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9일다해 대림1주일] 깨어 기도하라 (루카 21,25-28.34-36)

2015. 11. 28. 오후 6: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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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9일 다해 대림1주일]  깨어 기도하라  (루카 21,25-28.34-36)


오늘은 전례력의 한 해가 시작되는 대림 제1주일입니다. 대림 시기는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리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려고 준비하는 때입니다. 희망을 품고 주님을 기다리며,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알아뵐 수 있도록 깨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에게 영원한 왕조를 약속하셨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유다 왕국의 멸망을 예고하면서도, 훗날 주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어 주시리라고 전한다. 다윗의 후손이 세상에 공의와 공정을 이룰 것이다.(제1독서 예레미야 33,14-16)
14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에게 한 약속을 이루어 주겠다. 15 그날과 그때에 내가 다윗을 위하여 정의의 싹을 돋아나게 하리니, 그가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룰 것이다. 16 그날에 유다가 구원을 받고 예루살렘이 안전하게 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는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라고 권고한다. 우리는 이미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으니, 하느님 앞에 흠 없이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제2독서 테살1서 3,12ㅡ4,2)
형제 여러분, 12 여러분이 서로 지니고 있는 사랑과 다른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도, 여러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처럼 주님께서 더욱 자라게 하시고 충만하게 하시며, 13 여러분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시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재림하실 때, 여러분이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흠 없이 거룩한 사람으로 나설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아멘.
4,1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끝으로 우리는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당부하고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있는지 우리에게 배웠고,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욱더 그렇게 살아가십시오. 2 우리가 주 예수님의 권위로 여러분에게 지시해 준 것들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나타날 표징들을 알려 주신다. 그날이 갑자기 닥치지 않도록 늘 깨어 기도해야 한다(루카복음 21,25-28.34-3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5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26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27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28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35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36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대림 제1주일 제1독서 (예례33,14-16)


"그날과 그때에 내가 다윗을 위하여 정의의 싹을 돋아나게 하리니, 그가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룰 것이다." (15)

예레미야서 33장 1~13절은 경비대 울안에 구금된 상태에 있는 예레미야를 향하여 하느님께서 심판을 경유한 이후 회복의 은혜를 베푸시겠다는 예언이 주어진 사실이 제시되었다.

이제 이어지는 33장 14절~26절은 한걸음 더 나아가 회복된 선민위에 세우실 다윗 왕가레위 지파 사제직도 회복될 것이란 첫번째 약속을 제안한다. 이것은 미래의 메시아 왕궁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되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히 15절과 16절예레미야서 23장 5절과 6절의 메시아 예언과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와같이 이스라엘 자손의 고향땅으로의 회복에 대한 예언이 주어지고 있는 맥락에서, 미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될 메시아 왕궁에 대한 예언이 주어짐으로써, 주님의 구원 역사가 단순히 바빌론 포로에서 해방시켜 고향땅으로 귀환게 하는 정치적 차원에서 멈추지 않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영혼을 구원하게 하는 영적 차원까지 확장되어 나간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제 예레미야서 33장 15절이하 17절에서는 그날에 이루어질 다윗 혈통의 한 정의의 싹 통한 다윗 왕가의 영원한 이스라엘 왕권 회복이 예언된다. 여기서 말하는 다윗은 역사적 인물 다윗이 아닌 다윗의 계보를 의미한다. 역사적 인물인 다윗은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윗의 계보에서 나온 정의의 싹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계보에서 난 사실을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는 표현으로 부각시켰고(마태1,1). 사도 바오로'그분께서는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고' 라는 표현으로 강조하였다(로마1,3).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육신적 의미로 국한하여 이해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의 권능을 통해 잉태되시어,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셨기 때문이다(이사7,41; 마태1,18-25). 따라서 이것은 구약 시대에 주님을 대리하는 통치자로서 가장 이상적이었던 다윗 왕의 통치를 계승하여  그것을 완성시킬 왕으로 오신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정의의 싹'으로 표현된다. 여기서 '정의의'에 해당하는 '체다카'(tsedaqah)라는 표현은 본절 15절과  이어지는 16절에서 명사형으로 다시 사용되고 있다. 이 '체다카''올바름', '공의', '공정', '의로움', '합법성' 등의 의미로 사용되는 표현으로서, 하느님의 대표적인 속성이기도 하다(신명9,4; 판관5,11). 이것은 일차적으로 다윗의 계보에서 오는 왕이 합법적인 정통성을 지닌 왕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남부 유다 왕국의 말기에는 역사의 질곡으로 인하여 적법한 절차에 의해서  정통적 있는 인물에게 왕위가 넘어가지 못한 경우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엘야킴(여호야킴 ;2열왕23,34)과 남부 유다의 마지막 왕인 치드키야가 그러하다. 이들은 직계 혈통으로 왕위를 계승한 자들이 아니었다.

또한 왕위가 자체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외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남부 유다 말기의 몇몇 왕들은 정통성이나 합법성에 있어서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장차 오실 '정의의 싹'은 이러한 왕들과 전혀 다른 정통성있고 적법한 왕 될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는 과거의 모든 왕들과 달리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하실 왕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가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룰 것이다'  주님께서 계약 백성에게 보내실 메시아는  구약 시대 이스라엘의 열왕들과 전혀 다른 완전한 왕이 될 것이다. 그들 모두가 이루지 못했던 것을 온전히 이루며, 실패했었던 것을 성공으로 이끌 것이다. 여기서 '공정'과 '정의'는 모두 하느님의 속성이다.

메시아의 통치는 이방의 왕들이 다스리는 것과는 달리 인간의 통치가 아니라  하느님의 통치하심을 구현하는 것이 될 것이라는 선언인 것이다. 메시아의 다스림은 하느님의 다스림이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본문의 표현에는, 정치적으로 합당한 결정이 내려지고, 사법적으로 정의로운 판결이 내려진다는 의미를 넘어서서, 모든 사람의 안정과 평화를 보장하는 다스림이 실행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또한 치드키야가 그러했던 것처럼,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방향으로 하느님의 백성들을 이끌어서,결국은 그들을 파멸시켰던 것과는 달리, 하느님께로부터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방향으로 이끌어간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본문에서는 이러한 공정과 정의의 실현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언급한다. '세상'으로 번역된 '빠아레츠'(baaretz) '이 땅'(in the land)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남부 유다 왕국의 지경을 나타내는 표현인데, 정관사 '하'(ha)가 결합된 형태로 이것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곳에서 지금까지 불법과 불의가 판을 치고 악이 횡행했기 때문이다.

본문은 그러한 절망과 고통의 땅이 메시아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공정과 정의가 구현되는 복된 땅이 될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더욱 확대 해석한다면,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재림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이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고,온 세상이 공정과 정의가 구현되는 종말론적인 상황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대림 제1주일 복음 (루카21,25-28. 34-36)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침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27~28)

루카 복음 21장 27절예수님의 영광스런 재림을 직접적인 어휘로 묘사하고 있다. 루카 복음 21장 25절과 26절종말에 두려워 떨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묘사한 반면에, 21장 27절그리스도께서 권능과 큰 영광으로 오시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사실 21장 27절다니엘서 7장 13절과 14절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구절로서 '사람의 아들'(인자,人子)의 재림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특히 이 모습은 승천하신 예수님의 모습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사도1,9~12), 하늘로 올라가실 때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재림 때에도 동일하게 재현될 것임을 보여 준다. 한편 루카 복음 21장 28절'이러한 일들'로 번역된 지시 대명사 '투톤'(tuton; these things)이 무엇을 가리키는 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많은 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나타나는 우주적 징조를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재림 시기의 정확한 때와 시간을 알 수 없지만, 말씀에 예언된 나타나는 징조들을 통해 그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재림의 시간에는 사람들이 극단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일텐데, 그것은 그 재림의 날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벌에 처해지는 두려움과 고통의 날이 될 것이며, 믿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는 완전한 기쁨의 날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사람들에게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로 권고하신다. 이 표현은 공관 복음의 병행 기사에서 루카 복음에만 나온다.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직접 천사를 보내어 선택하신 이들을 모으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이 나온다(마태24,31; 마르13,27). 이러한 차이는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사가가 마지막 날에 하실 예수님의 일을 중심으로 기록하였고,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들을 중심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말하자면,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사가의 시선은 하늘에 있었고, 루카 복음사가의 시선은 땅에 있었다. 루카 복음사가가 이렇게 기록한 것은 특별히 예수님을 따름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는 이들에게 용기와 격려를 주기 위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허리를 펴고'라는 뜻으로 번역된 '아나큅사테'(anakypsate; stand up)의 원형 '아나큅토'(anakypto)'스스로 일으키다','치켜 올리다'는 뜻이다. 그러나 비유적으로는 사람의 정신이나 원기'돋우어주다','고무시키다'는 뜻도 있다. 그리고 '들어라'로 번역된 '에파라테'(eparate; lift up)의 원형 '에파이로' (epairo)는 자신의 신체의 일부, 즉 '손'(1티모2,8)이나 '머리'등을 '높이 들어올리다'는 뜻이다.

따라서 세상의 마지막 때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징조를 볼 때, 신앙인들은 머리를 들고 그 징조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주님의 재림의 때를 기다리라는 것이다. 

믿지 않는 이들은 세상의 마지막 때에 두려움으로 숨을 곳을 찾게 될 것이지만,신앙인들은 그 때에 세상의 모든 것에 미련을 두지 말며 세상적인 관심을 내려놓고, 오로지 도래할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며, 새롭게 펼쳐질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대하고 희망을 가지라는 말씀이다.


대림1주일

<대림 시기> 송영진 모세 신부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이러한 일들'은 재림 전의 여러 가지 표징들입니다(루카 21,25-26).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라는 말씀은 "믿음과 희망을 가져라." 라는 뜻입니다. ("기뻐하여라."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드는 것은 '자유인'의 자세입니다.즉 해방된 사람의 모습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숙이는 것은 노예들과 죄인들의 자세입니다.) 

이 말씀은, 복음서 안에서는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대림 시기를 맞이한 우리는 예수님의 강생(탄생)에 관한 말씀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재림에 관한 말씀으로 읽을 때에는, '속량'이 가까워졌다는 말은 구원과 해방의 '완성'이 가까워졌다는 뜻입니다. 강생에 관한 말씀으로 읽을 때에는,구원과 해방이 이제 '시작'되었다는 뜻으로 읽게 됩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구원의 시작이고, 예수님의 재림은 구원의 완성입니다.) 

'속량'이라는 말은 우리가(인류 전체가) 노예 상태에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죄와 죽음의 지배를 받고 있는 노예라는 것.) 예수님은 노예로 살고 있었던 우리를 해방시켜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세주'이신 분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것은 '해방된 삶'을 시작하는 것이고, 종말과 재림은 이 해방이 완성되는 때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은 해방을 얻은 자유인의 생활이기도 하고, 해방과 자유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이기도 합니다. 

'속량'이라는 것은 '몸값을 받고 노예를 풀어주는 일'(몸값을 내고 노예 상태에서 풀려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몸값을 내신 분입니다. (그 몸값은 예수님의 목숨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몸값을 받은 자는 누구인가? 앞에서 우리가 죄와 죽음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고 말했으니, 그 '죄와 죽음'이라는 것이 몸값을 받은 셈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은 죄와 죽음을 무력화시킨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써 죄와 죽음을 정복하셨고, 죄와 죽음에 대해서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죄와 죽음은 예수님 앞에서 패배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죄와 죽음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점에서도 해방과 자유는 아직은 미완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대림 시기가 시작되는 이 시점에서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묵상해야 합니다. 승리자이신 예수님과 패배자인 '죄와 죽음' 사이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는 대림 시기에도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대림절은 단순히 성탄절을 준비하는 시기가 아닙니다. "나는 지금 예수님께서 주신 자유와 해방을 얼마나 누리고 있는가? 이 자유와 해방의 완성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또는 "승리자이신 예수님 편에 서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또는 "'이미' 패배했지만 아직도 우리 가운데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죄와 죽음'이라는 것을 물리치는 싸움을 얼마나 잘하고 있는가?"를 특별히 점검하는 시기입니다. (물론 평소에도 늘 해야 하는 일입니다.) 

승리자이신 예수님 편에 서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도 '죄와 죽음'이라는 것과 싸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쪽에서는 이미 이긴 싸움입니다. 그러나 우리 각 개인의 입장에서는 아직도 진행 중인 싸움입니다. (전쟁의 승패는 확정되었지만, 작은 전투는 아직도 계속되는 상황.) 

우리가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또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기도하면서 도움을 청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고...그러면 백전백승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흔들리고, 기도하지 않고, 세속의 유혹에 넘어가고, 그러면서 예수님을 잊어버린다면, 백전백패입니다. 

지금 우리의 대림 시기는 메시아 없이 살던 사람들이 메시아의 강생을 기다리던 때와 같은 시기가 아닙니다. 메시아는 이미 이천여 년 전에 오셨고, 우리의 해방을 선포하셨고, 당신의 목숨으로 몸값을 내셨고, 부활하심으로써 최종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척 하면서 연극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믿고 있으니, 이 믿음 속에서 대림시기와 성탄 시기를 지내야 합니다. 믿음을 더욱 강하고 튼튼하게 만드는 시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대림 시기는 다시 한 번 더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시기입니다. 

지난 일 년 동안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다면 이제 잠시 멈추고 신앙인으로서 자기의 '삶'을 점검하는 시기. 조금이라도 예수님을 소홀히 하고 세속의 일에 한눈을 팔았다면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시기. 길 잃은 양처럼 살았다면 우리를 애타게 찾고 있는 착한 목자이신 분에게로 돌아가는 시기. 

사실 우리는 편안하면 편안해서 방심하고, 힘들면 힘들어서 주저앉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아직은 세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오염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날마다 목욕을 하는 것처럼, 대림 시기가 아니더라도 날마다 회개를 해야 합니다.


 수원교구 분당마르코성당 대림 1주일

어제는 교회 전례력으로 한 해를 마치는 날이었고 오늘은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대림 시기의 첫날인데, 어제와 오늘 복음이 같습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가 어제 복음이었지요. 다시 생각해 보니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대림 시기가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을 기념하는 성탄을 기다리는 때이지만, 마지막 때에 영광 중에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는 시기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어제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두 번째 오심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방탕, 만취, 일상의 근심은 우리를 좁은 벽 안에 가두어 버려, 지금 이 순간 외에는 보지도 생각하지도 못하게 만듭니다. 만취한 사람은 술이 깨었을 때의 세상이 어떠한지를 생각하지 못합니다.
일상의 근심에 얽매인 사람도 그 일 이외의 다른 것은 생각하지도 못합니다. 자기 일에 몰두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가까이 오는 것을 알지 못하듯이, 이렇게 자유롭지 못한 이들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문을 열고 들어오셔도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 마음과 우리 집의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도록, 안테나를 세워야 하겠습니다.
누군가 인생은 기다림 속에서 저물어 간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다림은 막연하고 모호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오심을 기쁨과 희망 속에서 준비하는 기다림입니다. 주님의 재림 못지않게 우리 개개인의 죽음도 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지막 순간도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지요.
주님의 다시 오심이, 늘 깨어 준비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주님과의 감격적인 해후의 순간이 되겠지만, 영원한 생명을 잊고 순간적인 것에만 몰두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두려운 만남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있는지 우리에게 배웠고,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욱더 그렇게 살아가십시오.> (1테살 4,1)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는 대림 제1주일입니다.
새해 축복 많이 받으시길 기둰합니다.

새해는 '기다림'으로 시작합니다.
성탄, 즉 아기 예수님 다시 오심을 기다립니다.

어떻게 기다려야 할까요?
사도 바오로는 이미 우리가 배운대로
더 사랑하면서 기다리면 된다고 하시네요.
대림시기는
좀더 하느님을 사랑하고 좀더 이웃을 사랑하면서
성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또 우리는 다시오실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 걸까요?
왜 그분이 다시 오셔야만 할까요?
오늘 독서와 복음은 정의와 공정이란 키워드를 우리에게 던져줍니다.
하느님 나라는 정의와 공정의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는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공정한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쇄신과 개혁이 필요합니다.
'정의의 싹'으로
우리 가운데 오실 임마누엘 하느님을 우리는 기다립니다.

그건 그분을 기다리며
이 대림시기가 우리 또한 정의와 공정의 사도가 되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는 기간이란 뜻입니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새해에는 지금까지 배워서 아는 것처럼
더 사랑하며 살고
더 겸손하게 살고
더 나누며 살고
더 손해보고 살고
더 희생하며 살고
더 이해하며 살고
더 희망하며 살고
더 정의롭게 사는 그런 한해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멋진 한해 꾸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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