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유 꽃.
엊그제 비 온 뒤끝이어서인지
아파트의 좁다란 사잇길에는
아직도 찬 기운 가시지 않은 바람이 맴돌고 있다.
며칠 전부터 그 길 옆의 산수유 꽃들이
군데군데 노랗게 피기 시작하더니
우중충한 아파트 벽에 밝고 노란색을 덧칠하여
그 건물을 조금은 생기있게 만들어 놓았다.
가느다란 가지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아주 작고 섬세한 꽃들이 하나둘 모여서 말이다.
너무나 신기하여 그 꽃을 가까이 들여다 보니
나뭇가지에 붙어있는 꽃받침 같은 네개의 잎안에
이십여개나 되는 성화 봉송에 쓰이던 햇불 모양의 긴 꽃자루와
그 끝의 불꽃 모양의 작은 봉오리가 터지면서 꽃이 피었는데
눈을 크게 뜨고도 수술과 암술이 겨우겨우 보일 정도로 작아
떨어지는 빗방울에 부서지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었다.
그 길의 여기저기에서도 산수유 꽃을 시샘하는 듯
동네 꼬마들 같은 샛노란 개나리와
귀부인 티가 나는 하얀 목련꽃이 얼굴을 내밀고 있고
그늘진 곳의 벚나무 꽃망울들도 산고의 진통을 앓고 있는지
얼굴이 온통 불그스레하게 물들어 가고 있다.
봄이 꽤나 깊숙이 들어서고 있는 듯하다.
겨우내 여린 나뭇가지 속에서
온 몸 얼어붙는 추위를 고통스럽게 견디어내고서는
따스한 봄바람과 햇살 받으며
제 생살 스스로 찢고 나오던 아픔도 잊은 채
활짝 웃으며 기쁨으로 환호하는 꽃들!
긴 기다림 속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 얼마나 밝고 눈부신 세상이었을까.
은은한 미소 지으며 피어난 청초한 모습에는
지난 날 고통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비록 모두가 겪는 세상 사는 모습이라 하더라도
아픔을 딛고서도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을 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자연의 섭리'일 뿐이라고 한마디로 표현하고 마는 것은
꽃이 겪은 고통이나 기쁨을 함께 하지 못하는 所致일 것이며
힘겹게 피워냈던 그 꽃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모르는 야속한 말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남들의 쉬워 보이는 일도
막상 자기가 해보면 힘들고 어려운 법이다.
이 찬란한 봄에
일상 속에 파묻혀 지나치기 쉬운 길가의 작은 산수유 꽃을 보노라면
그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조그마한 꽃이지만
어느 누가 그 속에 향기까지 담아 그러한 꽃 한송이라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만
아픔에서 벗어난 산수유 꽃들에게도
봄날의 기쁨은 덧없이 짧은 것이며
다시 세월 좇아가야 하는 고단한 길이 더 남아있었다.
세상에 나와 잠시 한숨 돌리고서는
그들에게는 가혹한 일이었지만
어느 꽃은 현기증 나도록 흔들리는 가지에 앉아
한여름의 뙤약볕 아래 여물어가는 열매를 가다듬으며
거센 소나기와 바람을 견뎌내야만 하였고
어느 꽃들은 그들이 더욱 실하고 곱게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기꺼이 자기 몸을 떨구어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었다.
어느 것이나 다 눈물겨운 일이었으나
해마다 겪는 그런 일들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라 하더라도 동시에 큰 기쁨이 되었을 것이다.
가녀린 나뭇가지에 갇혀있다가
저 아래 강 건너오는 봄의 훈풍에 노란 꽃 피우고
가을이면 빨간색의 길쭉한 열매를 맺는 산수유 꽃,
먼 발치에서 반겨주는 그 꽃을 보니
열매는 사람 몸에 좋은 약재로 쓰이고
차로 달여 마셔도 좋다시며 그 고운 빛깔의 껍질을 벗기고 계셨던
어릴 적의 이웃 집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참으로 가냘프고 예쁜 꽃이다.
언제 보아도 그 세월이고
가만 있어도 돌아올 그 세월인데
무엇이 급하여 연두 잎을 내기도 전에 노오란 꽃부터 먼저 피우는 것일까.
개나리, 목련,진달래 그리고 벚꽃들이 모두 앞다투며 피더라도
추위 가시면 천천이 여유롭게 피어도 될 법도 한데
왜 그렇게 일찍 흐드러지게 피어나 찬 바람에 떨고 있는지........
혹시
눈부신 세상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어둡고 좁은 그 나뭇가지 속이 너무나 답답하였을거나.
이상원이레네오.
산수유 꽃.
2009. 3. 25. 오후 1:27:23
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