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강 교회의 미래상

2011. 5. 22. 오전 6:50:14

글자
 
 

 전광진 신부의 교회 이야기

 

제45강 교회의 미래상 

오늘날 세상변화

 

오늘날 사람들의 사상을 포스트 모더니즘(Post-Modernism)이라고 부른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특징은 '개인과 자유'다. 공동체를 싫어하고 규칙을 싫어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과 자유를 추구하는 힘은 정보에서 나온다.

 

뛰어난 경영인은 앞을 내다보는 혜안이 있다. 뛰어난 경영인들이 혜안을 가지는 이유는 단 한가지다. 그것은 가장 정확한 정보를 가지기 때문이다. 가장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길 중의 하나는 '끊임없는 독서'다.

 

 

독일 레겐스부르크 교구는 신부가 환속하면 사회에서 적응할 때까지 교구에서 3년 동안 생활비를 대준다. 주로 젊은 신부가 환속을 하기 때문에 돈도 없고, 또 환속하기까지 이미 많은 고통에 시달렸을 것이기 때문에, 사회에서 좌절하지 않도록 교회가 도와주는 것이라고 한다. 실패한 사람에게까지 따뜻하게 배려하는 독일사람들의 마음이 부럽다.

 

우리나라에서 환속한 신부들에게 교구에서 생활비를 준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했다.

 

'예수마음'을 생각한다. 미래의 교회도 예수마음을 깊이 새겨야 하겠다.

 

 

2. 카알 라너신부(1904-1984)의 미래교회전망

 

 

카알 라너신부의 사상을 중심으로 미래의 교회를 다음과 같이 전망해본다.

 

 

1) 열린 교회

 

미래교회는 열린 교회가 될 것이다.

 

옛날에는 조용히 기도하고 덕을 닦으면서 살다가 천당에 가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이런 영성을 '도피의 영성'이라고 한다. 교회는 세상에서 떨어져 교회 안에서 살아야 했다.

 

옛날 중세 세계관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1) 이원론 : 사물을 흑과 백으로 보는 이원론이 토대였다.

 

(2) 개인주의 : 내하나만 열심 해서 천당 가면 그만이다는 태도다.

 

(3) 내세주의 : 지상은 악이고 천상은 복이니 이 세상보다는 저세상을 찾는 태도다.

 

(4) 육신비하 : 육신은 악으로 보고 영혼만 중시하는 태도다.

 

(5) 내재주의 : 내가 내 안에서 만드는 신앙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교회로 하여금 세상으로부터 도피를 강조했다.

 

1900년대 중반에 들어오면서 유럽에서는 세상과의 단절이 교회를 세상으로부터 외면 받게 했고 그 결과 가톨릭교회의 끝없는 추락을 낳았다는 깊은 반성이 있었다. 교황 요한23세와 카알 라너와 같은 신학자들은 교회가 세상을 더 이상 악이 들끓는 세속으로 단죄해서는 안된다고 판단하였다. 교회가 세상을 품지 않으면 교회의 미래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개최하면서 공의회의 모토를 '현대세계에로의 적응'으로 정하고 교회가 세상으로 향하기를 염원하였던 것이다.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신 것이 주님의 간절한 뜻이었다. 오랫동안 교회는 세상을 악의 소굴로 보고 멀리하였다. 그리고 교회 안으로 폐쇄되어 세상의 소리에 귀를 막고 살았다.

 

유럽전체가 가톨릭이고 유럽전체가 가톨릭국가였을 때는 그것이 통했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었다. 세상은 저만치 앞서 나가고 교회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이제는 교회 안에 머물러있기만 한다면 아무도 교회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교회 안에 도피해있기만 한다면 교회 문을 닫아야할 형편이다.

 

 

세상을 향해 시원하게 문을 열어야 하겠다.

 

세상 속에서 사람들을 구원하려하신 주님의 간절한 염원을 생각한다. 현대세계에로의 적응을 간절히 원했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염원을 생각한다. 교회는 결코 세상과 분리될 수 없고, 세상 안에서 세상 사람들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통을 함께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세상적인 것을 보고 듣고 시야를 키워나가야 하겠다.

 

 

2) 소공동체 교회

 

미래교회는 다양한 소공동체가 활성화되는 교회가 될 것이다.

 

이제는 교황청과 교구에서 기획하고 정해주는 행정구역이나 조직이 당연히 교회를 활성화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래로부터 형성되는 소공동체는 다양한 형태를 띠게 될 것이다.

 

한 본당 내에서도 구역에 따라 정해지는 속지적인 소공동체뿐만이 아니라, 같은 관심사를 매개로 자연스럽게 구성되는 속인적인 소공동체들이 형성될 것이다. 마라톤동호회, 배드민턴동호회와 같은 동호회도 생겨날 수 있다. 나아가 같은 신앙적 관심으로 모인 다양한 신심단체, 레지오마리애나 성서모임과 같은 소공동체들도 활성화되어야 할 것이다. 사목자들은 다양한 소공동체들을 선의의 마음으로 육성하고 지원해야 할 것이다.

 

 

3) 민주화된 교회

 

미래교회는 민주화된 교회가 될 것이다.

 

탈권위가 오늘의 시대정신이 되고 있고, 이제는 무조건적인 순명 보다는 함께 논의하고 마음으로부터의 협력을 이끌어 내는 것이 더욱 많은 성과를 낼 수 있는 시대가 되고 있다.

 

주교, 신부, 부제를 뽑는 방식은 성경에 나와 있지는 않다. 되도록 적임자가 임명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 특히 주교의 임명방식은 시대에 뒤떨어진 방식이다는 의견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교회가 침체되고 있고 어떤 방법으로든 대처가 필요하다면 보다 민주적으로 주교를 선임하는 방식이 대안이라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라너신부는 '주교를 선임할 때 그 교구의 사제들만이라도 실질적인 방식으로 참여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성직자들은 직무를 행함에 있어 거의 독재적인 자유가 있고 그 남용을 견제할 만한 장치도 별로 없다는 것도 문제다. 지금까지 성직자들은 권유하기보다는 명령하고, 의논하기보다는 판단하고, 제시하기보다는 지시하고, 봉사하기보다는 군림해 왔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사제평의회나 사목협의회가 의결기관이 아니라 자문기관에 불과한 것도 낡은 행정체계이다. 그래서 평신도들의 보다 적극적인 참여가 요청되고 있다. 그저 자문기관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오늘날 폭넓은 동의를 얻기 어렵다. 라너신부는 평신도들의 단순한 자문역할을 넘어 심의방식의 참여권을 인정해주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요청만 나오면 덮어놓고 교회의 본질에 반하는 민주화인 것처럼 의혹을 품어서는 안될 것이다.

 

 

오늘날 소통의 부재가 주는 폐해가 자꾸 드러나고 있다.

 

첫째, '대화'는 소통의 실제적 조건이다.

 

명령과 지시만으로는 이제 안되게 되어있고 맹목적인 순종의 요구도 이제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사실 순명이라는 것도 개인의 자유로운 동의가 있을 때 효과를 내는 것이다.

 

둘째, '나눔의 정신'이 소통의 실현을 가능하게 한다.

 

한국교회 교구와 교구사이의 장벽이 때로는 개신교 교파간의 장벽만큼이나 높다는 말이 있다. 교구의 경계선이나 본당의 구획선이 편의상 구분하는 실정법의 산물인데도, 우리교회는 교구나 본당을 너무 절대시하는 풍토가 만연되어 있다. 교구나 본당이 주교나 본당신부의 봉건 영토가 아니다.

 

 

4) 사회참여교회

 

미래교회는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

 

'선교의 개념'이 '복음화'로 확대되고 있고, 진정한 복음화는 단순히 신앙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생활 전반을 행복하고 풍요롭게 변화시키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세상의 다양한 일들이 모두 인간구원과 관련되어 있기에 교회는 세상의 다양한 분야에 보다 열린 마음으로 참여해야 할 것이다.

 

사회를 정의롭게 하는 일, 부패를 막는 일, 사회의 여러 문제를 개선하고 해결하는 일, 민족의 평화와 화해에 기여하는 일,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 환경을 개선하고 인류의 공동선을 위해 노력하는 일 등등이 모두 교회의 복음화다.

 

하지만 교회 안에는 보수적인 성향으로 말미암아 변화가 느리기에 교회의 사회개혁적인 과제에 대해 심도 있게 자각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이런 상황을 개선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기 쉽다. 아직도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빨갱이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예수님께서 이 시대에 오신다면 과연 누구를 위해 무엇을 하시겠나? 권력자나 가진 사람들보다는 없는 사람들, 노동자, 농민, 비정규직, 철거민, 독거노인과 같은 소외되고 힘없는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시지 않겠나? 우리가 어려움에 처한 노동자와 농민, 비정규직 사람들, 철거민들, 외국인노동자나 다문화가정을 위해 진정으로 아파한 적이 있는지... 그들의 절규와 단체행동을 그저 못마땅한 눈으로 보고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교회의 사회참여는 정치의 영역도 포함된다. 정치제도와 정책이 사회의 공동선에 부합하도록 감시하고 개선의 요구를 하는 것도 이 시대의 복음화다.

 

또한 환경문제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대처도 필요할 것이다. 4대강 사업과 같이 개발지상주의에 사로잡혀 환경이 파괴되고, 그 피해가 민족전체를 고통으로 몰아가는 거대한 흐름을 바로잡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 도시 재개발로 억울한 피해자가 눈물을 흘리는 일이 없도록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인구문제, 기아문제, 고령화문제, 민족화해문제 등이 교회의 새복음화 과제다.

 

 

3. 서열주의에서 능력주의로

 

나는 유럽에서 6년을 살면서 유럽 가톨릭교회의 어려운 현실을 가까이서 보았다. 유럽의 가톨릭교회도 여전히 서열주의를 고수하고 있었다.

 

한국가톨릭교회도 엄격한 서열주의를 고수하고 있다.

 

신부들은 서품연차에 따라 서열이 지어진다. 순서가 되면 일제히 본당에 발령을 받고, 일정한 나이가 되면 일제히 은퇴한다. 본당의 특성이나 사제의 개인의 역량보다 대체로 서품연차 순으로 큰 본당에 배치한다.

 

서열주의에서 능력중심으로 교회를 운영할 것을 신중하게 검토해야 할 것이다.

 

옛날에는 성과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모두가 농사를 짓던 시절에는 결과에 큰 차이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다르다. 성과를 내지 못하면 금방 문을 닫는 것이 오늘날 냉엄한 세상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옛날 유럽 모두가 가톨릭신자였던 시절에는 선교가 필요 없었다. 근데 지금은 다르다. 선교가 없으면 교회도 문을 닫아야 한다. 따라서 교회성과의 첫 번째는 '선교'다.

 

 

오늘날 세상은 '서열주의에서 능력주의'로 변화하고 있다. 시간만 지나면 호봉이 올라가고 봉급이 올라가는 제도가 바뀌고 있다. 그래서 연봉제라는 말이 나오고 성과급이란 말이 나온다. 기업뿐만 아니라 공무원, 대학교수들도 평가제가 도입되고 있다.

 

교회는 서열주의를 고수하고 있다. 서열주의에는 경쟁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그러다보니 성과에 무관심하고 사제들도 동기부여가 약해지기 쉽다. '선교에 성과를 내라'고 사제 개개인의 윤리에만 호소해서는 한계가 있다. 반드시 제도화되어야 효과가 있다.

 

그래서 사제들도 평가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좀 생소한 말이지만, '사제평가'라고나 할까?

 

 

교회의 능력주의

 

교회의 능력주의는 평가를 해서 기업처럼 잘라내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능력주의는 '각자의 재능에 따라 꼭 필요한 자리에 배치하는 것'이다. 사람은 서로 재능과 능력이 다르고 또 잘 할 수 있는 일이 다르기에, 각자의 재능과 능력에 따라 잘 할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전체 교구나 수도회가 열매를 많이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교회 능력주의의 핵심이다.

 

 

성경에도 잘 하는 사람에게 더 큰일을 맡기도록 하고 있다.

 

미나의 비유(루카 19, 11-27) : 어떤 사람이 종 열 사람에게 미나 한 개씩을 나누어 주고 먼 길을 떠났다가 돌아와서 얼만큼의 돈을 벌었는지 보았다. 열 개로 늘린 종에게, '잘했다. 나는 너에게 열 고을을 맡기겠다.' 다섯 개로 늘린 종에게는, '너도 잘했다. 너에게는 다섯 고을을 맡기겠다.' 근데 한 개 그대로인 종에게는, '이 게으른 놈. 여봐라. 저자에게서 미나를 빼앗아 열 개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주어라.'

 

탈렌트의 비유(마태 25, 14-30) : 두 탈렌트와 다섯 탈렌트를 맡긴 두 사람이 각각 두 탈렌트와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다. '니가 작은 일에 충실하였으니 큰 일을 맡기겠다...' 근데 한 탈렌트를 맡긴 사람은 한 탈렌트 그대로였다. '너는 게으른 종이다. 여봐라. 저 자에게서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신부들의 역량을 사목결과를 통해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해마다 종합되는 교세통계표가 가장 확실한 기초자료라고 할 수 있다.

 

사제평가 기준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소를 생각할 수 있다.

 

1) 세례자숫자 2) 판공성사자수 3) 교납금증감율

 

이 세 가지를 해마다 산출하고 최소한 3년 치를 평가해서 사제인사의 기초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본당평가 기준으로 몇 가지 요소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1) 도시본당, 중소도시본당, 시골본당, 2) 발전가능성이 많은 본당, 현상유지본당 3) 노인본당, 젊은 층이 많은 본당 등의 기준에 따라 본당을 평가해서 사제인사의 기초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유능한 신부를 발전가능성이 많은 본당으로 배치하는 것이 전체교회를 살리는 길이다. 그렇지 못한 신부는 그 적성에 맡는 일을 맡기는 것이 전체교회를 살리는 길이다. 교회의 능력주의가 유럽교회의 전철을 밟지 않을 유력한 대안이 될지 기대된다.

 

 

4. 결론

 

미래교회를 생각하면서 다시 '예수마음'을 생각한다. 미래의 교회는 예수마음을 깊이 새겨야 하겠다.

 

교회는 많은 경우에 아직 교리화된 딱딱한 하느님을 전하고 있는 것 같다. 교회의 복음선포가 이론에 그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론적인 선포는 공허하게 그칠 수밖에 없다. 실천적인 선포가 필요하겠다. 복음을 우리의 마음에, 우리의 손에 담아내야 하겠다.

 

예수님의 모든 행위는 추상적인 이념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죄를 용서하고 병을 고쳐주었다. 슬픔에 동참하여 눈물을 흘렸고 완고한 마음 앞에 탄식하였다. 예수님은 현실주의자셨다.

 

뛰어난 성인들은 이상주의자들이 아니었다. 사도바오로... 이냐시오... 마더 데레사... 이 분들은 고상한 명상 속에 사신 분들이 아니었다. 죽는 날까지 현실 안에서 억척같았던 분들이었다... 깊은 영성이란 것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도 내 신앙을 내 생활 구석구석에서 드러내야하겠다. 내 신앙을 마음속에만 감추어 두어서는 안되겠다.

 

예수님의 마음은 차가운 이론이 아니라, 따뜻한 연민의 마음이었다. '인간에 대한 연민(憐憫)'... 내 박사학위 논문주제가 지금 교황님인 '요셉 라칭거의 교회론'이었고, 마지막 결론이 '교회는 인간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였다. 모든 인간에 대한 연민... 이 말이 미래교회가 가져야할 마음이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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