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가끔 큰 재해나 사고가 생겨 큰 인명 피해가 나곤 합니다. 그럴 때 이런 질문을 던지지요. ‘아무런 죄도 없는 이들이 왜 이런 화를 입어야 합니까? 왜 그들을 데려가셨습니까?’ 물론 가슴 아픈 일입니다. 어떤 말도 위로되지 않을만큼 크나큰 아픔인데요. 오늘 복음은 그런 이야기입니다. 메시아를 찾으러 온 동방박사들에게 헤로데는 ‘그 아기를 나도 경배하겠다’ 면서 박사들을 기다리지만 천사들의 부름에 딴 길로 돌아갔기에 예수님이 누군지 모르는 헤로데는 두 살 이하의 아기를 죽이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자신의 통치에 불안함을 가졌겠지요. 여기서 우린 아까운 아기들의 죽음과 그 가족의 안타까움을 더 바라보지만 여기서는 이런 것이 보입니다. ‘주님의 구원사업을 펴기 위한 아기들의 순교’ 를요. 이 순교는 통치자의 만행을 알리는 사건이 되고요. 구세주가 세상을 바로잡는 때를 기다리고 만나게 되는 사건으로 이어지는데요. 물론 안타까운 희생이요, 죽음이었습니다. 하지만 헛된 죽음은 아니었습니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도 수 백명의 아까운 생명이 빛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그로인해 얻은 것도 있었습니다. 세상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의식들이 생기게 되었고요. 성장위주의 경제논리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값을 메길 수 없는 귀중한 희생이었습니다. 그 희생이 우리를 가르침으로 이끌었고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해주는데요.
예수님의 구원방식도 그러하였습니다. 무난하고, 손쉽고, 평안하게 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얻은 평화는 가짜이거나 수명이 짧기 때문입니다. 독서의 마지막을 이렇게 장식합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제물이십니다.” 주님을 증거하고 증언하는 삶은 생각보다 많은 고난과 어려움이 따릅니다. 구유의 아기예수님처럼 가난하고 비천하게 시작하고요. 겨자씨의 비유처럼 처음에는 보잘 것 없이 작습니다. 기적은 가진 것을 나누는 데서 시작하고요. 십자가의 죽음처럼 피하고픈 고통이 따릅니다. 작고 말없는 아기들의 순교가 결국 예수님의 구원을 도왔고요. 결국 현세에서만 모든 것을 거는 삶이 아니라, 영원한 삶을 약속받는 삶으로 이어졌는데요. 물론 희생을 머리로 받아들이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 숭고한 희생이 기적을 만나게 해주는 것이라면 우린 기쁨으로 받아들여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