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진 신부의 교회 이야기
세상 풍토가 많이 바뀌었다. 교회의 리더들도 기술이 있어야 한다. 기술이 없이 마음만으로 안된다.
리더의 기술이 리더십이다. 리더가 최고의 리더십을 가질 수 있는 힘은 역시 '정확한 정보'다. 정확하게 알지 못하니 판단이 시원찮고 잘못 판단하니 사람들이 상처받고 공동체가 죽는다.
오늘날 리더십을 갖춘 사람이 리더가 되어야 조직이 산다.
오늘날 급변하는 세상에서 이순신리더십을 배우려는 개인과 조직이 늘고 있다. 웬 이순신장군이냐고 하겠지만... 열악한 환경, 무능한 조정, 부족한 지원이라는 온갖 악조건에서도 주어진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여 불가능했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장군의 탁월한 리더십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강한 영감을 줄 수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이순신과 같은 뛰어난 분을 모시고 있지만 실상은 잘 모른다.
일본의 가장 뛰어난 장군으로 평가되는 사람은 도고 제독(1848-1934)이다. 도고 제독은 러일전쟁 때 러시아함대를 격파한 일본제일의 명장이다. 훗날 부하들이 도고 제독을 영국의 넬슨 제독(1758-1805)과 비교하며 이렇게 칭송하였다. : "장군은 넬슨 제독에 버금가는 해신과 같은 분이십니다." 넬슨 제독은 나폴레옹의 프랑스 함대를 격파하고 대영제국 시대를 열었던 역사상 가장 뛰어난 해군 제독으로 평가받는 장군이다.
이때 도고 제독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 "영국의 넬슨은 뛰어난 장수였지만 군대의 신이라고 할 정도의 인물은 되지 못한다. 인류역사상 해군의 신이라고 할 수 있는 장군이 있다면 오직 조선의 이순신 한사람뿐이다. 이순신과 비교하면 나는 하사관도 못된다."
1. 이순신장군과 임진왜란
장군은 1545년 4월 28일 현재 서울 인현동에서 사형제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장군의 조부는 기묘사화(1519년) 때 조광조와 뜻을 함께 하다가 큰 고초를 당하여 가세가 기울었고, 장군이 두 살 때 장군의 아버지는 한양을 떠나 처가 고향인 충청도 아산에 정착하게 된다.
성분이 나빴던 장군은 문과에 나갈 수가 없었다. 28세에 무과에 응시하였으나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낙방하고 32세에 무과에 합격, 초급장교로 임명된다. 주요한 연줄이 없었던 장군은 변방에서 야전지휘관으로 전전하다가 마침내 전라좌수사와 삼도수군통제사로서 임진왜란동안 왜군들을 섬멸하다가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였다.
일본은 산이 높고 골이 깊어 270개현으로 나뉘어 있었다. 일본역사상 처음으로 천하통일을 이룬 장군이 토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였고 그때가 1590년이었다. 토요토미는 전쟁으로 단련된 힘을 모아 조선침략을 결심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임진왜란이었다.
1592년 4월 13일, 바다를 건너온 왜군은 부산을 간단히 석권하고 승승장구했다.
부산성, 사령관 정발과 군사 2천명이 전멸했다. 한나절이 걸렸다.
동래성, 사령관 송상현과 군사 3천명도 전멸했다. 역시 한나절...
일본은 성을 공격하는 공성전에 능했다. 당시 일본군의 칼솜씨는 최강이었다. 일본군에는 노련한 칼잡이들이 포진하고 있었고, 게다가 신식무기였던 조총으로 무장했으니... 조선군은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왜군은 거침없이 밀어부쳤고, 대비하지 못했던 조선은 속수무책이었다. 조선전체가 일본군공포에 떨었다.
조정은 다급했다.
당시 한양사령관이었던 이일은 급히 군사를 모았는데 겨우 800명이었다. 이일은 상주에서 처음 일본군과 교전하였는데 전멸하고 만다.
조정은 전방에 있던 당시 최고의 장수 신립을 급히 불렀다.
신립장군은 어리석게도 천혜의 요새인 문경새재를 포기하고 충주 탄금대에 방어선을 폈다가 8000여 결사대와 함께 전멸하고 만다.
5월 1일, 불과 18일 만에 서울이 왜군에 떨어지고 곳곳은 아비규환 지옥과 같은 세상이 되었다.
선조는 서울과 백성을 버리고 평양까지 재빨리 도망갔고 왜군은 전광석화와 같이 밀어부쳤다. 선조는 평양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쳤다. 하지만 평양에 입성한 왜군은 바로 의주로 밀어 부치지 못했다. 의주로 밀어 부쳤으면 상황이 끝났을 것이다.
왜 의주로 밀어부치지 못했을까... 그것은 바로 이순신때문이었다.
토요토미는 전쟁을 시작할 때 수륙양병전을 계획했다. 육군과 함께 수군이 남해를 거쳐 서해로 원활한 군수물자를 조달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육군이 승승장구하는 동안 수군에 문제가 생겼고, 군수물자를 보급 받지 못했던 육군이 보급품을 기다리면서 평양에서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던 것이다. 실로 이순신의 승첩이 나라를 살린 것이다.
1) 한산도해전
바다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당시, 부산, 통영, 여수, 목포의 사령부...
경상좌수사 박홍은 남은 전함을 불태워버리고 달아났다.
경상우수사 원균도 남은 전함을 불태우고 1척을 몰고 합류했다.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부랴부랴 군사를 모으느라 합류하지도 못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함대 홀로 출병하게 되었다.
전라도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해상활동에 강했다. 특히 여수 지방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바다의 용병들이었다. 장보고함대의 중심세력이 바로 여수지방의 뱃사람들이었다.
5월7일, 옥포해전은 이순신함대의 첫 전투였다. 말로만 듣던 일본군과의 첫 대전... 일본전함 30여척을 대파하였고, 4000여명의 적 수군을 궤멸시켰다. 이순신함대는 단 한척의 손실도 없었다. 이어 9일까지 전선 42척과 수군 6000여명을 궤멸시켰다.
이순신은 최초의 승전보를 선조에게 띄웠다. '옥포파왜병장'... 실로 일본군을 이긴 최초의 낭보였다. 평양에서 이를 받아본 선조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이순신이 누구냐?'
이순신의 승전소식은 백성들 사이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번졌다. '공포의 일본군도 별것 아니더라...' 육군의 자신감이 회복되었고... 의병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의병들은 소규모였지만 일본의 보급로를 차단하였고 기습으로 일본군에 조금씩 타격을 주기 시작하였다.
순식간에 평양까지 진격한 왜군은 바다에서 막히면서 더 이상 진격을 하지 못했다.
일본수군의 연패소식에 대경실색한 토요토미는 불호령을 내렸다.
'최강의 일본함대를 동원하여 반드시 이순신을 잡아라.'
이렇게 해서 일본군 최정예 와키자카 야스히루 부대가 한산도에 투입되었던 것이다.
한산도해전... 양측에서 만 명씩 2만 명이 격돌했던 동양 최대 해전이었다.
1592년 7월 8일, 이순신은 일본 최정예전단 73척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그 유명한 학이 날개를 편 것과 같은 학익진전법으로 공격, 59척을 격침시킨다. 일본군 만 명중 살아 돌아간 자는 1000명이 못되었다. 통영 앞바다 조심해야한다. 일본귀신이 많단다.
한산도해전은 일본군의 기를 꺾어놓았고, 일본군에 이순신공포를 불러일으켰다.
토요토미는 이를 갈며 두 가지를 명령한다:
첫째, 앞으로 이순신을 보면 피해라.
둘째, 평양에서 철군하여 남해안 일대에 성을 쌓고 장기전에 대비하라.
유성룡은 ‘징비록’에 이렇게 썼다. "원래 적들이 수륙양면으로 군사를 합세하여 서쪽으로 치려했으나 순신의 이 싸움으로 그들의 위세가 크게 꺾였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평양을 얻었으나 형세가 외로워 더 진격하지 못했다. 우리나라가 보존된 것은 오직 이 때문이었다."
1592년에 개전된 임진왜란은 사실상 여기서 끝이었다.
그 후 1597의 정유재란까지는 대치시기였다.
이 대치시기동안 이순신은 4년 남짓 한산도에 머물면서 계속 전함을 진수하여 300여척으로 늘리고 군사를 훈련시킨다.
제승당... 한산도의 군영의 사령부였다. 특히 장군의 지휘소였던 운주당에서 장군은 밤낮으로 전략회의를 열었고 더러는 갑옷을 입은 채로 잠을 잤다.
장군은 늘 외롭고 고독했다. 무능한 조정은 당파싸움으로 일관했고, 선조는 이순신을 질투하고 미워하였다. 지원도 없었다. 장군은 종종 전망대에 앉아 허전한 마음을 달랬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끓나니...'
2) 명량해전
그 누구도 당대 최고의 병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승리하지 못할 때, 홀로 승전에 승전을 거듭해온 이순신장군... 그러나 적은 내부에 있었다.
1597년 2월 26일... 장군을 시기한 원균의 질투와 모함,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 때문에 구속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선조는 사형을 명했다. 서슬퍼런 상황에서 우의정 정탁의 청으로 겨우 구사일생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졸병으로 강등되었다.
이순신을 몰아낸 원균은 지휘소였던 운주당에 첩을 데려다 놓고 살았다. 저녁에는 자주 연회를 열었다.
1597년 1월, 토요토미의 재차 침공이 시작되었다. 정유재란이었다.
1597년 7월 15일... 조선수군이 전멸한 날... 원균이 지휘했던 막강했던 조선수군과 전함 300척은 거제도 앞바다에서 일본군과 단 한 번의 전투에서 전멸 당하고(칠전량해전), 원균은 배에서 내려 도망치다가 산에서 일본군에 붙잡혀 죽고 만다.
7월 18일, 장군은 수군의 전멸소식을 듣고 통곡하였다.
그러면서도 뜻밖의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된다. 배설장군이 패배를 직감하고 전함 12척을 끌고 탈영하게 된다. 배설은 전함 12척을 지금의 전남 장흥 앞바다에 숨겨놓고 혼자 도주하고 말았다.
선조의 교지가 이순신에게 날아들었다. : "그대를 수군통제사에 명하노라. 하지만 군사가 없으니 육군으로 싸워도 좋다." 이순신은 답을 올렸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이 남아 있나이다."
장군은 일본함대가 남해를 거처 서해로 돌아 한양에까지 진격할 것으로 예감했다. 12척의 전함으로 수백 척의 일본함대를 물리칠 수 있는 곳은 진도 앞 명량해협 뿐으로 직감하고 9월 중순쯤이면 일본함대가 진도 앞바다에 도달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때까지 불과 두 달, 시간이 없었다. 장군은 급히 곳곳에서 군사를 모으고 드디어 전함 12척을 찾아 명량해협에서 대비하였다.
진도대교 아래의 명량해협은 바닷물살인데도 폭포수와 같이 회오리치며 흐르는 것이 장관이다. 물소리가 사람의 울음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명량, 우리말로 울돌목이라고도 불렀다. 하루에 네 번 남해에서 서해쪽과 서해에서 남해쪽으로 번갈아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빠르게 흐르는 물살은 보기에도 놀라울 정도다.
9월 16일, 운명의 날, 300척의 일본함대가 길이 2km 폭 300여m의 좁은 해협으로 길게 늘어서 들어왔다. 이순신은 겁에 질린 장졸들에게 결연히 각오를 다졌다. "필생즉사 필사즉생...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요, 죽기를 각오하면 반드시 살 것이다."
장군은 물밑에 쇠줄을 감추어두었고 빠른 물살을 타고 전진하던 일본전함이 갑자기 당겨진 쇠줄에 걸려 서로 부딪치는 순간 집중공격을 퍼부었다. 2시간이상 계속된 전투로 일본전함 133척이 파괴되어 도주하였고 조선수군은 단 한 척의 피해도 없었다.
이 전투로 잃었던 재해권을 되찾고 일본군을 부산쪽으로 밀어냈던 것이다.
3) 노량해전
1598년 8월 18일, 토요토미가 죽었다. 비밀리에 일본군의 대대적인 철군이 시작되었다.
1598년 11월 18일, 마침내 마지막으로 순천왜성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의 대대적인 철수작전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명나라 장수 진린에게 뇌물을 보내 길을 비켜달라고 했고, 진린이 이순신을 설득했지만 이순신은 추상같았다.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선두에서 지휘하던 장군... 사기가 꺾인 일본전함 500여척 중 450여척을 격파하고 19일 새벽에 총탄에 쓰러지고 만다.
이순신은 이 전투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무능했던 선조는 민심을 잃었고, 영웅이 된 의병장들을 질투했다.
의병장 김덕령은 혁혁한 전공을 세웠는데도 역모에 몰려 옥사했고, 홍의장군으로 전공을 많이 세운 곽재우도 전쟁이 끝나기 직전 의병을 해산하고 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장군은 각종 비리와 당파싸움으로 혼탁한 조정의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다. 살아남았다가 어떠한 변고에 휘말릴지 모를 일이었다. 장군은 평소에 '나는 적이 퇴각하는 날에 죽어 유감될 일을 없애겠다'고 말했다.
11월 19일 새벽... 승리가 확정적인 것을 확인한 장군은 갑옷을 벗었다.
시신을 검시한 기록에는 '총탄이 가슴을 관통해서 등 뒤로 뚫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방탄복은 누에고치로 만든 우수한 것이었고 조총으로는 웬만해서는 뚫기 어려웠다. 게다가 철갑으로 된 갑옷은 조총으로 뚫지 못한다. 그리고 방패를 둘렀다. 정상적으로라면 조총에 맞아 죽을 수 없었다. 방패를 치우고, 갑옷을 벗고, 방탄복까지 벗었다고 추정된다.
장군은 스스로 죽기를 각오함으로써 명예를 지키고, 남아 있는 가족들을 지키고자 하였던 것으로 학자들은 판단하고 있다.
2. 이순신리더십
이순신리더십을 다음 네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1) 격물치지(格物致知)
격물치지는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악하여 안다'는 뜻이다. 현재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최선의 대책을 찾아 대처함으로써 가지고 있는 힘을 최대화하는 태도를 말한다.
일본군에는 노련한 칼잡이들이 많았다. 백병전으로는 일본군을 상대할 수가 없다는 것을 간파한 장군은 근접전을 피하고 함포전으로 일본함대를 섬멸하였다. 일본의 장기인 칼솜씨를 무력화하고 우리의 장점인 화포를 극대화한 전법이었다. 또 일본군이 전함에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결과가 불화살을 견디도록 철지붕을 덮고 송곳을 박은 거북선이었다. 돌격선인 거북선은 적진을 무차별로 헤집고 다니면서 적함과 충돌하여 대오를 흐트려 지휘계통을 차단하였고 그 혼란을 틈타 함포를 집중시켜 일본함대를 격멸시켰던 것이다. 결과는 연전연승이었다.
2) 기본에 충실
장군은 평소에 기본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늘 군사훈련을 통해 유사시에 눈빛만 보아도 서로의 뜻을 알 수 있도록 훈련시켰고 혼란한 해전상황에서 일사불란한 팀웍을 키웠다. 이러한 노력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했을 때 오합지졸의 군대를 단 1년 만에 강군으로 변화시켰고 무적함대로 키워냈던 것이다.
훗날 장군은 일본군이 육지로 상륙하기 전에 부산 앞바다에서 함포로 섬멸했더라면 일본군의 장기인 공성전과 칼솜씨를 무력화시키고 나라 전체의 참화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탄식했다. 불행하게도 부산의 경상좌수사 박홍함대와 통영의 경상우수사 원균함대가 평소에 전투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일본군이 손쉽게 부산에 상륙했던 것이고, 여수의 전라좌수사 이순신함대만이 일본군을 대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 신뢰와 따뜻한 인간미
장군은 사심이 없었다. 자나 깨나 가련한 백성들을 위한 생각뿐이었다. 백성들을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의 안위만을 생각했던 조정의 대신들과 악독한 장수들을 보면서 장군은 통탄하곤 했다. : "장부로서 세상에 태어나 나라에 쓰이면 죽기로서 최선을 다할 것이며, 쓰이지 않으면 들에서 농사짓는 것으로 충분하다. 권세에 아부해 한때의 영화를 누리는 것은 내가 가장 부끄럽게 여기는 바다."
장군의 이러한 강직하고 따뜻한 성품은 부하와 백성들로부터 신뢰라는 큰 재산을 얻었다. 사람들은 절망 속에서도 장군을 보고, '장군이 오시니 우리는 살았다'고 환호하면서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4) 솔선수범
장군은 지휘관으로서 늘 모범을 보였다. 이러한 장군의 솔선수범이 부하장수들에게 믿음을 주었고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는 끈끈한 동지의식을 키웠을 뿐만 아니라 지역민들에게도 인심을 얻고 무한한 존경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장군의 삶은 늘 장졸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는 불굴의 용기를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특히 송희립은 거의 모든 전투에서 장군과 함께 생사를 같이 하였다. 장군이 노량에서 적탄에 맞았을 때 장군의 전투복을 대신 입고 독전하였고 전투가 끝났을 때 장군의 시신을 관음포 언덕으로 모셨다. 훗날 송희립은 장군의 후임으로 전라좌수사에 임명되었던 장군의 심복중의 심복이었다.
실로 장군은 주어진 환경과 조건을 극복하며 마침내 빛나는 승리를 일구었던 진정한 영웅이었다. 하늘이 내린 영웅이 아니라 노력과 결단을 통해 스스로 운명을 개척한 영웅이었다.
우리는 일생을 살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必生卽死, 必死卽生,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요, 죽기를 각오하면 살 것이다'는 말을 들으면 지금도 가슴이 뜨겁다. 장군의 혼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