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0주일] 예리코 소경치유 (마르 10,46ㄴ-52)

2015. 10. 25. 오전 6:3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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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0주일] 예리코 소경치유 (마르 10,46ㄴ-52)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하셨지만, 멸망한 뒤에는 흩어진 이스라엘을 다시 불러 모으시고 그들을 위로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아버지가 아들을 돌보듯이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이끄시고 지키신다.(예레미야31,7-9)
7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야곱에게 기쁨으로 환호하고, 민족들의 으뜸에게 환성을 올려라. 이렇게 외치며 찬양하여라. ‘주님, 당신 백성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소서!’ 8 내가 이제 그들을 북녘땅에서 데려오고, 땅끝에서 모아들이리라. 그들 가운데에는 눈먼 이와 다리저는 이, 아이를 밴 여인과 아이를 낳는 여인도 함께 있으리라. 그들이 큰 무리를 지어 이곳으로 돌아오리라. 9 그들은 울면서 오리니, 내가 그들을 위로하며 이끌어 주리라. 물이 있는 시냇가를 걷게 하고, 넘어지지 않도록 곧은길을 걷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되었고, 에프라임은 나의 맏아들이기 때문이다.”


시편 126(125),1-2ㄱㄴ.2ㄷㄹ-3.4-5.6(◎ 3 참조)
◎ 주님이 큰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
○ 주님이 시온을 귀양에서 풀어 주실 때, 우리는 마치 꿈꾸는 듯하였네. 그때 우리 입에는 웃음이 넘치고, 우리 혀에는 환성이 가득 찼네. ◎
○ 그때 민족들이 말하였네. “주님이 저들에게 큰일을 하셨구나.” 주님이 우리에게 큰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 ◎
○ 주님, 저희의 귀양살이, 네겝 땅 시냇물처럼 되돌리소서.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
○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      

[매일복음(다해) 13-11-18] - 그가(예리코 소경)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루카 18,35-43)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우리의 영원한 대사제로 세우셨는데,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을 제물로 바치시어 우리의 죄를 씻어 주셨다.(히브리 5,1-6)
1 모든 대사제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뽑혀 사람들을 위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하도록 지정된 사람입니다. 곧 죄 때문에 예물과 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2 그는 자기도 약점을 짊어지고 있으므로, 무지하여 길을 벗어난 이들을 너그러이 대할 수 있습니다. 3 그리고 연약한 탓에 백성의 죄뿐만 아니라 자기의 죄 때문에도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4 이 영예는 어느 누구도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아론과 같이 하느님에게서 부르심을 받아 얻는 것입니다. 5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도 대사제가 되는 영광을 스스로 차지하신 것이 아니라, 그분께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하고 말씀하신 분께서 그렇게 해 주신 것입니다. 6 또 다른 곳에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

[매일복음(다해) 10-11-15] - 그는(예리코 소경)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루카 18,35-43)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며 그분께 자비를 청한다. 그는 예수님을 믿었고 그 믿음으로 구원되었다. 다시 보게 된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을 따라나선다.(마르코10,46ㄴ-52)
그 무렵 46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47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48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9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50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51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52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연중 제30주일 제1독서 (예레31,7-9)

"내가 이제 그들을 북녘땅에서 데려오고, 땅끝에서 모아들이리라.  그들 가운데에는 눈먼 이와 다리저는 이,  아이를 밴 여인과 아이를 낳는 여인도 함께 있으리라. 그들이 큰 무리를 지어 이곳으로 돌아오리라." (8)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행하실 구원을 선언하시면서, 먼저 그 백성을 북녘땅과 땅끝에서부터 구원하실 것을 밝히신다. 이러한 내용을 시작하는 본문의 '이제'(혹은 '보라')에 해당하는 '히느니'(hinni)는  주의를 환기하는 표현인 '헨'(hen)1인칭 접미어가 결합 형태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주도하시는 내용이 제시됨을 나타낸다. 

그리고 여기에서 '북녘땅' 은 선민이 포로되어 끌려가 흩어져 살던 곳으로서 주님의 백성에게 치명적인 위협을 주었던 장소이다.(예레6,22.23) 그러나 주님의 권능은 그와 같은 세상 권세를 이기고도 남음이 있기에, 그의 백성이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있다 할지라도, 능히 주님께서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수 있다. 

또한 '땅끝'에 해당하는 '야르케테 아레츠'(yarkethe arets)'북녘땅'을 심화하여 나타낸 표현이다. 이것은 장소적으로 남부 유다 땅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을 나타낼 뿐 아니라 선민이 고국으로 돌아오기에는 혼자만의 힘으로 불가능한 상황을 대변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주님의 구원은 인간의 이러한 모든 불가능을 뛰어 넘는 구원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끄시는 구원은 그 혜택을 받는 자들에게 관련해서 볼 때 차별이 없으며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성격을 지닌다. 

본문에 진술된 네 종류의 사람들 즉 눈먼이,다리저는 이,아이를 밴 여인,아이를 낳는 여인모두 다 자기 힘으로는 귀환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짧은 거리의 여행조차도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건장한 자들이나 장정들만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연약하고 비천한 사람들까지도 구원의 대열에 참여케 하신다. 여기에 주님의 자비하심이 잘 드러난다. 

고대 근동의 문화적 배경을 고려하면, 인간적인 시각에서는 이들이 사회 재건에 별 기회가 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자비가 풍성하신 주님의 시각에서는 이들이 단지  주님의 형상을 닮은 존귀한 자들이며,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창세1,26) 더없이 귀한 존재들이다. 

사회에서 천히 여김을 받으며 극히 약하고 무기력한 자들로 여겨지던 그들에게 주님의 구원이 임한다는 것은 구약의 여러 예언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예언하는 바이기도 하다.(이사35,5,6; 미카4,6-8 ; 스바3,19.20) 

한편 구약의 성전 제사 규정 및 봉사와 관련하여 눈먼 이나 다리저는 이들은  주님께 가까이 나아갈 자격이 아예 없는 사람들이었다.(레위21,17-24) 또한 해산하는 여인도 부정한 자로 간주되어 정해진 기간동안 성소에 가까이 할 수 없었다.(레위12,1-8) 

그러나 앞선 예레미야서 31장 6절의 외침 즉 "일어나 시온으로 올라가 주 하느님께로 나아가자." 라는 외침은 여기에 예언되고 있는 자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이것을 감안할 때, 본문은 주님의 구원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시점에는  과거 그러한 모든 의식적 제한들이 다 해제될 것임을 나타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이 예언이 그리스도안에서 남자도,여자도,유다인도,그리스도인도, 불구자도,일반인도 없는 즉 그 모든 구별이 사라지는 신약 시대, 곧 종말론적 구원의 완성과 성취를 내다보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로마10,12) 

'큰 무리를 지어 이곳으로 돌아오리라.' 본문은 귀환하는 자들의 숫자가 많을 것임을 나타낸 것일 뿐 아니라 그들이 주님 앞에 예배하는 큰 공동체의 성격을 띠고 돌아올 것임을 암시한다. '무리'에 해당하는 '카할'(qahal)은 구약 성경에서 주로 주님 대전에서 그의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는 종교적 공동체를 나타내는 데 사용된 단어이다.(레위4,14 ; 민수16,33) 

구약 시대의 그 회중은 정상적인 남자들로만 구성되어 있었으나,주님의 구원이 시행될 때에는 앞의 네 종류의 사람들까지 포함되며 여러 구약적 맥락의 제한 규정이 해제된다. 즉 본문은 장차 이루어질 구원의 포괄성을 예언하고 있다. 

"그들은 울면서 오리니, 내가 그들을 위로하며 이끌어 주리라.  물이 있는 시냇가를 걷게 하고 넘어지지 않도록 곧은 길을 걷게 하리라."(9) 주님께서 남부 유다 백성을 이끌어 고향 땅으로 들어가게 하실 때에 그들은 울면서 돌아올 것이다. 그런데 구원의 여정에서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더욱이 '울면서' 에 해당하는 '삐뻬키'(bibek ; with weeping)의 원형 '뻬키'(beki)감당하기 힘든 슬픔을 당할 때 매우 큰 소리로 통곡하면서 우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다.(신명34,8; 2사무13,36) 

구원의 여정이 슬픔이 아니기 때문에 혹자는 이를 기쁨의 표시로 우는 울음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원어의 의미를 임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라 받아들이기 힘들다. 따라서 이보다는 뒤에 이어지는 예레미야서 31장 18,19절의 내용과 관련하여 과거 자신들의 죄악에 대한 회개의 표시로 흘리는 눈물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 

이제 남부 유다 백성들이 회개하는 가운데 귀환의 길을 걸어 고향 땅으로 돌아올 때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험한 곳으로 방치하지 않고,안전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고,주님 대전에 바른 존재로 서도록 역사하실 것이다. 

강수량이 적은 근동에서 '물'이 있는 시냇가는 풍성한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이다. 특히 광야에서의 삶은 물이 없을 경우 생명을 지탱하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주님께 복을 받은 사람들은 그 모습이 시냇가에 심겨져 사시사철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로 비유한다.(시편1,3) 

과거 선민은 주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물이 아닌 그들 스스로 저수 동굴(웅덩이)을 파서 물을 얻으려고 애를 썼다.(예레2,13) 다시 말해서 그들은 생수의 원천이신 주님을 버리고, 주님 밖에서 무언가 자신들의 심령과 삶을 충족시켜 줄 것을 얻기 위해 웅덩이를 팠다. 하지만 그 웅덩이는 물을 담아 두지 못하는 갈라진 웅덩이였다. 

그러나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회복시키실 때에는 과거처럼 허망하게 그렇게 애쓸 필요가 없으며 주님께서 전적으로 채워주심으로 그들은 만족을 누릴 것이다. 이것을 구원사적 관점에서 접근하면, 본문에서 말하는 물이 있는 시냇가란 인간의 심령을 충만하게 채워 영적으로 기쁨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성령의 임재와 연결된다.(요한7,37-39) 

한편 '곧은 길'에 해당하는 '뻬데레크 야샤르'(bederek yashar)는  비유적 측면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원래 이 단어는 조금도 구부러짐이 없는 올곧은 상태를 나타낸다.(욥기1,1) 구약 성경에서 120회나 사용되는데, 대부분 주님께서 보시기에 의롭거나  인격적으로 정직하거나 올바른 상태를 가리킨다.(신명12,25; 32,4; 1열왕15,5; 욥기1,1) 

과거에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선민들이 자기 욕심대로 행하며 그릇된 삶을 살았다. 하지만 이제 그들이 울며 회개하는 가운데 돌아오는 길은 주님의 성령으로 충만할 것이며 그들의 인격과 행위는 의롭고 온전한 것으로 변모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바르티매오가 아닌가!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의 절규는 단순한 부르짖음이 아니라 그의 신앙 고백이요 기도입니다.
절박한 상황에서 예수님께 소리치며 부르짖는 그를 주위 사람들은 시끄러우니 잠자코 있으라고 합니다. 거지 주제에 운명이려니 하고, 자신의 처지를 그가 온순하게 받아들이기를 강요하는 듯한 분위기입니다. 고통을 통해 가르치시고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섭리와 계획을 그가 믿고 기다리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의 지혜로운 처사에 불만을 표출하면서 소리를 질러 댄다고 생각합니다.
정해진 날 정해진 시간에 성전에서 경건하게 정성껏 올리는 자기들의 제사만 아름답고 고고한 기도라고 생각하면서, 길거리에서 소리치는 그의 부르짖음은 소음 공해에 불과할 뿐,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에 오히려 방해만 된다고 꾸짖으면서 소리치지 말라고 저지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우리 자신 안에서도 이 두 가지 생각이 충돌하면서 혼란과 갈등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요. 마음속에서 치솟아 오르는 부르짖음이 있지만 무엇인가가 내리누르면서,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조용히 기도만 하고, 눈길을 저 높은 곳에 고정시켜, 눈먼 거지가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느님을 번거롭게 하는 일에 신경을 쓰지 말라고 스스로 타이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부르짖는 눈먼 거지에게서 당신에 대한 믿음을 보시고 확인하십니다.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는 간청은 이 비참한 내가 눈을 뜰 수 있다는 믿음, 예수님께서 나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으시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구원을 받은 것은 그에게 잠잠히 있으라고 꾸짖던 이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길을 막고 그분께 소리를 지르던 눈먼 거지였습니다.
용기와 소신을 갖고 필사적으로 예수님께 매달린 바르티매오의 신앙을 본받아 우리도 적극적으로 주님께 나아가 우리의 나약함을 치유해 주시도록 기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한 걸음도 물러설 수 없는 벼랑 끝 절박한 상황에서 우리의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의 부르짖음이 어떻게 들리시는지요? 그리고 그가 도움을 요청한다면 …….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바르티매오의 기도

<예리코에서 눈먼 이를 고치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 예리코에서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이를 고쳐 주신 이야기는(마르 10,46-52), 겉으로만 보면 '장애자 치유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직전에 있었던 일이라는 점에서 이 이야기를 '예수님을 따른 사람의 이야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르티매오는 앞을 보지 못했고, 예리코 길가에 앉아서 구걸을 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은, 그저 하루하루 먹고사는 일만 걱정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삶'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재산이 많은 부자라고 해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이 자기 앞을 지나가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순간 그에게 '새로운 희망'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자기 앞을 지나가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말을 듣고 '새로운 삶'을 희망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부터 '새로운 삶'을 희망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는 그 희망이 이루어질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간절하게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섭리' 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면,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을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은, 바르티매오의 희망과 기도에 하느님(예수님)께서 응답하신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하느님(예수님)께서 '언제든지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바르티매오를 선택하시고 부르신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보통 거지들이 청하는 자비는 몇 푼의 돈을 뜻하지만, 바르티매오가 청한 자비는 돈이 아니었습니다.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7)." 라는 바르티매오의 간청은, 다시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간청이고(마르 10,51), 이것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해 달라는 간청입니다.

복음 말씀에는 바르티매오가 큰 소리로 예수님을 계속 불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부르신 것으로 되어 있는데(마르 10,48-49), '부르심과 응답'이라는 관점에서,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부르시고 그가 응답한 것으로 바꿔서 생각해도 됩니다.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마르 10,50)." 이 짧은 문장은 바르티매오의 희망이 무엇이었는지, 또 그 희망이 얼마나 간절한 것이었는지를 잘 나타냅니다. '겉옷을 벗어 던지고' 라는 말은, 그가 '낡은 삶'을 벗어 던졌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벌떡 일어나' 라는 말은,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이 간절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그가 어떻게 예수님께 곧장 갈 수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옆에서 누군가가 도와주었을 수도 있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손을 내밀어 주셨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마르 10,52)." 바르티매오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그가 희망했던 '새로운 삶'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었음을 암시합니다. 단순히 다시 보는 것이 아니라.~~~

"가거라." 라는 예수님 말씀은, "이제부터 '새로운 삶'을 살아라."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은, "네가 믿고 희망한 대로 너는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인데, 이 말씀에 "나를 따라라." 라는 부르심도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떻든 다시 보게 된 바르티매오는 곧바로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서는데, 그 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고, 십자가를 향해서 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길입니다.

이 이야기와 사도행전 3장에 있는 이야기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와 요한 사도가 성전에 가는데 어떤 장애자가 두 사도에게 자선을 청합니다(사도 3,3). 사도들에게 몇 푼의 돈을 청한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 사도는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도 3,6)." 그러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킵니다(사도 3,7). 그 장애자는 몇 푼의 돈만 청했지만, 베드로 사도는 그가 청한 것보다 훨씬 더 큰 것, 즉 몸의 치유와 새로운 인생을 주었습니다.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을 따라간 것처럼 그 사람도 사도들을 따라갑니다(사도 3,8.11). 그리고 두 사도가 붙잡혀서 최고의회에서 재판을 받을 때, 사도들 곁에 서서 함께 재판을 받게 됩니다(사도 4,14). 아마도 그는, 사도들이 붙잡혀서 이튿날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을 때(사도 4,3), 사도들과 함께 붙잡혀서, 감옥에 함께 갇혀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신앙인이 되어서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즉 신앙인으로서 사도들과 같은 길을 가는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지금 무엇을 희망하고 있는가? 예수님께 기도할 때 주로 무엇을 청하는가? 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몇 푼의 돈인가? 몸의 건강인가? 세속에서의 출세와 성공인가? 아니면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새로운 삶인가?

하느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마태 7,11). 혹시 나는 그 '가장 좋은 것'을 외면하고 '덜 좋은 것'만, 또는 '나쁜 것'만 청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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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25일 연중 제30주일 복음 (마르10,46ㄴ-52)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50)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소경을 불러오라고 명하시고, 그에 따라 사람들이 소경을 부르고 있는 장면을 생생하게 기록하였으며, 또한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해 소경 바르티매오가 어떻게 반응하였는지를 현장감있게 생생하게 기록하여 역동감을 더해 준다.

여기서 '겉옷'해당하는'히마티온'(himation; garment; cloak)70인역(LXX)에서 '겉옷' '의복'의 두 가지 뜻을 모두 나타내는 히브리어 '베게드'(beged)에 대한 역어로 나온다.

겉옷은 일교차가 큰 팔레스티나에서는 밤에 이불의 역할을 했다. 따라서 이것은 생활 필수품이었으며, 특히 거지 바르티매오에게는 낮에는 거지 행세를 할수 있는 유니폼이었다.

낮에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거지 노릇을 할 수 있는 유니폼이요, 밤에는 이부자리가 되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예수님께 갔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요 용기였다. 만일에 그가 예수님께 갔다가 치유받지 못한다면,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경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의 소리가 들리는 그 방향으로 재빨리 나아가는데 있어서 그 겉옷이 방해물이 되자 그토록 자신에게 중한 것이었지만, 미련없이 가차없이 내어 버렸다.

참으로, 단 한번만이라도 예수님을 가까이 대면하고 싶었던 그의 간절하고 뜨거운 마음과, 예수님을 만난다면 자신이 반드시 치유받을 수 있으리라는 내적 확신(믿음)과 희망이 이런 행동을 가능케 했다고 본다.


오~~~바르티매오, 당신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마르 10,51)

예수님께서 만약
"내가 청하는 것을 들어줄테니 말해 봐라" 하시면 여러분은 무엇을 청하실래요?
한 가지만 청하라면 신중히 생각하여 청해야겠지요.

자, 정하셨나요?
그분은 자비하시니 꼭 들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세요.
그리고 그것만 있으면
주님을 더 잘 섬기고 이웃을 더 잘 섬기며
하느님 자녀답게 잘 살아갈 수 있겠는지 생각해 보세요.
일시적인 문제해결에 촛점을 맞추지 말고
하느님 자녀답게 살아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성찰하십시오.

오늘 눈먼 이는
"다시 볼 수 있도록 해 주십사" 청을 하네요.
아마도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느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잘 보았었는데
무엇에 눈이 멀었는지
그만 하느님 자녀답게 살 수 없게 되어버렸나 봐요.
그래서 "다시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는 것이겠지요.

나는 무엇에 눈이 멀어
볼 것을 못 보고 엉뚱한 것만 눈에 들어와
참 하느님 자녀답게 못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되십시오.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지닌 이는 참으로 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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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복음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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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2주일] 가난한 과부의 헌금 (마르코12,38-44)15.11.08조회 128[연중 제31주간 모든 성인 대축일] (묵시 7,2-4.9-14; 1요한 3,1-3; 마태 5,1-12ㄴ)15.11.01조회 77[연중 제30주일] 예리코 소경치유 (마르 10,46ㄴ-52)15.10.25조회 58[연중 제29주일] 전교주일.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마태 28,16-20)15.10.17조회 62[연중 제28주일] 낙타와 바늘 구멍 (마르 10,17-30)15.10.11조회 55[연중 제27(군인)주일]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 (마르 10,2-16)15.10.04조회 126[연중26주일 한가위]어리석은 부자 (루카 12,15-21)15.09.26조회 312[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루가9,23-26)15.09.19조회 97[9월13일 연중 제24주일]하느님의 일 (마르 8,27-35)15.09.12조회 111[연중 제23주일] “에파타!” (마르 7,31-37)15.09.05조회 430[연중 제22주일]조상들의 전통 (마르 7,1-8.14-15.21-23)15.08.30조회 280[연중 제21주일 2015. 8. 23.] 생명의 말씀(요한 6,60-69)15.08.22조회 395[2015년 8월 16일연중 제20주일] 생명의 빵 (요한 6,51-58)15.08.15조회 354[ 8.15광복70주년]성모 승천 대축일((루카 1,39-56)15.08.14조회 455[연중 제19주일]하늘에서 내려온 빵(요한 6,41-51)15.08.09조회 456[연중 18주일]생명의 빵 (요한6,24-35)15.08.02조회 321[연중 제17주일]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요한 6,1-15)15.07.25조회 5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