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루가9,23-26)

2015. 9. 19. 오후 5:36:46

글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제 십자가를 지고  (2015. 9. 20.) (루가9,23-26)

 


우리나라는 18세기 말 이벽을 중심으로 한 학자들 몇몇의 학문적 연구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들 가운데 이승훈이 1784년 북경에서 ‘베드로’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신앙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마침내 한국 천주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대부분 선교사의 선교로 시작된 다른 나라들의 교회에 비하면 매우 특이한 일이다. 그러나 당시 한국 사회는 전통을 중시하던 유교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어, 그리스도교와 크게 충돌하였다. 결국 조상 제사에 대한 교회의 반대 등으로 천주교는 박해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신해박해(1791년)를 시작으로 병인박해(1866년)에 이르기까지 일만여 명이 순교하였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의 해인 1984년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이들 순교자 가운데 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와 평신도인 정하상 바오로를 비롯한 103명을 시성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 교회는 9월 26일의 ‘한국 순교 복자 대축일’을 9월 20일로 옮겨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지혜서는 고통 속에 죽은 의인들이 내세에서 누리는 평화에 대해 말한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그들이 파멸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을 지니고 하느님 곁에 살아 있으며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누리고 있다.(지혜 3,1-9)
1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2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3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4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5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6 그분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7 그분께서 그들을 찾아오실 때에 그들은 빛을 내고, 그루터기들만 남은 밭의 불꽃처럼 퍼져 나갈 것이다. 8 그들은 민족들을 통치하고 백성들을 지배할 것이며, 주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 9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바오로 사도는 환난도 박해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없다고 선포한다. 아무것도 우리를 위해 아드님을 내어 주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는 없다.(로마 8,31ㄴ-39)
형제 여러분, 31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32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33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의롭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34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35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36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37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39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정미연, 제 십자가를 지고, 2015.9.13. 평화신문 1331호.jpg

 예수님을 따르려면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야 하며, 그분을 위해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3-26)
그때에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송영진 모세 신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루카 9,23-25)"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을 '왜' 따라가는가? 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 기쁨, 행복 등을 받기 위해서 예수님 뒤를 따라갑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이라는 말씀은, "누구든지 내가 주는 영원한 생명, 기쁨, 행복을 받으려면"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영원한 생명과 기쁨과 행복은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과 기쁨과 행복은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고, 점점 더 커지다가,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예수님 뒤를 따라가면 나중에 영원한 생명과 기쁨과 행복을 얻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지금은 기쁘지 않고 행복하지 않아도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뒤를 따라감으로써 지금 예수님의 생명을 받게 되고, 또 따라가는 것 자체가 지금 기쁘고 행복하니까, 그래서 예수님 뒤를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왜 따라가는가?(신앙생활을 왜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좋은 대답은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이 기쁘고 행복하니까."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라는 말씀은, "세속적인 바람이나 욕심 등을 버리고 날마다 온갖 고난을 감수하면서"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기쁨과 행복이 세속에서 얻는 즐거움보다, 또는 세속에서 겪는 고난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에 신앙인들은 세속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또 세속의 고난을 감수하면서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 신앙인이기 때문에 겪는 괴로움을, 또는 세속에서 얻는 즐거움과 쾌락을 신앙생활에서 얻는 기쁨보다 더 크게 느끼는 경우가 있고, 그래서 "너무 힘들어서 신앙생활을 못하겠다." 라고 생각하거나, 또는 "너무 재미없어서 신앙생활을 못하겠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론과 실제 현실은 다르다." 라고 말할 것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면, 기도하는 동안 참아야 할 불편함, 따분함 등이 기도에서 얻는 기쁨보다 더 크게 느껴진다면, 기도를 안 하려고 하거나 하더라도 억지로 하게 될 것입니다. 또는 기도하는 동안 눈에 보이는 어떤 장면에, 또 귀에 들리는 어떤 소리에 더 마음을 빼앗긴다면,
기도를 멈추거나 대충 성의 없이 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선택'과 '노력'에 관한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세속이 주는 '재미와 즐거움' 가운데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예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선택했다면 그것을 지키고 키우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처음부터 세속을 선택했다면 신앙생활을 안 할 것이고, 신앙을 선택했더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중간에 탈락하게 될 것입니다.


 이  '선택'과 '노력'은 누가 어떻게 해 줄 수가 없습니다. 각자 자신의 믿음, 지향, 의지 등에 달린 일입니다. 정말로 간절하게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과 기쁨과 행복을 믿고 희망한다면, 그것을 얻기 위해서 지극 정성으로 노력할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능동적으로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는 "세속을 선택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를 얻지 못할 것이고"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는 "나를 선택하고 내 뒤를 잘 따라오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기쁨과 행복을 얻으려고 예수님 뒤를 따라가다 보면 육신의 목숨을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목숨을 빼앗기는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는 떠나게 될 이 세상을 조금 일찍 떠나는 것뿐입니다. 세속을 선택하고 세속에 취해서 살면, 사는 동안에는 즐거울 수도 있지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자기가 아무것도 얻지 못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선택하고 노력했다면 얻을 수 있었던 것들을 하나도 얻지 못한다는 것은 그것들을 모두 잃은 것과 같습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온 세상을 얻는다고 해도,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이기도 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면 온 세상을 얻었다는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평생 대통령이 되기만을 바라면서 살다가, 대통령이 된 다음에는 권력의 맛에 취해서 자기 마음대로 정치를 하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백성들에게 고통만 주는 정치를 하고)...그런 사람이 회개하지 않은 채로 죽어서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대통령으로 살았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소용이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너희는...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루카 13,28)." 이 말씀은, "그날에 너희는 후회하고 절망하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아마도 분명히 자신의 인생을 후회하면서 그렇게 살았던 자기 자신을 저주하고 증오할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저주와 증오와 후회가 지옥의 진짜 형벌일 것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2009.9.13 연중 제24주일)

모든 생물에는 한계가 있듯이 우리 인간도 한계를 지니고 사는데, 그것이 바로 죽음이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죽음이 삶의 한 부분이며 삶을 완성시키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죽음이 하나의 현실이므로, 이것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위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통하여 마지막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삶을 더욱 보람 있고 알차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인생의 한계를 잘 알고 있던 우리 순교자들은 누구보다도 삶을 아끼고 사랑하던 분들이었지만, 죽음을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위한 제2의 세례로 받아들여 기꺼이 순교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생명에 대한 애착이야말로 가장 본능적인 것인데, 하느님을 위하여 이것마저도 기꺼이 포기하고 순교하신 우리 선조들은 참으로 장하신 분들입니다. 103위 성인 가운데는 열네 살짜리 어린이에서 여든 살 고령에 이르는 분도 계시고, 하인에서 종3품 고관도 있었습니다. 교회 직위도 주교에서 평신도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습니다. 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는 촌부도 있었습니다.
열네 살밖에 되지 않는 꼬마가 어떻게 순교할 수 있었을까! 고령의 노인이 어떻게 순교의 고통을 참아낼 수 있었을까! 하느님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에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것이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성인은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으며, 순교자들은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택으로 만들어진다.”, “성령은 순교자들의 영이시다.”라는 토마스 머튼의 고백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현대는 피를 흘리는 순교보다는 땀과 노력, 봉사와 희생이라는 새로운 의미의 ‘백색 순교’를 요구합니다. 결혼과 가정생활에도 피를 흘리지 않는 순교가 요청되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진실과 정의를 위하여 평신도 신분으로 마치 수도자처럼 살아가는 분들도 종종 만나게 됩니다. 이분들의 삶이야말로 새로운 의미의 백색 순교, 순교자의 여정이 아닐까요?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로마 8,38-39)

여러분은 신앙인이지요?
하느님을 믿으시지요?
그런데 하느님 때문에
내가 욕을 먹고 고통을 겪게 되고
죽음의 위험까지 처해진다면
어떨까요?

내가 문제가 없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신앙인이기에 칭찬을 받고
좋은 사람 평가를 받을 때는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확신할 겁니다.
그런데 상황이 그 반대가 되어도
과연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오늘 한국순교자들의 대축일을 지내며
그 후예들인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해야겠습니다.

한국순교성인들이여
우리를 위해 빌어주소서.
아멘.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조재형가브리엘 신부

1982년 신학교에 입학했을 때입니다. 기숙사 건물의 이름은 대건 관이었습니다. 그때는 잘 몰랐습니다. 대건 관은 바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기억하기 위해서 정한 이름입니다. 1983년에는 새로이 기숙사를 신축했습니다. 이번에는 이름을 양업 관으로 정했습니다. 이 또한 최양업 신부님을 기억하면서 정한 이름입니다. 신학생들이 순교하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신학생들이 길 위에서 돌아가신 최양업 신부님을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사제가 된다는 것은 기꺼이 순교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니는 것입니다. 사제가 된다는 것은 세상의 명예와 재물을 버리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내 놓을 수 있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순교자 성월을 맞이해서 많은 분들이 성지순례를 다니고 있습니다. 교회는 순교자들의 무덤, 순교자들이 죽임을 당한 곳, 순교자들이 살았던 곳을 성지로 조성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피와 땀은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분들은 천상에서 영원한 삶을 살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분들은 신앙의 별이 되어서 우리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1982년 여름방학 중에 도보 성지순례를 신학생들과 함께 다녔습니다. 당시에는 많은 성지들이 잡초가 우거져 있었습니다. 논과 밭 사이에 있었습니다. 무덤만 덩그러니 있었습니다. 애써 확인하지 않으면 성지인 줄 모르는 곳이 많았습니다. 33년이 지난 지금은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성지에는 전담 신부님이 계시는 곳이 있습니다. 순례자들이 함께 기도할 수 있는 성전이 있는 곳이 많습니다. 신앙의 선조들이 살았던 모습을 재현한 박물관이 있는 곳도 있습니다.


순교자들을 위해서 성지를 조성하는 것은 후손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억울하게 죽은 것 같지만 그분들의 순교가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런 성지를 통해서 우리들의 믿음을 더 굳게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지를 조성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일들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들이 순교의 삶, 나눔의 삶, 희생의 삶,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8장에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사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환난, 역경,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 칼 때문에 신앙을 지키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시련과 고통 죽음까지도 각오하는 결단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사랑에서 떼어놓는 것들은 무엇인지 생각해봅니다. 나의 욕심이, 나의 게으름이, 나의 자존심이, 나의 이기심이, 나의 교만이 그리스도와의 사랑에서 나 자신을 떼어놓은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천국에서 순교자들이 보시면 참으로 가슴 아픈 일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너무 쉽게 보이곤 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순교자들처럼 목숨을 바쳐야 될 일은 별로 없습니다. 재산과 가족, 부와 명예를 포기하는 일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이 지켜온 신앙을 보존하고 후손들에게 물려줄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의 봉사와 나눔, 우리의 사랑과 희생으로 순교자들의 신앙을 지켜나가야 하겠습니다. 순교자 대축일을 지내면서 예전에 읽었던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밤하늘이 있기에 별들은 아름답습니다.”

이 세상은

별들이 많은

은하수 같은 것입니다.

별들이 많기에

밤하늘이 아름다울 수 있지만

그 뒤에는

우주라는

어두운 하늘이 있습니다.


별들이 밤하늘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이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기에

그것만으로도

이 세상은 아름다울 수 있는 겁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아버지기일 9시미사 .

아들 내외가 어제와서 임신 6주란다.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립니다.





우리나라는 오래 전 천주교 서적과 교리를 연구하던 몇몇 학자들 중심으로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승훈이 1784년 북경에서 ‘베드로’로 세례를 받고서는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마침내 우리네 천주교회가 이 땅에 탄생한 것이다.

이는 선교사의 활동으로 시작된 대다수 다른 나라의 교회사에 비하면 매우 특이하다할 게다.

 

사실 당시 우리 사회는 유교 전통을 중시하였기에 천주 교리 내용에서는 여러 면에서 크게 충돌하였다.

결국 조상 제사에 의견 차이 등으로 천주교는 큰 박해를 맞았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의 해인 1984년 한국을 방문하시어 이들 순교자 가운데

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와 평신도인 정하상 바오로를 비롯한 103명을 시성하였다.

그 뒤 한국 교회는 9월 26일의 ‘한국 순교 복자 대축일’을 9월 20일로 옮겨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로 지낸다.

 

예수님께서 모든 이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루카9,23-26)

 

오늘은 한국 순교 성인의 대축일이다.

이 땅의 103위 순교 성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실천하신 분들이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참으로 두려운 그분의 일침이다.

그런데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오늘의 우리에게

선조들의 저 영웅적인 순교 이야기가 가슴 깊이 와 닿지 않는 것이 사실일 수도 있을 게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저 뜨끔한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모든 생물에는 한계가 있듯이 우리 인간도 한계를 지니는데, 그것이 바로 죽음이리라.

그리고 우리는 죽음이 삶의 한 부분이며 삶을 완성시키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을 게다.

죽음이 하나의 현실이므로, 그것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위축되는 것이 아닌,

오히려 그것으로 마지막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더욱 보람 있고 알차게 살아야 한다.

 

이런 삶의 한계를 잘 알고 있던 우리네 순교자들은 누구보다도 목숨을 아끼고 사랑하던 분들이었지만,

죽음을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위한 제2의 세례로 받아들여

기꺼이 순교의 그 험난하고도 영광스러운 길을 선택하였다.

생명에 대한 애착이야말로 가장 본능적인 것인데,

하느님을 위하여 그것마저도 기꺼이 포기하고

십자가의 길을 가신 우리 선조들은 참으로 장하신 분들이다.

 

“성인은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으며, 순교자들은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택으로 만들어진다.” “성령은 순교자들의 영이시다.”라는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신부님의 고백이 마음에 와 닿는다.

현대는 피를 흘리는 순교보다는 땀과 노력, 봉사와 희생이라는 새로운 의미의 ‘백색 순교’를 요구한단다. 결혼과 가정생활에도 피를 흘리지 않는 순교가 요청된다.

하느님과 진실과 정의를 위하여 평신도 신분으로 마치 수도자처럼 살아가는 분들도 종종 만난다.

이분들의 삶이야말로 새로운 의미의 백색 순교, 순교자의 여정이 아닐까?

 

이렇게 순교자들의 장렬한 죽음은 복음으로 변화된 새로운 삶의 완성이었다.

그것은 교회만이 아니라 이 땅의 참된 인간화를 위한 한 알의 밀알과도 같은 봉헌이었다.

순교자들의 후예로서 우리 또한 사회와 자신의 새로운 변화를 위하여 복음의 가치를 증언하는 이가 되자.

이것이 진정한 순교 정신의 계승일 게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분명하고도 단호히 말씀하셨다.

이기심과 욕심, 세속적인 생각이 가득한 자기 자신을 버리고 남들을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 삶에 주신 모든 책임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리라.

이렇게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지는 자세,

이것이 바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인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자그마하고도 아주 멋진 순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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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복음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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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7(군인)주일]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 (마르 10,2-16)15.10.04조회 126[연중26주일 한가위]어리석은 부자 (루카 12,15-21)15.09.26조회 311[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루가9,23-26)15.09.19조회 97[9월13일 연중 제24주일]하느님의 일 (마르 8,27-35)15.09.12조회 110[연중 제23주일] “에파타!” (마르 7,31-37)15.09.05조회 429[연중 제22주일]조상들의 전통 (마르 7,1-8.14-15.21-23)15.08.30조회 279[연중 제21주일 2015. 8. 23.] 생명의 말씀(요한 6,60-69)15.08.22조회 394[2015년 8월 16일연중 제20주일] 생명의 빵 (요한 6,51-58)15.08.15조회 354[ 8.15광복70주년]성모 승천 대축일((루카 1,39-56)15.08.14조회 454[연중 제19주일]하늘에서 내려온 빵(요한 6,41-51)15.08.09조회 455[연중 18주일]생명의 빵 (요한6,24-35)15.08.02조회 320[연중 제17주일]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요한 6,1-15)15.07.25조회 552[연중 제16주일.농민주일] 외딴곳 (마르 6,30-34)15.07.19조회 399[나해연중 제15주일]12제자 파견 (마르 6,7-13)15.07.12조회 331[ 7월 5일 주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15.07.05조회 291연중 제13주일>“탈리타 쿰!” (마르 5,21-43)15.06.28조회 56[연중 제12주일]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마태18,19ㄴ-22)15.06.21조회 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