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 킬 계 명 편

2006. 11. 10. 오전 8: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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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킬  계  명 편

224.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의무 때문만은 아닙니다.  바꿔 이야기하면, 우리가 사는 것이 의무라고 한다면, 많은 분들이 제대로 살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사는 것은 권리입니다. 물론 살아가는 방법을 우리가 어떤 것을 택하는지에 따라서 달라지긴 합니다.  이제 삶을 효율적으로 지내는 방법에 관련되며, 동시에 신앙인으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본보기, 삶의 규정에 대해 말씀드릴 차례입니다.  그것을 ‘지킬 계명’으로 분류하겠습니다.  이 지킬 계명의 부분에는 ‘십계명2)’의 실천과 ‘교회법에서 정한대로 실천해야 할 규정이나 법’이 있습니다.


225. ‘사랑하는 일’을 여러분들은 의무라고 생각하십니까?  권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대답하시더라도 틀리는 응답은 아닙니다만, 우리가 어떤 과정을 선택하는가에 따라서 우리가 맺을 삶의 열매는 달라집니다.  똑같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의무로 하는 일과 기쁨과 선택에 의해서 하는 일에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납니다.  이 시간을 통해서 말씀드리는 계명에 대한 것도 그렇게 알아들으시기를 바랍니다.


226. <계명을 이야기하기 위한 두 가지 예화>

① 어떤 사람이 신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신부와 함께 가던 중 십계명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신부님, 저는 십계명이 싫습니다. 십계명을 보면 왜 그리도 ‘무엇하지 말라’는 명령이 많습니까? 귀찮아 죽겠습니다.

신부는 그 사람의 얘기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 몰라 암담해 하면서 말없이 운전만 하였다. 그러던 중 그들이 타고 가던 차가 두 갈래로 갈라지는 곳, 이정표가 서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동쪽은 어디로 가고, 서쪽은 어디로 간다는 이정표를 바라보고 있던 신부는 핸들을 그들이 가야 할 방향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꺾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그 사람이 놀라면서 소리를 질렀다.  “아니, 신부님, 어디로 가십니까? 이쪽으로 가야합니다. 지금 신부님은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자 신부가 대답하였다.  “이 사람아! 오른쪽으로 가라, 왼쪽으로 가라하는 이정표는 귀찮아 죽겠네. 어디로 가면 어떤가. 그냥 내 마음대로 가게 내버려두게나”

② 한번은 어떤 사제가 신자들이 모인 곳에서 십계명에 대해서 아주 강하게 말하였다. 강론이 끝나고 나서 한 신자가 그 사제에게 찾아와 말하였다.  “오늘 하신 십계명에 대한 강론은 너무 솔직하고 강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젊은 아이들이 교회에 잘 나오려 하지 않는데, 이제는 더 멀리할 것 같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는 십계명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렇게까지 강조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이러한 충고를 들은 사제는 일어나서 어딘가에 가더니 ‘극약’이라 써 붙인 약병을 들고 왔다. 그는 그 신자에게 약병을 들어 보여주며 말하기를, “제가 이 병에 붙어있는 ‘극약’이란 딱지를 떼어버리고 ‘꿀’이라고 써 붙이면 어떨까요?  그러면 더 위험할까요? 아니면 덜 위험할까요?”


227. 여러분에게 이 예화를 들려드린 것은, 아직 여러분이 어떤 생각을 갖고 살아가시는 분이지 제가 알지는 못하지만, 자칫 왜곡되게 생각하면 경직되게 알아듣고 멀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실 분도 있을 것 같아 어느 강연 테이프의 녹음에서 풀어쓴 것을 옮긴 것입니다. 달리 이야기하면, 계명이라는 것을 그렇게 지나치게 경직된 모습으로 말로, 나의 삶의 의지를 꺾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의미도 담고 있는 것입니다.


228. 성서에 나오는 십계명 순서 (출애굽기 20,1-7; 신명기 5,1-22)

① 나 야훼는 너의 하느님이시다. 내 앞에서 (내 밖에)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

② 너는 우상을 만들지 말라. 그것들에게 절하거나 섬기지 말라.

③ 너는 야훼, 너의 하느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④ 너희는 6일 동안 힘써 일한 뒤 안식일을 기억하고 거룩히 지내라.

⑤ 부모를 공경하여라.

⑥ 사람을 죽이지 말라.

⑦ 간음하지 말라.

⑧ 도둑질을 하지 말라.

⑨ 네 이웃에게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

⑩ 네 이웃의 소유물들, 아내와 가축들, 그 외 재산들을 탐내지 말라.


229. 우리가 알로 있는 십계명 : 주요 기도문에 나오는 순서

①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②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아라.

③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④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⑤ 사람을 죽이지 말아라.              ⑥ 간음하지 말아라.

⑦ 도둑질을 하지 말아라.              ⑧ 거짓 증언을 하지 말아라.

⑨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아라. ⑩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아라.


AUGUSTINUS 성인의 배열에 따른 것이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십계명이다.  이 성인의 배열은 여성에 대한 존중을 드러내고 있다. 남성 중심의 유다 문화에서 여자는 집이나 가축들과 같이 남자의 재물로써 취급되고 있는데,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 10번째 계명에 나타난 여성과 재물을 갈라놓는다.  하지만, 이 예비자 교리에서 말하는 십계명의 순서는 성서에 나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접하기 쉬운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분류법을 따르겠습니다.


230. 십계명의 내용은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커다란 제목으로 묶을 수 있습니다.  흔히 알아듣듯이 계명이기에 우리 사람의 생활이나 환경을 제한하고 억압하는 것으로 알아들으면 본래 주어질 때의 목적과 어긋나게 됩니다.  그것은 잘못 해석하면, ‘세상 사물이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 내 맘대로 해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겠다’는 것이니 문제 있는 자세밖에 다른 것은 아닙니다. 공동체 안에서 제대로 살아가려면 지켜야 할 규정과 내용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권리를 누리고 살려면 의무에 대한 것도 제대로 살펴보고 지켜야 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231. 이 기도문, 천주께서 인간에게 내려주신 계명이라는 의미로 천주십계(天主十戒)라 부른다.  이 기도문의 원형은 구약시대,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야훼 하느님으로부터 삶의 지침을 받은데서 기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집트인들을 뒤로하고 홍해를 건너고 나서 3개월이 지난 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나이산에 이르른다.  그리고 모세는 시나이 산 위로 올라가서 하느님을 만나고 당신의 정신을 담은 계명을 두 개의 돌판에 새겨서 돌아온다(출애굽기 20장).  이렇게 되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 3개월만에 하느님의 선택과 사랑에서 벗어나려는 끊임없는 노력을 하던 때였다.

이 십계명에 대한 최소한의 준수야말로 하느님의 은총을 잃지 않는 방법이었다.  그것만 지키면 더 이상 아무 것도 지킬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은 너무 소극적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해석하는 것이다. 


232. 십계명의 목적 - 내용구별

사람을 가리켜서 구원을 얻기 위해서만 움직이는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좀 어불성설이긴 하지만, 신앙인으로서 구원의 길을 향하여 나아가는 한가지 방법으로 십계명을 생각할 수도 있다.  십계명의 준수가 구원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지만, 사도신경에 나오는 그 믿음과 그 믿음의 고백과 더불어서 삶의 지침이 될 수는 있습니다. 이 십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고[敬天], 다른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서[愛人] 최소한도로 지켜야 할 규범이요, 가장 기본적인 규율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계명은 신앙에 대한 규범이요, 다른 인간을 향한 계명은 윤리도덕에 대한 규범입니다.  십계명의 처음 세 가지는 하느님에 관련된 것이고, 다음 일곱 가지는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가 알아차려야 할 사항 한가지는 이것입니다.  신앙에 대한 계명이 인간 윤리에 대한 계명보다 앞서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윤리나 도덕에 앞서 있는 것은 신앙이 없이는 윤리와 도덕이 유지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233. 인간의 자유를 위해 주어진 계명

하느님은 당신의 십계명에서 긍정적 표현보다는 부정적 표현을 많이 쓰고 계신다.  제 1 계명, 제 3 계명, 제 4 계명을 빼고는 다 “무엇하지 말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 말라’는 계명을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자유가 억압되고 억지로 해야 한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실상은 그것이 아니다. ‘..을 하여라’는 말씀보다 ‘..무엇하지 말라’는 하느님 말씀은 우리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시는 계명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부정적인 명령은 긍정적인 명령보다 제한사항이 적다.  에덴동산에서 하느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계명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 동산에 있는 과실나무 중 어느 과실이든지 먹을 수 있지만 동산 한가운데 있는 선악과나무의 과실만은 먹어서는 안된다고 부정적 명령을 내리신다(창세기 2,16-17).  만약 하느님이 이 부정적 명령대신에 긍정적 명령을 주었다면 어떠했을까?  아담과 하와에게 다음처럼 명령했다고 하자. “너희들은 동산 북서쪽 모퉁이에 있는 나무들로부터 시작하여 동산 외곽을 쭉 따라가면서 서 있는 나무들의 과실을 차례로 따먹을지라.”  이 명령은 부정적 명령보다 자유를 덜 허락하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 ‘간음하지 말라’는 부정적 계명대신에 “너는 일주일에 두 번 배우자와 성행위를 할 지니, 밤 9시부터 11시 사이에만 할지니라”고 했다면 그 계명은 인간의 자유를 더 많이 제한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 백성을 위한 원초적 생활률인 십계명이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고 있다면, 그 외 다른 규범과 규율들도 인간의 자유가 바르게 행사될 수 있도록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을 필요가 있다.


234. 하느님 사랑에 대한 계명 세 가지

: 인간 세상에서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하느님을 올바른 마음과 자세로 섬겨야 한다는 것이 처음 세 가지, 하느님에 대한 계명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삶의 정신이다.



235.   제 1계명 ; 나 야훼는 너의 하느님이시다. 내 앞에서 (내 밖에)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

제 1 계명은 다음에 나오는 모든 계명의 기본이 되는 계명이다.  즉 으뜸 계명이라는 소리이다.  출애굽기 20,3과 신명기 5,7에 나오는 히브리말은 두 가지 표현으로 번역할 수 있다. ‘①너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  ②너는 내 밖에 있는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로 번역할 수 있다.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로 번역하면, 하느님 외에 다른 신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 신들을 섬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경우 신학적으로는 단일신(單一神)론을 내포한다.  ‘내 밖에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로 번역하면, 하느님 이외에는 다른 신들이 없다는 의미로서 이 경우는 신학적으로 유일신(唯一神) 사상을 내포한다.  어떠한 번역이든 야훼 하느님만을 섬겨야 한다는 강조점은 같다.


236.   이 첫 번째 계명은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하느님께 제사를 올리고 기도를 드리면 끝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의 일차적인 의미는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알아모신다는 것이다.  하느님을 하느님답게 대접해드린다는 것이다.  강조점이 제사나 기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바르게 아는 것이다.

앎이 다르면 섬김도 다르고, 섬김이 다르면 그 섬김의 결과도 다르다. 즉 사랑의 하느님으로 알고 섬기는지, 심판의 하느님으로 알고 섬기는지, 필요할 때 우리가 기도하는 구원군으로 알고 섬기는지 그에 따라서 삶에 나타나는 결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237.   하느님을 심판의 하느님으로 알면 나머지 아홉 가지 계명들은 하느님의 심판이 무서워서 지키는 꼴이 된다.  하느님을 그때 그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구원(救援)군(軍)으로 생각한다면 필요한 시간에만 나머지 아홉 가지 계명들을 지키게 될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의 하느님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나머지 아홉 가지 계명을 지킨다.  판관기 11장에 나오는 ‘입다’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른 채 엉뚱한 방향에서 하느님을 섬기려 한 사람이다.  근 하느님께서 시키지도 않은 맹세를 하면서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청한다.  ‘입다’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하느님을 섬길 때 중요한 것은 제사나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을 바르게 알아보고 섬기는 것이다.


238.   우리가 하느님을 알아모신다는 것은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알아모신다는 상호 전인적인 섬김을 내포한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라’는 계명 앞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점은 우리편에서만 하느님 섬김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편에서도 우리게 대한 섬김이 있다는 것이다. 세상과 인간을 위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섬기시는지 모른다  하느님은 우리를 돌보아 주시고 우리의 불충실성에 대하여 용서와 자비를 베풀어주신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섬기신다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를 통하여 분명히 드러났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태 20,28; 마르코 10,45)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돌아가셨다.


239. 제 2 계명 ;

너는 야훼, 너의 하느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 이는 하느님께서 그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자를 죄없다 하지 않기 때문이다”(출애굽기 20,7; 신명 5,11)

우리 나라의 욕설은 대개 성적인 것과 관련이 있지만, 그리스도교 국가인 미국이나 유럽은 하느님과 관련되어 있다.  즉 ‘GOD DAMM<비난하다. 지옥에 떨어뜨리다>--->GOD DAMM YOU=빌어먹을자식, 뒈져버려라'  그렇다고 한다면, 제 2 계명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들먹거리면서 쌍욕을 하지 말라는 것인가?

이 계명에서 이야기하는 하느님의 이름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이름은 그 이름을 소유한 존재와 본질적인 연결을 가지며, 소유한자의 특성을 드러낸다. 우리가 누구를 알고 사귀려면 이름을 먼저 알아야 한다. 이름을 모르고서는 깊은 관계를 가질 수 없다.  신을 섬길 때도 마찬가지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항상 ‘야훼의 이름으로’ 복을 선언하였다. 사제들도 ‘야훼의 이름으로 백성들에게 복을 빌어주었다(신명10,8)’.  인간에게 복을 빌어주는 주체는 하느님이시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이름은 하느님 자신을 가리킨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많은 이들이 자기의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하느님의 이름을 들먹인다. 이것이 지나치면 인간이 신의 이름을 남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명의 본질은 그 이름을 남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존귀한 일에 대하여 정성어린 태도를 말하는 데, 맹세를 할 때도 함부로 하지 말라는 뜻도 담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훗날 이 계명을 지나치게 해석하여,  ‘야훼’라 써 놓고 계명준수 차원에서 ‘아도나이’라고 불렀다. >



240. 제 3 계명 ;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켜라.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생업에 종사하고 이렛날은 너희 하느님 앞에서 쉬어라이 안식일 계명은 두 가지 요소가 합쳐져 있다. ① 엿새동안 열과 성을 다해서 생업에 종사하고 ② 그리고 나서 안식일 날 주님을 찬미하면서 쉬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삶에서 최선을 다한 다음에 쉬라는 요구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엿새동안 내내 놀다가 칠일째 되는 날도 다시 논다면 그는 안식일 계명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이 아니다.  제대로 지키려면 먼저 주간(週刊)동안 열심히 살아야 한다.


241.   이 안식일은 사람을 위한 날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한 날이다. 안식일은 하느님의 날이니 거룩하게 지킬 것을 명하신다.  안식일은 쉼[휴식(休息)]의 날이다.  쉼을 통해서 하느님이 허락하신 축복과 생명을 받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400년간 노예생활을 통해서 쉬지 못했다.  이 쉼은 하느님의 해방에 의한 선물인 것이다.


242.   우리가 삶에서 쉬지 않고 정신없이 일할 때, 우리 몸은 우리에게 반역을 일으킨다. 과로로 인한 긴장으로 집중력이 떨어지고 초조하게 된다.  숨돌릴 시간도 없이 정신없이 움직이는 것은 위대한 행위가 아니라 무지막지한 바보스런 짓이다.  주님께서 주신 생의 목적은 즐김과 보람이 함께하는 것이지 녹초가 되기까지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다. 쉼이 있어야 목표도 더 빨리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243.   한 주간 중 하루를 쉰다는 것은 아주 작은 일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사실은 우리 생명을 보존하고 수령하는 데 꼭 필수적이고 중요한 행위이다.  하느님이 안식일에 쉬라고 한 것은 인간의 육체적 건강과 영혼의 성숙을 위해서이다.  주일날은 공일날이 아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주일날 하느님을 예배한다는 것을 미사 한 대만 드리면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미사 한 대 드리고 나서 그 날이 주일인지 평일인지 모른다는 듯이 정신없이 놀러 다니거나 일하러 간다. 이런 사람들에게 주일은 거룩한 날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공휴일’이다.  이들은 미사한대 드림으로써 나머지 시간들은 온통 자기 자신을 위한 휴식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한다. 주일이란 주님의 날이다.  주일은 한 시간만이 주일이 아니라, 24시간 내내 다 주일이다.  그러므로 나머지 시간동안 세속의 일에 정신이 팔려서는 안된다.


244. 우리 신앙인들은 왜 안식일[=토요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키는가?  바오로 사도는 자기가 전한 복음을 듣고 신자가 된 이방인들에게 안식일 준수를 명하기보다는 주간의 첫날[=주일]을 기념하도록 하였다. 예수님도 안식일 다음날 새벽에 부활하셨다(마태 28,1).  안식일 다음날 우리는 주의 만찬을 나누려고 한자리에 모였다.(사도행전 20,7) 토마 사도가 부활하신 주님을 뵌 날도 부활 다음주간 첫날(=부활2주일)이었다.  그리하여 한 주간의 첫날은 주일이 된 것이다. 달력을 보아도 주일이 가장 앞에 있지 않은가?  초대교회 공동체의 일원인 성 이냐시오는 “더 이상 안식일을 위해 살지 아니하고, 주일날을 위해서 살게 되었다”고 기록한다.


245. 그렇다면 먹고살기 위해 주일에 일을 해야만 하는 경우는 어떠한가?  구약성서 출애굽기 31,14에 나오는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한 명령이 있다.  그런데 역사배경에 따르면, 이 계명은 바빌론 유배 후기에 나온 계명이다. 이 당시 계명은 엄격성을 띠게 되는데, 그 이유는 예루살렘 성전 예배가 불가능한 정치 종교적 상황에서 유대인이 유대인으로서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율법준수였다.  그런 의미에서 출애 31,14의 계명은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라기 보다는 민족전체에게 주어진 계명인 것이며, 국가 차원에서 그렇게 되도록 해야 할 임무를 배려해야 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주일에 일을 하지 않아야 하는 목적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일상생활을 성화하고 동포의식과 형제적 일치를 촉진하는데 있다’


246.   <인간이 쉴 때조차도 하느님을 먼저 생각하고 삶의 중심을 하느님께 두라는 삶의 요구이다.  주일미사를 빠지고 빠지지 않는 것과 그 비율에 따라서 거룩한 생활을 했다 못했다가 갈라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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