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거산, 백곡,베티성지 순례기

2023. 10. 17. 오전 11: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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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0. 15 짙은 안개 후 맑음

동수씨가 사당역까지 데려다 주었다손경희박사는 벌써 왔다고 문자가 왔다.

주차장에 2대의 대형 버스가 와 있다. 2호차에 올라가니 가브리엘라 봉사자가 반긴다비아한미희수산나도 보인다한 동창들과 다니는 기분이다막히지 않고 9시 50분에 성거산 주차장에 도착했다.

옛날 7년전 김기혁레오 분과장과 같이 걷던 성거산은 하루종일 걸어서 올라왔었는데 차로 10분 만에 올라왔다우리는 제1, 2 줄무덤 에 나란히 섰다정말 줄지어 큰절을 올리고 숙연하게 기도하고

병인박해 기념성당으로 내려갔다걷는데 보니 2개의 스틱에 의지하며 온 분도 있고지팡이를 짚으시는 분도 있다자폐아들과 같이 온 어머님도 있고 혼자 성지순례를 다니는 분들도 몇몇 보인다나는 감사하고 살아야 한다.

경기도와 충청북도 경계선에 자리 잡고 있는 성거산 성지는 천안시 북면 납안리 46-1번지로 되어 있다한국의 성지 중에서 보기 드물게 해발 500m의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이 성지는 차령산맥 줄기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특히 봄가을에는 꽃들과 단풍으로 찾아 온 순례자들의 감탄을 자아내고 있다.

 

성거산이란 명칭은 고려 태조 왕건이 수행원들과 함께 성환 지역에 머무르면서 잠시 쉬는 동안 오색구름이 맴돌며 신령한 기운이 감도는 모습을 보고 거룩할 성()'자에 '거할 거()'자로 이름을 지어준 다음 이 산에서 제사를 지낸 데서 유래한다또한 태조 이성계와 세종대왕도 온양 온천에 목욕을 하러 올 때마다 이곳 성거산에 들려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

 

이곳 성거산 성지 주변은 박해 때 신앙의 선조들과 순교자들이 피신하여 신앙생활을 영위했던 삶의 터전인 교우촌 7개가 산재되어 있어 선조들의 신앙의 향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860년대부터 1920년 사이에 세워진 교우촌을 보면 서덕골(서들골), 먹방이소학골사리목매일골석천리도촌 등이 있었으며,

이 교우촌 중 목천 서덕골 교우촌은 뮈텔 주교가 배티 삼박골 교우촌까지 사목 방문을 할 때 거쳐 가는 경로였다또한 서덕골 교우촌은 한국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의 백부 최영렬이 이주해 살던 곳으로, 1839년 기해박해 이후 최양업 신부의 둘째 아우인 최선정 안드레아가 맡겨져 성장한 곳이며 최양업 신부도 종종 드나들었던 곳이다.

특히 소학골 교우촌은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칼레(Calais, 신부와 페롱(Feron, 신부가 박해를 피해 머물다 중국으로 탈출한 곳이고박해가 끝난 뒤에도 뮈텔(Mutel, 閔德孝주교두세(Doucet, 신부베르모렐(Vermorel, 신부가 거처하거나 순방하던 곳이다칼레 신부와 페롱 신부는 병인 박해 때 동료 선교사들이 곳곳에서 체포되자 전교 여행을 중단하고 한실(현 경북 문경군 마성면 성내리교우촌에서 숨어 지냈다그러다가 포졸들에게 쫒기면서 연풍을 지나 괴산과 진천을 거쳐 배티 삼박골 교우촌에 머무르다가 마지막으로 소학골에 와서 페롱 신부와 함께 잠시 은신하다가 조선을 떠난 유서 깊은 교우촌이다.

또한 소학골 교우촌에는 병인박해시 10명의 순교자가 탄생했는데, 5명은 공주 감영에서 참수형을 당했고 나머지 5명은 서울 포도청에서 참수형을 당했다공주 감영에서 참수당한 최천여 베드로최종여 라자로배문호 베드로고 요셉채서방 며느리는 성거산 성지 제1줄무덤에 안치되어 있다현재 제1줄무덤에 총 382줄무덤에 총 36기의 묘봉이 있는데시신(屍身)들이 겹쳐 묻혀 있어 실제 이곳에 안장된 순교자의 수는 훨씬 더 많다고 한다. 1959년 미군의 공군기지가 성거산 정상에 주둔하면서 도로를 개설할 때 도로 상에 있었던 묘봉 수가 총 107기였다고 이장(移葬작업에 참여한 6명의 증언이 있었다따라서 이곳은 병인박해 때 내포지방에 살다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 때문에 순교를 당한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안식처이다.

 

하느님과 진리를 위해사랑은 죽음보다 강함을 생명을 바쳐 증거한 순교자들의 신앙은 오늘날 한국 교회를 탄생시킨 원동력이 되고 못자리가 되었다그동안 오고 가는 사람도 없이 벌 · 나비·짐승들만이 함께 했던 성거산 성지의 무명 순교자들은 침묵의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었다.

 

성지 현황을 보면 제1줄무덤에서 제2줄무덤까지의 거리가 약 530m 정도로가는 동안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칠 수 있도록 14처가 설치되어 있고넓은 성모광장에는 야외제대와 신자석이 마련되어 있어 야외미사를 봉헌하기에 불편함이 없다또한 순례자들이 식사를 하고 쉴 수 있는 쉼터도 마련되어 있다2줄무덤부터 시작하는 2.1km 거리의 '순교자의 길'에는 순교자와 관련된 많은 조각품과 한국의 103위 성인과 성거산(소학골출신 순교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55개의 대형 호롱등이 설치되어 있어 전구하며 조용히 묵상할 수 있다

2011년 5월 7일에는 성거산 아래 성지 초입에 건립한 성당과 수산나 피정의 집에 대한 봉헌식을 가졌다.

 

한편 교우촌 중에서 가장 오래된 소학골 교우촌에는 박해 때 교우들이 살던 집터와 태풍에 의해 쓰러진 돌배나무가 남아 있어 오랜 역사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또 감나무가 있으면 교우촌이다 생각하면 된다고 해설사는 이야기 한다.

성거산 성지는 깊은 산골에 위치해 소음이 없으며 공기가 맑고 전망이 아름다워 한 번 순례를 온 이들은 꼭 다시 오고 싶어하는 곳이다특히 계절마다 무명 순교자를 상징하는 각종 야생화가 피어 군락을 이루며 주변 환경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

2008년 12월 22일 성거산 성지는 '천안 성거산 천주교 교우촌터'라는 명칭으로 충청남도 기념물 제175호로 등록되었다.

병인박해 기념성당에서 미사를 했다.

앞 유리창은 화폭이다멀리 산이 겹겹이 보이고막 물들어 가는 산이 가만히 무게잡고 있는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난다창 가운데에 십자가 예수가 미사하는 우리를 내려다 본다미사중 신부님 강론

“ 코로나 이후 최고의 순례자가 온 날입니다저는 내포 합덕성당에서 신부가 되신 33번째 신부입니다동네에서 40명의 신부가 나왔습니다집집마다 신부 수녀가 없는 집이 없습니다지금은 젊은 이가 없어서 맥이 끊겼습니다.

오늘은 코로나 이후 가징 순례객이 많이 온날입나다풍수원성당 500현양회 100성남동 성당 200명이 온 날입니다.

신유박해 때 고향을 등지는 것이 죽는 것과 같았던 시절이다내포지역이 박해 때 이곳으로 피신하여 교우촌을 이룬 곳입니다군사도로를 내다가 십자가 나왔습니다십자가의 죽음이 최고의 참혹한 벌입니다수치심과 손목 근육에 못질하면 다리로 피가 흘러 고통을 더욱 가중합니다죽음의 극복이 사랑입니다.

미사시간이 즐거워야 합니다번뇌에 빠지는 것은 미사가 즐겁지 않아서입니다.

이곳은 2021년에 완성된 곳입니다아직 할 일이 많고 땅도 나라땅입니다땅 한평 사주시고 기부를 해 주에요.”

신부님의 간절한 강론에 몇몇 신자들이 기부하려고 신청서를 갖고 나온다.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식사 후 주차장으로 올라오며 손박사가 이야기 한다.

칼레 신부님은 프랑스로 돌아가서 평생 조선을 위해 기도했다고 합니다.”

버스로 40분 가서 백곡성당으로 갔다.

충북 진천군 백곡면 배티 성지 바로 인근에 위치한 백곡 성당은 예로부터 깊숙한 산골로찾는 사람이 적었고 안성으로 넘어가는 도로가 말끔히 포장된 지금도 그리 인적이 흔치 않은 곳이다.

 이 지방은 천혜의 피난처로 박해 시대 때 수많은 교우촌이 형성됐던 곳이다충북 진천군과 충남 천안시 그리고 경기도 안성시가 경계를 이루는 삼각점에 위치한 이 지역은 우선 그 지세가 험해 비교적 박해의 찬바람을 피할 수 있었다뿐만 아니라 그 위치가 각 지방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위치교통이 편리했기에 박해 시기 은밀한 연락이나 밤을 틈탄 도주가 용이했던 것이 교우촌이 형성되기에 아주 적합한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박해 시대를 거쳐 신앙을 자유를 얻은 뒤 여러 번의 이전을 거쳐 현 위치에 자리한 후 1961년 공소 경당을 세웠습니다이곳에는 병인박해 때 순교한 남원 윤씨와 밀양 박씨의 묘가 있는데 이들은 시누이와 올케 사이입니다홍주에서 살다 박해를 피해 배티로 이주해 온 윤행윤의 손자며느리인 박 바르바라와 손녀 윤 바르바라는 함께 체포되어 신앙을 굳게 증거한 뒤 매를 맞아 순교했고그 시신은 가족들에게 거두어져 배티 성재골에 안장되었습니다집안에서 내려오는 이들의 순교일은 1866년 10월 20일입니다.

배티 뒷산 성재골의 무명 순교자 묘역에 안치되어 있던 이들의 묘는 오랫동안 잊혔다가 1970년대 초 후손들이 다시 찾았습니다. 1977년 평택에 사는 순교자의 후손들이 묘를 선산으로 이장하기 위해 배티를 찾았을 때 배티와 백곡 공소의 신자들은 후손들을 만나 교회에서 대대로 잘 돌보며 기도드릴 수 있도록 설득하여 두 순교자의 유해를 백곡 공소 경내로 이장한 뒤 깨끗하게 단장했습니다.

 

배티성지

천혜의 피신처라 할 수 있는 배티는 충북 진천군과 경기도 안성시가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 위치한 깊은 산골로 박해 시대 내륙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이런 지리적 특성으로 1830년부터 본격적으로 교우촌이 형성돼 왔고 최양업 신부가 이 지역을 근거로 전국을 다니며 사목 활동을 했습니다성지에는 1997년 봉헌된 최양업 신부 기념성당과 오솔길을 따라 각각의 맷돌에 새겨진 14그리고 2002년 봉헌된 양업 영성관’(피정의 집)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성지에서 내려와 배티 고개를 향해 조금 올라가면 최양업 신부가 머물던 사제관 겸 성당이 있습니다. 1년 내내 도보로 전국을 다니며 사목하던 최양업 신부가 장마철에는 이곳에 머물며 천주가사를 집필했고 기도서인 성교공과를 번역했습니다. 1999년 최양업 신부의 성당 및 사제관 터를 확인한 후 그 부근의 농가를 헐고 2001년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복원했습니다이 집은 이미 1849년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다음해 다블뤼 신부가 설립한 조선교구의 소신학교로 사용됐던 곳입니다.

배티 고개 길을 따라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면 배티에 숨어 신앙생활을 하던 선조들이 포졸들에게 잡혀 안성으로 끌려가다 집단으로 순교한 14인의 무명 순교자 묘역이 있습니다배티를 중심으로 진천 일대에서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박해 때에 60여 명의 순교자가 났는데그 가운데 순교 행적이 전해지는 순교자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된 8명을 포함해 모두 34명에 이릅니다나머지는 배티 일대에 무명 순교자 묘소들로 산재해 있습니다청주교구는 배티 성지의 성역화와 최양업 신부의 영성을 본받고 현양하기 위해 1999년 양업 교회사연구소를 설립했으며, 2012년 4월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기념성당 봉헌식, 2014년 4월 11일 최양업 신부 박물관 축복식을 가졌습니다최양업 신부 박물관은 첨단 정보통신기술을 접목해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꾸며졌습니다.

순례를 마치고 서울로 출발했다차창 밖으로 호수가 보인다아름다운 경치다산자락이 물소에 들어앉은 모습은 그림보다 예쁘다옆에 카페가 들어가 있다.

자동차 전용도로를 달리니 생각보다 일찍 6시에 도착했다감동의 성지순례를 했다.

봉사자가 최양업 신부님의 편지를 읽어 주었다.

원컨대 지극히 강력하신 저 십자가의 능력이 저에게 응결시켜 주시어 제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않게 하시기를 빕니다.

우리의 모든 희망은 하느니의 자비에 달려있고 하느님의 거룩한 뜻이 이루어 지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삶 안에서 죽고 함께 묻히는 것이 소망입니다.”

(최양업 신부 1846-1847 서한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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