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교회의 역사 >
120. 이런 네 가지 특징을 갖는 교회는 자신의 역할을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펼치기 시작합니다. 사도행전 이후에 나오는 신약성서의 나머지 내용들은 이렇게 형성되고 발전하는 교회 공동체의 변화모습을 적고 있습니다. 발전하는 모습, 그 공동체들 사이에서 생긴 문제와 그 문제들에 대하여 설명하는 사도들의 가르침, 예수님이 남기신 말씀(마태오 10,23)을 따라서 여기서 박해하면 저기로 피하고 거기서도 박해하면 또 다른 곳으로 펼쳐져 나가는 교회를 볼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그렇게 해서 세계의 여러 곳으로 알려지게 된 교회와 그 역사를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교회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우리는 질문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수 차례 언급하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던 것처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3일만의 부활, 40일만의 승천, 10일만의 성신강림에 이어서 제자들의 모습이 완전히 바뀐 모습을 보였다고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바로 그 때가 교회의 시작입니다. 교회가 되기 위한 싹은 오래 전부터 품고 있었겠지만 말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신 그대로, 스승 예수에게서 배운 그대로 실천했던 제자들의 모습을 가리켜서 ‘교회!!!’라고 하는 말에 가장 가까웠다고 해서 우리는 그들의 모습을 ‘초대교회(初代敎會)’라고 부릅니다. 물론 그들의 뛰어난 생활상을 가리켜서 ‘초대교회 신자들의 생활’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생활모습은 사도행전 2-5장에 나와 있습니다. 물론 잘못 나가는 모습을 보인 사람들도 있긴 합니다만 어쨌든 우리는 당시의 역사를 가리켜서 모두가 본받아야 할 초대교회의 역사라고 합니다. 가장 하느님을 따라 사는 사람들의 정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기신 말씀과 그 정신에 가장 가까이 움직여 나간 공동체라는 말이 될 것입니다.
스승 예수를 가장 가까이 뵈었던 ‘그들’은 삶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기뻤던 삶의 모습이고, 환희와 즐거움의 모습이었고 어떤 역경이라고 하더라도 과감히 떨쳐 버리고 다시 움직이겠다고 하는 그런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죽임[살해=殺害]의 위협 앞에서도 굳건했던 그들의 모습이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지더라도 자신의 생활은 떳떳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에 대한 기록을 남깁니다. 바로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성서의 내용과 말씀들이 그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역사는 시작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공동체, 즉 그리스도교회의 처음 출발지는 지금의 이스라엘 지역입니다. 교회 초창기의 역사에 이 지역은 지금은 역사에서 사라져 버린 ‘로마’라는 국가의 정치적인 식민지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문화지배는 지금의 그리이스 지방에 있던 국가 그리이스였습니다. 그랬기에 성서는 그리스어로 쓰여져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의 구별에 따르면, 성서가 담고 있는 역사의 가장 늦은 배경은 길어야 기원 후 110년경으로 잡습니다. 즉,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약 70년 후까지 기간이지요. 그 이상의 역사적인 상황이나 모습은 성서에서 우리가 찾아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서 기록 이후의 일을 알아보는 것이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릴 교회의 역사가 되는 거구요.
성서가 담고 있는 시기 이후의 역사는 여러 가지 면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습니다.
요즘은 그런 일이 좀체 없습니다만, 초창기에는 신앙을 갖는 것도 지금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제약이 많았다는 소리가 되겠지요.
로마라는 국가와 그 정치이념을 생각해 보면, 종교는 대단히 크고 중요한 일에 속했던 시대였습니다. 특히 이 국가 로마는 자기들의 민족신, 조국 신들을 믿고 따를 수 있도록 엄격하게 관리하였다는 말이 맞을 것입니다. 그 조국 신들에는 황제에 대한 숭배가 있었습니다. 따르면 살지만 거부한다면 죽음의 길로 가야하는 그런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이 로마라는 국가에서 볼때, 그리스도교인들은 국가적인 종교, 예배를 멀리하는 무신론자들의 집단이었고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찬제(聖餐際)’라는 것을 통해서 인육(人肉)을 먹는 집단으로 모함을 받았습니다. 또한 이 그리스도교인들은 신을 따르지 않기에 질병들(=페스트, 홍수, 기근, 이민족의 침입)의 원인이 된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들에게 온 것은 박해와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렇게 해서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박해들은 상당수 로마의 정치지도자였던 황제들에 의해서 시행되었습니다.
125. 기원 후 112년경에는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가 칙령을 반포, 박해하는 기준을 만듭니다. “크리스챤들을 일부러 색출할 필요는 없지만, 만일 그리스챤임이 드러나고 또 로마의 신들에게 희생 드리기를 공식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들은 벌하라”고 명령합니다. 이 칙령은 훗날 로마 관리들이 그리스챤들을 다루는 한가지 기준이 됩니다.
126. 밀라노 칙령과 교회의 로마종교(國家宗敎)화(化)
로마 황제중 한사람으로서 ‘콘스탄티누스 대제’라고 있습니다. 일설(一說)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그는 황제권 다툼으로 인한 ‘막센티우스=막시미누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그렇게 승리하기 전 그는 꿈에서 십자가<†>와 그 표시를 앞세운 사람들의 무리를 보았고, 길(吉)한 징조라 생각하여 그는 자기의 병사들에게 십자가 깃발을 앞세우고 전쟁에 임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전쟁에서 승리하자 ‘그리스도교 박해’를 끝내고 ‘그리스도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인합니다. 이 밀라노 칙령(313년 6월) 이후에 그리스도교는 지하(地下)교회에서 지상의 교회로 모습이 바뀌게 됩니다. 박해시대에 몰수되었던 교회의 재산이 반환되고, 그리스도교인들을 속박하던 모든 법률이 폐지되었습니다.
이 회의는 콘스탄티노플의 수도원장인 에우띠체스가 주장한 그리스도의 단성론 <그리스도는 천주성(天主性)만 가졌지 인성(人性)은 없다는 주장>을 인정한 회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시 교황 레오 1 세는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 플라비아누스에게 교서를 보내어 정통 가톨릭 교리수호를 역설하고 에우띠체스의 이단을 반대한다고 천명했으나,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를 움직인 에우띠체스 일파가 에페소 회의를 열게 한 뒤, 주교들을 위협하여 지시 서명을 받아냈고, 플라비아누스 총주교를 살해하였다.... 이것이 강도회의의 전말이다...
451년 : 교황 레오 1세에 의하여 칼체돈 공의회가 열림... 콘스탄티노블 맞은 편에 위치한 칼체돈에서 에페소 강도 회의를 유발시킨 에우띠체스의 그리스도 단성론을 단죄함....
<신자들이 미사 중에 받아 모시는 눈으로 보이는 성체는 천주성과 기묘한 일치를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믿고 따르는 신앙의 내용입니다. 이것을 굳이 표현하자면, 천주성(天主性)-인성(人性)의 양성론(兩性論)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현재 가톨릭 교회는 양성론을 수용한다. .>
726년 : 레오 3세 황제가 성화상과 유해 공경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함.. 이것이 소위 성화상 파괴주의 인데, 843년까지 동방에서 큰 혼란을 야기시킴....
731년 : 그레고리오 3세는 로마 시노드를 개최하여 성화상 파괴주의를 단죄하고, 성화상 공경은 가톨릭 전승과도 일치함을 명백히 선언함..
787년 : 제 2차 니체아 공의회 개최........주로 성화상 파괴주의를 단죄함.......
밀라노 칙령(313년)이후에 황제는 로마를 교황에게 맡기고<330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의 수도를 천도-시오노 나나미, 콘스탄티노플 함락 83면> 자신의 권력 중심지를 동쪽의 지역인 비잔틴(=콘스탄티노플)으로 옮겨갑니다. 그리하여 후일에는 상업적인 중심지였던 도시들을 중심으로 해서 5개의 커다란 도시가 생겨납니다.(로마, 비잔틴=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 5세기경.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 네스토리우스, 그리스도안에 신성과 인성이 함께 있음을 주장, 431년 에페소공의회에서 단죄. // 네스토리우스에 반대하는 에우티케스는 인성이 신성에 흡수돼 버리는 단성론주장, 451년 칼체돈 공의회에서 단죄.
한편,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쪽의 교회는 당시의 시대상황과 사상의 발전에 따라 신앙에 대한 학문적인 것이 발전해 나가지만, 다른 네 개의 도시를 중심으로 한 동쪽의 교회는 과거의 모습 그대로 남습니다. 또한 주된 언어였던 라틴어와 그리스어의 차이, 관습과 제도의 차이, 그리고 비잔틴 총주교들이 로마 교황과의 동등권을 주장하는 야심 때문에 교회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857년 포시우스 총주교 때엔 한때(864-868년) 로마와 분리되었다가 다시 화해하기도 하였으나, 미카엘 체룰라리우스 총주교는 콘스탄티노플내의 ‘라틴계 교회와 수도원을 폐쇄하고, 라틴교회가 누룩 없는 빵을 사용한다, 사제의 독신제와 신경에 필리오꿰를 삽입하였다’고 공격하였다.
이에 대하여 레오 9세 교황은 특사를 파견 담판을 시도하였으나 결렬되고, 사절이었던 훔베르트 추기경은 체룰라리우스에게 파문선고(현재는 그의 행위가 월권<越權>이라는 견해가 지배적)하고, 체룰라리우스는 로마교황을 파문(당시는 공석이었지만)함으로써 동․서방 교회는 분열되었다(1054년). 그 뒤 루마니아, 조지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러시아의 정교회들이 로마 교회에서 속속 이탈하였다. 이것이 1961년쯤에 와서 상호파문을 취소함.
분열된 동․서방 교회는 더 큰 대립을 하게된다. 분열한 후 동로마 제국은 점점 약해지고 증대해 오던 이슬람교도가 제국의 아시아지역, 북아프리카를 석권하여 성지를 점령하고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였다. 이에 서방교회는 7차례(1079년-1265년)에 걸친 이 십자군 운동을 일으킨다. 이 운동의 목적은 성지회복 및 크리스챤들이 성지에서 자유로운 순례였다. 제 1회 십자군은 교황 우르바노 2세가 1095년에 클레르몽 회의에서 제안했고 원정군의 옷에 †자 표시를 했으므로 십자군이라고 불렸다. 몇 번에 걸친 원정에 따라 한때 예루살렘을 회복하여 라틴 제국을 건설(1204-1261)하고, 라틴교회 총주교좌를 설치하고 예루살렘 성지를 크리스챤들이 자유롭게 순례하는 권한을 얻기도 하였다.
131.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분열(1517년 이후)
천주교와 개신교의 분열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 차례입니다. 종교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나누어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한 분은 아우구스티노회 소속 마르틴 루터(수사 신부)입니다.
그는 1483년에 튀빙겐 지역의 작센 지방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은 1484년 만스펠트의 광산지역으로 옮겨가 살게되면서 동광기업(광산)의 경영주가 되었고 아들의 입신출세를 위해 교육시킬 계획을 세운다. 아버지의 계획에 따라 아들은 라틴어, 수사학, 윤리학과 신심과 조용한 기도 생활에 대해 배운다. 그는 15세에 에르푸르트대학에 입학하여 강의를 들으면서도 악기연주에 재능을 보였고, 철학자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진지해 진다. 이후 1505년에 부친의 뜻에 따라 같은 대학의 법학과에 입학을 하지만, 2개월 후에는 수도생활을 하기 위해 법학과를 포기한다.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수사가 된다. 1506년 9월에는 정식서원을 하고 수도자가 되었고, 1507년 4월에는 사제서품을 받고 본격적인 신학을 연구한다. 1513년에는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성서를 강의한다. 1515년에는 비텐베르그 본당의 설교가가 되어 강론대에서 교회개혁의 필요성을 주창한다. 개인의 구원에 관심이 많았던 루터는 영신적 번뇌와 그 탈출과정을 통해서 ‘의인은 신앙에 산다’는 신앙에 의한 의화(義化)’를 주창하면서 교회, 성사, 사제직의 필요성을 거부하기에 이른다.
이때 교황 레오 10세는 전임교황이 베드로 대성전의 재건을 위해서 반포한 대사(大赦)를 다시 선포하고 비용을 걷기 위한 방법으로 대사 설교가를 임명한다. 이 설교가(說敎家)가 된 루터는 신자들이 대사의 참다운 의미와 가치를 망각한 채 대사부를 면죄부(免罪符)로 착각하여 남용하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1517년 10월 31일 교회관습대로 교구장과 대주교에게 대사남용에 항의하는 95개항의 신학명제를 작성, 동봉하여 보낸다. 약 2 주 후, 이 명제가 출판업자의 손에 넘어가 인쇄되고 인문주의자들과 교회개혁을 이야기하는 이들의 환영을 받는다. 마르틴 루터는 이 반박 명제를 비덴베르크 성당에 붙이고 95개 조항을 게시하여 개혁 주도의 신호를 보인다.
1518년 10월 카예파노 추기경이 심문관으로 독일의 아우스부르크에 파견되어 루터의 가르침, 즉, 대사, 신앙과 성사은총의 관계, 공로의 의미에 대한 견해를 경청하고 그에게 무조건 이단적인 교리를 취소하도록 명령하였다. 결국 1520년 2월 로마에서는 이 교리에 대한 내용이 조사되고 루터의 단죄를 선언한다. 1545-1563년 사이에 열렸던 트리덴틴 공의회에서 다른 교리를 말하는 프로테스탄트를 인정하지 않기에 이른다.
영국교회를 위시해서 영국교회의 대표 주교인 켄터베리 대주교 관구와 통공관계에 있는 여러 교회를 성공회라 부른다.
성공회는 1533년 헨리 8세는 아라곤의 가타리나와 이혼하고, 앤 블린과 결혼하여 파문 당함.... 1534년에 그는 수장령을 발표하고, 수장령을 통하여 국왕이 영국교회의 으뜸이라고 선포한다. 이렇게 시작된 성공회는 ‘개신교의 한 형태’입니다. 그렇지만 가톨릭 교회의 전통을 가장 잘 보존하는 개신교이기도 합니다.
성공회는 혼인문제와 관련하여 로마의 교황과 대립했던 ‘헨리 8세’때를 시작으로 해서, 이후 엘리자베스 여왕 때에는 국가와 종교를 단일시 하려는 일 때문에 교황청으로부터 파문을 받습니다(1570년). 이때부터 로마교회와 분열된 것입니다.
이 성공회는 성경을 기본 신앙으로 따르고, 가톨릭에서 통용되는 사도신경과 니체아 신경을 믿으며, 주교 사제 부제의 성직제도를 보존하고, 세례성사와 성체성사를 그대로 보존한다. 하지만 1850년 이후 영국에 다시 가톨릭교회가 진출하여 1982년 현재 31개 교구, 국민의 9% 가량인 약 509만 명의 가톨릭신자가 있다.
1583년 : 마태오 리치가 중국에서 선교활동 시작...
1633년 : 갈릴레오가 이단 심문을 받음... 그는 1642년에 운명함........
1704년 : 청나라의 전례문제... 유교의 여러 사상과 관습을 그리스도교와 접목시키려는 선교사들의 행위, 특히 조상 숭배와 중국의 민간 신앙 문제의 적용이 큰 문제가 되어, 끌레멘스 11세가 이를 금지시킴...
1724년 : 청나라 크리스챤 박해가 시작됨....
1789년 : 프랑스 혁명이 시작됨.... 교회 재산의 국가귀속 등의 공포정치 시작... 교회가 수많은 박해를 받기 시작하고 1796년 나폴레옹의 교황청 침공으로 극도의 혼란상이 가중됨..........미국은 헌법 제 1차 개정 작업을 통하여 종교자유를 명기함..
1829년 : 영국 가톨릭이 종교 자유를 획득함으로써 헨리 8세 이전의 시민권을 회복함...
1869년 : 제 1차 바티칸 공의회... 비오 9세가 소집한 이 공의회는 약 800명의 고위 성직자가 참석하여 4회기 89회 회의를 함.... 교황 수위권, 무류성, 19세기의 주지주의, 유물론 등 내외의 위험에 대치함....
1967년 : 로마에서 세계 평신도 대회가 개최됨... 교황은 민족들의 발전을 촉구하는 "뽀뿔로룸 쁘로그레시오" 반포하고 사제 독신제도를 강화하는 "사체르도딸리스 챌리바뚜스" 반포하심...
1983년 : 교회법이 개정 선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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