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류역사와 적응
** 게르만민족
로마인들은 야만인(Barbari)이란 용어를 미개국이나 적대국의 국민들을 가리키는데 사용했다. 특히 로마제국의 역사가들은 이 단어를 제국의 북쪽 국경을 둘러싸고 있던 게르만 민족을 지칭하는데 사용했다. : 역사가들은 동부게르만 민족으로 서고트족(Visigoths), 수에비족(Suevians), 반달족(Vandals), 부르군디족 (Burgundians), 동고트족(Ostrogoths), 롬바르드족(Lombards), 서부게르만 민족으로 프랑크족(Franks), 알레만니족(Alemanni), 앵글족(Angles), 색슨족(Saxons), 프리시아족(Frisians)으로 구별하였다.
375년경, 우랄산맥 서쪽에 포진하고 있던 몽고족의 분파인 훈족이 동유럽을 휩쓸자 유럽 동북부 지역에 살던 게르만 민족이 훈족에 침략에 시달리게 되었다. 기마민족인 훈족의 침략에 쫓긴 게르만민족은 결국은 이들을 피해 보따리를 싸서 서유럽쪽으로 유입되게 되었다. 이것이 소위 게르만민족의 대이동이다.
당시 로마제국은 395년 동서로마로 분열되었고, 서로마제국은 약화일로에 있었다.
게르만민족은 동유럽 대부분과 서유럽전역을 석권, 곳곳에 왕국을 세웠다.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형국이었다.
수에비족은 스페인지방을 침공하였다가 서고트족에 합병되었다.
서고트족은 프랑스 남부지방와 스페인지방에 서고트왕국을 세웠다. 프랑크왕국에 합병.
반달족은 반달왕국을 세우고 결국 496년 서로마제국을 멸망시켰다.
부르군드족은 라인강상류과 프랑스동부지방에 자리를 잡았다가 프랑크왕국에 합병되었다.
동고트족은 이탈리아반도 동부해안 라벤나지역에 동고트왕국을 세웠다.
롬바르드족은 이탈리아반도 북부에 롬바르드왕국을 세웠다가 프랑크왕국에 합병.
프랑크족은 프랑스 중북부지역에 프랑크왕국을 세웠다. 프랑크왕 끌로비스는 뛰어난 능력으로 주변 게르만왕국들을 격퇴하고 영토를 확장했다. 프랑크족은 점차 주변 게르만국가들을 정복하고 마침내 유럽천하를 통일하게 되었고, 중세를 이루어갔다.
알레만니족은 프랑스동부 알사스지방에 자리를 잡았다가 프랑크족에게 합병되었다.
앵글로족과 색슨족은 영국에 자리를 잡았다.
프리시아족은 유럽북부해안지방에 자리를 잡았다가 프랑크족에 합병되었다.
게르만민족에 의해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던 시기, 가톨릭교회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그 전쟁과 혼란의 시기에 가톨릭신앙과 교회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때문이었다.
첫째, 게르만민족의 지도자들이 가톨릭신앙을 수용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게르만민족의 본격적인 침공이 있기 전부터 수많은 게르만 사람들이 로마제국으로 이주해서 살고 있었고, 로마문화와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둘째, 교황과 주교들이 게르만민족의 침입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고 종교와 문화를 지켰기 때문이었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고 오랫동안 정치적인 공백상태가 계속되면서 교황은 실질적으로 황제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교황은 위험을 무릅쓰고 게르만왕들과 협상을 벌여 백성들을 보호하였고,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식량을 조달하였다.
학자들은 인류역사를 고대, 중세, 근대, 현대로 구별한다.
고대와 중세를 가르는 분기점으로 게르만민족에 의해 서로마제국이 멸망되던 476년...
중세와 근대를 가르는 분기점으로 학자들은 가톨릭과 개신교가 분열되었던 1521년...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분기점으로 학자들은 1914년-1918년까지의 제1차 세계대전...
그 이후를 현대로 구분한다.
개인이나 단체나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되고 마는 것이 역사의 순리다.
가톨릭교회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던 시기에 세상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다가 개신교와 분열되는 뼈아픈 실책을 겪었다.
안타깝게도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던 시기에 가톨릭교회는 또 다시 세상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세상에서 고립되는 뼈아픈 실책을 겪게 된다.
2. 변화의 시대와 탈그리스도교
근대말기인 1800년대부터 1900년대까지 100년간은 인류역사를 통틀어 가장 변화가 극심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이 바뀌었나...
첫째, 정치적 변화 : 정치제도가 군주제도에서 민주주의로 바뀌게 되었다. 인류역사상 한사람의 군주가 다스리던 제도가 국민들이 국가의 주인인 민주주의로 바뀌게 된 것이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둘째, 경제적 변화 : 경제제도가 봉건지주제도에서 자본주의로 바뀌게 되었다. 산업혁명이 변화의 불씨가 되었다. 그때까지는 땅이 부의 기반이었는데, 그때부터는 기술이나 개인의 능력이 부의 기반이 되었다. 빌게이츠나 워렌버핏이 땅이 많아 부자가 아니다.
셋째, 사상적 변화 : 사람들의 사상이 명령과 순명에서 자유와 개인으로 바뀌게 되었다. 사람들은 전통을 거부하고 자유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나아가 공동체가 거부되고 개인을 중시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근대주의(Modernism)라고 불렀다.
넷째, 사회적 변화 :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정치와 종교의 혼합이 끝나고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게 되었다. 이와 함께 교회가 지배하던 영토가 국가로 반환되게 되면서 교회는 권력과 부를 잃게 되었다. 교황은 교황령을 지키고자 하였지만 이탈리아정부와 격렬한 대립 끝에 결국 교황령을 차례로 내주게 되고 만다.
이러한 세상의 변화로 서유럽일대에 변화의 폭풍이 몰아닥쳤다. 가톨릭교회도 이 변화를 피해갈 수가 없었다. 변화에 성공하여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것인가, 변화에 실패하여 사람들의 외면을 받을 것인가... 교회로서는 기로에 선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가톨릭교회는 변화에 실패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외면하게 되었고, 오히려 변화에 역행하는 정책으로 사람들의 지탄을 받았다. 그 결과는 교회로부터 사람들의 대량이탈이었다. 학자들은 이를 '탈그리스도교'라 불렀다.
3. 가톨릭교회의 대처
1) 개혁적인 학자들
당시 개혁적인 학자들은 교회개혁을 주장하였다. 특히 1800년대의 독일 튀빙엔(Tübingen)대학 신학자들은 중세의 낡은 교회와 신학풍토를 몰아내고 교회와 신학 전반에 걸쳐 강력한 쇄신운동을 전개하였다. 튀빙엔학파라고 불리는 이들은 '예수님께서 세우신 가톨릭교회가 마치 교황이 지배하는 교황제국과 같이 되었고, 성직자는 신자들을 다스리는 권력자처럼 되어버린 현실을 비판하고 초대교회의 순수성을 회복하자'고 역설하였다.
튀빙엔학파와 같은 개혁적인 학자들의 주장은 ‘교회의 현대화’였다. 가톨릭교회가 변화하는 세상의 요구를 수용하고 여러 사상들과 대화해야함을 촉구하였다. 나아가 낡은 방법, 즉 단죄와 처벌의 위협, 법과 허례허식으로 신자들을 지도할 것이 아니라 교회전반의 의식개혁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되찾아야한다고 주장했다.
튀빙엔학파의 이러한 쇄신운동은 보수적인 교회분위기에 비추어 대단히 혁신적인 운동이었다. 교황청이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보수적이었다. 오히려 개혁적인 학자들의 당시로서는 지나치게 혁신적인 주장들이 교황청과 갈등을 불러일으켰고 더러는 제재를 받기도 하였다.
2) 교황들의 대처
교황 비오9세(1846-1878)는 시대적 변화의 중심에 서있던 교황이었다. 비오9세는 265분의 교황 가운데 가장 오래 재임했던 교황이었다.
교황 비오9세(1846-1878), 레오13세(1878-1903), 비오10세(1903-1914), 베네딕도15세(1914-1922), 비오11세(1922-1939), 비오12세(1939-1958)
요한23세(1958-1963), 바오로6세(1963-1978), 요한바오로1세(1978), 요한바오로2세(1978-2005), 베네딕도16세(2005-)
시대적 분기점에서 교황 비오9세는 교황권과 교도권의 권위를 더욱 강화함으로써 교회의 전통을 확고히 지키려는 '방어정책'을 추진하였다. 나아가 제1차 바티칸공의회를 소집하여(1869-1870) 교회의 권위를 재확인하였다. 제1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황의 무류성과 수위권'을 선포하였고, 교회구성원의 충성과 순명을 더욱 강조하였다.
교황 비오9세 이후의 교황들도 거듭 교황권을 더욱 강화하고 근대주의를 단죄하는 수세적인 방식으로 대처했다.
교황들의 이러한 처사에 교황권을 옹호하는 보수적인 사람들은 환호하고 지지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변화요구에 대한 교황들의 낡은 처방방식에 반발했다.
첫째, 정치적 변화 : 군주제도가 무너지고 민주주의로 바뀌게 되었지만 교황들은 이러한 변화를 수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교회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민주주의에 대해 충격과 불안한 콤플렉스에 젖어있었다. 교황들은 군주제도를 고수했고 교황의 절대권을 고집하였다.
둘째, 경제적 변화 : 봉건지주제도가 무너지고 자본주의로 바뀌게 되었지만 교황들은 봉건지주제도를 고수하고 자본주의를 수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본주의를 근절하고 중세의 계급질서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산업혁명으로 생겨난 수많은 노동자들이 그들의 어려움을 교회에 호소하였지만 적절한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외면하기 일쑤였다.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도와주는 것은 개별적인 도움보다도 법과 제도를 고치는 것이 더욱 근본적인데 그런 사실을 깨닫기까지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결과로 많은 노동자들이 교회에 실망하고 공산주의로 넘어가게 되고 만다.
셋째, 사상적 변화 : 근대주의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자유와 개인' 의식을 주장하게 되었지만 교황들은 교회에 대한 '권위와 순명'을 더욱 강조하였다. 개혁적 신학자들은 세상의 여러 사상들을 무조건 단죄하기보다는 수용하고 대화해야한다고 하였지만 거부되고 만다.
넷째, 사회적 변화 : 오랜 정치와 종교의 혼합이 끝나고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면서 교회가 지배하던 영토가 국가로 반환되자 교황들은 정교분리를 막고 교회의 영토를 지키는 한편, 세상에 대한 교회의 권위와 순명체제를 유지하려 하였다. 그 와중에 정치권과 대립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바야흐로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가톨릭교회는 수세에 몰렸고, 사람들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많은 개혁적인 신학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직시하고 교회가 시급하게 바뀌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하지만 교황들은 교회의 권위와 힘을 고수하려 하였다. 오히려 다양한 신학적 분석과 전망을 시도하는 신학자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더러는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교황들은 세상의 도전에 당황하고 있었고, 교회의 전통을 굳게 고수하는 것만이 교회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교황들은 교회의 개혁과 쇄신을 시도하였지만 내놓는 처방들 대부분이 시대의 요구와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교회는 점점 더 세상으로부터 고립되고 있었다. 교회라는 우물 안에 더욱 갖히고 있었다.
4. 개혁적 신학자들의 용기와 교황 요한23세(1958-1963)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가톨릭교회를 현대세계에 새롭게 적응시키려는 시도를 하기까지, 100여 년 동안 교황과 교도권은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개혁적인 신학자들은 거듭 교회가 현대세계에 적응해야한다고 주장하였지만 교황청에서는 이들에 대해 경고장으로 응수하였다.
경고를 받았던 학자들 대열에 셔누(D.Chenu, OP), 다니엘루(J.Danielou, SJ), 드 뤼박(H.de Lubac, SJ), 콩가르(Y.Congar, OP), 부야르(H.Bouillard, SJ), 떼이야르 드 샤르댕(Teilhard de Chardin, SJ), 라너(K.Rahner, SJ)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훗날 이들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이끌었던 위대한 학자들이었다. 공의회의 정신이 이들에게서 나왔던 것이다. 이들은 신학교 교수직에서 해임되거나 저작이 금서로 지정되었고, 더러는 공의회가 개최될 때까지 유랑생활을 하였다.
이들은 새로운 시대적 흐름을 정확하게 직시하였고, 교회가 효과적으로 대처해야할 근본적인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교황 요한23세(1958-1963)는 이들의 분석과 처방을 받아들여 공의회를 개최함으로써 교회개혁을 주도하였던 것이니, 이들은 현대교회를 살린 선구자들이었다. 교황 요한23세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이끌었던 신학자들은 현대가톨릭교회의 영웅들이다. 하느님께서는 공의회를 통해 교회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보여주신 것이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리더는 구성원의 재능을 보고 적재적소에 쓸 줄 알아야 한다.
5. 변화와 경영
뛰어난 경영인들은 항상 변화를 예의주시하고 적절한 대비책을 강구한다. 교회는 '영적인 동시에 가시적인 조직'이다.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교회지도자들도 변화와 경영에 대한 역량을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이다.
첫째는 '위기의식과 안목'이다. 최고경영자라면 '우리조직은 내일이라도 망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으로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 교회지도부도 세상변화 앞에 늘 위기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안일과 나태는 조직을 쇠퇴시킨다. 나아가 세상에 대한 넓은 안목을 가져야 할 것이다. 과거에는 세상을 마귀로 보고 세상적인 것을 백안시했지만 이제는 세상으로 향하는데 주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물 안에서 안주하다가는 망할 수 있는 것이 오늘날이다.
둘째는 '지혜와 통찰력'이다. 정보와 지식만으로 경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지혜와 통찰력을 갖추어야 한다. 지혜는 정보와 지식을 실천하고 경험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또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통찰력과 선견력이 중요하다. 통찰력과 선견력은 역사와 선각자들의 경험을 많이 읽고 배우며 끊임없이 탐구할 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스피드와 타이밍'이다. 최고경영인은 항상 변화를 재빨리 읽고 트렌드를 정확하게 포착해내야 한다. 적시에 적절한 대책을 찾아내는 것이 조직경영의 생명이다.
넷째 '혁신에 대한 의지와 용기'다. 조직경영은 혁신의 연속이다. 최고경영자는 늘 혁신에 대한 굳건한 의지와 혁신에 따르는 희생과 저항을 이겨내기 위한 용기를 갖추어야 한다.
불확실한 이 시대에 교회의 리더들이 혜안을 가지기를 간절히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