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간의 근본적인 나약함
사실 우리 인간... 근본적으로 나약한 존재다... 인간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항상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 요랬다 조랬다, 좋았다 싫었다... 외롭고 허전하고... 병들고, 허무하고... 그 마지막 한계가 죽음이다.
우리가 또 말 때문에 얼마나 실수하는지...
'사람은 귀가 두 개고 입이 하나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 말은 '말하는 것보다 두 배는 많이 들으라'는 뜻이다. 혀... 참 다스리기 어렵다. 툭하면 허풍이고 허세고, 툭하면 거짓말이고, 두셋만 모이면 넘 욕하고 헐뜯는다. 그래서 퇴계 이황선생님 말씀, "사람이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은 그 실천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대인, 큰 사람은 항상 말조심, 입조심을 해왔다.
삶의 참된 의미를 찾지 못하면 사람은 결국 행복하기 어렵다. 무엇이 참 행복인지를 알지 못하면 허공 속에서 헤매는 구름과 같을 뿐 아니겠나... 참 행복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정신없이 바쁘게 살다가 죽음 앞에서야 후회하면서 하는 말: "허망하다.", "인생이 허무하다.", "일장춘몽 같다.", "이렇게 죽을 것을 내가 왜 내밖에 모르고 아락바락 살아 왔던가." 그리고 배우자에게 하는 말, '여보게, 미안하네...'
구약성경에도 죽음을 앞둔 한 이스라엘의 왕이 이렇게 탄식하고 있다.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하늘아래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나는 누구보다도 많이 배웠다. 이스라엘에서 나만큼 배운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 모든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제 죽는데. 또 나는 누구보다도 가진 게 많았다. 이스라엘에서 나만큼 부자가 없었다. 그러나 그 모든 재산도 무슨 소용이 있더냐... 다 바람을 잡는 것과 같이 헛된 일이었다."
우리도 살면서 수없이 인생의 허망함, 텅 빈 가슴을 느끼며 산다. 때때로 너무나 힘들 때, 이래 살아서 뭐하겠노, 차라리 고만 살았으면 얼마나 좋겠나 하는 생각도 들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서 내일 이대로 영원히 눈을 뜨지 말았으면 얼마나 좋겠나 하는 생각도 들 때도 많다. 정신적인 공허함을 이겨 보려고 어떤 사람들은 신흥종교에 빠지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철학관이나 무속에 의지하여 정신적인 공허함을 이겨내려 한다.
원래 하느님께서 만드신 인생은 참 편안하고 좋은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겪으면서 사는 인생, 기쁘고 즐거운 일보다는 힘들고 어려운 일을 더 많이 겪으면서 사는 것이 사실이다. 한마디로 고단한 인생이다. 예로부터 고단한 인생을 이렇게 표현해왔다.
구약성서 욥 14, 1 : "사람의 수명이란 하루살이와 같은데도 괴로움으로만 가득 차 있다."
신약성서 필립 3, 20 : "우리는 죽기까지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의 본 고향은 이 지상이 아니라 천국입니다."
성 아오스딩 : "우리가 주님을 실제로 뵈올 때까지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번민과 고통은 끝이 없을 것이다."
성모찬송가(salve regina) : 이 세상을 '슬픔의 골짜기, 눈물의 골짜기로 표현'. "슬픔의 골짜기, 눈물의 골짜기에서 에와의 자손이 울며 탄식하나이다."
베토벤 유언장 : "하느님, 이제 번민과 고통의 세상을 벗어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덧붙였다. : "천국에서는 제발 들을 수가 있겠지요."
예수께서도 우리와 꼭 같은 길을 가셨고 때때로 고단한 삶 앞에 탄식하셨다. :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구나...'
2. 원죄와 선악과이야기
좋게 창조된 인생이 왜 이렇게 고통으로 채워져 있는가.
옛날 이스라엘 신학자들도 고달픈 인생살이에 대해 많이 묵상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왜 인생이 이렇게도 고단한가..."
이에 대해 이스라엘의 신학자들은 이렇게 답을 찾았다. : '태초에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창조질서를 세워주셨는데, 언제부턴가 이 창조질서가 깨어져 버렸고 인간본성이 죄로 물들게 되었다.'
"왜 인간본성이 죄로 물들고, 그로 인해 고통이란 운명을 뒤집어쓰게 되었는가..."
이스라엘 신학자들은 그것을 인간의 '높아 질려는 욕심' 때문으로 보았다. : '인간이 흙이라는 처지를 만족하지 못하고 하느님처럼 되고자 했던 욕심, 인간의 그 높아 질려는 욕심 때문에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질서가 깨지고만 것이다.'
인간의 높아 질려는 욕심인 '인간의 이기심', 이것이 원죄의 뿌리다.
고통 속에 있는 인간과 그 원인에 대해 깊이 묵상했던 이스라엘 신학자들은 '선악과이야기'로 그 답을 찾고 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계약’을 맺으시고, '죽지 않음'과 '이 세상에 대한 지배와 다스림', 그리고 ‘낙원’을 약속하셨다. 또한 창조가 잘 유지되도록 '질서'를 마련해 주셨다. 인간은 이 질서 안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을 누릴 수 있었다.
근데 하느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무엇이나 제 맘대로 다할 수 있게 하지'는 않으셨다. 그것이 선악과로 표현되고 있다. :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말아라. 그것을 따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 (창 2, 15-17)
선악과... 이것은 사람을 구속하는 멍에가 아니라 사회나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한 기본질서였다. 개인에게는 양심이고 공동체에는 규칙이고 사회에는 법이 선악과인 것이다. 선악과가 있어야 질서가 유지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신학자들은 불행하게도 이 기본질서가 깨어졌고 그로인해 인간본성이 죄로 물들어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되었다고 묵상하고 있다. 그 이야기를 이렇게 꾸몄다.
갑자기 뱀이 나타나서 여자에게 여자 맘대로 다하게 하지는 않으신 하느님께 대해 서운한 마음이 들도록 말꼬리를 얄밉게 바꾸고 있다. "얘, 하느님이 너희더러 이 동산에 있는 나무열매는 하나도 따먹지 말라고 하였다는데 그게 정말이냐? 하나도?" (창세 3, 1)
여자가 뱀에게, "아니야, 하느님께서는 이 동산에 있는 나무열매는 무엇이든지 따먹되, 이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열매만은 따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창세 3, 2-3) '따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여자가 덧붙인 이 말속에 모든 것을 맘대로 다하게 하지는 않으신 하느님께 대한 섭섭한 감정이 묻어있다.
뱀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아니야, 절대로 죽지 않아. 그 나무열매를 따먹으면, 너희는 하느님처럼 될 것이야." (창세 3, 5)
'너희는 하느님처럼 될 것이야...' 뱀의 유혹에 인간은 하느님처럼 되고자 했다. 선악과를 따먹고만 것이다. 하느님처럼 된다는 것, 그것은 인간이 하느님의 뜻에 따르지 않고 자기가 하느님처럼,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내 맘대로, 내 생각대로 다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담은 창조질서를 깨버리고 말았다.
이제, 하느님의 추궁이 시작되고 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아담은 비겁하게도 핑계를 대고 있다. "여자 때문에 그랬심다."
여자도 비겁하게 변명을 대고 있다. "뱀 때문에 그랬심다."
이렇게 해서 핑계와 변명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인간의 유산이 되었다. 인간은 자기 실수와 부족함을 솔직히 인정하기보다는 자꾸만 변명과 핑계를 대고 감추고 싶어 하게 되었다. 그냥 이것저것 둘러대지 않고 '제가 잘못했습니다.'하면 끝날 것을, 그 말 한마디를 끝까지 못하는 게 우리 인간의 가련한 운명이 되었다. 높은 사람이건, 낮은 사람이건, 체면과 자존심, 부끄러움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핑곗거리와 변명거리를 찾는 비겁한 신세가 되었다.
이제 징벌이 차례로 내려지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고통이었다. 질서를 파괴한 인간성, 죄로 물든 인간성 위에 고통이 선고되고 있다.
아담에게는 노동의 고통이 선고되고 있다. :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살리라." 그래서 먹고살기가 그렇게도 어려운 것이다. 여자에게는 혹독한 출산의 고통이 선고되고 있다. "너는 죽도록 고생하지 않고는 출산하지 못하리라." 그래서 아이 낳기가 그렇게도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큰 고통인 죽음이 선고되고 있다. : "너희는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너희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3. 원죄론
인간이 피조물인 처지를 무시하고 하느님처럼 되고자했던 열망, 높아 질려는 그 '가련한 열망'이 인간성을 죄로 물들게 했고 결국은 고통이라는 운명을 가져오게 했던 것이다.
아담이 지은 죄... 이기적인 본성이 인간성을 손상시키고 죄와 고통을 가져오게 하였으니,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을 신학자들은 '원죄'로 규정하였다.
이스라엘 신학자들은 아담이 지은 죄가 모든 인간에게 유전된다고 밝히면서, 이 유전은 생물학적 유전이라고 규정했다. 이렇게 해서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믿게 되었다.
교부들은 이 원죄론을 더욱 발전시켜, 아담보다 아담을 꼬신 하와를 범인으로 지목해 여자를 더욱 지독하게 몰아붙였다. 그리하여 초대교회 때부터 여자는 아주 나쁘게 해석되었다. 여자 때문에 세상에 고통과 죽음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해석함으로써, 교회 내에서 여성차별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이용하였다. 창세기 3,16의 여자에 대한 하느님의 처벌, "너는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도리어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라." 이런 구절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여자는 두고두고 손해를 보고 불평등한 대접을 받아야 했다.
신학자 떼르뚤리아노(220년 사망)의 말 : "여자여, 너는 지옥의 문이로다. 너는 악마에게 문을 열어주는 자이니, 너는 나무의 봉인을 깨뜨리고 하느님의 법을 저버렸고, 악마에게 가까이 갈 능력이 없는 순진한 남자마저 유혹하였도다."
신학자 요한 크리소스토모(407년 사망)의 말 : "온갖 야수들 가운데 여자보다 더 해로운 것은 찾아 볼 수 없다." "성행위는 원죄를 계속 유전시키는 범죄행위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독신으로 살면 자손번식이 중단되고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질 것인데, 사람들이 자제를 몬해서 자꾸 결혼하기 때문에 계속 죄로 물든 인간이 태어나고, 재림이 지연되고 있다"고 한탄하였다.
6C에 프랑스에서 열린 갈리아 시노드는 '여자가 과연 인간인가, 여자에게도 영혼이 있는가'하는 문제가 주제였다. 논쟁 끝에 표결에 붙였는데 단 한 표차이로 여자도 영혼이 있는 인간으로 가결되었다.
마침내 529년 오랑쥐 공의회는 이러한 가르침을 토대로 가톨릭 원죄론을 교의로 선포하고 있다.
첫째, 아담의 범죄 때문에 죄와 고통이 세상에 들어왔다.
둘째, 아담의 범죄는 모든 인간에게 유전된다.
셋째, 그렇기에 구원받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은총이 절대로 필요하다.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도 고통이 죄에 대한 벌로 주어진 것이며, 의인을 위한 약이라 가르쳤다. 이러한 가르침이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이 되어서 오늘도 교리를 가르치는 신부들과 수녀들은 원죄와 고통문제를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현대신학자들은 이 원죄론이 다음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되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첫째, 고통이 아담이 범죄한 벌로 주어진 것이라면, 고통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 된다. 과연 고통은 하느님이 주신 것인가.
둘째, 아담의 죄가 생물학적으로 유전되는 것은 아니다. 죄라는 유전인자는 없기때문이다.
오늘날 신학자들은 고통문제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인간의 고통과 불행한 현실은 ‘인간 스스로의 잘못에 근거한 것’이다. 인간 스스로 하느님과의 친교관계를 거부함으로써 모든 질서가 뒤틀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통의 원인은 다음 두 가지다.
첫째, 악의 세력이다. 이 세상에 악의 세력이 존재한다. 뱀으로 상징되는 악의세력, 분명하게 파악되지는 않지만, 세상에는 악의 세력이 존재한다. 이 악의 세력이 늘 인간을 유혹하고, 인간에게 피하기 어려운 고통을 주는 것이다.
둘째, 아담의 죄가 유전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기적인 인간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인간의 이기심, '나를 먼저 생각하는 본성'으로 인해 인간은 다른 사람과, 또 하느님과 단절되는 고통을 겪는다.
옛날에는 죄로 물든 인간성과 고통이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한 하느님의 처벌의 결과인 것으로 해석했지만,
오늘날은 악의 세력과 인간 스스로의 이기심으로 인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4. 죄로 물든 인간성과 기쁜 소식
우리의 인생이란 늘 고통과 시련의 연속인 것 같다. 너나할 것 없이 잘 낫거나 못 낫거나, 많이 배웠거나 못 배웠거나, 많이 가졌거나 못 가졌거나, 다들 이런저런 고통 속에 사는 우리 인생인 것 같다.
우리는 숙명적으로 '죄로 물든 인간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나약한 인간성... 20세기 가장 뛰어난 신학자 칼 라너 신부의 표현대로 ‘비겁하고 비참하고 원시적인 인간성’이 인간의 운명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는 너나할 것 없이 무거운 짐을 지고 죽기까지 허덕거리면서 사는 인생이다. 그러기에 굳건하지 못하다. 막부시대를 연 일본의 쇼군 도꾸가와 이에야스 : '인생이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감정의 변화가 심하고, 불안하고, 처음의 결심도 퇴색되고, 욕심과 집착을 버리기도, 자존심을 버리기도 지독하게 어렵다. 그렇기에 우리의 인생행로는 늘 흔들리고 고통을 피할 수가 없는 것 같다.
예수께서 인간의 근본적인 허무함을 이겨내게 해주셨다.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주님께서 이겨내게 해주신 것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행복하게 사는 길을 보여주셨다.
사람들은 저마다 행복을 찾아 이리저리 바쁘게 산다. 다들 많이 알고... 또 잘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또 많은 사람들은 그저 이기적인 마음 가는대로 아무렇게나 산다. 그냥 자기 욕심만 채우면서... 자기만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고, 참된 행복을 찾지도 않고 부초처럼 왔다리 갔다리 살다가... 어느 날 죽음 앞에서야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는 사람들이 참 많다.
예수께서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보여주셨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보여주셨다.
나아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있는 세상... 그 소식을 주님께서 알려주신 것이다. 사람들은 그 소식을 듣고 기뻤다. 너무나 기쁘고 기뻤던 나머지 사람들은 그 소식을 기쁜 소식, 복음이라고 불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