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사 >

2006. 11. 10. 오전 8: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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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

134. 교회창설의 배경, 천주교의 수용과 가성직제도

지리상의 발견과 서세동점(西勢東占)의 세계여행은 중국과 일본에까지 천주교가 전래되게 하였다. 이들 서양전래의 가톨릭은 당시의 문화와 함께 전래되었다.  북경을 방문하는 조선의 사신들은 중국의 예수회선교사들을 통하여 서양문물을 얻고자 하였고, 처음에는 학문으로 필담(筆談)을 나누던 것이 계기가 되어 서양의 문물이 점차로 조선에 반입되기 시작하게 되었다.

최초라고 한다면 아담 샬이 소현세자를 통해서 조선에 전도하려고 함이었으나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불발에 그치고 말았다.  그렇지만 서적들은 17세기초부터 서양의 학술서적들이 반입되기 시작.  마테오리치의 한문교리서  ‘천주실의’(天主實意)가 진리 찾던 소수의 실학자를 매료시킴. 처음에는 학문으로 연구함(천주학, 천학, 서학). 차츰 신앙으로 바뀜. 교리 연구하던 남인학자들이 받아들이고 환영하여 서학이라는 새로운 학풍으로 등장. 사절단으로 북경을 오가면서 이승훈이 1784년 2월에 북경에서 불란서 선교사 그라몽 신부로부터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 받고, 조선에 돌아와서 이벽과 권일신 등에게 세례 베품.  이승훈이 가져온 서적들을 읽고 연구한 다음에 복음전파 시작함.

인생의 중요한 문제들의 해결점을 서학에서 찾고, 이제는 기도와 재계등 계명의 일부를 실천하기 시작.   1786년부터 지도급 신자들은 가성직제도 세워 북경과 유사한 체제 세우려함. 북경주교에게 문의한 결과 옳지 않음을 알고 선교사 파견을 요청.  조선의 천주교 수용은 조선인 스스로에 의해 시작됨.


135. 한국 교회역사의 시작

처음으로 한국 땅에 천주교가 소개되었을 때에는 지금처럼 신앙이라기보다는 학문의 하나였습니다.  명분에 죽고 사는 ‘주자학’이라는 이론적인 학문을 떠나 흔히들 이야기하듯이 실사구시(實事求是-사실에 바탕을 두어 진리를 탐구하는 일)의 하나로 소개됩니다.  그런 과정에서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고 그들이 발견한 바에 따라서 생활의 한 부분으로 발전합니다.

그런 뜻에서 한국교회의 전래는 자생적이라고도 합니다.  이런 학문의 하나로서는 당시 조선사회에서 냉대를 받던 몰락한 양반계층의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학문의 하나로서 탐구하다보니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삼은 것과 많이 차이가 나죠.  

이들은 처음에 신앙이 아닌 학문의 하나로 출발했기에 지금은 천진암이라고 알려진,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에 있는 절[寺] ‘주어사’에서 모임을 갖고 시작합니다.  이때가 역사로는 1777년이라고 합니다.

이때부터 학문의 하나로 출발했던 것이기에 지금 이야기하기에는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라는 것에 따라서 지금의 ‘주교, 신부, 부제, 신학생’의 개념을 사용합니다. 그러다가 이승훈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북경의 성당으로 보내어 1784년에는 세례를 받게 합니다.  역사에서는 그때부터를 한국교회의 시작이라고 기억하고 지냅니다.


이 해를 기준으로 해서 1984년에는 교회역사 200주년 기념식도 여의도 광장에서 가진 적이 있었지요.  굳이 역사상에서 따진다면, 올해는 한국 천주교회 전래 1998년에는<--215주년-->쯤 될 것입니다.


136. 성직자 영입운동과 조선교구의 설정

종교로 받아들여지면서 집회도 잦아짐.  정부는 탄압시작.  북경교구에는 성직자파견 요청. 1794년 주문모 신부 입국하여 1801년 체포 순교함.   33년간 성직자 없이 교회부흥운동을 펴나감.   1831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조선교구 설정함.  브뤼기에르 소주교를 임명하였으나 입국 전에 병사함.  후임교구장으로 앵베르 범주교가 다른 유방제, 모방, 샤스땅 신부가 입국함.


137. 교회가 받은 탄압

사상적 (--유교의 양반 사상과 천주교의 평등사상이 부딪힘), 사회적(천주교의 제사거부), 정치적(당파싸움의 방편으로 이용됨) 이유.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교로 낙인찍고 인륜을 거스르는 단체이며 모임이라고 단정. 유교의 배타주의, 정교합일주의, 당쟁과 세도정치, 쇄국이양주의의 복합적 결과.

이런 탄압을 가리켜 박해(迫害)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크게 4대 박해와 한번의 작은 사건이 있다.


137.1. 신해교난(1791)

   : 전라도 진산에서 윤지충(바오로)와 권상연(야고보)가 조상의 신주를 불살라버린 사건 때문에 피신했다가 자수하여 결국 사형 당함.  이 사건이 확대되어 이승훈, 권일신 등도 삭탈관직됨. 탄압에도 불구하고 신자 수는 더욱 늘어났다.


137.2. 신유박해(1801)

   : 정조 후임으로 순조가 즉위(1801)하자 조모(祖母)인 대왕대비 김씨가 실권을 잡고 천주교와 가까웠던 시파를 제거할 목적으로 천주교 탄압.  이가환, 권철신, 이승훈, 정약종, 최필공, 주문모 신부등 3백여 명의 신자들이 순교함. 1834년 유방제 신부가 입국할 때까지는 조선에 신부가 없었다.  1831년에 교황청은 조선교구를 설정하고 빠리 외방 선교회가 맡게됨.  신자수가 9천여 명까지 늘어남.  1836년경에는 김대건, 최양업 도마등 3명의 신학생이 유학 떠남.


137.3. 신유박해 때 즉 1801년 10월에 전국에 천주교  금지교서를 내리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 오늘날 이른바 사학이라는 것은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헐어 없이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짐승으로  돌아가게 한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점점 이에 물들어 그릇되어 가니, 이 어찌 슬프고 마음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니랴 !.... 잡아서 뉘우치지 않는 무리가 있거든 반역죄로 다스려라.... 수령은 각각 그 맡은 바 지방에서   오가 작통법 (다섯 집씩 반을 만들어 그 중에 천주교 신자가 있으면 관에 고발하도록 하는 제도 )을 밝게 실시하여........... 사학의 무리가 있거든 곧 관에 고하여 죄를 다스려 사학을 뿌리째 없애버려 남은 씨가 없도록 하라 "   << 순조실록 >>


137.4. 기해박해(1839)

   : 순조 후 헌종이 즉위하자 외조부인 조만영이 시파를 축출하기 위해 탄압시도. 외국인 성직자가 있다는 소리와 함께 시작된 박해로 성직자 세 명(앵베르, 모방, 샤스땅)과 2백여 명의 신자들 순교함. 천주교가 사교라는 척사윤음을 발표. 이때 신자수는 1만여 명 이상. 정하상은 ‘상재상서’를 지어 천주교를 변호하고 박해의 부당함을 알림.


137.5. 병오박해(1846)

   : 김대건이 최초의 사제(상해 긴가항 성당)가 되어 1845년에 귀국.  그러나 1년도 안되어 체포되고 1846년에 교우 9명과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함.  이후 철종이 즉위하자 교회에 대한 태도가 너그러워진 듯.  12명의 프랑스 선교사가 활동.  신자 수는 2만3천에 이르기까지.


137.6. 병인박해(1866)

   : 철종 이후 고종이 즉위하자 흥선대원군의 섭정.  조정의 인물들이 외국세력에 대항하여 천주교 반대.  자신의 입지를 튼튼히 하기 위해 박해시작.  가장 대규모로서 9명의 성직자와 8천여 명의 신자들 순교.


전체적으로 약 100년 동안 1만여 명의 교우들이 순교함. 103명이 1984년 5월 6일, 한국을 방문하신 교황 요한바오로 2세에 의하여 여의도 신앙대회 중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138. 박해의 가장 큰 원인

박해의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인 것으로 반대세력을 몰아 내려는 한 방편으로 천주교를 희생으로 삼았다... 또  다른 이유로는 조선에 외국인 신부들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조정에서는 외국신부들을 처단하기 위해 교우들을 잡아 들였다... 조정에서는 전국에 척사윤음을 공포함으로써 박해령을 내려 전국에서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이 박해 때에 앵베르 주교와 샤스땅 신부, 모방 신부가 순교하였다...두 신부는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도 교황청에 조선교회의  형세를 적어 보냈다... 그에 따르면 당시 교우 총수 약 1만명 예비자 600명이었다...


139. 종교의 자유와 오늘의 교세

쇄국정책에서 1876년 병자수호조약으로 문호개방. 1883년에 독일과 영국에 맺은 문서에서 종교의 자유를 명기함. 1886년 한불통상조약으로 완전한 신앙의 자유보장.

1888년에는 최초의 수녀회 ‘샬트르 바오로회’가 진출. 성서 출판소를 열어 교리서 발간시작.  1893년에는 약현성당(중림동)이 최초의 양옥으로 준공. 1898년에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천주교인들의 모임자리였던 김범우의 집에 명동성당이 들어섬. 1906년 경향신문 1907년 경향잡지 창간됨.

1925년에는 79, 1968년에는 24위가 복자로 시복됨.  1984년에는 현 교황 요한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됨. 1997년 말 현재 신자수가 300-310만 명이라고 한다.


140. 종교 분열에 대한 종합

박해는 신앙의 눈으로 보면, 교회의 승리입니다. 박해를 통한 교회의 발전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천주교에 허용된 신앙의 자유도 무수한 순교자들의 피의 대가라는 것을 알아야.  순교는 신앙증거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 가장 소중한 생명을 바침으로써 육신을 죽이는 이를 초월한 하느님의 존재를 드러내는 행위이다.

오늘날은 예전과 같은 순교는 없다.  불가능하다고 해도 그 정신으로 살아가야.

가정에 충실하고 가족을 위해서 시간을 할애하고 염려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가족의 평화와 화목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죽이는 삶이 가장 먼저 요구되는 순교의 삶이다.   순교는 반드시 행위로 표시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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