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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교역사
가톨릭교회는 유대교로부터 독립해서 빠른 시간에 로마제국으로 퍼져나갔고, 유럽화를 거쳐 세계로 진출하였다. 가톨릭교회의 세계선교는 세 단계로 이루어졌다.
1) 로마화의 단계(0-500)
교회초기 300년 동안은 로마제국의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교회는 선교에 온 힘을 다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가톨릭교회의 자유를 선포했을 때 교회는 이미 로마제국 안에서 무시할 수 없는 공동체로 성장하였다. 38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가톨릭을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하면서 가톨릭은 로마제국의 중심종교가 되었다.
2) 유럽화의 단계(500-1500)
476년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게르만 민족 가운데 프랑크족이 서유럽을 평정하게 된다. 프랑크왕국은 가톨릭신앙을 받아들였는데 국가의 국시를 '가톨릭교회의 보호'로 정할 정도로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 황제는 주교를 지방의 왕으로 임명했는데, 주교는 한편으로는 왕으로서, 또 한편으로는 주교로서 그 직무를 수행하였다. 북아프리카에만 300개 교구가 있을 정도로 지중해를 중심으로 유럽일대에 가톨릭교회는 전성기를 맞게 된다.
3) 세계화의 단계(1500-)
1400년대 말, 유럽의 세계진출에 힘입어 가톨릭은 세계로 진출하게 되었다.
당시 해양강국이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서로 다투어 해외에 식민지를 건설하는 한편 가톨릭신앙을 전파하였다. 하지만 현지의 문명을 파괴하고 강제로 가톨릭신앙을 전파했던 당시의 식민지식 선교는 오늘날 반성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세계선교는 주로 수도회가 큰 역할을 하였는데, 1534년에 설립된 예수회가 아마도 가장 큰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또 1653년에 주로 아시아지역 선교를 목적으로 프랑스에서 설립된 '파리외방전교회'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지역 선교에 큰 공헌을 하였다.
세계선교는 많은 순교자들을 낳으면서도 유럽에 선교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복음을 전하겠다는 신념으로 죽기를 각오하고 선교대열에 뛰어 들었고, 유럽교회전체가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선교를 지원하였다.
2. 중남미선교
1400년대 말, 해양강대국이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많은 탐험가와 모험가들이 미지의 세계로 진출하여 부와 명예를 얻고자 했다. 왕실은 국가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이들을 지원해주었다.
포르투갈은 유럽 남쪽으로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항해를 계속하여 드디어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에 도착하였고, 항해를 계속, 인도에 도착하였다. 아프리카, 동인도, 브라질 등등 도처에 포르투갈 식민지가 건설되었다.
1516년, 중국에 최초로 도착한 포르투갈 상인들은 1517년, 마카오에 거점을 설치하였고, 1542-1543년, 일본에 도착하였다. 일본은 이때 문호를 개방하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국력이 급속도로 팽창하기 시작하였다.
스페인도 포르투갈 못지않은 성공을 거두었다. 컬럼부스(1451-1506)는 1492년 이래 아메리카를 발견하였는데, 중남미의 섬들을 인도인줄 착각하고 서인도로 명명하였다. (원주민을 인디오) 컬럼부스와 함께 활동했던 아메리고 베스푸치(1454-1512)도 4번 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하였고, 그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식민지의 노예들과 보물들을 유럽으로 실어 날랐다. 이와 함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엄청난 국력을 쌓아나갔다.
당시 아프리카에서의 노예사냥은 너무나 비인간적이었다. 닥치는 대로 노예를 잡아다가 화물선 밑창에다 수백명씩 가두어 넣고 기나긴 여행 후에 유럽에 도착하면 배안에서 다 죽고 살아남은 노예가 때로는 1/3도 안될 정도로 비참했다. 원주민들과 흑인들은 가족도 부모도 없이 뿔뿔이 노예로 팔려나갔고 백인들의 자산이 되었다.
유럽의 정복자들은 식민지를 개척할 때 신부들을 대동하고 식민지 민족들에게 가톨릭복음을 전하는 것을 거룩한 사명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정복과 동시에 토속종교를 금지시키고, 가톨릭신앙을 강제로 부여하였다. 이렇게 해서 멕시코, 브라질과 같은 중남미 전체가 가톨릭이 되었다. 하지만 인도나 중국, 일본과 같은 토속종교문화가 강했던 나라에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당시의 선교는 '식민지마인드'와 불가분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 바탕에는 유럽사람들의 우월의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유럽이 세상의 중심이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야만인, 다른 종교는 모두 미신이니 다른 종교나 문화는 모조리 파괴하고 가톨릭교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유럽중심의 우월의식과 강제적인 개종정책'은 많은 문제를 일으켰고, 오늘날 비판을 받고 있다. 사실 선교방법은 무자비한 경우가 많았다. 비그리스도인들은 어둠의 자녀들이고 그들의 종교나 문화는 미신이기에 모조리 없애야 했다.
3. 아시아선교
1) 예수회의 적응주의
1534년에 창설된 예수회는 선교를 기존의 식민지마인드에서 탈피해서 새로운 마인드로 접근하였다. 놀랍게도 예수회는 현지의 문화와 생활방식을 인정하는 선교를 도입하였던 것이다.
예수회원 로베르트 데 노빌리(de Novilli, 1577-1656)는 선교방법에 있어서 당시 다른 민족의 종교와 문화를 금지하던 사고를 버리고, 현지에 적응하는 '적응주의'를 주창하고, 원주민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에 적응하는 방법을 주창했다.
2) 인도선교
예수회창설자중의 한사람이었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는 1541년, 유럽을 떠나 인도에 도착하여 1549년까지 8년 동안 고아(Goa)를 비롯, 말라카, 세일론 섬 등에서 선교하였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인도를 떠나 일본으로 떠난 후, 로베르트 데 노빌리는 인도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모든 관습을 허용했다. 나아가 인도의 토속종교에 대해 관용으로 대하였다. 이러한 적응정신에 힘입어 인도에서 가톨릭은 빠르게 전파되기 시작했다.
3) 일본선교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549년 일본에 도착하여 1552년까지 3년 동안 3천여 명의 신자를 얻었다.
1552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중국으로 떠난 후 일본에서는 그의 후계자들인 도레와 페르디난데스 두 신부의 활약으로 가톨릭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1592년부터 일어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종군신부로 파견된 세스페데스 신부는 조선에서 1년간 활동하였는데, 주로 일본군주둔지에서 군인들을 대상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많은 조선인들이 포로로 일본에 붙잡혀가게 되었고, 일본에서 조선인들은 가톨릭을 신봉하게 되었다. 오다 쥬리아 등.
그러나 1598년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도꾸가와 이에야스가 초대 막부가 되어 막부시대를 열면서 가톨릭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도꾸가와는 가톨릭을 방치할 경우 정권에 심각한 도전세력이 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1868년, 명치유신으로 막부시대가 끝날 때까지 일본의 막부는 250년 동안 천주교 말살정책을 취했다.
일본의 민족의식은 칼의 문화로, 철저한 복종이 무엇보다도 사회의 근본토대였다. 그 박해는 집요하고, 철저하고, 처절한 것이었다. 수많은 순교자가 배출되었고, 그 기간도 길었다. 일본의 박해는 조선의 박해보다 훨씬 규모도 크고 기간도 길었다.
신자들은 모두 지하로 숨어들었고 숱한 박해가 있었다.
점차 신자들은 신부 없이 신앙생활을 이어갔는데, 이런 기간이 오랫동안 이어지면서 정통교리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비밀종교인 밀교의 형태를 띠게 되었고, 성모마리아를 하느님처럼 받들게 되는 등 정통교리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이들은 가톨릭신앙에서 많이 이탈된 신앙으로 규모는 적지만 독자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이들을 은신자(隱信者)라고 하고, 이들이 신봉하는 신을 납호신(納戶神)이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많은 은신자들이 토속종교와 합쳐져 가톨릭에서 변질된 민간신앙으로 자리잡고 있다.
1868년 명치유신으로 일본이 근대화의 길을 걸으면서 신부가 다시 오게 되어 흩어진 신자들을 찾았는데, 일부는 돌아오게 되었지만 일부는 신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늘날 일본 가톨릭은 명치유신 이후에 선교한 신자들이 대부분이고 신자는 45만 여명으로 추산된다.
4) 중국선교
프란치스코는 1552년, 당시 대국이었던 중국으로 향했으나 홍콩 근처의 섬 상천도에서 열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훗날 교회사가들은 그를 '동방의 사도'로 불렀다.
마태오 릿치(Matteo Ricci, 1552-1610)는 적응주의를 중국에 적용시켜 비상한 성공을 거두었다. 1590년 북경에 도착한 마태오 릿치는 천문학자요 수학자로 북경의 궁중에서 환대를 받으며 생활하였고, 황제의 친구요, 조언자로 활동하면서 선교할 수 있었다. 그의 사망시 중국지도부에 2천명이상의 가톨릭신자들이 있었다.
아담 샬(Adam Schall von Bell, 1592-1666)은 북경의 고위관리에까지 오르면서 선교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1650년 북경에 성당을 세웠고, 1657년 종교자유를 얻었다. 그의 사망시 27만의 가톨릭신자들이 있었다. 1692년, 황제의 관용령은 중국과 황실에 대한 예수회원들의 공헌에 대한 보답이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사람들에게 그들이 언제나 경건하게 살아왔고, 여러 신들을 경배해왔음을 인정하여 그들 고유의 문화와 신인식을 존중했다. 그리하여 유교의 상제(上帝)개념을 하느님개념으로 환원시키고, 조상숭배인 제사나 여러 의식들도 전통으로 존중해주었다. 그러나 중국의 모든 신인식은 가톨릭 신앙에서 완성될 수 있음을 제시하여 거부감을 주지 않았다.
이러한 적응주의로 중국에서 가톨릭은 빠르게 성장하였다.
그러나 1630년대부터 중국에서 활동하던 도미니꼬회와 프란치스코회의 선교사들은 예수회의 적응주의를 지나친 것으로 주장하고 마태오 릿치와 예수회원들을 로마에 고발하였다.
1645년,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는 적응주의를 금지시켰다. 중국의 모든 종교나 문화는 미신에 불과하며 모두 금지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리하여 제사를 비롯하여 전통적인 유교의식도 미신으로 금지되었다.
1704년, 교황 끌레멘스 11세는 적응주의 금지를 다시 재확인하였다.
1742년, 교황 베네딕도 14세는 모든 적응주의를 근본적으로 금지시켰다. 자존심이 강한 중국, 나라이름도 세계의 중심이라고 중국이라고 지었던 중국에서 결국 박해가 시작되었다. 철저한 박해로 가톨릭은 지하로 숨어들거나 거의 박멸되었다. 중국의 선교는 점차 꺾이고 말았다.
1939년, 비오11세와 1940년 비오12세가 마침내 중국 그리스도교에 대한 적응주의 금지령을 철회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이미 죽을 사람은 다 죽고난 뒤였다. 또 공산화된 중국에서 이 금지령철회는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었다. 1949년, 모택동의 등극이후 20개의 대교구, 79개의 교구, 38개의 지목구는 전멸되어 지하로 숨어들게 되었다. 리더의 판단미스는 많은 고통과 실패를 낳는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