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3주일.장미주일. 자선 주일]성령과 불로 세례를 (루카3,10-18)

2015. 12. 12. 오전 10:5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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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3주일. 장미주일.자선 주일]


성령과 불로 세례를  (루카3,10-18)


    “금을 쌓아 두는 것보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낫다”(토빗 12,8).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1984년부터 해마다 대림 제3주일을 ‘자선 주일’로 지내기로 하였다. 자선은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한 가지 방법이며,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내주신 성체성사의 나눔의 신비를 체험하게 하는 신앙 행위이다. 오늘 교회는 가난하고 병든 이들, 소외된 이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특별 헌금을 통하여 자선을 실천한다. 교회는 자선이라는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을 통하여 다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시킨다.


스바니야 예언자는 전쟁에 시달리고 있는 예루살렘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다. 이스라엘이 큰 고통을 겪었지만, 이제 주님께서 예루살렘 한가운데에 계시어 그들을 새롭게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제1독서).

스바니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14-18ㄱ
14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5 주님께서 너에게 내리신 판결을 거두시고, 너의 원수들을 쫓아내셨다. 이스라엘 임금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니, 다시는 네가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16 그날에 사람들이 예루살렘에게 말하리라. “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17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18 축제의 날인 양 그렇게 하시리라.


바오로 사도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신자들에게 기뻐하라고 권고한다. 그가 늘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그 기쁨이 “주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주님께 감사하고 기도한다면 하느님의 평화를 맛보게 될 것이다(제2독서).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 4,4-7
형제 여러분, 4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5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6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7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대림 3주일, 자선주일이며, 장미주일 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맞기 위해서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려 준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저마다 자신의 위치에서 올바르게 살아가기를 바라신다(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0-18
그때에 군중이 요한에게 10 물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11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자, 13 요한은 그들에게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하고 일렀다.
14 군사들도 그에게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요한은 그들에게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일렀다.
15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16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17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18 요한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대림 제3주일 제1독서(스바니야 예언서 3,14-18ㄱ)

주님께서 보호하셨다' 이름 뜻을 지닌 '스바니야'서의 작중 연대를 1장의 머리글을 보면, 요시야 임금 통치 시절(B.C.640-609년)로 제시한다. 

한 세기 이상 고대 근동 전체를 호령하던 아시리아 대제국이 서서히 몰락해 가는 것을 보면서 유다 임금 요시야는 가나안의 바알 숭배와 아시리아의 천체 숭배를 근절하는 종교개혁을 단행한다(2열왕23,4-14). 이런 상황에서 스바니야 예언자는 주님의 권능이 온전히 드러나게 될 주님의 날을 선포한다.

스바니야서는 니네베의 파괴를 주님께서 하늘과 땅의 임금이심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계시한다. 스바니야서의 대부분은 요시야 임금의 통치 시절과 부합하지만, 일부 대목은 유배 이후의 상황을 반영한다.

예를들어, 오늘 독서의 예루살렘의 재건을 노래하는 마지막 대목 3장 14-20절은 이 책의 다른 대목보다 적어도 한 세기 이상 늦게 곧 6세기 말에 작성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스바니야서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부분(1,2-2,3)은 예루살렘의 주민들에게 보내는 경고의 신탁이다. 그들은 야훼 종교와 주변의 다른 다신교를 혼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야훼 하느님의 주권과 권능을 제대로 인정하지도 않고 거기에 존경을 표하지도 않았다. 

둘째부분(2,4-15)은 이스라엘 이외의 다른 민족을 거슬러 선포한 신탁이다. 주님의 주권은 사방의 민족뿐만 아니라 그들이 섬기는 모든 신들에게까지도 미친다. 

마지막 세째부분(3장)은 다시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관심을 집중한다. 먼저 예루살렘 주민을 대표하는 지도자, 통치자, 예언자, 사제들의 잘못을 고발함으로써 그 곳을 단죄한다(3,1-4). 대신과 판관들은 백성들을 착취하고, 예언자들은 거짓 예언으로 사람들을 속이며, 사제들은 종교 혼합주의로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짓밟는다.  

이런 예루살렘의 불의와는 달리, 하느님께서는 날마다 올바른 판결을 내리시는 공정한 분이시다(3,5).  

그분은 당신의 도읍인 예루살렘만은 당신을 경외하고 당신의 가르침을 받들거라고 기대했지만, 그들은 그분의 기대를 저버리고 빗나갔다(3,7). 그래서 그분은 뭇 민족과 더불어 당신의 백성도 없애 버리기로 작정하셨다(3,8-9).  

그러나 주님의 뜻을 받드는 적은 수의 겸손한 이들을 살아남게 하심으로써, 그들에게서 당신의 백성을 새롭게 일으키리라고 하신다. 이들이 바로 '남은 자들'이다. 

"나는 네 한가운데에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리니,그들은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리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그들 입에서는 사기치는 혀를 보지 못하리라.  정녕 그들은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으며, 풀을 뜯고 몸을 누이리라." (3,12-13) 

주님께서 친히 보살피시고 다스리시는 이 남은 자들을 통하여 주님의 도성 시온은 회복되고,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은 온 세상 민족들의 칭송을 받으며, 이름을 떨치게 될 것이다(3,16-20).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4) 

여기서 제시되는 '시온의 딸' '이스라엘' '예루살렘 딸' 모두 동격이다. '환성을 올려라' '크게 소리쳐라'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점층적 표현을 사용하여 그 기쁨을 매우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환성을 올려라' 해당하는 '란니'(ranni)의 기본형 '라난'(rannan)'소리내어 노래하다'는 의미를 가지며, 기쁨에 겨워 크게 소리내어 노래하는 것을 말한다. 

'크게 소리쳐라' 해당하는 '하리우'(hariu)의 기본형 '루아으'(ruah)'부르짖다', '외치다', '즐거이 부르다'등으로 번역되는데, 여기서는 부르짖듯 큰소리로 즐거이 노래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란 표현에서 사용된 '즐거워하여라'에 해당하는  '웨알레지'(wealezi)의 원형 '알라즈'(allaz) '기뻐 날뛰다','몹시 기뻐하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전쟁의 승리와 같은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인하여 잔치를 열거나 격렬하게 움직이면서 기뻐함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영어로 표현하면 'sing', 'shout out', 'Be glad and rejoice' 라는 점층적 표현을 쓸 수 있겠다.

본절에 사용된 이러한 점층적 표현은 하느님께서 가져다주실 선민의 복락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선민의 이러한 기쁨에 대한 세 단문처럼, 하느님의 기쁨에 대한 세 단문이 3장 17절 하반부에 점층적 표현으로 교차 대구를 이루며 나온다.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 하시리라." (17)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려 기뻐하시리라' 사실상 같은 개념으로 삼중적으로 강조해서 표현하고 있다.

이전에 하느님의 분노가 진노의 대상이었던 선민들이 완전히 용서받고 거룩하게 되어, 하느님의 사랑과 기쁨의 대상이 됨을 보여주고 있다. 

원문은 '그가 베푸는 그 사랑 안에서 스스로 만족하시고 기뻐하시며, 조용히 그 사랑을 향유하실 것이다.' 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드러낸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의 애틋함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크시면, 그 사랑에 스스로 빠져서, 만족과 기쁨으로 잠잠히 안식하실 수 있겠는가!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이보다 더욱 절실하게 나타내는 표현이 있을 수 있겠는가! 

전능하신 용사의 강한 이미지(17절 전반부)가, 그가 구원을 베푸신 그 자녀를 향한 어버이의 사랑으로 놀랍게 승화되고 있는 것이다(17절 후반부). 

이러한 선민에 대한 하느님의 그쁨을 묘사하는 표현은,결국 하느님의 선민에 대한 사랑의 깊이를 보여주면서, 한편으로는 장차 선민들이 하느님께로부터 흠없이 거룩하게 성화될 것임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영어로 하면 이런 의미일 것이다. "He will take great delight in you, he will rest(quiet) you with his love,  he will rejoice over you with singing." 

그리고 3장 16절 상반부에 선민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종말론적 심판과 구원의 날, 결정적인 '그 날' 반드시 도래할 것임을 강조하면서, 그 날을 바라보고, 주어진 현실 가운데에서 좌절하지 말고, 하느님께 대한 신앙으로 굳게 설 것을 권면함과 동시에 이를 통해 선민들을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너에게 내리신 판결을 거두시고,너의 원수들을 쫓아내셨다.' (15)

'주님께서 너에게 내리신 판결을 거두시고'란 표현은 주님의 사죄의 은총 나타낸다. 여기서 '거두시고'로 번역된 '헤씨르'(hesir)'제하다','제거하다'란 뜻의 동사 '쑤르'(sur)의 사역형이다. 이스라엘의 구원에 있어서 행하신 하느님의 주권적 역사를 '쑤르'란 동사를 사용하여 다시 한번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들 가운데서 '거만스레 흥겨워하는 자들을 치워 버리리라'(11절) 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을 두렵게 하는 형벌을 제거하기까지 하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그들의 구원을 가로막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완전히 제거하신다. 이러한 능력을 지니신 주님만이 진정하고도 완전한 구원을 이루실 수 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더 나아가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외부적 위협마저 철저히 제거하신다. 즉 이스라엘의 원수를 쫓아내시는 것이다. 

여기서 '판결'(형벌)은 주님께서 판결하여 내리시기로 결정하신 심판을 의미하며, '원수'란 심판의 형벌을 수행하기 위해 주님께서 모으셨던, 이방의 여러나라와 민족들(8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제 심판을 끝마치시고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 대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기 때문에, 더 이상 그들은 필요가 없게 되었다. 오히려 그들은 이 남은 자들에게 위해를 가할 소지가 충분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들을 쫓아내신 것이다. 

'힘 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16) 

'두려워하지 마라' 직설적인 표현에 이어,'네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간접적인 표현이 사용된다. '손을 늘어뜨린다' 하는 것은 절망이나 낙심의 상태를 묘사하는 히브리적 관용구이다(2사무4,1; 이사13,7; 예레6,24).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그들의 왕으로 계시기 때문에, 결코 두려워할 것도 그리고 낙심하거나 좌절할 일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전달한다.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그들의 왕으로 그들 앞에서 싸우실 것이기 때문에, 결코 어떤 대적과 어떤 전쟁에서도 그들은 패하지 않으며, 어떤 원수도 그들에게 해악을 끼치지 못하니,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17) 

'승리의 용사' 해당하는 '낍보르'(gibor)는 전투의 문맥에서는 '용사','전사' 언급하고 있다 (여호1,14; 6,2; 판관5,13; 2사무1,19 등). 그러나 이 단어가 하느님께 적용될 경우에는 단순히 '용사'를 언급하는데 그치지 않고, 모든 싸움에서 승리를 가져다 주시는 '전능하신 용사'라는 개념을 내포하게 된다. 

즉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전능하신 용사이심이 선포되고 있는 것이다(이사10,21). 그는 이러한 능력으로 그의 백성들을 모든 전투에서 구원하시며 승리로 이끄신다. 따라서 하느님의 백성은 어떤 역경 가운데서도 궁극적으로 안전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있다. 

'축제의 날인양 그렇게 하시리라. 나는 너에게서 불행을 치워버려, 네가 모욕을 짊어지지 않게 하리라.' (18)

새 성경의 번역이 좀 잘못된 것 같다. 여기서 선민은 '축제(절기)로 인하여 근심하는 자들' 묘사된다. 이것은, 이방인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던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신분의 제약으로 '축제'(절기)때마다 '축제'(절기)를 지켜야하는 장소였던 예루살렘에, 사실상 참여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할 것임 전제한다. 

이러한 이유때문에, 그들은 '축제'(절기)로 인하여 항상 근심하는 처지에 놓일 수 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불행'이요,'모욕'으로 표현), 본절에서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자들을 모으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주님의 구원이 선포되고 성취되는 그 날에, 그들은 그들의 거룩한 산 시온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며, 그곳에서 마음껏 주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쁨으로 축제(절기)를 지키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예언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느님의 회복의 역사로 인해, 그들의 어깨 위에 드리워진 모욕(치욕)의 짐은 벗어지게 될 것이다.



 


<회개>  송영진 모세 신부


"군중이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3,10-11)"


지금 세례자 요한이 하는 말은, 말로만(형식적으로만) 회개하지 말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회개를 하라는 뜻입니다. 죄를 뉘우치는 것만 회개가 아니라, 잘못된 삶을 고쳐서 바로잡는 일이 회개입니다.
전에 잘못한 일들은 바로잡아서 원상 복구시키고, 앞으로는 잘못하는 일들이 없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냥 말로만 "잘못했습니다." 라고 하고, 잘못된 일들을 바로잡지 않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는 '말'이 아니라 '삶'입니다.


예리코의 세관장 자캐오가 좋은 모범이 됩니다. 그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8)." 자캐오는 세관장이면서 부자였습니다(루카 19,2).
아마도 부정한 수입이 많았을 것입니다.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다는 그의 말은, 자기가 재산을 부정하게 모은 죄를 회개하면서 그 죄에 대한 보속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다는 말은, 자기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손해 배상을 하겠다는 뜻입니다.


(재산의 반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머지 반은 피해자들에게 내놓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제대로 회개하기 위해서 전 재산을 내놓은 것입니다.)


자캐오가 한 말에 대해서, "복음서에는 재산을 내놓겠다는 자캐오의 말만 있을 뿐이고, 그가 실제로 재산을 내놓았다는 말이 없다." 라고 시비를 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캐오가 말한 다음에 예수님께서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19,9)." 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에, 자캐오는 말하고 나서 즉시 자기의 말을 그대로 실천했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루카복음 18장에 있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를 지금 말하고 있는 내용에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 비유에 나오는 세리는 진심으로 회개하는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18,13-14)." 그 세리가 의롭게 되었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그 세리의 회개를 인정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셨다는 것은, 그 세리가 말로만 회개한 것이 아니라 '온 삶으로' 회개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그 세리가 기도하러 오기 전이나, 아니면 기도하고 돌아간 다음에, 자캐오처럼 자기가 잘못한 일들을 모두 바로잡고 피해자들에게 배상을 했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비유에 나오는 바리사이의 기도를 보면, 자기가 잘못한 일은 하나도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루카 18,11-12). 잘못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회개하지 않습니다. 회개하지도 않고, 자기가 잘한 일을 자랑하면서, "감사드립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교만'이고 '위선'입니다. 아마도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처럼만 살아라.", 또는 "나를 본받으면 된다." 라고 말하는 위선자였을 것입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에서 놓치면 안 되는 중요한 점 하나는, '회개'를 '회개'로 인정하는 것은 하느님(예수님)의 권한이라는 점입니다. 아무도 자기 마음대로 "나는 회개했다. 나는 용서받았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예수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 이것이 바로 고해성사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겁에 질려서 얼떨결에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즉시 회개했습니다(루카 22,62). (전승에 의하면 그는 평생 그 일을 생각하면서 괴로워했고, 그 일에 대해서 날마다 회개했다고 전해집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당신의 양들을 맡기신 일은(요한 21,15.16.17), 그의 회개를 인정해 주셨음을 나타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그의 회개를 인정하지 않으셨다면, 그에게 당신의 양들을 맡기지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죄를 짓고 나서 회개한 베드로 사도가 초대 교황이라는 점이 무척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죄를 경험해 본 사람이라서 다행이라는 뜻이 아니고, '회개' 라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은 사람이라서 다행이라는 뜻입니다.)


만일에 한 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그래서 회개할 일이 없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나처럼 살아라." 라고 말하는 위선자가, 또는 사람들의 나약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주 차갑고 냉혹한 사람이 교회를 다스리는 일이 생겼을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 사도가 잘못한 일은 잘못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의 회개'는 '그의 잘못'을 씻었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보지 않으시고, 우리의 회개만 보실 것입니다. 그러나 형식적으로 말로만 회개한다면, 이미 지은 죄에다가 새로운 죄를 더 짓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대림 제 3주일 장미주일 묵상 /기쁨/ 자비의 특별 희년


오늘은 전례의 전체적 색채가 장미색으로 가득한 장미주일입니다.

장미색은 기쁨을 상징하는데, 입당송, 본기도, 화답송, 독서와 복음 말씀은 한결같이 ‘기쁨’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대림 3주일에 이처럼 기쁨을 노래하는 이유는 다가올 성탄절과 예수님의 재림이 심판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이자 기쁨임을 미리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이런 오늘 로마의 바티칸 베드로 대성당에서는 자비의 성문이 성대하게 열립니다.

 ‘자비의 얼굴’이라는 회칙을 통해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부터 내년 그리스도 왕 대축일까지를 ‘자비의 특별 희년’으로 선포하셨는데, 2차 바티칸공의회 폐막 50주년을 맞는 바로 오늘 자비의 성문을 성대하게 여십니다.

 

교황님께서는 이 성문을 열면서 교회가 하느님의 자비를 세상에 선포하고, 모든 사람이 교회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할 수 있게 하자고 초대하십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입은 이들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자비를 그대로 보여주시는 자비의 얼굴이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워야 한다(루카 6,36)고 가르쳐 주시고, 또 그것을 실제 보여주셨습니다.

이 때문에 자비는 교회의 본질이며, 교회 생활의 토대입니다.

이처럼 자비의 성문이 열리는 오늘 세례자 요한은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3,11)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자신에게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라고 말하고,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고 알려 줍니다(3,13-14).

 마치 세상에서 자비를 어떻게 베풀어야 할지를 알려주는 듯합니다.

하지만 요한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자신보다 더 큰 인물이 올 것임을 사람들에게 알려줍니다.

자신과 달리 하느님의 자비를 온전히 가져다줄 분,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고,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 오신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 줍니다.

요한에 따르면 그분은 알곡을 당신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불에 태워버리십니다(3,16-17).
사실, 이 말은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 특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모두 알고 있던 말입니다.

다만, 자신들이 알곡이며, 이방인들이 바로 쭉정이라고 생각하며, 메시아가 오시면 그들을 불태워버릴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자비는 자신들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바에 따르면 하느님은 쭉정이 취급받던, 그래서 사람들이 하느님의 자비에서 제외될 것으로 여기던 그런 이들을 파멸하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은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이시며, 그들이 돌아올 때 따뜻하게 맞아주시는 자비로운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이 자비 때문에 이 땅에 오신 분이며, 하느님 자비의 얼굴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셨고, 제자들에게 그렇게 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지만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돌아온 탕자를 맞아들이는 아버지에게 불만을 터트리던 큰 아들처럼(루카 15,11-32), 예수님에게 불만을 터트리며 그분을 죽음으로 내몰아 버립니다.  정말 자비의 얼굴을 지니신 아버지의 얼굴을 닮지 못한 이들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들에게도 종종 발견됩니다.

자비의 성문이 활짝 열리는 오늘 자비가 진정 교회의 기초이자 본질임을 기억합시다.

우리 자신이 죄인이었다가 아버지께 돌아와 자비를 입은 이들이었음을 고백합시다.

그러면서 하느님 자비의 얼굴을 배워 다른 이들에게도 자비를 실천합시다(마태 18,23-35).

이렇게 우리 모두가 자비의 얼굴을 지니게 될 때 세상은 하느님 자비의 얼굴로 가득 차게 될 것이고, 참으로 기쁨이 흘러넘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장미주일인 오늘 우리 모두가 함께 기다리고 기억해야 할 바입니다.




대림3주일...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필리 4,5)

성탄을 준비하고 한해 마무리를 준비하는 때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이 시기를 보내야 할까요?


오늘 독서와 복음은
한결같이 두려워 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고
무조건 기뻐하고 기도하면서 감사하라고 하네요.
여기까진 네 알겠습니다 하겠는데...

다만 한 가지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게 하라네요.
자비럽고 너그러운 마음
그것을 다른 모든 사람이 알게 될 정도가 되려면 어찌 해야 할까요?

이번 한주간
더 너그럽고 더 자비롭게 살아봅시다.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이보다 더 중요한 준비가 없으니까요.

왜냐하면
성탄의 신비는 하느님의 자비와 선물을 경축하는 축제이기 때문이지요.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이 저에게도 보이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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