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만물의 창조와 인간에 대한 하느님에 대해서>

2006. 11. 10. 오전 8: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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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만물의 창조와 인간에 대한 하느님에 대해서>

49. 빛 어둠,   창공 위아래의 물,   땅과 바다 식물,   해 달 별,   물고기 새,   동물과 사람 의 순서에 따라 창조합니다. 이 내용에 따르면 과학이라고 하는 잣대로 설명은 하지만, 진화론을 중심으로 하는 이론보다는 인간을 더 진실하고 가치 있게 대우하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성서의 세계관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창세기 6장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에 대한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창세기 11장까지는 역사의 바탕을 찾을 수 없는 원역사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노아의 방주를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성서의 본래의도를 아직도 파악하지 못하고 헤매는 사람입니다.

한없이 높아지고자 하는 욕심이 발동하여 인간은 범죄하고<우리가 사는 세계도 비슷하지 않을까>, 악이 인간 세계에 들어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끊임없는 사랑을 베풀겠다고 약속하시는 하느님을 볼 수도 있습니다 <--원죄(原罪)-->.  이처럼 인간이 끊임없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려고 발버둥을 쳐도 하느님은 무시하지 않으셨다고 성서는 그 믿음을 고백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다음에 인간으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신 분이 하느님이시고, 원죄라고 칭하는 선악과를 따먹고 낙원에서 쫓겨나는 인간에게 가죽옷을 해 입히시고 구원의 구세주를 약속하시며, 동생을 죽인 형님 카인을 쫓아내면서도 다른 이가 함부로 죽이지 않도록 표를 하겠다는 보호약속도 하시고, 노아의 홍수로 인구가 별로 남지 않게 되었을 때도 계속해서 종족이 늘어날 수 있도록 해주시고, 먹을 양식도 늘려주시고<최초에는 풀과 씨가 든 과일나무(창세 1,29)--> 훗날 고기까지 허락(창세 9,3)>, 하느님이 계시는 곳까지 한없이 교만해지는 인간의 잘못을 보면서도 언어를 섞어놓는 일만을 하시는 하느님의 참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50. 이 하느님에 대한 내용이 여러분의 교재 16과에 나옵니다.  사실 하느님이라고 하는 개념은 진화론이 아닌 창조론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모든 것을 과학으로 설명하려는 풍조에 젖어든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서 알려고 도전하다가 쉽게 지치고 맙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리면서 하는 말, ‘하느님은 인간 세상에 일어나는 고통과 슬픔에 대해서 별 관심을 갖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때때로 가끔씩 주무시거나 졸음에 겨워 눈을 비비시는 분이다, 하느님은 내가 고생을 하고 고통을 겪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보시는 고약한 분이시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하느님은 계시지 않는다(=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신다).’고 정리를 하고 맙니다.


51. 그러나 하느님을 일찍이 자신들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분으로 고백하고 공경해왔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인간에 가장 가까운 계시는 분으로 성서는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시는 분(신명 4,7), 야훼여 당신은 가까이 계시며(시편 119,151),  그랬기에 인간이 잘못된 길로 나아갈 노심초사하며 구원의 길에서 멀어질까 끊임없이 걱정하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당신의 아들을 시켜 이 세상을 구원할 방법을 찾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그것이 구약성서에서는 ‘정의를 지키고 이끄시는 하느님’으로 신약성서에서는 ‘사랑의 하느님’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하느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마음대로 개념을 정하고 정리합니다.  그렇게 정리할 때 가장 먼저 부딪히는 것은 ‘진화론,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신앙을 파악하고 설명할 때 생기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과학이라는 이름과 하느님이라는 두 가지 개념은 병존(竝存)할 수 없는 용어입니다.  진화론과 창조론은 영원한 평행선을 긋는 것이며, 결코 만날 수 없는 두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저것을 판단하고 규정하려고 해도 안될 것이고 그 반대로 안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고 하면 할수록 사람은 혼란만 더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에게 그 기원을 두고 있고 그 하느님으로부터 만들어졌다는 의미에서 이야기한다면, 인간은 결코 하느님을 완벽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재간이 없습니다.  만일 가능하다고 우긴다면, 그것은 물이 없어도 물고기가 숨쉬고 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오류를 범하거나, 동그란 네모가 존재할 수 있다는 우격다짐과도 같은 일이 될 것입니다.  애초에 그럴 수 있는 개념은 없지 않습니까?  사람이 처음부터 그렇게 정했으니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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