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2주간 화요일. 사도 4,32-37;요한 3,7-15
어린이들, 청소년들을 보면 어른들과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젊은이들이 세상을 사는 방식은 어른보다는 더 솔직하고 더 진솔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무의식중에 배워 알고 있는 듯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즉 뒷생각 하지 않고, 밑에 무언가 깔려있는 듯한 정치적인 계산없이 사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게 살다보니 이내 공허감에 빠집니다. 먼저 살고 있는 어른들이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른들의 어떤 모습이 문제였던 것일까요? 어른들이 사는 세상이란 ‘질서’에 우위를 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독재자는 ‘정의’를 부르짖습니다. 하지만 그 정의란 어떤 정의입니까? 자기 질서를 통제하기 위한 정의일 뿐이지요. 사실 질서는 생명을 만들어 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생명은 질서를 만들어내지요. 지금 같은 계절의 변화나, 꽃이 때에 맞춰서 피어나는 것, 그런 것들이 여기서 말하는 질서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그런 말씀을 하고 싶으신가 봅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 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당신이 말씀하신 영의 세계도 질서가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말하는 오싹하면서 뻑뻑한 법과 질서의 느낌은 아닙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은 마치 무질서하게 보입니다. ‘하느님 마음데로’ 라는 말을 사용하듯이 말이지요. 허나 하느님 마음은 언제나 ‘인간의 구원’ 이라는 한 목표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린 느낍니다. ‘바람이 불고 싶은데로 불 수 있게’ 군더더기가 많은 나의 공간을 잘 정리해야 한다고요.
1독서에 나오듯이, 신자공동체가 자기 소유를 공동소유로 하면서 사도들 앞에 놓았던 것은 억지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스스로 제일 나은 방법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들이 무언(無言)중에 결정한 질서였던 것이지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질서는 생명을 만들어 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생명은 질서를 만들어내지요. 그렇다면 내가 하느님의 뜻을 받아 산다면 내가 응답한 정도의 생명감 있는 질서가 나올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니코데모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문제에 관해 고민했듯이 여러분도 그것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