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4주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성서주간 (요한 18,33ㄴ-37)
한국 천주교회는 1985년부터 해마다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간(올해는 오늘부터 28일까지)을 ‘성서 주간’으로 정하여, 신자들이 일상생활 중에 성경을 더욱 가까이하며 자주 읽고 묵상하기를 권장하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등불이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환시를 통해 장차 일어날 일들을 본다. 억압과 폭력을 저지르는 이 세상의 왕국들이 모두 멸망한 다음 하느님께서는 통치권을 당신 메시아에게 주실 것이다. 그의 통치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니 7,13-14)
13 내가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14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시편 93(92),1ㄱㄴ.1ㄷ-2.5(◎ 1ㄱ)
◎ 주님은 임금님, 위엄을 입으셨네.
○ 주님은 임금님, 위엄을 입으셨네. 주님이 차려입고 권능의 띠를 두르셨네. ◎
○ 누리는 정녕 굳게 세워져 흔들리지 않네. 예로부터 주님 어좌는 굳게 세워지고, 영원으로부터 주님은 계시네. ◎
○ 당신 법은 실로 참되며, 당신 집에는 거룩함이 서리나이다. 주님, 길이길이 그러하리이다. ◎

영광 중에 다시 오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풀어 주시고 하느님의 한 백성이 되게 하신 분이시다.(묵시 1,5ㄱㄷ-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5 성실한 증인이시고 죽은 이들의 맏이이시며 세상 임금들의 지배자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피로 우리를 죄에서 풀어 주셨고, 6 우리가 한 나라를 이루어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신 그분께 영광과 권능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7 보십시오, 그분께서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모든 눈이 그분을 볼 것입니다.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이고, 땅의 모든 민족들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입니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8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유다인의 임금이 되려 하셨다고 그분을 고발한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 앞에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나라의 임금이시다.(요한 18,33ㄴ-37)
그때에 빌라도가 예수님께 33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물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하여 너에게 말해 준 것이냐?” 하고 되물으셨다.
35 “나야 유다인이 아니잖소? 당신의 동족과 수석 사제들이 당신을 나에게 넘긴 것이오. 당신은 무슨 일을 저질렀소?” 하고 빌라도가 다시 물었다.
36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37 빌라도가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동방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찾아와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마태 1,2) 하고 묻자 헤로데는 다른 임금이 태어난 줄 알고 두려워합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유다인들은 “우리 임금은 황제뿐이오.”(요한 19,15) 하고 말하면서, 황제에 맞서 자기가 임금이라고 자처하는 자를 풀어 주면 그는 황제의 친구가 아니라고 하면서 빌라도를 윽박지릅니다(요한 19,12 참조).
그 결과 주님께서는 ‘예수 나자렛 사람 유다인의 왕’이라는 조소 섞인 죄명과 함께 십자가에 처형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고백하는 ‘그리스도 왕’은 세상이 두려워하는 위엄과 권력을 쥐신 권세의 왕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신 연약한 평화의 임금, 자비와 사랑과 봉사의 임금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인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축으로 하여 종말, 곧 완성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음을 고백하고 묵시록의 말씀대로 “처음과 마지막”이신 그분의 왕권을 전례 안에서 고백합니다. 1980년대 초반 보좌 신부 시절, 어느 자매님이 저에게 편지와 함께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제목의 산문시를 보내 주셨습니다. 어느 분의 글인지 밝힐 수가 없어 안타깝습니다만, 그대로 인용하면서 오늘의 묵상 글로 대신하겠습니다.
“예수는 가난 속에서 살다가 죽었다. 그에게는 자기 소유의 집도, 보험 증서도, 사회 보장 제도 카드도, 은퇴 계획도 없었다. 그의 재산은 무엇인가? 그는 간단한 옷만 남겼다. 그리고 십자가 밑에서 군인들은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제비를 뽑았다. 그러므로 그는 새로운 상처들을 제외하고는 빈손으로 죽었다. 재산과 후계자는 남기지 않았다.
예수는 결혼하지 않았다. 그는 일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그래서 그는 아내 또는 자녀의 격려도 없이 짧으면서도 긴 세월을 보냈다. 우리는 자녀를 보물처럼 소중히 다루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아들 또는 딸의 아빠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쓸쓸히 죽었다. 자녀 없이…….
그러나 예수는 그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죽도록 사랑했다. 그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죽도록 신뢰했다. 그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죽도록 봉사했다. 예수에게는 하느님이 모든 것, 전부였다. 그런데 나는 어떠한가?”
그리스도 왕 대축일 제2독서 (요한묵시1,5ㄱㄷ-8)
"우리가 한 나라를 이루어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신 그분께 영광과 권능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6)
6절 역시 5절에 이어 계속되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찬양과 영광송으로써 본절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아버지 하느님을 위하여, 우리를 한 나라로 이루어 사제로 삼으셨다' 는 것이다. 이것은 5절에 언급된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을 통한 구속 사업의 두가지 결과를 언급한 것이다.
이것 역시 탈출기 19장 5절과 6절 곧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나의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이것이 네가 이스라엘인들에게 알려 줄 말이다" 라는 문구를 염두에 둔 표현으로 보인다.
베드로 사도 역시 이것을 인용하여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1베드2,9)고 언급한 적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구속 사업은 이 세상에서 왕 노릇하던 사탄의 세력을 굴복시킴으로써 집합적으로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로 구성된 하느님의 나라를 만들었다. 그리고 아담이 범죄한 후 단절되었던 하느님과의 관계를 대속적 죽음으로 회복시킴으로 인하여 개별적으로는 성도 개개인을 직접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하느님의 사제(히에레이스; hiereis)로 만들었다.
전자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적 지위를 부각시킨다면, 후자는 거룩하신 하느님께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직접적 접근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내용은 묵시록의 결론 부분에서 결정적으로 반복 선포된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묵시21,3)
"민족들이 그 도성의 빛을 받아 걸어 다니고, 땅의 임금들이 자기들의 보화를 그 도성으로 가져갈 것입니다"(묵시21,24).
한편 이러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을 위하는 일이었다. 이런 사실은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위하여) 이란 표현에 잘 드러나고 있다.
즉 이것은 성부 하느님께서 세우신 인류 구원 사업을 온전히 이루기 위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이었던 것이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업이 오로지 성부 하느님을 위한 일이었음은 본문 뿐 아니라 요한 복음에서도 누차 강조되고 있다(요한6,38-40; 8,42 ;10,37.38 ;17,4).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이 그를 믿는 자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나라가 되고 또한 개별적으로는 영적 사제가 되게 하는 귀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 놀랍고 영광스러운 사건 앞에서 요한 사도가 이것을 가능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과 권능이 영원 무궁하기를 비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여기서 '영광'으로 번역된 '독사'(doxa)는 본래 '영예'나 '명성'을 뜻하며, 하느님과 관련해서 사용될 때에는 '신성으로 거룩하심','존귀나 위엄','권능' 등을 뜻한다. 그러나 원초적으로는 '무엇인가를 드러내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영광스럽게 한다는 것은 영광스럽게 하는 대상을 드러내 보인다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사제로 삼으셨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바로 그러한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신다(요한17,5).
하느님의 실체를 드러내 보이신 분이요, 하느님의 유일한 진리를 인간에게 전달하신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하셨으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께 세세토록 영원한 영광을 돌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한편, 여기서 '권능'으로 번역된 '크라토스'(kratos)는 일반적으로 '신적 권세' 나 '통치권'을 의미한다. 여기서 언급된 '크라토스'는 '적에 대한 승리' 또는 '법이나 규칙에 의한 통치'를 뜻할 때 주로 사용된다. 이 표현으로부터 오늘날 '민주정치'를 뜻하는 '데모크라시'(Democracy)나 '전제정치'를 뜻하는 '오토크라시'(Autocracy)등의 '크라시'란 단어가 파생되었다.
이러한 권세와 능력은 만왕의 왕으로 재림하시는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마지막 통치를 연상시키는데, 요한 사도는 묵시록의 머리말인 1장 5절, 6절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승리적 통치를 언급한다. 이것은 총체적인 악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와 통치 역시 묵시록의 뚜렷한 주제가 될 것임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며, 동시에 묵시록의 앞으로의 전개 방향을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보십시오. 그분께서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모든 눈이 그분을 볼 것입니다.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이고, 땅의 모든 민족들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입니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7)
'보십시오'(이두;idu)라는 감탄사를 필두로 시작되는 본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재림을 묘사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시리라는 기대는 이미 공관복음에서도 공통적으로 나온다(마르코13,26; 14,62; 마태24,30; 26,64; 루카21,27). 그래서 혹자는 이러한 진술을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종말론적인 후렴구' 로 간주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본절은 다니엘의 환시와 결부된 것으로 보인다. 다니엘 7장 13절에는 "사람의 아들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이나 히브리 사상에서 '구름'(톤 네펠론; ton nephelon)은 주로 '하느님의 임재와 현현' 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탈출13,21;16,10; 마태17,5 ; 사도1,9). 따라서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는 언급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신적 임재와 현현을 나타내는데 부족함이 없는 진술이다.
특히 여기서 '오십니다'로 번역된 '에르케타이'(erchetai)는 본래 '오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에르코마이'(erchomai)의 직설법 현재형이지만, 여기서는 미래적 현재형으로 사용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확실성과 임박성을 생생하게 묘사한다(묵시3,11; 22,7 ; 12,20).
'모든 눈이 그분을 볼 것입니다.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이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재림의 성격이 그의 강생과는 대조적으로 공개적일 것임을 드러낸다. 따라서 눈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의 재림을 생생하게 목도하게 될 것이며, 그분을 '찌른 자들'도 그분의 재림을 볼 것이다.
여기서 '찌른'으로 번역된 '엑세켄테산'(eksekentesan)은 '분리'나 '이탈'의 의미를 나타내는 '에크'(ek)와 그 자체로 이미 '찌르다', '꿰뚫다' 라는 뜻을 지닌 동사 '켄테오'(kenteo)의 합성어인 '엑켄테오'(ekkenteo)의 부정 과거형이다. 그런데 이 표현은 신약 성경에서 본문과 즈카르야서 12장 10절을 인용한 요한 복음 19장 37절에서만 등장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 (요한19,37).
그런데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찌른 로마 병사는 한 명이었지만, 그분을 찌른 자들이 복수형으로 나온 것은, 그 배후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의 정치 권력의 야합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시에 당시나 모든 세대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증거를 '적대적으로 대한 모든 이들'을 아울러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에게는 그의 재림이 그 자체로 축복이지만, 그것을 적대적으로 대한 모든 이들에게 있어 그의 재림은 그 자체로 심판이 될 것이다.
'땅의 모든 민족들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입니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즈카르야서 12장 10절에서 "그리하여 그들은 나를, 곧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보며, 외아들을 잃고 곡하듯이 그를 위하여 곡하고, 맏아들을 잃고 슬피 울듯이, 그를 위하여 슬피 울 것이다" 라고 되어 있는데, 본문은 이러한 사상을 계승한다.
그런데 여기서 '가슴을 칠 것이다' 로 번역된 '콥손타이'(kopsontai)는 문자적으로 '자르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콥토'(kopto)의 미래 중간태로 '자기 자신을 자른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것은 묵시록에서 바빌론으로 상징된 로마의 패망과 관련되어 언급된 바 있다(묵시18,9).
그런데 즈카르야서 12장 12-14절을 감안하면, 묵시록 19장 9절이하는 '바빌론 왕들의 비통함'을 표현하고 있으며, 여기서는 '땅'(게스; ges)이라는 표현이 첨가되어, 그 애통함과 비통함의 범위가 확장되고 있다.
즉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영향이 '땅에 있는 모든 종족', 곧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으로 통칭되는 전 인류(묵시5,9 ;7,9 ;10,11 ;13,7 ;14,6 ;17,15)에게 미칠 것이라는 계시가 아닐 수 없다.
이 놀라운 일은 진실로 반듯이 될 일이므로,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나이 아멘; nai men) 이란 표현을 덧붙이는 요한 사도의 기록은 너무나 타당하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로 번역된 '나이'(nai)는 '아멘'과 동일한 의미로서, '나이'가 희랍식의 긍정을 의미한다면, '아멘'(amen)은 히브리식의 긍정을 뜻한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이다'(8) 하느님은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로 소개한다. '알파와 오메가'는 희랍어 알파벳의 처음과 끝글자를 뜻하므로, 의미상 '처음과 마지막' 그리고 '시작과 끝' 이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또한 희랍 철학의 전통을 감안할 때, '알파와 오메가'라는 표현은 '지극히 높으신 신의 영원성'을 지칭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본절에서 선포된 하느님의 자기 칭호인 '알파와 오메가'는 묵시록 전체의 구조와 관련해서 매우 독특한 중요성을 가진다. 왜냐하면, '알파와 오메가'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하느님께서 만물의 창조주로서, 모든 만물보다 앞서 계시고, 또한 만물을 종말론적인 성취로 이끄실 분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하느님의 신적 자기 선포가 묵시록에서 단지 두 차례만 등장하고 있다. 첫번째는 요한 사도가 환시를 보기 전인 묵시록 1장 8절에서 등장하고, 두번째는 하느님의 피조 세계 전체에 대한 종말론적인 성취가 '다 이루어졌다' 라고 선포한 바로 그 시점에서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 라고 언급된다(묵시21,6).
말하자면, 요한 사도는 자신의 저술에 교차 대구법적인 구조를 사용하며,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느님의 면모를 매우 정교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께서는 창조의 시작으로 '알파'이시며, 새 창조(구원)의 완성으로 '오메가'이신 것이다.
<왕이신 그리스도> 송영진 모세 신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8,36)."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요한 18,37)."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재판 받으실 때 빌라도에게 하신 말씀인데, 당신의 왕권과 왕국을 설명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왕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세속의 왕들과는 다르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나의 왕국은 세속의 왕국들과는 다르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나의 통치 방식은 세속 왕들의 통치 방식과는 다르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만일에 예수님의 통치 방식이 세속의 왕국들과 같은 방식이었다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무기력하게 붙잡혀서 십자가형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에서 체포되실 때 칼을 빼어 들고 그것을 막으려고 했던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실 것이다. 그러면 일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태 26,52-54)
요한복음에 있는 '내 신하들'이라는 말을 사도들과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생각할 수도 있고,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가리키는 말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아무래도 천사들을 가리키는 말일 것입니다. (사도들과 제자들을 모두 합해도 그들의 힘은 세속적으로는 보잘것없는 힘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 신하들'은 천사들일 것입니다.)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은, 지상의 모든 군대를 다 제압할 수 있는 강력한 '하늘의 군대'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천사들의 군대와 함께 다니시면서 복음을 선포하셨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그 군대가 무서워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했을 것이고, 회개한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경우에 그것이 과연 진짜 믿음이 되고, 진짜 회개가 될까? 어떻든 하늘의 천사들을 동원한다고 해도, 무력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세속적인 방식입니다.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라는 말은, 칼로 다스리는 세속의 왕국은 언젠가는 망하게 될 '허무한' 나라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왕국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다스리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영원하다는 점에서도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진리' 라는 말은 '구원에 관한 진리'를 뜻합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사랑만이 사람들을 구원한다.'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세상에 오신 분이고, 오직 '사랑으로만' 일하신 분입니다.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라는 말씀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 사랑에 응답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고, 그 사랑을 거부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라는 말씀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하느님(예수님)의 사랑에 응답하고, 자신도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내 목소리를 듣는' 사람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복음을 알아듣고, 믿고, 실천하는 사람을 뜻하는데, 사랑을 통해서 구원을 받게 되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 나라가 딴 세상에, 즉 저승이나 하늘나라에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이루어져야 하는) 나라입니다. 신앙인은 그 나라를 완성하는 사업에 동참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이 하느님 나라로 변화되고 완성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은 신앙인의 의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왕 대축일'은 예수님이 이 세상의 진정한 통치자라는 것을 선포하고 경축하는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 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그렇게 믿는다면 당연히 주님께만 순종해야 합니다(사도 5,29).
세속의 권력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다면, 또 세속의 법이 하느님의 법과 충돌한다면, 세속의 권력과 법을 거부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법에만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 현실을 보면, 세속의 권력과 법은 살아 있는 힘처럼 느껴지고, 실제적인 위협이 될 때가 많은데, 하느님의 힘과 법은 멀게만 느껴지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아도 아무런 일도 안 생기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다 보니 세속 생활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세속의 일을 먼저 하고, 신앙생활은 우선순위가 자꾸 밀리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 대해서 "먹고살자니 어쩔 수 없다." 라고 변명하는 경우도 많고, "어떻게 항상 신앙생활만 할 수 있나?" 라고 항의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물론 날마다 이십사 시간 기도만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고, 세속 생활을 다 포기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할 일을 다 하더라도 '신앙인으로서', 또 '신앙 안에서'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신앙인은 몸은 비록 이 세상에 있지만, 이 세상이 아니라 예수님의 왕국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요한 18,37)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잘 먹고 잘 살게 만들어줄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바로 그 메시아일 수도 있다는 믿음도 있었고
그래서 진짜인지를 시험하기 위해서도 못살게 굽니다.
그러나 진정한 메시아는
단순히 우리를 세속권력자에게서 해방시켜 주고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분은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그는 진정한 메시아가 아니라 좀 괜찮은 정치가일 뿐이겠지요.
예수님은 메시아이십니다.
정치권력의 압제에서가 아니라 우리를 참으로 구속하는
어둠과 악의 세력, 죄와 악습의 사슬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분은 진리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치심으로써
우리가 참 자유를 누리도록 해주시는 참 임금이요 참 메시아이십니다.
아직도 세상의 행복과 재물의 축복을 기대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나는 예수를 나의 진정한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는 뜻이고
그분을 훌륭한 정치가 중의 한분으로 격하시키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가 고백하는 그리스도 왕에 대한 진술이
우리를 진리를 통해 더 자유로워지는 날임을 선포하는 그런 날이길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님, 나의 주님, 나의 임금이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