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성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스바니야 3,1-13;마태오 21,28-32
여러분은 어떤 길이 옳고 바른 길인지 아십니다. 이미 그런 것에 대해 배우셨고 그런 것이 얼마나 고귀한 삶인지 아십니다. 하지만 문제는, 알지만 행하지 못하는 우리네 모습니다. 알지만 바른 길로 넘어가는 문턱에 매일 걸려 넘어지는 것을 보는데요. 그 문턱은 다양합니다. 남의 눈치, 반대에 부딪히기 에 귀찮아질 삶, 다가오는 경제적인 어려움, 등등 말이죠. 돌아가신 이태석 신부님이나 마더 데레사 등의 삶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는 그러하질 못합니다. 과연 누구의 문제일까요?
독서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불행하여라 말을 듣지 않고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는구나, 주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 하느님께 가까이 가지 않는구나.”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그저 옛날 사람만의 일도 아닙니다. 복음에 아버지가 아들 둘에게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지만 “싫습니다.” 해놓고 아버지의 뜻을 받든 큰 아들과 “가겠습니다. 아버지” 해놓고 가지는 않은, 작은 아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물론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젊은 아들들이 보기엔 힘들어 보였겠지만 그로인해 자기 집이 먹고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면 다음 행동은 달라졌을텐데요.
오늘 기념일을 맞이한 십자가의 성 요한은 수도회를 개혁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반대하는 동료 수도자에게서 9개월간 감금당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가 ‘왕따’였기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르멜회가 수도회다운 수도회가 되길 바랬지만 다른 수도자들은 그저 편안하게 살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감금을 당하면서 하느님 사랑이 무언지, 부르심을 받은 인간의 소명이 무언가 바라보면서, 이를 바르게 응답할 수 있도록 영적인 가르침을 펴야겠다는 생각이 굳어집니다. 그래서 그의 저서인 가르멜의 산길, 어둔 밤, 영혼의 노래 등을 통하여 인간이 하느님께 다가가야 하지만, 인간 실존의 근본적인 모습은 하느님께 가기 싫어하는 근본적인 비참한 모습을 지적하면서 자아재건의 길인 ‘어둔 밤의 길’을 통하여 인간이 올바르게 하느님을 찾고 사랑할 수 있는 길을 십자가의 성 요한은 제시합니다.
수도회다운 수도회를 거부한 사람들, 마찬가지로 알지만 동참하기 싫어하는 우리들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왜 알고 있음이 행동과 연결되지 않으십니까? 그저 용기없음은 아닐 것입니다. 그저 게으름만도 아닐 것입니다. 진정 여러분이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