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예수님의 탄생 (루카 2,1-14)

오늘은 예수 성탄 대축일입니다. 이 밤은 더없이 소중하고 상서로운 밤! 하느님의 아드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시어, 어둠 속에 살고 있는 이들을 생명과 구원으로 이끌어 주시는 밤입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맞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합시다.
이사야 예언자가 노래하는 메시아에 대한 희망은 훌륭한 임금에 대한 기대에서부터 발전해 왔지만,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강력한 정복자가 아니라 전쟁과 억압을 없애는 평화의 군왕이다.(이사야 9,1-6)
1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 2 당신께서는 즐거움을 많게 하시고, 기쁨을 크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당신 앞에서 기뻐합니다, 수확할 때 기뻐하듯, 전리품을 나눌 때 즐거워하듯.
3 정녕 당신께서는 그들이 짊어진 멍에와, 어깨에 멘 장대와, 부역 감독관의 몽둥이를, 미디안을 치신 그날처럼 부수십니다.
4 땅을 흔들며 저벅거리는 군화도, 피 속에 뒹군 군복도, 모조리 화염에 싸여 불꽃의 먹이가 됩니다.
5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운 경륜가, 용맹한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라 불리리이다.
6 다윗의 왕좌와 그의 왕국 위에 놓인 그 왕권은 강대하고, 그 평화는 끝이 없으리이다. 그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공정과 정의로 그 왕국을 굳게 세우고 지켜 가리이다. 만군의 주님의 열정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티토서는 모든 이를 구원하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다고 전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고 깨끗하게 하시어 당신 백성이 되게 하셨다.( 티토 2,11-14)
사랑하는 그대여, 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12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줍니다.
13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우리를 그렇게 살도록 해 줍니다. 14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어,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해방하시고 또 깨끗하게 하시어,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의 일을 전하는데,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린다. 예수님의 탄생은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이다.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태어난 구세주시기 때문이다.(루카복음 2,1-14)
1 그 무렵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서 칙령이 내려, 온 세상이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다. 2 이 첫 번째 호적 등록은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실시되었다. 3 그래서 모두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본향으로 갔다.
4 요셉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올라갔다. 그가 다윗 집안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5 그는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갔는데,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6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 날이 되어, 7 첫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8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 9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10 그러자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11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12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13 그때에 갑자기 그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하였다.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예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제1독서 (이사9,1-6)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운 경륜가, 용맹한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라 불리리이다."(5)
이사야서 9장 1절에서는 어둠 속을 걷던 백성에게 큰 빛이 비춰질 것이 예언되었고, 이사야서 9장 2-4절에서는 전쟁과 압제가 종식되고 기쁨과 즐거움이 임할 것이 예언되었다.
이제 이사야서 9장 5-6절에서는 이 모든 빛과 기쁨과 즐거움을 가져올 메시야의 탄생과 통치가 예언되고 있다. 이사야서 9장 5절의 문장이 이유 접속사 '키'(ki; for)로 시작된다는 것은 앞서 제시된 빛과 기쁨과 즐거움이 바로 메시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실상 완벽한 어둠의 퇴치와 전쟁과 압제의 종식, 그리고 기쁨과 즐거움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메시야를 통해 가능한 것들이다.
이런 것들을 볼 때 이사야서 9장 1-4절의 예언이 궁극적으로는 신약 시대의 메시야 강생 이후에 이루어질 영적 측면의 예언이라는 사실을 이사야서 9장 5절이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에 해당하는 '라누'(lanu)는 전치사 '레'(le)에 1인칭 복수 접미어가 붙은 형태이다. 전체사 '레'(le)는 '~에게'로 번역되어 목적어를 이끌수도 있고, '~을 위해'로 번역되어 목적 그 자체를 나타낼 수도 있다.
따라서 '라누'(lanu)는 '우리에게'(to us)로 번역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for us)라는 의미도 함유하고 있다. 즉 '라누'(lanu)는 한 아기가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태어날 것을 암시하며, 그 아기가 이스라엘의 영적 이익을 위해 태어날 것을 암시한다.
전자는 이 예언이 주어진지 7백여년 이후 예수님께서 유다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으로 성취되었으며(미카5,2; 마태2,1-11; 루카2,11), 후자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목적과 관련된다(마태1,21; 루카1,33).
그리고 '한 아기'에 해당하는 '옐레드'(yelled; a child)는 '낳다'라는 의미의 동사 '얄랴드'(yallad)와 동일한 어근을 지닌 명사로서 '낳은 것', '태어난 것'이라는 의미이다.
주님께서 당신 백성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시고, 전쟁을 없애시며 평화를 주시기 위해 보내실 메시야는 사람의 아기로 태어날 것이라는 사실이 바로 '옐레드'(yelled)에 예언되어 있다. 이것은 메시야가 육화(강생)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영원으로부터 살아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이신 성자께서(요한1,1; 필리2,6)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태어나실 것이며, 신성(神性)을 지닌 존재이지만 육화(강생)을 통해 인성(人性)까지 취하실 것을 드러낸다.
그리고 '옐레드'(yelled)라는 단어는 메시야가 어떤 방식으로 구원을 이룰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 구원자는 압제자의 멍에를 부수고 무서운 전쟁을 종식시킴으로써 그 백성들에게 영원한 평화와 기쁨을 주실 것이지만, 압제자보다 더 무서운 모습으로 오시지 않는다.
마치 아기와 같이 아무런 힘도 없고(이사야53,7; 1베드2,23) 온유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오셔서(마태11,30) 온유와 겸손, 자기 희생으로 악의 세력을 무장 해제하시고, 그 백성들에게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 주실 것이다.
또한 '태어났고'와 '주어졌습니다'에 해당하는 '율라드'(yullad; is born)와 '닛탄'(nithan; is given)은 각각 강조 수동형과 단순 수동형 동사이다.
특히 여기에서 '율라드'(yullad)는 인간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메시야가 태어나게 되었음을 보여주며, '닛탄'(nithan)은 그 아들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주 하느님께서는 그 메시야를 인간의 아기로 육화하게 하시는데, 아무런 대가없이 다만 그 백성의 구원을 위해 선물로 주신 것이다.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이고'
'왕권'에 해당하는 '함미스라'(hammisrah; his goverment)는 구약에서 본절과 6절에서만 두 차례 사용될 뿐 다른 용례가 없는 단어로서 '통치권'을 의미한다. 즉 장차 태어나실 메시야는 통치자의 권한을 부여받으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것은 주님의 부활, 승천 후에 완전히 성취된다(필리2,9-11).
'그의 이름은 놀라운 경륜가'
원문은 '셰모 펠레 요에츠'(shemo pelle yoets)인데, '셰모'(shemo; his name)에서 '이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솀'(shem)은 단순히 부르는 호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과 속성을 의미한다. 즉 장차 오실 메시야의 본질과 속성을 그 이름을 통해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놀라운'에 해당하는 '펠레'(pelle; wonderful)은 인간의 경험과 이성으로 불가해한 기이하고 놀라운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이사29,14; 시편119,129). 이것은 메시야께서 경륜의 영을 부여받은 분이며(이사11,2), 인간의 지혜를 뛰어 넘어 그의 구원사업을 감당하실 것임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요에츠'(yoets; councelor)라는 것은 그가 백성들의 직면한 삶의 모든 문제들을 그 지혜로 해결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다른 보호자', 즉 '다른 상담가'(another Councelor)라는 사실(요한14,16)과 관련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상담가'(original Councelor)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에게 찾아오셔서 누구도 답할 수 없는 가장 본질적인 인생의 문제들, 곧 죄의 문제, 죽음의 문제를 진리의 말씀과 당신 몸을 온전히 희생하시는 인류 구원사업을 통해 해결해주셨다. 그야말로 그는 놀라운 상담가로 불릴 수 있는 참되고 유일한 분이시다.
'용맹한 하느님'
원문은 '엘 낍보르'(el gybbor; Mighty God)인데, 이사야서 10장 21절에도 '용맹한 하느님'으로 나오지만, 전능하신 하느님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되심은 그의 신성과 인성의 공존에 전적으로 달려있는데, 본절의 '아기'라는 단어에 그의 인성이 나타나 있다면, 여기의 '하느님'('엘'; el)이라는 단어에는 그의 신성이 표현되어 있다.
'영원한 아버지'
원문은 '아비아드'(abiad; Everlasting Father)는 구약에서 여기에서만 유일하게 사용된 단어이다. 이것은 '아버지'(창세19,31)를 의미하는 명사 '아브'(ab)의 연계형에 '영원'(1역대28,4)이라는 의미의 명사 '아드'(ad)를 결합시킨 복합어로서, 그 존재가 영원한 아버지이심을 의미한다.
근동지방에서는 '아버지'란 말이 육친(肉親)의 아비도 나타내지만 보호자란 의미로도 사용된다. 따라서 고대 근동의 임금들은 자기 백성들에 대해서 스스로 아버지라고 칭했으며, 심지어 포로들한테도 자신의 아버지됨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됨은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니고 임시적인 것이다.
여기서 이사야 예언자가 장차 오실 메시야를 가리켜 영원히 존재하시는 아버지라고 칭하는 것은 메시야께서 구원하실 자들을 지으셨으며, 새롭게 창조하실 창조주이시며(요한1,3 ; 2코린5,17), 그를 통해 구원받을 자들에 대한 영원한 보호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즉 부성적 사랑으로 영원토록 변치 않고 백성들을 양육하고 인도하실 것임을 보여준다.
'평화의 군왕'
원문은 '사르 샬롬'(sar shallom; Prince pf Peace)에서 '군왕'에 해당하는 '사르'(sar)는 원래 중앙의 임금이 지방의 위임 통치를 위해 임명한 위임 통치자, 총독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장차 오실 메시야가 하늘의 임금이신 주님에 의해 이 땅에 위임 통치자로 오실 것을 암시한다.
여기서 '평화'라는 용어를 덧붙인 것은 그 위임 통치자가 '평화'가운데 오셔서 '평화'를 확립하실 것임을 보여준다. '평화'에 해당하는 '샬롬'(shallom)은 전쟁이 없는 상태, 평화로운 상태는 물론이거니와 한걸음 더 나아가서 개인과 공동체에 필요한 모든 것이 충족된 이상적 상태를 의미한다.
메시야는 하느님과 원수되었던 인간을 그와 화해하게 하시는 왕으로 이 땅에 오셨다(로마5,10; 에페소2,13-17).
이 땅에는 전쟁과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지만, 그가 가져오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이 지상적 평화마저도 완전해져서 다시는 싸움이나 반목이 없으며 모든 것이 충족되어 완벽한 상태에 이를 것이다.
주일과 대축일에 사도신경을 외울 때, 특별히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3월 25일)과 오늘 성탄 대축일에 우리는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에서 고개를 숙여 깊은 절을 합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이때 무릎을 꿇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다는 엄청난 신비 앞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흠숭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득, 이 무릎 꿇음과 성지 주일이나 성금요일 수난 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는 단락에서 무릎을 꿇는 것이 겹쳐집니다.
전례상으로는 특별히 이 둘을 연결 지으려는 의도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분명 깊은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제사만이 아니라 그분의 태어나심은 이미 ‘주어짐’입니다.
영원히 살아 계시는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이미 죽음을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누리시려고 인간이 되시고 세상에 태어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온전히 주어지시려고 태어나십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그렇게 태어나신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오늘 사도신경을 바치며 드리는 깊은 절은, 우리를 위하여 ‘주어지신’ 분께 드리는 흠숭과 경배이며 또한 감사입니다.
예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복음 (루카 2,1-14)
"그 무렵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서 칙령이 내려, 온 세상이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모두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본향으로 갔다. 요셉도 갈릴레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틀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올라갔다. 그가 다윗 집안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1.3~4)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 날이 되어, 첫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6~7)
레위기 25장 10절,13절을 보면, 이스라엘 각 지파가 하느님께로부터 상속받은 땅은 영원한 것이었으며, 특히 희년에는 각각 자신의 땅과 가족에게로 돌아가야했다. 이런 구약의 전통이 로마 통치 하에 이루어졌던 유대인들의 호적 관습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호적을 위해 모든 유대인들을 각각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한 것은 유대인들의 관습인 것이다.
이런 유대인들의 전통과 관습을 이용해 로마 황제는 각각 자기 출생지 혹은 고향에서 호적 등록을 하도록 영을 내렸던 것이다. 참고로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후로 로마 제국은 정기적으로 인구 조사를 했는데, 이것은 일차적으로 세금 징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요셉이 다윗의 동네인 베틀레헴으로 감으로써, 그가 다윗의 자손이며 유다 지파인 것이 다시 한번 증거되고, 메시아 탄생의 장소에 관한 미카 에언서 5장 2절의 말씀이 성취되게 된다.
이 모든 것을 볼 때, 표면상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지만, 세상의 모든 역사와 구원을 주관하시고 계획하시고 섭리하시고 안배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심을 보여준다.
우리가 보고 체험하는 눈앞의 현실과 이 인간사(세속사)가 암울하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위에, 그 모든 것 안에 하느님께서 관통하고 계시며 구원의 역사로 만들어 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
한편, 루카 복음 1장 7절에서 '첫아들'로 번역된 '프로토토콘'(prototokon; firstborn)의 원형 '프로토토코스'(prototokos)는 신약성경에서 8회 나온다.
이것은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콜로1,15), '모든 인류보다 뛰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장자성'(로마1,15), '죽은 자들 가운데 먼저 나신 자로서 모든 성도들이 따르게 될 부활의 원형'(콜로1,18; 묵시1,5; 1코린15,23), '모든 성도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본받아야할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는 맏아들'(로마8,28~29)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단어이다.
반면에 '독생자'로 번역된 '모노게네스'(monogenes)라는 단어도 있는데, 예수님만이 영원으로부터 계신 진정한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며 육화하신 유일한 구원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명칭 가운데 '첫아들'(맏아들)로 번역된 '프로토토코스'는 다른 인간과의 공통점을 강조한다면, '독생자'로 번역된 '모노게네스'는 다른 인간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강조점이 다르다.
문제는 개신교의 관점이다. 개신교는 이 '프로토토코스'라는 '첫아들'의 의미가 그 뒤로 둘째, 세째 등등 줄줄이 자녀들이 더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성모님의 '평생동정성'교리를 부정하는 근거로 이 단어를 든다.
예수님의 '형제들'(adelphoi)이란 복음의 표현이 희랍어로는 사촌 형제들을 의미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모님의 평생동정성을 부정하는 근거로 삼듯이 말이다.
우리 가톨릭은 2,000년동안 성모님의 <평생동정성>교리를 신덕도리(믿을교리)로 지켜왔다.
예수님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수태하기 전에도(출산 전에도), 출산시에도, 출산 후에도 평생 동정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개신교는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자신들이 성모님의 '평생동정성'을 목숨을 걸고 부정해서 얻는 게 무엇인가? 그들은 자신들의 대처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성모님에 관한 교리에 매스를 대었다.
과연 성모님께서 예수님 다음으로 자녀들이 있었다면,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실 때 유언으로 성모님을 당신 동생들에게 안 맡기시고, 왜 사도 요한에게 맡기셨는지 해명을 해야 한다(요한19,26).
성모님께서 성삼위의 특은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고 순결하게 되는 데에 영육간에 자신들이 손해 볼 일이 무엇이 있는가? 그리고 '구유'라고 번역된 '파트네'(phatne; manger)는 가축의 먹이를 넣어주는 여물통이다.
당시 팔레스티나의 작은 가옥은 하나의 큰 방으로 되어있는데, 돋우어진 부분과 낮은 부분 둘로 구분되어 있다. 이 낮은 부분이 가축들이 사는 곳이며, 그곳에는 대개 돌로 다듬은 여물통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보다 큰 집에는 마구간(stable)이 사람사는 거주 공간과 떨어져 있기도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아마 이러한 곳에서 태어나셔서 구유에 누이게 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초대 교회의 성 유스티노 순교자는 예수님께서 태어난 곳을 동굴(cave)로 보았다. 그래서 A.D. 330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베틀레헴에 있는 동굴에 예수 탄생 기념 성당을 세웠다. 그 당시 동굴을 동물의 우리로도 사용했다는 점에서 볼 때, 예수님께서 태어난 마구간 역시 동굴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여관'(inn)이라고 번역된 '카타뤼마티'(katallymati)의 기본형 '카탈뤼마' (katallyma)는 여행 중인 사람이나 짐승의 짐을 푸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 '카탈뤼오'(katallyo)에서 온 명사이다. '그들이'라고 번역된 '아우토이스'(autois; for them)는 어떤 것의 수혜자를 의미하는 여격으로 요셉과 마리아를 가리키고 있다.
말하자면, 갓난 아이를 돌볼 특별한 장소 뿐만 아니라 요셉과 마리아가 거할 장소조차도 없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들어갈 자리'로 번역된 '토포스'(topos)는 '있을 곳' 즉 여유 공간(room)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그들이 여관을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은 아마도 호적을 하러 모인 사람들로 가득 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왕되신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왕으로서의 족보를 제시하며 동방박사의 축복을 받는 것을 기록했고, 요한 복음사가는 하느님의 아들되신 예수님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님의 선재(先在; logos말씀의 선재성)을 밝힘으로서 자신의 복음서를 시작한다.
그러나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마구간 출생과 구유에 놓인 비천한 모습을 상세히 기록함으로써 하느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께서 얼마나 낮고 천한 인간으로 오셨는지 그 겸손과 고난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루카9,58).
우매한 동물의 냄새나는 마구간, 동물의 먹이통(여물통)인 구유에 누워 계신 구세주, 만왕의 왕, 하느님의 아드님을 상상할 수 있는가?
베틀레헴이라는 말 자체가 '빵의 집'이라는 뜻이지만, 동물의 여물통에 누워 계신 주님께서는 바로 우리 죄많은 인간들을 살리시기 위해 먹히는 먹이(음식; 밥; 성체)가 되어 오신 분이 아니신가!
필리피 서간 2장 6~8절에 계시된 대로 하느님 아버지와 본질이 같으신 분이 이렇게 철저히 낮아진 극도의 자기비하(kenosis)와 겸손을 보여주신 의미는 무엇인가?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그리스도의 복음 활동이 이처럼 소외되고 낮은 자들에게 미치며, 참으로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자들도 다 품어 주시는 사랑을 드러내시는 것이 아닌가?
무죄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사명인 인류 구원 사업이라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골고타 산상에서 좌도와 우도의 죄인들사이에 십자가에 못박힌채 매달려 모든 피와 물을 소진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지상 생활의 시작과 끝을 깊이 묵상해야 당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풀린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품위를 신적 품위로 들어 올려주시고 당신의 신성에 참여시켜 주신다.
예수님의 구원사업이 게승되는 성사적인 인간 집단인 교회도, 그 구성원인 우리들도 영성적으로 어떻게 가난하고 비천하게 살며, 모든 비천하고 가난하고 낮은 자들을 품어 안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탄생> 송영진 모세 신부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루카 2,7ㄴ-ㄷ)."
아기를 구유에 뉘었다는 말은, 예수님을 외양간에서 낳았다는 뜻입니다.여관에는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는 말은 빈 방이 없었다는 뜻인데,돈이 있었지만 방을 구할 수 없었음을 나타냅니다.(인간 세상에는 아기를 낳을 곳이 없었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는 그들이 너무 가난해서 방을 구하지 못했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분명히 요셉은
마리아를 위해서 미리 돈을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상적인(일반적인) 가격으로는 방을 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남들보다 더
많은 돈을 지불했다면 방을 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요셉에게는 그렇게 할 만한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웃돈을 줄
형편이 안 되어서 방을 구하지 못한 것이 되고, 따라서 방이 없었다는 말에는 돈이 없었다는 뜻도 조금은 들어 있는 셈이
됩니다.)
방을 구하지 못해서(방을 빌려주는 사람이 없어서) 외양간으로 가야만 했던 일을, 인간 세상이 메시아를 거부한 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 이 말은, 원래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가리키는 말인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태어나실 때부터 시작된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성탄절만 되면 설치하는 구유와 트리는 요셉과 마리아가 실제로 겪은 상황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안 어울리는, 너무나도 화려한 장식물입니다. 물론 우리의 신앙과 기쁨을 표현한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소박하게 꾸미는 것이 옳습니다. (부자들만 갈 수 있는 호텔과 백화점 같은 곳에 설치되어 있는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들을 볼 때마다, 저게 예수님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당시에 베들레헴에 먼저 가서 여관방을 차지했던 사람들은 아마도 이렇게 변명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 아기가 메시아라는 것을 몰랐다.아무도 그 아기가 메시아라는 것을 알려 주지 않았다." 몰랐다는 것이 그들의 죄는 아니지만, 가난한 산모를 외면한 것은 그들의 죄입니다. 아기가 메시아든지 아니든지 간에...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에서 바로 그것을 분명하게 지적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
그 당시에 베들레헴에서 방을 구하지 못해서 외양간으로 가야만 했던 사람이(산모가) 마리아뿐이었을까? 아니면 더 심하게, 외양간도 구하지 못해서 그냥 들판에서 노숙한 사람은 없었을까? 방은 그렇다 치고,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서 굶어야만 했던 사람은 없었을까? 있었다면, 요셉과 마리아가 겪은 것보다 더 심한 고난을 겪었을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도시라는 명예는 얻었지만, 가난한 예수님과 성가정을 외면한 도시라는 불명예도 얻었습니다.
오늘날의 인간 세상은 어떤가? 성탄절에 더 서러워지는 사람들에게 지금의 교회는 어떻게 보일까?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루카 2,8-9)."
'들에 살면서' 라는 말은, 들판에서 '야영을 하면서', 또는 '노숙을 하면서' 라는 뜻입니다. 이 말에서,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면서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지금 이 땅의 가난한 노동자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소외계층 사람들의 모습도,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해도 힘이 없어서 어떻게 하지 못하고 참아야 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사람들이 거부해서 외양간으로 가셔야만 했던 예수님의 탄생 소식이 들판에서 야영(노숙)하고 있는 가난한 목자들에게 가장 먼저 전해졌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고,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자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마태오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 소식이 헤로데 왕과 고위층에게 먼저 전해진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들은 그 소식을 듣고 기뻐하기는커녕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목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분명히 목자들은 고위 권력자들보다 더, 사제들이나 율법학자들보다 더 간절하게 메시아(구원자)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목자들에게 먼저 기쁜 소식이 전해진 것은 당연한 일인데, 사실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이기 때문에, 목자들에게 먼저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는 것은 사실은 목자들이 먼저 기쁜 소식을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부자들을 '역차별' 하신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먼저 찾아서 얻은 것입니다.
목자들이 들은 소식은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루카 2,10)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을 주셨으니 온 백성이 기뻐했어야 했는데, 기뻐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뿐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에서 기쁨을 찾지 않고, 다른 것에서, 즉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에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안 받아서 못 받는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