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 16일연중 제20주일] 생명의 빵 (요한 6,51-58)
잠언에서 지혜는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지혜는 집을 짓고 잔치를 마련하여 사람들을 초대하는 여인과 같다. 그 초대에 응답하는 사람들은 어리석음을 버리고 지혜의 길을 걷게 된다.(잠언 9,1-6)
1 지혜가 일곱 기둥을 깎아 자기 집을 지었다. 2 짐승을 잡고 술에 향료를 섞고 상을 차렸다. 3 이제 시녀들을 보내어 성읍 언덕 위에서 외치게 한다. 4 “어리석은 이는 누구나 이리로 들어와라!”
지각없는 이에게 지혜가 말한다. 5 “너희는 와서 내 빵을 먹고, 내가 섞은 술을 마셔라. 6 어리석음을 버리고 살아라. 예지의 길을 걸어라.”
시편 34(33),2-3.10-11.12-13.14-15(◎ 9ㄱ)
◎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 내 영혼 주님을 자랑하리니, 가난한 이는 듣고 기뻐하여라. ◎
○ 주님을 경외하여라, 주님의 성도들아.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는 아쉬움 없으리라. 부자들도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지만, 주님을 찾는 이에게는 좋은 것뿐이리라. ◎
○ 아이들아, 어서 와 내 말을 들어라. 주님 경외를 가르쳐 주리라. 삶을 즐기고 복을 누리려, 장수를 바라는 이 누구인가? ◎
○ 네 혀는 악을 조심하고, 네 입술은 거짓을 삼가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평화를 찾고 또 찾아라. ◎
에페소서도 지혜에 대해 언급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식별하며, 성령으로 충만하여 언제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일에 아버지께 감사드린다.( 에페 5,15-20)
형제 여러분, 15 미련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잘 살펴보십시오. 16 시간을 잘 쓰십시오. 지금은 악한 때입니다. 17 그러니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 18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서 방탕이 나옵니다. 오히려 성령으로 충만해지십시오. 19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20 그러면서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을 초대하신다. 그분께서 몸소 주시는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그분의 살이다. 그분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시는 사람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고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요한 6,51-58)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52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신약에 가까이 오면서 구약 성경에서는 오늘 잠언에서 보듯, 지혜가 점점 의인화되어 사람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구약의 예언서는 자주 세말에 주님께서 친히 잔치를 차려 주신다는 사실을 예고하는데, 이 말씀대로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당신 몸과 피를 양식으로 내어 주시면서 오늘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잔칫상에 초대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는 그분의 약속을 보장받고, 또한 그는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기 때문에 바오로 사도처럼 ‘그리스도가 삶의 전부’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머무르신다는 사실은,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아울러 성체를 모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데, 동참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2독서가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 하고 제시합니다. 경외심을 갖고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그분을 섬기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며 이를 통하여 지혜 자체이시며 말씀(로고스)이시고 생명이신 그분과 일치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잔칫상에 초대받은 우리가 얼마나 큰 은총의 선물을 받고 있는지, 그래서 얼마나 행복한지 곰곰이 살펴보는 한 주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자기 살을 (요한 6, 52-59)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우리가 생활하다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 직면할 때가 있다. 자기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도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체험을 하였다. 사울에게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이 일어난 것이다. 인간의 머리로는 그리고 사울의 상식적으로는 상상이 가지 않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의문의 질문을 한 것처럼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 해주었지만 유대인들은 도저히 알아듣지를 못하고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매우 당황스러워한다. 그 일로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지기까지 하였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었다라면 상황은 매우 달라졌을 것이다. 말다툼을 하기보다는 예수님께서 자기 살을 먹으라고 내어주시기까지 하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오히려 감격하고 감사드렸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도 예수님처럼 자기들 살까지는 못 내주어 준다고 하더라도 남에게 내어주는 사람을 살려고 노력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을 이상하게 생각하였고 자기들끼리 말다툼까지 벌였다.
우리도 학문을 하다보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 또 하느님의 말씀을 읽다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만나게 된다. 또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도 만나게 된다. 또 때로는 장상의 말을 들었을 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저 사람이 어떻게..."라고 당황하게 된다.
그것이 나의 한계이다. 내가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의 한계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당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은 "어떻게 이런 일이.... 어떻게 이런 말을...." 한다.
김해 공항에 착륙하려다가 참사를 당한 비행기 탑승객 유가족들이 사건 현장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라고 울부짖으면서 통곡하는 모습을 보았다.
사실 우리 주위에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 때가 많이 있고 도저히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나 말을 들을 때가 있다. 그렇다. 이 세상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일보다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더 많다. 이 세상은 내가 모든 것을 다 이해하기 때문에 우주가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벽에 부딪쳤을 때 그것이 내 생활의 장애물이 될 수도 있지만 또한 나의 영역을 넓혀나갈 수 있는 하나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위기는 기회라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장애물을 만났을 때, 또 도저히 내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이나 말을 들었을 때 그 앞에서 절망하고 돌아설 수도 있다. 더 이상 관계를 유지하지 않고 단절할 수도 있다. 상대방을 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말다툼을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다.
사실 우리 사이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은 서로 자기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데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조금만 더 이해할 수 있다면, 조금만, 더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조금만 더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얼마든지 화해하고,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고놈의 한계점을 넘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서로 말다툼하고 갈라지게되는 일이 부지기수이다.
적어도 영적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런 장애물을 만났을 때 그것은 하나의 위기이다. 그 장애물 앞에 그냥 주저앉을 수도 있고 그것을 잘 극복하려고 노력할 수도 있다. 장애물 앞에 주저앉을 때 더 이상의 발전은 없다. 그것이 자기의 한계이기 때문에 모든 일을 그 범위 안에서 생각하고 이해하고 바라보게 된다. 이런 식의 생활로서는 아무리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수도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항상 제자리 수준에 머물고 말 것이다. 영적 세계는 무한하다. 또 우리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세계도 아니다. 그래서 시인 괴테는 "사색하는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행복은, 탐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탐구하고 탐구할 수 없는 것을 조용히 우러러 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에 구도자의 자세가 있다. 하느님을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우리의 작은 머리로 다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그리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거나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기보다는 마리아가 아들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 듣지를 못했지만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루가 2,52)고 하신 것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하는 것이 구도자의 자세이다.
이 세상은 자기가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휠씬 넓고 깊고 신비한 세계이다. 더군다나 영적인 세계, 하느님 나라의 세계는 인간의 머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담을 수 없는 세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무한한 세계를 향해 늘 우리의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하고, 보고 들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그리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만이 초연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하느님의 세계를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서 봉사할 수 있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동참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기 살을 먹으라고 우리에게 내놓으시는 그런 성체의 삶을 살 수 있다. "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라고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유대인들이 어떻게 예수님처럼 자기들의 살을 먹으라고 남에게 내어 줄 수 있겠는가?
유대인들은 한번도 자기 살을 먹으라고 내어놓은 삶을 산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 삶을 살려고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아니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바오로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에는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하던 사람들이었다. 바오로는 그것이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하였고 자기의 신앙이었다.
그가 예수님의 사도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 자기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았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자기의 신앙관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생각하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고 그 이상의 세계 즉 자기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다마스쿠수 사건을 통해 그 세계를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라고 이해하지 못하는 말씀 앞에서 그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영적인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영적 세계는 거기에서 멈출 것이다. 더 이상의 발전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씀이 무슨 뜻인가? 라고 곰곰이 생각하며 그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 묵상하며 생활한다면 자기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세계를 보게 될 것이고, 이성적으로 도저히 알아듣지 못했던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이성의 세계를 넘어선 또 다른 세계 즉 하느님의 세계를 볼 수 있게 되리라. 그렇게 될 때만이 비로서 우리는 박해하던 사울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변화되었듯이 우리의 삶이 변화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때부터 신앙의 그 깊은 세계, 넓은 세계, 무한히 펼쳐지는 신비로운 세계를 볼 수 있으리라.
우리가 남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놓지 못하는 것은, 그리고 다른 사람의 아픔을 진심으로 들어 주지 못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나의 이해의 폭이 좁다는 것이요, 자기 자신의 영적 생활의 빈곤함을 말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믿고 받아들인 사람만이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면서 예수님 안에 살고 예수님의 힘으로 살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그 깊은 진리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할 때 아무리 우리가 성체를 영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예수님 안에 산다고 말할 수 없고 또 예수님의 힘으로 산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영적 여정은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서 예수님 안에 살고 예수님의 힘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때까지 걸어가야 한다.
먹고 마시는 일은 간단할런지 모르지만 다른 이들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도록 내 살을 내어 주는 사람이 되기까지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한 알의 쌀이 밥이 되어 우리의 입에 들어가기까지 그냥 된 것이 아니다. 봄부터 농부의 수고와 벼들의 성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포도송이가 포도주가 되어 우리들이 마시게 되기까지에는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한 알의 포도송이가 우리 입에 먹혀지기까지에도 봄부터 뜨거운 태양과 비바람을 맞으며 견뎌온 결실이다. 우리 자신이 남에게 먹히는 존재로 성장되기 위해서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가을에 풍성한 결실을 맺기 위해 봄부터 부지런한 농부의 수고와 땀방울이 필요로 하였듯이 그렇게 우리의 영성 생활을 위해 노력하는 자만이 남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내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유 광수신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요한 6,56)
예수님은
자신의 살과 피를 받아먹어라고 하십니다.
사람이 살아 가면서
가장 소중한 것 중의 하나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실까 하는 겁니다.
뭘 먹고 마시냐의 선택은
영육간의 건강을 위해
아주 중요합니다.
음식을 잘못 먹으면
배에 탈이 나고
맛있다고 너무 많이 먹으면
살이 찌고 똥배가 나옵니다.
현대인들은 사실 너무 많이 먹어서
탈이 납니다.
오늘은 뭘 드시고 싶으세요?
뭘 마시고 싶나요?
우리가 몸에 좋은 음식을
잘 고르고 적당히 잘 섭취해야 하듯이
영에 좋은 음식도
그렇게 고민하며 섭취해야 하지 않을까요?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성체를 받아 모시고
생명과 지혜의 말씀을
묵상 가운데서 받아 모시고
감사와 찬미의 화살기도를 바치며
주일을 보낸다면
건강한 영혼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 나의 몸과 마음에
가장 유익한 먹거리가 무엇인지 고민해 봅시다.
영육간의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
유혹에 빠지지 말고
멋진 식사하시기 빕니다.
[출처] 2015.08.16.|작성자 알타반
맛없는 첫영성체
교회는 유아세례를 받은 어린이들과 세례를 받지 않았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첫영성체 교리를 하고 세례와 첫영성체를 시킵니다. 어릴 때에 부모를 따라, 혹은 주일학교를 다니면서 보았던 그 조그맣고 하얀 빵이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이 빵을 먹고 싶으면 세례를 받고 첫영성체 교리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마저도 수락할 만큼 어린이가 가지는 성체에 대한 기대는 대단합니다.
첫영체를 하고 나서 기분이 어떠냐고 물으면 아이들의 대답은 한결 같습니다. “아무 맛도 없어요!!” 그렇습니다. 아무 맛도 없습니다. 기대와 달리 밋밋하고 맛없는 첫영성체의 체험이지만, 미사 중에 빵을 먹기 위해서 기나긴 시간 기다리고 고대하며 준비해야 했음을 아이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맛없는 성체를 먹기 시작하면서 어린이들은 비로소 자신들이 어른들과 동등하게 미사에 참석하고 있음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합니다.
먹어야 삽니다. 먹고 마시는 내용으로 채워진 방송 프로의 높은 시청률은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먹거리는 우리네 일상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냉엄하게 표현하자면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 아등바등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지 않으면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다만 생명을 얻기 위해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더 가지기 위해 탐욕에 빠져 살아가고 있는 것 같은 현실이 안타깝고 걱정스럽습니다.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를 먹어야만 살 맛 나는 참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진리입니다. 나는 생명을 주는 양식을 찾고 있는지, 아니면 조상들이 먹고도 죽어 간 그런 빵을 얻기 위해 표독스럽게까지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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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mangomagic101.deviantart.com(왼쪽), www.flick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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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음식이 무엇이고 어떤 것이냐에 따라서 삶의 내용도 달라집니다. 무릇 살기 위해 입으로 들어가는 것만 먹는 것이겠습니까? 내가 살아가는 생의 목적에 따라 먹는 것도 각기 다른 법입니다.
돈을 생의 목적으로 삼는다면 수전노처럼 이윤과 재물로 자기 배만 채우고자 하는 탐욕스런 돼지가 될 것입니다. 명예만을 좇아 산다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이웃의 아픔과 슬픔까지 이용해 먹는 파렴치한 정치인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권력을 얻기 위해 애쓰며 살아간다면 공공의 이익과 국민의 안위를 먹이로 삼는 억압과 독재가 악취를 풍기게 될 것입니다. 인간적인 눈앞의 이익만을 먹고 살겠다고 달려든다면 그것은 죽는다는 것도 모르고 먹는 독버섯과 같은 해로운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고공에서 외롭게 싸우고 있는 노동자들이나, 천막에서 추위와 더위를 벗 삼아 지내시는 밀양의 어르신들과 강정의 평화 지키미들, 풍찬노숙으로 500여 일을 지내는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 그리고 작은 힘이나마 아픔으로 눈물 흘리는 이들과 연대하는 의로운 이들은 오히려 굶기를 밥 먹듯 하며 지내고 있어도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참된 양식을 먹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화무십일홍 권불십년이라 했듯이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참된 양식은 결코 재물이나 명예나 권력이 아닙니다. 존중과 섬김, 나눔과 소통, 공감과 연대를 살아간다면 세상은 정의와 진실, 공동선과 형제애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결국 지금 내가 무엇을 손에 쥐려하고 있는지, 무엇을 먹어야 참 생명을 살아가는 것인지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면 조상들이 먹고도 결국 죽어 간 그런 양식을 먹는 바와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나누는 양식이 참된 살과 피
양식은 내가 먹고 이웃에게 나눌 때 참된 양식으로 성장합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셨듯이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 주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 양식은 나를 통해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삶을 이웃의 양식과 음료로 내어 주고 나눌 때 예수님의 살과 피는 나를 통해 참된 양식이요 음료가 됩니다. 나만 먹고, 나만 배부르게 생명을 누리려 든다면 그 또한 먹고도 죽어 간 구약의 만나와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수님이 내어 주시는 살과 피를 참된 양식으로 먹은 우리가 내 살과 피를 가난한 이웃과 나누는 것이 참된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는 말씀은 가난하고 고통 받는 역사의 현장에 투신해 살아가는 이들의 참된 생명의 삶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입니다. 따라서 미사 때 마다 주님을 기억하여 행하는 성찬례는 참된 양식으로 자신을 나누라는 지엄하신 명령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살과 피를 참된 양식으로 먹고 마신 이들은 자신의 살과 피 또한 참된 양식과 음료로 내어 놓아야 한다는 요구입니다. 내가 먹고 마시는 것이 죽음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참 생명을 가능하게 해 주는 양식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삶의 요청입니다.
첫영성체를 하면서 빵을 먹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참된 양식을 얻기 위해 그 어린 나이에 교회가 요구하는 것들을 해 낼 수 있었고, 그래서 얻은 것이 참된 생명을 주는 참된 양식입니다.
오늘 복음을 들으면서 참된 양식을 얻기 위해 첫영성체를 준비하는 어린이만큼의 고대와 준비라도 하고 있는지, 오히려 먹고도 죽어 갈 양식을 얻기 위해 분주하고 정신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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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기 신부(다미아노)
의정부교구 청소년 사목국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