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에 관하여>
111. 이제부터는 28과에 나오는 삼위일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인간의 세계에는 사람의 지식과 과학의 수준으로 알아듣지 못하는 것과 그것으로 설명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설명이 안되긴 하지만 그래도 그 대상은 굳건하게 존재합니다. 이제부터 짧게나마 말씀드릴 삼위일체에 대한 것도 그 범위에 속합니다. 설명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수준에서 먼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본보기를 들어볼까요?>
112.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경우를 먼저 본보기로 들지요. 혼인을 하고 남자와 여자가 첫 날밤을 잘 지내고 나면--물론 때를 잘 만나야 하겠지만-- 자녀가 생깁니다. 그저 생기는 것은 아니지요. 그래서 과학에서는 설명을 합니다. 난자와 정자가 합쳐진 다음 세포분열이 생기고 사람으로 발전하는 거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왜 난자와 정자는 자석과 쇠의 관계처럼 서로 끌어당기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합쳐진 다음에는 왜 분열을 하고 우리 몸에서 볼 수 있는 그러한 기관으로 발전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물론 DNA, RNA 어쩌구 하면서 그것들이 가진 특성이라고 설명을 할 수 있기는 해도, 그렇게 설명한다고 해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의문들이나 궁금증이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겨울이 지나 봄이 되면 나무들에 물이 오르고 꽃을 먼저 피우는 녀석들도 있고 잎사귀를 먼저 내는 녀석들도 있습니다. 일관성이 없죠. 그러나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인간이 보기에 그런 것뿐이고 자체로는 충분히 설명이 가능할 것입니다. 물질 내에서 이루어지는 삼투압현상이다 뭐다라고 우리가 설명은 해도, 그 역시 그런 설명만으로 우리가 갖는 의문이나 궁금증들이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하루를 움직이고 밤이 되면 잠을 잡니다. 온통 사람들이 다 똑같은 시간을 잠으로 소비하는 것은 아니지만 잠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우리가 지낼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이것 역시 세포가 쉬기 위한 수단이고 뇌에서 그렇게 명령하니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해도 그것으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궁금증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가 이 세상을 못사는 것은 아닙니다. 궁금하긴 하지만, 그냥 내버려두어도 우리가 살아가는데 아무런 지장은 없습니다. 삼위일체(三位一體)에 대한 것을 이렇게 생각하시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신비스럽게 남겨놓아야 할 것은 그래도 있을 거라고 봅니다.
113. 삼위일체(三位一體)를 몇 마디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성령을 이야기할 때도 말씀을 드리기는 했겠습니다만, 우리가 따로 따로 알아듣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사실은 따로 따로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고 한 분이시다’라는 것이 삼위일체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더 어렵게 설명하면, 성부라는 위격(位格)과 성자라는 위격, 그리고 성령이라는 위격이 따로 따로 활동하지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분들은 셋이 아닌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신학의 이 부분에 이르면, 설명이 본래의 주제보다 더 알아듣기 힘들어집니다.
인간과 자연 세계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알아듣지 못하는 내용들이 있다고 하는 것처럼, 이 삼위일체 부분은 계시(啓示)라 해서 하느님의 고유영역이라고 규정합니다.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된 인간은 그 하느님의 속성을 모두 이해하지 못하므로 하느님이 알려주시는 한계 안에서만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28과의 내용을 읽어봐도 애매모호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114. 아우구스티노 성인이라는 있습니다. 그 어머니는 모니카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이 아들이 당시에는 매우 똑똑한 인물이었습니다. 법학, 철학, 수사학, 논리학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이름을 날린 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의 바램과는 달리 아들은 방탕의 길에 첨단을 달리던 분이었습니다.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로 32살 경에 이르러 회심(悔心)의 길을 갑니다. 그렇게 바뀐 생활을 지낸 다음 그는 주교가 됩니다. 그렇게 뛰어난 지혜와 학식으로 교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칩니다.
그분의 삶의 체험가운데 삼위일체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회심의 길을 간 다음, 삼위일체의 신비를 알아듣기 위해서 바닷가를 거닐며 고민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신비라는 판단을 했으면서도 그는 알아듣기 원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바닷가 물이 치는 곳에 소년이 앉아서 모래구멍을 파놓고 조개 껍데기로 물을 퍼 넣고 있었습니다. 얘야,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냐? 아저씨는 지금 삼위일체의 신비를 알아들으려고 그렇게 고민하고 계시는데, 제가 이 조개 껍데기로 이 구멍에 바닷물을 다 퍼 옮겨 담을 수는 있어도 삼위일체의 신비를 알아듣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신비가 그렇게 어려운 것인가를 다시 물어보려고 소년을 쳐다본 순간 그는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고, 그 이후로 아우구스티노는 삼위일체에 대해서 탐구하기를 중지했다는 고백 아닌 고백이 있습니다. 이것은 한 개인이 체험한 일화이기는 합니다만, 사람의 세계에는 그 머리로 해결되지 않는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115. 올해<1998년>의 경우에는 다음 주일 (6월 7일)이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이날 우리는 독서와 복음의 내용을 통해서 몇 마디 말씀을 듣습니다.
첫 번째 독서 잠언을 통해서는 하느님의 지혜<=구약성서에서 사용하는 성령의 칭호, 초대받은 당신 131면>가 고백하는 하느님 찬미를 듣습니다. 세상 시초에 만들어진 그 힘은 하느님의 창조 때도 함께 있었다는 신앙고백의 한가지입니다. 단순히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활동의 조수역할을 수행했다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독서, 로마서의 말씀을 통해서는 하느님 성령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신앙인으로 살면서 느끼는 여러 가지 기쁨의 원천은 성령이 우리에게 작용해서 생기는 결과라고 알려줍니다.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하고 이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끈기를 낳고 끈기는 희망을 낳는데, 이런 과정의 원천은 성령이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신 결과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을 통해서는 예수님과 살면서 들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하느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재확인시켜 줄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선언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성령의 역할은 모든 것을 완성시켜 준다는 교회의 정신을 그대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 돌아오는 주일에 듣게 될 삼위일체의 역할에 대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