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주간 화요일. 히브리서 6,10-20;마르코 2,23-28
여러분은 사랑의 초월성을 믿으십니까? 어떤 것도 너머서는 사랑의 초월성을 어떻게 경험하고 계십니까? 사실 그런 사랑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는데도 그것을 꽤나 어렵게만 알고 있습니다.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이런 경우가 그런 초월의 모습이겠지요. 두 개의 직장을 갖고 있는 미혼모가 아들의 야구시합을 보러가기 위해 자기 시간을 낸다거나, 10대 청소년이 자기 친구를 위해 헌혈을 하는 행위들을 보면, 너무 쉬운 거라 보고 넘기기 일쑤지만 그런 참된 기적의 초월성을 그저 멀리 또 너무 크게만 보는 것 같은데요. 그렇게 보기에 오히려 무감각해 있는 우리자신을 보곤 합니다. 그래서 그런 지 신비영성가인 떼이야르 드 샤르댕 신부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온전한 인간성을 가지고 그리스도교를 믿고 따르려면 인간이나 신이 우리에게 너무 가까워서 너무 크게 보이고, 그래서 오히려 보이지 않는 무감각 상태를 극복해야한다.” 고요.
초월하는 사랑의 원천인 주님이 어떻게 하셨나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1독서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두 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에 관하여 거짓말을 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두 가지란 약속과 맹세입니다. 무슨 약속입니까?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그 약속, “정녕코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너를 한껏 번성하게 해주겠다.” 이것을 믿었기에 그는 희망을 가지고 긴 시간을 버텨 나갈 수 있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도 안식일에 해서는 안될 일을 한, 제자들을 변호하시기 위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긴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최고라 일컫는 법마저도 초월한 사랑을 알려주십니다. 그런데도 우린 초월하는 사랑을 갈구하기보다는 그것에 얽매어 있기만을 바라는 사람들을 보곤 합니다. 더 사랑할 수 있는데, 더 아낌없는 마음을 줄 수 있는데, 그저 현실의 노예로, 현실의 한계만 탓하면서 사랑의 걸음을 멈추고마는 안타까운 현장을 살고 있는데요. 모두가 몸을 싸매고 다니는 추운 계절에도 하느님은, 집도 없이 날아다니는 새들을 굶기지 않으십니다. 그런 사랑의 초월을 우리도 경험해 봐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