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3일 연중 제24주일]하느님의 일 (마르 8,27-35)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에서, 종은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서 겪게 된 고통에 대하여 독백한다. 그는 모욕과 수모를 겪지만 그 수치를 피하려 하지 않는다.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고 도와주심을 믿기 때문이다.(이사야 50,5-9ㄴ)
5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6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7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우리 함께 나서 보자. 누가 나의 소송 상대인가? 내게 다가와 보아라. 9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
야고보서는 믿음에 실천이 따라야 한다고 권고한다.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야고보2,14-18)
14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15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16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7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18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대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실천이 있소.” 나에게 실천 없는 그대의 믿음을 보여 주십시오. 나는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 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라는 믿음을 고백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나서는 실천이 요구된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이들도 자신의 삶으로 그분의 길을 따라야 한다.(마르 8,27-35)
그때에 2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28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29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0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31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3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3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이 응답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베드로는 과연 알았을까요? 그 믿음 때문에 목숨까지 잃게 되리라고 생각했을까요?
베드로가 스승으로 고백하고 모신 분은 머지않아 군중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셔야 할 분입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베드로에게도,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고백하는 것만으로 제자의 역할이 끝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뒤를 따르는 것이 수난과 십자가의 길이라는 사실을 베드로가 처음부터 깨달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고난을 겪고 돌아가시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신 다음에도 십자가를 보고서는 도망갔던 그였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그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길을 따랐습니다. 사람들 손에 죽임을 당하신 그분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었고, 그분께서 부활하셨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시자 베드로는 절대로 안 된다고 펄쩍 뛰면서 말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는데, 오늘 이 말씀이 저에게 깊이 다가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모시던 베드로 사도처럼 가까운 친구나 친지들이 아주 부드러운 음성이나 감언이설로 설득할 때, 그것을 유혹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따듯한 격려나 충고로 착각하여 이것을 물리치기가 어려워진다는 점입니다. 인생을 올바로 살고 성덕으로 나아가려면 가까운 사람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유혹할 때, 과감하게 물리칠 수 있는 용기가 정말로 필요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예수님처럼 …….
하느님의 일, 사람의 일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마르 8,31-33)."
베드로 사도가 십자가의 길을
가시려고 하는 예수님을 말린 것은
순전히 인간적인 애정 때문입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분이 수난을 당하신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서
말렸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사탄'이라고 부르시면서 그를 꾸짖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베드로 사도가 사탄이 들렸다는 뜻도 아니고,
사탄의 유혹에
빠졌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의 행동이 결과적으로 사탄이 바라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사탄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무조건 방해하는
존재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는 사심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그렇게 한 것인데,
본의 아니게 사탄이 바라는
대로 행동하게 된 셈입니다.
이런 일은 우리도 흔하게
경험하는 일입니다.
고난을 겪는 것이 예상되는 어떤 일,
예를 들면 민주화 운동, 인권 운동, 노동 운동 등을 하려고 나서는
사람을
가족이나 친구들이 "왜 꼭 네가 해야 하는가?",
또는 "왜 꼭 그렇게 해야 하는가?" 라고 말하면서 말리는 일이
많습니다.
정말로 걱정되어서,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나쁘다고 비난만 할 수는 없는데,
떠나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리는 것을 뿌리치는 일이 무척 힘들게 됩니다.
"내게서 물러가라."는
"내게서 떠나라."가 아니라 "내 뒤로 가라."인데,
제자의 본분을 지켜서 스승의 뒤를 따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당시에 스승과
제자가 함께 길을 갈 때,
스승은 앞에서 걸어가고 제자는 그 뒤를 따라가던 관습에서 온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신자들은)
예수님께서 앞장서 가신 길을 뒤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또 예수님보다 앞에 설 수도
없고, 나란히 갈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반대하거나 수정할 수 없습니다.)
1) 여기서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시는 일들을 가리키고,
'사람의 일'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세속적이고
개인적인 희망과 목표를 가리킵니다.
그 희망과 목표가 꼭 악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리 선한 것이고 좋은 것이라고
해도,
세속적인 희망과 목표라면 그냥 세속에서 끝나버릴 일들입니다.
따라서 궁극적인 구원을 받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그런 희망과
목표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가장 중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 덜 중요한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2) '하느님의 일'을
'부활'로,
'사람의 일'을 '십자가 수난과 죽음'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들의 범죄이고,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께서 그 범죄를 극복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수난 예고 말씀을 하실 때 부활 예고 말씀도
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당하실 일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실 일도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부활 예고
말씀은 흘려들었고,
수난 예고 말씀만 심각하게 받아들이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3) '하느님의 일'을
'그리스도의 인류 구원 사업'으로,
'사람의 일'을 '사람이신 예수님의 지상 생애'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당시에
제자들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최종 목표인 인류 전체의 구원은 아직 모르고 있었고,
눈앞에 계신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활동이
성공하기만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 수난을 '실패'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4) '하느님의 일'을
'영원한 생명'으로,
'사람의 일'을 '지상의 생명'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지상의 생명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 8,35)."
이 말씀에서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지상의 생명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놓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소극적으로 목숨을 빼앗기는 사람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목숨을 바치는 사람, 즉 순교자입니다.
5) '하느님의 일'을
'신앙생활'로,
'사람의 일'을 '세속 생활'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가장 많이 해당되는
경우입니다.
신앙인이라면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가 안 믿는 세속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신앙생활이 가장 앞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인들도 세속 생활을
무시할 수는 없고,
어떤 경우에는 온 힘을 다 쏟아야 할 때가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 생활을 '신앙 안에서' 하고
있는가,
아니면 신앙과 상관없이 하고 있는가?
혹시 신앙생활을 취미생활처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를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1독서 이사 50,5~9a (나는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긴다)
제2독서 야고 2,14~18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복음마르 8,27~35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이다)
고난받는 종의 메시아 - 강 길웅 신부 -
이사야서에는 고난 받는 야훼의 종의 노래가 네 개가 나옵니다. 그 종은 일찍이 본 일도 없고 들은 일도 없을 정도로 박해를 당해서 사람의 형상마저 일그러져 아주 비참하게 됩니다. 오늘 1독서에서 그 종은 때려도 가만있고 침을 뱉어도 피하지 않으며 수염을 뽑아도 대들지 않고 바보처럼 그저 당하기만 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야훼의 종'은 특별한 사명을 지닌 인물로 등장하는데 그가 과연 누군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생각할 때 이 종은 모순되는 점이 많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종이면 씩씩하고 영예로워야 하는데 하필이면 그가 억울한 고난을 받기 때문입니다.
야훼의 종, 고난 받는 종이 도대체 누구냐? 이것은 구약의 수수께끼였으며 일종의 감춰진 보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야훼의 고난 받는 종을 여러 각도에서 분석하여 시대가 바뀌고 새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그에 조명해 보곤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숨겨진 미스 테리 였습니다. 수백 년이 지나도 그런 인물은 만날 수 없었습니다.
장면은 바뀌어, 오늘 예수님은 잡신들이 우글거리는 이방인 지역을 제자들과 함께 가시다가 문득 한 가지 질문을 불쑥 던지게 됩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이것은 일종의 시험이었으며 교육이었습니다. 이때 제자들의 의견은 분분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도 하고 엘리야라고도 하며 그냥 예언자 중의 하나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께서 원하시는 대답이 아닙니다.
이때 예수님이 다시 물으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다른 사람은 다 착각하고 있다 해도 제자들은 과연 당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하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은 대답을 못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나서서 자신 있게 말합니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희랍 말이고 히브리말로는 메시아요 우리말로는 구세주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만이 옳게 바라보고 바르게 고백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수제자가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도 착각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메시아관입니다.
베드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메시아란 현세적으로 강력한 힘과 능력을 가진 분이라 믿었으며 바로 그 힘으로 나라를 해방시키고 경제적으로 부흥시키며 또한 사회를 안정시키리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바보처럼 당신이 사람들에게 잡혀 버림을 받아 죽는다고 하시자 깜짝 놀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펄쩍 뛰면서 주님을 말렸습니다. 그래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단호하게 대처하십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베드로는 잘 나가다가 사탄으로 전락 됩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바라보는 베드로의 믿음의 눈은 아주 위대했지만 그러나 그 그리스도를 현세적인 문제의 해결사로만 봤다면 그건 잘못입니다. 그건 믿음이 아니고 야심이었으며 탐욕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래서 큰 꾸지람을 듣습니다. 정신이 번쩍 날 정도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잘못된 메시아 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실생활은 사탄으로 행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게 신앙의 모순이며 그리고 그 모순 속에서 평생 방황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짊어지는 메시아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부인합니다.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말하는 메시아는 이미 왔으며 그가 곧 예수님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1독서를 가지고 예수를 조명해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가 지적한 대로 예수님은 아무런 죄도 없이 끌려가시어 얻어맞고 가시관을 쓰셨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처절하게 운명 하셨습니다. 그래도 자신을 굽히지 않았으며 비굴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떳떳하고 당당했습니다. 사람들은 일찍이 그들의 메시아가 고난 받는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이게 신앙의 아이러니입니다. 십자가는 실로 구원의 표시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십자가의 길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직접 십자가를 짊어지는 문제에서는 갈등이 많습니다. 그것이 아프고 서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를 거부하면 그 사실 때문에 사탄이 됩니다. 즉 하느님을 거부하는 자가 됩니다. 억울해도 져야 합니다. 거기에 놀라운 구원의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십자가의 예수님이 정말 구세주라고 믿습니까? 그렇다면 행복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십자가를 지셔야 합니다. 바로 그때 예수께서 여러분 안에서 큰 일을 하실 것입니다.
-유 광수 신부-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유럽 교회의 지도자들이 한국 교회의 발전과 한국인의 열심한 신앙 생활에 감탄하고 놀라워한다. 한국 교회는 살아 있으며 아시아의 선교는 한국 교회가 맡아야 한다고 한다. 나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과연 우리 한국 교회는 살아있고 아시아의 선교를 떠 맡을 만큼 성숙한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비록 유럽 교회가 잠자고 있다고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든 아니든 내가 만나 본 유럽인들의 심성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적인데 비하여 한국 교회는 겉으로는 크게 발전한 것 같지만 안을 들어다 보면 왠지 미성숙하고 그리스도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유럽인들은 생각하는 사고가 그리스도적이고, 몸에 벤 생활 자체가 그리스도적이고, 그네들의 문화가 그리스도적이다. 그네들의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가 그리스도적이다.
거기에 비해 우리 나라는 어떤가? 우리 나라에 그리스도교가 들어 온 것은 불과 2백년이 조금 넘었다. 그 중에서도 약 백년동안의 박해와 교회 제도상 외국 선교사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적인 신앙 교육을 체계적이고 깊이 있게 받을 수 없었다. 우리 민족은 본래 종교적인 심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가톨릭 교회를 쉽게 받아들였지만 유교, 불교적인 문화를 가지고 살아온 우리들의 사상이나 마음까지 완전히 복음적으로 바꾸어 놓지는 못했다. 열심하고 희생적이고 생명을 바쳐 순교까지 하는 열성은 있지만 그것은 소수일 뿐 일반적으로는 복음이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고 있다. 아직까지 우리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사상은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느낌이고 우리의 심성에까지 촉촉히 적셔주지를 못하고 있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지금도 복음보다는 불교적인 가르침, 공자의 가르침이 더 많이 마음에 와 닿고 쉽게 이해하고 친근감을 느끼는 것이 현실이다. 한마디로 우리들의 신앙은 어설프고 우리의 삶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고 왠지 급조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오늘 복음을 보면 이런 것들이 더욱 분명해진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한 분"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네들의 의식 세계를 볼 수 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마만큼 군중들과 제자들의 의식 속에는 한결같이 구약 성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만일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물었다면 누구라고 대답했을까? 석가, 공자, 단군, 위대한 성현 중에 한 분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유교, 불교적인 문화 속에서 자란 우리들에게 그리스도는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인 복음은 아무래도 낮 설은 것 같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느낄 때가 많이 있다. 과연 나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한 그리스도란 구세주라는 뜻이다. 즉 당신은 나의 구세주이십니다.라는 고백이다. 사실 이 말은 엄청난 말이다. 나를 구원해주시는 하느님이 바로 "나와 함께 계신 당신이십니다." 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과연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이신가?
많은 신자들이 예수를 구세주라고 고백하면서 실제 생활 속의 구세주는 따로 있는 것 같다. 재물이 구세주요, 권력이, 명예가 그리고 나의 남편이, 나의 아내가, 나의 애인이 구세주이다. 나의 취미가 구세주요, 나 자신이 구세주인 경우를 많이 본다.
맥루한은 "아무도 아무에게 아무것을 가르쳐 줄 수 없다."고 하였다. 즉 우리가 무엇을 배우고 깨닫는 것은 가르쳐 주는 사람에 달린 것이 아니라 배우는 이의 자세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말로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어도 배우는 이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가르쳐 줄 수 없다는 말이다. 모든 것은 받아들이는 이의 자세 즉 배우는 이의 열성과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있어야 새로운 것을 배우고 발전할 수 있는 법이다.
아무리 나를 구원해주시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하신다 하더라도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나의 자세가 복음적이지 못할 때 복음은 복음이 될 수 없다.
나의 고정관념과 전통적인 습관을 벗어버리지 않는 한 새로운 발전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들과 제자들의 고백의 또 다른 차이점은 이런 것이다. 즉 군중에게 있어서 에수님의 존재는 절대적이신 분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 중에 한분일 뿐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절대적인 분이 아니니까 절실하게 믿을 필요도 없고 구세주라고 가지 고백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냥 여러분들 중에 한분일 뿐이다. 그분이 요한 세례자이든 엘리야이든 옛 예언자 중에 한분일뿐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 분이냐?라는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의 고백은 그렇지 않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말에는 당신은 나의 전부이십니다.라는 뜻이 담겨있다. 당신만이 나를 구원해주실 수 있으신 분 그래서 당신은 나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분이십니다. 라는 고백이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군중들과 제자들과는 이런 엄청난 차이점이 있다. 군중들은 절대로 예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릴 수 없고 그분을 위해서 생명을 바칠 수 없다. 그러나 자기들에게 있어서 절대적이신 분인 예수님을 위해서 제자들은 자기들의 모든 것을 버렸고 생명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나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라는 질문은 정말 중요한 질문이고 그에 대한 고백은 나의 삶을 결정짓게 하는 것이다.
과연 나에게 있어서 구세주는 누구인가? 이 말은 정말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이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르 8,33)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그러다보니 안 돌아가는 머리지만
온갖 지식을 총동원해서
머리를 짜냅니다.
우리는 만족해하며
하느님께서도 기뻐하실 것이라 여깁니다.
과연 그럴까요?
우리가 보기에
아무리 좋아보이고 옳아보여도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원하시지
않을 수도 있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그저 사람의 일만 생각하면
그게 사탄의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인간적인 지혜나 판단에
너무 의존해서는 안됩니다.
그 일이 과연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인지,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는지를
되물어 볼 일입니다.
'장고 끝에 악수'라 하듯
우리의 수고가
하느님과는 아무 관계없는 일이
될 수도 있을테니까요.
오늘 내가 생각하고 고민하고
답을 찾은 것이
과연 하느님께서도
기뻐하실지 한번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하느님의 뜻을 다시 생각하는
'주님의 날' 되시길 축원합니다.
‘딜레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퇴양난의 처지를 말하기도 하고, 결과를 예측하기 힘든 상황을 말하기도 합니다. 생명은 스스로 발전하고, 종족을 보존하도록 진화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생명이 스스로를 망치는 행동을 한다면 이것도 딜레마입니다. ‘게임 중독, 알콜 중독, 도박 중독’으로 많은 사람들이 몸과 정신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자신의 이런 처지를 고백하였습니다. ‘내 안에는 거짓된 또 다른 자아가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고, 복음을 전하고, 영원한 생명에로 가고 싶은데 거짓된 자아는 나를 또 다시 어둠의 구렁으로 밀어트리려고 합니다.’ 초대교회의 위대한 성인도 ‘딜레마’에 빠졌던 자신의 상황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입시철이 되었습니다. 성소국에서는 좀 더 많은 학생들이 신학교에 합격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신학교의 교수 신부님들은 좀 더 성적이 좋은 학생들을 선발하려고 합니다. 물론 성적과 인성 그리고 영성을 겸비한 학생들을 선발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성적이기 때문에 성적이 신학교 입학의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교수 신부님들은 이야기 합니다. ‘공부만 하는데 신학교에 합격할 점수를 얻지 못하는가?’ 아마도 학생들에게도 거짓된 자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공부만 하는데도 신학교에 합격할 점수를 얻지 못해서 걱정하고, 고민하는 것 같습니다.
학생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수많은 ‘딜레마’에 빠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를 받았지만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비율은 30%가 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70%의 신자들은 거짓된 자아에게 자신의 의지를 빼앗기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지만 우리의 말과 행동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나의 것을 먼저 챙기려하고, 남을 속이려하고,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우리를 ‘딜레마’에 빠지게 하곤 합니다. ‘나의 멍에는 가볍고 편하다. 너희 지치고 목마른 이들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죽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지금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중풍병자는 걷게 하시고, 나병환자를 치유해 주셨고,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말씀은 제자들을 당황하게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고, 죽어야 할 것이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곁을 떠나갔다고 성서는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질문을 합니다.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들은 대로 이야길 합니다. ‘엘리야라고도 하고, 죽은 요한이 살아났다고도 하고, 예언자 중에 한분’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을 다시 합니다. ‘여러분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베드로는 아주 정확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칭찬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번에 베드로는 또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번에는 베드로를 야단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오늘 제2독서는 분명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행동이 함께 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행동이 없는 신앙은 우리를 참된 진리에로 이끌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던 베드로가 엄하게 질책을 받은 이유는 그 믿음을 실천하는 행동에는 함께 하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9월은 순교자 성월입니다. 순교자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행동으로 보여준 참된 신앙인입니다. 우리가 순교자 성월을 지내는 것은 믿음을 행동으로 드러낸 순교자들의 삶을 본받기 위해서입니다.
조재형가브리엘 신부
† 찬미 예수님! 조재형가브리엘 신부님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수많은 ‘딜레마’에 빠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를 받았지만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비율은 30%가 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70%의 신자들은 거짓된 자아에게 자신의 의지를 빼앗기는 것 같습니다. '~~70%의 신자들이 자신의 의지를 빼앗긴다고 하셨는데요. 사실 이 문제는 개인에게 돌리기 보다는 교회의 무관심속에 있다고 봅니다.
신부님께서는 본당사목등 두루 경험을 하셨으니 잘 아시겠지만요. 사실 신자로 태어난 세례후에 신자관리에 대하여 교회가 하는 프로그램이 있나요? 겨우 레지오라든가 자체 단체에 가입하여 명맥을 잊는게 다는 아닐런지요.
어린아이가 뭘 알아요? 커가며 배우고 익혀 참된사람이 되는거 아닌가요? 기초교리 달랑 가르쳐 세례베풀고 나서 니 맘대루해? 성경을 지속적으로 배울수 있는 프로그램이 각 본당에 있기를 바랍니다. 세례후 뭐 1년간이라도 함께 할수 있는것 말입니다.고맙습니다.
김종업님(rlawhddjq) 2015-09-13 06:53: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