계시

2006. 11. 10. 오전 8: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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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

35. 인간으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신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제 6과 ‘하느님과 계시’ 부분의 이야기입니다.  가톨릭 신학의 한가지 용어인 ‘계시(啓示)’라는 말의 의미는 영어로 'REVELATION'으로 씁니다.  낱말을 분해하여 설명하면, ‘닫혀있던 장막을 걷어내어 감췄던 것을 보여준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행위의 주체는 인간이 아닌 하느님뿐입니다.  주체도 하느님이시고, 보일 수 있도록 해주는 객체(=대상)도 하느님이라는 소리가 됩니다.   그럼 우리는 질문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하느님을 볼 수는 없는가?’  대답이야 여러 가지로 할 수 있습니다만, 성서에 나오는 답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3,20에 “나의 얼굴만은 보지 못한다. 나를 보고 나서 사는 사람이 없다”고 선언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33,23에 하느님은 한가지만은 인간에게 허락하십니다.  “뒷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


36. 그래서 신학에서 설명하고자 할 때 인간은 하느님을 직접 볼 수 있는 능력은 없지만,  자연의 사물, 우주 만물의 신비, 천체의 조화, 인간의 양심을 통하여 하느님을 보고 체험하고 만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에 대한 설명이 <초대받은 당신> 제 6과의 다른 부분들 설명입니다.

세상이 저절로 생긴 것도 아니고 자연적으로 질서를 지켜서 운행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하느님이 정하신 법칙과 규정이 담겨있다는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 만물의 생성부터 관련되어 있는 것도 있습니다.  인간의 탄생 역시도 하느님의 작품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학의 이야기를 ‘창조론’이라고 하는데, ‘진화론’과는 배치가 됩니다.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는 것은 보류하고, ‘창조론’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인간의 귀중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하찮게 여기거나 인간 생명의 유지와 발전을 위한 도구로 흔히 생각하고 다루는 동물들에서 진화되었다고 믿는 ‘진화론’을 일부러 나쁘게 볼 이유가 조금도 없습니다만, 인간을 진화론보다 상대적으로 귀중하다고 보는 것이 창조론 입니다.  인간이 쉽게 접근하지 못할 최고 지성의 존재가 인간의 근원이라는 믿음이 바로 창조론 입니다.  인간뿐만이 아니라, 다른 생물들도 역시 기원을, 출발점을 하느님에게서 찾는 것이 창조론 입니다.


37. 사람의 속에 무엇이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어도 잘못을 했을 때 가책을 느끼게 하고, 선을 행했을 때 격려의 마음을 갖게 하는 ‘양심’을 통해서 하느님의 존재를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에는 이러한 보조수단을 넘어 당신의 아들이 직접 인간 세계에 내려와 인간과 하느님 사이를 화해시키는 작업을 했는데, 그 인물의 이름이 ‘예수’라는 것입니다.  이 인물을 통하여 움직이신 하느님의 행위는 하느님이 직접 움직이시는 것이라고 설명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라는 존재를 인간은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훗날 다시 한번 더 반복이 되기는 하겠습니다만, 삼위일체(三位一體)의 개념을 들어서, 하느님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분으로서 창조주이신 하느님, 인간과 하느님 사이를 화해하기 위하여 인간으로 이 세상에 임하신 성자로서의 하느님,  우리 인간들과 교회를 이끄시는 힘으로서의 성령 하느님으로 하느님이 나타나시는 모습(=양태,樣態)을 구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구별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쉽게 알아듣고자 하는 방법과 하느님이 당신을 인간에게 드러내 보이시는 계시(啓示)에 의하여 구별하는 것뿐입니다.


38. 이 예수는 하느님이 정하신 때가 되자 인간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십니다.  역사적인 배경으로 이 인물 예수에 대한 것을 다루는 간략한 이야기가 <초대받은 당신> 책 7과 8과의 내용입니다.

예수는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져 우리에게 번개처럼 나타난 것이 아니고, 세례자 요한도 예고했던 것처럼, 과거의 예고가 실행된 탄생이라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선구자였습니다.  예수님에 앞서서 그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으로 복음서에 소개됩니다. 마태오 3,11-12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그 분은 나보다 훌륭한 분이어서 나는 그분의 신발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라고 요한은 예수에 앞서 오면서 예수를 그렇게 소개합니다.


39.   이 예수가 이야기한 것을 주제로 소개하면, 그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이 누구인지 따로 이야기를 해야 하겠습니다만,  하느님의 뜻이 통하는 세상을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뜻을 사람들 사이에 널리 펼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표현하면, ‘하느님 나라의 건설’입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서 말씀을 통하여, 가르침을 통하여, 기적을 통하여, 결국에는 당신의 생명을 제물로 바치는 행위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죄인으로 처형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따른 인간으로서의 예수, 당신의 아들 예수를 십자가의 죽음에서 살려내시고 승천하게 하시고, 그 뜻을 따르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펼쳐 가십니다.  그 공동체의 이름은 ‘교회’입니다.  제대로 된 의미에서의 교회라고 한정을 해야 할 것입니다.  혹시라도 여러분들이 보고 나서 실망할 수 있는 그런 나약한 모습을 지닌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 지난 주간의 교리내용 정리>

40. 지난 주 수요일에 저는 가톨릭 교회의 시초와 그 출발점에 대한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새로운 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차지하는 사람으로서 예수의 위상(位相)에 대한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그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시대적인 상황에 맞춰 설명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예수에 대한 것은 반복하여 말하자면, 역사를 우선으로 해서 볼 것이 아니라, 신앙을 우선으로 해서 봐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마련한 과학이라는 것으로 해석 또는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의 가르침과 기적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를 뒤로 미루긴 했지만, 간단한 말씀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신앙과 신약의 중심인물인 이 예수에 대해서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에 대한 바탕을 간략하게라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

역사의 구별을 위한 개관>

41. 역사는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 세상에 흔적을 남기는 역사, 그래서 후대의 사람들이 남겨진 흔적들을 이용하여 과거의 생활을 추정해 볼 수 있게 하는 역사가 있고, 두 번째는 구전(口傳)역사라 할  만큼 이 세상의 흔적과 비교하여 연구할 수 없는 ‘무형의 언어로 전해진 역사’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각각의 중요성은 인정하는 사람에 따라서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우리 나라의 역사도 마찬가지로 크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단군신화와 고조선에 해당되는 부분이 후자의 ‘무형의 언어 역사’가 될 것이고, 삼국시대 이후에 대한 것이 전자의 ‘흔적을 남긴 역사’가 될 것입니다.  이 양자는 서로 충돌이 되지 않습니다.  서로 보완을 하지요. 하지만 한가지 기준을 가지고 다른 것을 재고 연구하면 그 존재의 의미가 쇠퇴하게 됩니다.


42. 성서에 대한 역사도 마찬가지로 크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성서는 이스라엘의 역사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성서에도 앞서 말씀드린 두 가지의 성격의 역사관이 나타납니다.  그것을 구별하기 전에, 먼저 한가지를 정리하겠습니다.  전에도 강조한 경우가 있었지만, 성서는 ‘신앙고백서’라는 것을 다시 강조합니다. 그랬기에 과학으로 바라보고, 흔적으로 역사를 연구하려는 사람들의 기대에 걸맞지 않게 그들의 역사기록인 성서에는 하느님이라는 용어가 심심찮게 등장합니다.   또한 그 하느님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예언자들의 소리도 나타납니다.  그들이 역사를 기록한 방식은 간단하게 말하면 이러합니다.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잘 된 일이 있었으면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잘 따랐기 때문이고, 혼란과 걱정과 전쟁이 닥쳤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과 행동이 하느님의 뜻에서 멀리 떨어진 생활을 했다는 소리가 됩니다.  그러므로 다소간 실망감이 앞서겠지만,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고 이스라엘의 역사인 성서를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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