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3주간 목요일. 이사야 54,1-10;루카 7,24-30
제가 지금부터 질문하는 것에 한번 답해보시겠습니까? ‘나는 어떤 사람이라 생각하십니까?’ ① 개방적인 사람 ② 폐쇄적인 사람 ③ 중립적인 사람. 무어라 답하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개방적인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남에게서 개방적인 사람이란 이야길 들으면 왠지 열려있는 듯한 사람처럼 느껴지고, 나 또한 어떤 문제이든 잘 받아들일 것이라 여기는데요. 하지만 문제는 내가 그렇게 개방적인 사람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다른 것 가운데 자기가 알고 들어보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을 찾을 수 있는데요. 과연 그것이 무언지 각자 잘 아시는지요...
오늘 독서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의 천막 터를 넓혀라. 네 장막의 휘장을 아낌없이 펼쳐라.” 우리가 교리 시간에 배운 대부분의 것은 교의 신학이었습니다. 교의 신학은 도그마(dogma), 이른바 하느님의 계시진리를 성경에 입각하여, 교회에서 선포한 교의들과 관련시켜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신학입니다. 하지만 이것만 충실하다 보니 신비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부분을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예전 학교에서 중세시대를 배울 때, 암흑시대라고 배웠을 것입니다. 이런 말이 나오게 된 경위가 실은 교과서 편찬의 주된 위원들이 개신교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지만, 중세는 신학시대의 보물창고 같은 시기였습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지금보다 더 넓은 시각에서 바라보았던 시기입니다. 현대를 살면서 중세보다 과연 하느님을 더 넓게 바라보고 있다고 확언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교리 지식에 갇힌 만큼으로만 하느님을 바라봅니까? 살면서 자기를 넓힌다는 것, 어쩌면 두려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독서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네가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수치스러워 하지마라. 네가 창피를 당하지 않으리라.” 교회의 범위 안에서 당신을 계속 새롭게 우주적으로 바라보는 시도가 필요합니다. 안 그러면 갇힌 신앙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복음 마지막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은 바라사이들과 율법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 뭔가 배웠다는 지식인들이 오히려 참다움을 보지 못하는 벽에 막혀 있음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아는 상식이라는 것도 결국 내가 만든 벽인데 말입니다. 구세주 예수님은 우리가 알던 방식으로만,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만 오시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당신을 바라보고 있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