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강 이 시대의 예언자, 교황 요한 23세(1958-1963)

2011. 5. 18. 오전 6:42:41

글자
 
 


초심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살다보면 처음의 순수한 마음을 간직하기가 어려운 것이 인간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세상 속에서 점차 변질되기 쉽다.

 

그렇기에 라틴어 격언처럼 '교회는 종말까지 개혁을 필요로 한다.'

 

역사 안에서 꾸준한 개혁이 있었지만 가톨릭교회는 많이 변질되기도 하였다.

 

중세시기 성직자들이 권위주의로 물들면서 봉사자가 아니라 대접받는 권력자가 되었다.

 

세상은 급변하고 사람들은 더욱 앞서가는 데, 가톨릭교회만이 낡은 방식을 고집하고 우물 안에 갖혀 있었으니 세상으로부터 왕따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앞서가는데, 교회의 제도와 성직자들의 사고방식은 구식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본당신자들 중에 기업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인간경영, 조직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조직경영, 도사들인데... 본당신부들의 본당운영솜씨는 구닥다리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독선적이고, 들을 줄 모르고, 고집부리고, 큰소리치고, 게다가 잘 삐지고... 특히 아무나보고 말 놓고, 놓는건지 안놓는건지 어지중간하고...

 

 

1900년대 초... 가톨릭교회는 늙고 병들어 있었다. 노쇠한 가톨릭교회...

 

당시 개혁적인 신학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직시하였다.

 

시대적으로도 근대가 끝나고 현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정신없이 변화하는 세상 앞에 우왕좌왕 어쩔 줄을 몰랐다.

 

교황청의 보수적인 고위성직자들은 '옛날 교회의 전통과 권위를 확고하게 지키는 것이 교회를 살리는 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많은 개혁적인 신학자들이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직시하고 교회의 쇄신과 개혁을 요구해도 역대 교황들과 고위 성직자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가고 교회는 끝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이런 세상변화를 사람들은 잘 읽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 뛰어난 신학자들은 세상흐름을 정확하게 읽었던 것이고, 교황 요한 23세께서는 이대로 앉아 있다가는 교회가 망한다는 절박한 상황을 받아들여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개최함으로써 교회의 변화를 이끌었던 것이다.

 

 

나는 요한 23세를 모든 사제들의 모델로 신학생들에게 추천한다.

 

1958년, 비오 12세(1939-1958)의 뒤를 이어 늘 유머와 웃음이 풍부하고 인자한 동네 할아버지 같던 론깔리추기경이 차기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가 바로 요한 23세였다.

 

요한 23세 이전의 교황들은 비밀스럽고 보수적인 '군주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교황님의 생활은 다 드러나서는 안되었다. 비밀속에 있어야 했다. 교황님은 거룩하게 보여야 했다. 교황들은 세상과 동떨어져 있었다.

 

교황에 당선되면 바티칸과 라떼란성당, 그리고 휴양지인 까스텔깐돌포에만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전통에 따라 교황은 '바티칸의 포로'라고 불리었다.

 

이러한 교회의 모습은 늘 세상사람들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저 안에 뭐가 있을까... 수도원 내부의 이야기를 다루었던 영화 '장미의 이름으로', 신부가 사랑하고 애낳고 어쩌고 하는 이야기로 된 영화 '가시나무 새'도 다 그런 맥락이다.

 

 

요한 23세는 서민적이고 개방적이었다.

 

전임교황들이 주로 귀족출신이었던데 비해, 가난한 농부집안출신의 요한 23세는 천성이 서민적이었다. 교황은 교황청의 신비스움과 비밀스러움을 고집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세상을 향하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교황이 다른 나라를 방문하고 하는 것은 비오 12세 시대만해도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1958년 10월 28일 당선되어 11월 4일 교황좌에 착좌했다. 그해 12월 24일, 교황은 로마의 한 병원 어린이 환자들을 방문하여 함께 성탄을 보냈다. 놀라운 사건이었다. 교황이 바티칸을 떠나 병원을 방문한 사실 자체가 그 동안의 전통을 깬 충격이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이튿날 교황은 로마의 한 교도소를 방문하여 죄수들과 함께 식사를 하였다. '여러분들이 올 수 없기 때문에 제가 왔습니다.' 사람들은 당황하였다. 그러나 교황은 계속해서 공장과 양로원, 고아원과 교도소 등을 찾아다니면서 기꺼이 보통사람들을 만났다.

 

교황은 바티칸 군주로서의 지위를 낮추고 하느님 종들의 종으로서의 역할을 스스로 실천했다. 사람들은 교황을 존경하기 시작하였다.

 

교황은 또한 바티칸의 높은 벽을 깨고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자유롭게 만났다.

 

500년 만에 처음으로 성공회 켄터베리 대주교를 만났고, 역사상 처음으로 일본 민속종교인 신도(神道)의 대신관 등을 만났다. 소련공산당서기장 흐루시초프의 딸과 사위를 만났고, 공산국가 외교관을 만나면서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무신론자인줄은 알지만, 이 노인의 축복을 받지 않겠습니까.'

 

교황이 교회 안팎으로 찬사와 존경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온화한 인격에 있었다. 교황은 화려한 환경에 있었으면서도 항상 소박하고 소탈했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인도적인 가치관에 직접 호소했다.

 

나아가 교황은 갈라진 그리스도교 형제들과 과거의 적대행위를 청산하고, 가톨릭교회가 져야할 책임을 인정함으로써 일치의 토대를 놓았다. 실제로 교황은 정교회, 성공회, 개신교 지도자들을 극진히 영접했고, 유대인에 대해서도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라고 소개할 만큼 겸손했다.

 

요한 23세 이후로 교황을 황제로 만드는 격식이 점점 폐지되었다. 교황을 알현할 때 무릎을 세 번 굽혀 절하는 규정을 없애고, '성부성하'라는 호칭으로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바티칸에서도 수행원 없이 혼자 다니면서 일꾼이나 정원사들과 즐겨 이야기를 나누었다. 불쑥 바티칸 목공소에 들러 목수들에게 포도주를 대접하기도 하고, 근위대와 같은 직원들의 봉급을 자녀수에 따라 올려주었다. 가족이 많으면 봉급이 많게 되었다. 그래서 교황청장관들은 자녀를 많이 가진 교황청수위가 자기들보다 봉급이 많다고 투덜거리기도 하였다.

 

교황은 늘 '복잡한 것은 간단하게 만들고, 간단한 것은 복잡하게 하지 마라.'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일기장에 자주 이렇게 적었다. '안젤로야, 너를 너무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런 생각이 그를 자유롭게 하였다.

 

교황은 점점 세계의 아버지 상(像)이 되어갔다.

 

 

1881년, 북부 이탈리아 베르가모 교구의 소토일몬테에서 태어난 가난한 소작농의 13남매 가운데 장남이었던 요한 23세의 이름은 안젤로 론깔리였다. 론깔리는 천성이 검소하고 순박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공부를 할 형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머리가 좋은 론깔리가 농부로 한평생을 살게 될 것을 안타까워한 본당신부의 도움으로 11살 때 소신학교에 입학하면서 사제의 길을 걷게 된다.

 

신학교시절, 가난 때문에 눈물을 흘릴 때면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넌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다. 그러니 신부가 되더라도 가난한 신부가 되어라.' 훗날 요한 23세는 늘 '나는 소토 일 몬테의 가난한 농부출신이라는 사실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소신학교를 마치고 로마로 유학, 신학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하였고, 온갖 어려움을 이기고 23세 때 마침내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식 때 부모님은 비싼 기차표 때문에 참석하지도 못했다. 서품식을 마치고 론깔리신부는 미사도구를 챙겨서 베드로성당 지하로 내려가 성베드로 무덤 앞에서 혼자 첫미사를 드리면서 스스로에게 이렇게 다짐했다. '너는 존경 받기위해서 사제가 된 것이 아니다. 돈을 벌거나 편안하게 살거나 명성을 얻거나 쾌락을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너는 오직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기 위해서 사제가 된 것이다.'

 

이후 공부를 계속한 론깔리신부는 교회법 박사학위를 받고 베르가모 교구장의 비서와 교구신학교의 교수로 9년 동안 일했다. 이때 론깔리신부는 노동자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하였다. 때로는 길거리 시위현장에 달려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특히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운동을 도왔는데, 부유층의 비위를 건드려 교황청에 론깔리신부를 비난하는 투서가 들어가기도 하였다. 론깔리신부는 예리코로 가는 길에 강도당한 사람들을 못본체 지나친 사제의 예를 들면서, 신부는 정의를 위해 사회적 약자들을 도와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러한 론깔리신부에 대해 당시 교황 비오 10세는 다행히 '문책을 하지 않겠지만 조심해라'는 요지의 경고장을 보냈었다.

 

 

그 후 1925년 불가리아 교황대사로 임명되면서 주교로 서품되었고, 이후 그리스, 터키의 교황대사로 20년 동안 일했다. 불가리아와 그리스는 정교회국가이고, 터키는 이슬람국가여서 가톨릭은 소수였다. 이 기간 동안 론깔리주교는 소수인 가톨릭교회의 처지를 체험하면서 권위와 힘이 아니라 겸손과 진실로 사람을 대하는 법을 배웠다. 터키에서는 사제들에게 '까치발을 하고 조심스럽게 직무를 수행하라'고 당부했고, 모든 성사를 터키어로 집전하게 하였다. 터키외무성은 론깔리주교를 존경하기 시작했다. 또한 가톨릭과 정교회의 갈라진 그리스도교의 현실을 깊이 경험하면서 교회일치에 대한 간절한 열망을 갖게 되었고, 이것은 훗날 공의회정신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온후한 성격과 뛰어난 유머감각, 재치와 인내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특히 터키 대사시절 2차 세계대전 동안 나치의 대학살로부터 유대인들에게 위조문서를 만들어주어 유대인들이 다른 나라로 도망갈 수 있도록 도왔다. 특히 헝가리정부에 서한을 보내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수용소로 보내지 말도록 간곡히 호소하는 등의 방법으로 유대인 만2천명을 구해냈다.

 

 

1944년, 프랑스교황대사로 임명되었을 때, 론깔리주교는 로마에서 사무착오가 생긴 것으로 생각했을 정도로 자신의 중요직 임명에 놀랐다.

 

1944년 8월 25일, 파리는 독일로부터 해방되었고, 당시 프랑스교회는 독일치하의 비시정권과 임시정부사이에서 곤경에 처해있었다. 프랑스 대다수 주교들이 나치독일에 협력했기 때문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독일에 저항했던 레지스땅스의 최고 책임자였던 드골이 프랑스의 임시정부 대통령이 되었다. 드골은 프랑스가톨릭교회에 비시정권 하에서 독일에 협조한 주교 33명의 퇴임시키라고 요구하는 등, 가톨릭교회와 정부관계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 프랑스의 역사바로세우기

 

2차 대전 때 나치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고 즉각 친 나치 정권을 세운 것이 비시정권이었다. 비시정권은 프랑스내 나치 저항세력이었던 레지스땅스를 소탕하고, 유대인을 잡아 수용소로 보내는 등 나치에 적극 협력하게 된다. 여기에 '랭트랑 시냥', '마탱', '프띠 파리지엔' 같은 신문들이 끊임없이 나치를 찬양하고 시녀로 활약했다.

 

목숨을 걸고 나치에 저항했던 사람들이 레지스땅스였고 그 지휘자가 영국에서 임시정부를 이끌던 드골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레지스땅스의 영웅 드골장군이 프랑스로 돌아오면서 프랑스대통령이 되었고, 가장 먼저 한 것이 바로 역사바로세우기였다.

 

드골은 비시정권에 적극 협력했던 7,000명을 색출해서 사형시켰다(즉결처분, 민중재판까지 합치면 사형된 자는 최소 만명, 최대 10만명). 그리고 단순 협력자 100만 여명을 감옥으로 보냈다. 900개 언론사중 나치를 찬양했던 언론, '랭트랑 시냥', '마탱', '프띠 파리지엔' 등 649개 언론사책임자를 처벌하고 폐간했고, 나치 시대동안 스스로 문을 닫았던 신문사 '르피가로', '라크로와', '르땅'을 복간시켰다. 국회의원 80%가 레지스땅스 출신에서 뽑혔다.

 

나라가 어려울 때 국가를 위해 몸바친 사람이 대접받는 것이 정의... 프랑스의 자부심.

 

우리는 일제시대의 참담한 시기를 거치면서 해방후 역사바로세우기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많이 듣는다. 일제에 저항했던 사람들이 올바른 대접을 받지 못하고 어렵게 살고 있고, 오히려 일제에 협력해서 출세했던 사람들이 해방 후에도 그대로 권력과 부를 이어받은 경우가 적지 않다. 지난 10월 26일이 안중근 토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100년 되는 날이었다.

 

프랑스로치면 드골과 같은 김구선생, 당시 중국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지휘했던 김구선생이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죽였다.

 

한국 현대사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반드시 필요할 것이고, 그렇지 못하기에 우리나라 사회의 정의와 가치관이 많이 왜곡되어 있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이러한 현실이 결국 국민의 분열과 대립을 가져올 수 있기에 평화를 염원한다면 그 원인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일이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드골은 가톨릭교회에 대해서는 나치에 협력했던 주교들을 처리하라고 교황에게 요구하였다. 교황청은 큰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주교들을 퇴임시키기도, 그대로 버티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어려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해결사가 시급했다. 그러다가 사람 좋은 론깔리 주교를 생각하고 해결사로 프랑스대사로 임명한 것이다.

 

론깔리주교는 드골을 만났다. 드골은 론깔리주교의 인품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한 처리를 모두 론깔리주교에게 위임하였다. 론깔리주교는 프랑스주교들을 소집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결국 주교 3명이 사임하고 프랑스주교회의 이름으로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는 것으로 일을 매듭지었다.

 

나아가 론깔리주교는 프랑스에 잡혀있는 독일군포로들 가운데 독일신학생 949명이 신학을 계속 공부하여 사제가 될 수 있도록 조치하는 등 어려운 문제를 유연하게 해결하였다. 또 프랑스주교들과 힘을 합쳐 26만 독일군 전쟁포로들이 수감기간을 단축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했다. 어려움에 처한 모든 이가 사목대상이었다.

 

 

프랑스 대사시절, 론깔리주교는 프랑스 상류사회의 귀족들과 정치인들을 상대해야 했다. 때로는 짓궂은 신사들이 그의 뚱뚱한 체구를 조롱하기도 하였고, 갑자기 여자 누드사진을 불쑥 눈앞에 내밀기도 하였지만 대주교는 웃으면서 '사모님이신가 보군요?'라고 대답하는 재치를 보였다. 늘 소박하고 검소했고, 길거리에서 사람들 틈에 섞여 산책을 즐겨 하곤 했는데, 교황 비오 12세로부터 대사의 품위를 손상시킨다고 꾸중을 듣기도 했다.

 

 

9년 뒤, 론깔리주교는 추기경으로 서임되면서 베네치아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취임식 때의 인사말이 사람들을 감격시켰다. : "저는 어린 시절 어렵지만 축복받은 가난 속에서 자랐습니다. 이 가난이 저를 성숙시키고 세상을 보는 마음과 눈을 열어주었습니다. 저는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고, 사회적 약자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가톨릭신앙을 굳게 지키면서도, 그들과 대립하기보다는 일치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론깔리추기경은 늘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승객들과 자연스레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 '자, 자, 이리들 와서 앉으세요. 여러분이나 나나 같은 요금을 내고 탔잖아요. 우리 이야기 좀 합시다...' 취임 후 몇 일 만에 공장을 찾아 산업재해를 당한 노동자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하였고, 공단 항구에 있는 노동자들과도 미사를 드렸다. 매일 4시에 일어나 밤 10시까지 강행군을 하면서 5년 동안 공단지역에 30개의 신설본당을 세웠다. 1957년에는 교구시노드를 개최하였는데, 개막식에서 추기경은 '권위적인 태도가 삶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면서 '권위적인 태도는 냉혹함과 힘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가부장적 태도는 자신의 우월성을 지키기 위해 인간을 미성숙하게 만들지요. 그런 태도는 아랫사람의 권리를 무시하게 됩니다.'

 

그는 명령하는 권력을 마다하고 사람들과 진정으로 소통하기를 바랐다.

 

 

1958년, 교황 비오 12세가 서거하였다. 당시 교회에 대한 세계의 도전은 거셌다. 오랫동안 근대주의의 강력한 도전에 맞서 교황들은 교황권을 더욱 강화하고 전통을 굳게 방어하는 정책을 취했다. 총명하고 의지가 강했던 비오 12세도 전임교황들의 뒤를 이어 방어정책을 다져놓았고, 추기경들은 이 정책이 교회를 위해 유익하다고 확신했다.

 

론깔리추기경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 출신으로 교회의 정치무대에서 성공할 중요한 연줄도, 강력한 후원자도 없었다. 귀족출신들의 입장에서 보면 론깔리추기경은 교황에 당선될 인물이 아니었고, 교황으로 선출될 뛰어난 자질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지 못했다. 교황선출도 3일이나 걸렸다. 77세의 고령으로 교황에 선출된 요한 23세는 여러 파벌이 고령이라는 이유로 절충했던 대안 후보였다. 따라서 요한 23세가 얼마동안 현상을 유지해놓으면 다음에는 보다 젊은 교황이 계속해서 교회의 방어정책을 계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한 23세는 세상에 대한 교회의 '방어정책'을 적극적인 '적응정책'으로 완전히 바꾼 놀라운 일을 했던 것이고, 교회사에 영원히 빛날 뛰어난 업적을 남겼던 것이다. 교황 요한23세에 현대교회의 가장 큰 공로와 감사가 돌아가야 마땅할 것이다.

 

 

교황직에 오른 후에 요한 23세의 머리에는 온통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교회가 현대세계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1959년 1월 25일, 바오로 개종축일에 교황은 이태리의 추기경들을 성바오로 수도원으로 초대하여 연설을 하였다. 교황은 교황직 3개월을 회고하고 교회와 현대세계를 위협하는 갖가지 위험들을 열거하면서 맨 마지막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현시점에서 교회의 필요에 대응하기 위해서 세계공의회를 개최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공의회는 갈라진 형제들과의 일치를 모색하는 공의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추기경들은 숨을 죽였다. 공의회! 거창하고 위험한 행사다. 그러나 교황은 늘 하던 대로 웃으면서 말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저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일에 착수합시다.'

 

공의회 후에는 교회에 격변과 혼란이 따른다는 것이 역사의 가르침이었다. 보수적인 교황청의 핵심담당자들은 교황의 공의회결심을 냉담하게 받아들였다. 전임 비오 12세가 교회를 발전시켰고, 세계의 도전에 방어정책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지, 새로운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실제로 일부 추기경들은 고령의 교황이 서거함으로써 공의회가 자연스럽게 취소될 수 있도록 공의회 개최를 의도적으로 지연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교황은 공의회를 계획대로 밀고 나갔고, 교회가 시대의 요구에 적응해야하며, 세상을 향해 자신을 열어 놓아야한다고 하면서 '현대세계에로의 적응(aggiornamento)'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였고, 이러한 과제를 해결할 때 갈라진 형제들과의 일치가 가능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이렇게 하여 '현대세계에로의 적응과 갈라진 형제들과의 일치'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목표가 되었다.

 

1962년 10월 11일, '그리스도 당신만을, 우리는 당신만을 원하나이다'라는 교황의 개막연설로 시작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시작되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18개의 갈라진 교회들 대표들이 교황의 초청을 수락하여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1962년 11월 11일-12월 8일, 첫 번째 회기가 끝날 때쯤 교황은 위암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두 번째 회기를 맞지 못하고 1963년 6월 3일 서거하였다.

 

요한 23세 후임으로 선출된 교황 바오로 6세는 공의회를 그 본래의 목표에 따라 이끈 교황으로 평가된다. 폐회전날인 1965년 12월 7일, 공의회는 1054년에 있었던 동서방교회의 상호파문을 철회하여 동서방교회의 화해를 이끌었고, 교회, 전례, 사목, 계시 등 4개의 헌장과 교회일치, 매스미디어 등에 관한 9개 교령, 종교자유 등에 관한 3개의 선언을 채택함으로써 현대교회사에 빛나는 금자탑을 세웠다.

 

요한 23세 재임 시기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극에 달하던 시점이었다. 미국과 소련의 대립은 핵전쟁 일보직전까지 갔다. 교황은 서거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미국대통령 케네디와 소련공산당 서기장 흐루시초프를 설득하여 핵전쟁의 발발을 막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1963년도 회칙 '지상의 평화'는 이러한 치열한 대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963년 6월 3일, 요한 23세는 제2차 회기를 맞지 못하고 서거하였다.

 

서거하던 날, 비서신부가 눈물을 흘리면서, "교황님의 삶은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천국으로 가셔서 하느님 옆에 계시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자, 교황은 "그렇게 기쁜 소식을 들려주면서 울기는 와 우노."하면서 위로하였다.

 

서거 직전 비서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다. :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시오. 저 넓게 벌린 팔이 내 교황직의 이상이었소. 나는 겸손하고 소박하게 살려고 했소. 모두를 사랑하고 모두에게 잘해주려고 노력했소. 성모님, 나의 어머니시여!' 신학교 때부터 평생 입술에서 떠나지 않던 성모님께 드리는 기도였다.

 

스스로를 낮추어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이 시대의 예언자 요한 23세는 2000년 9월 3일 복자품에 올랐다. '착하신 교황 요한'이 그의 별칭이 되었다. 베드로대성당 지하무덤 교황 요한 23세께서 누워계신다. 지금도 교황님들 가운데 인기1위. 항상 꽃다발과 향유...

 

지난 2000년 대희년 때 요한 23세 석관을 열었더니 시신이 부패하지 않고 있었다. 사람들은 놀랐고, 석관을 그대로 성당으로 올려 대희년 1년 동안 순례객들이 참배하도록 하였었다. 성지순례가면 꼭 인사드리고 오면 좋겠다.

 

교황 요한23세 비디오나 DVD를 꼭 보면 좋겠다.

 

책 : 영혼의 일기(도서출판 크리스챤), 요한 23세(분도출판사), 교황 요한 23세(성바오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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