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뛰어난 개혁으로 그 흐름을 바꾸어 놓는 일은 감동적이다.
천주교의 예수회, 불교의 봉암결사, 조선의 개혁가를 비교해보겠다.
1. 가톨릭 : 예수회결사(結社)
1500년대 유럽사람들은 가톨릭교회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교황님을 비롯한 가톨릭지도부는 권위주의에 물들어 있었고 무능했다. 곳곳에서 교회에 대한 원성이 높았다. 세상이 바뀌고 있었다. 중세가 끝나고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근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무조건 복종하기보다는 인간의 삶을 중시하는 눈을 뜨게 되었다. 소위 '인문주의'다.
교회는 변화되는 세상을 제대로 보고 세상의 요구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권위주의와 권력정신을 버리고 순수한 복음정신으로 돌아갈 것이 필요했다.
당시 교회지도부는 무능했지만, 다행히 많은 개혁가들이 복음정신으로 무장하고 가톨릭교회의 개혁을 위해 헌신하였다. 필립보 네리, 안젤라 메리치, 대데레사, 십자가의 성요한, 빈첸시오... 이분들은 추락한 가톨릭교회에 새로운 복음정신을 불러일으켰고, 교회를 위해 지칠 줄 모르게 헌신하였다. 그 가운데 아마도 가장 주목받는 개혁가들은 예수회를 창설한 이냐시오 로욜라(1491-1556)와 6명의 동지들일 것이다.
독일의 아오스딩 수도회 수사신부였던 마르틴 루터도 개혁정신이 강한 수도자였다.
하지만 '영웅심리'가 강했던 34세의 젊은 루터는 교회 내에서 개혁하지 못하고 교회를 뛰쳐나가 새로운 교회를 세움으로써 이후로 사람들은 저마다 새로운 교회를 세우게 되었고, 잇달아 수많은 신흥종파까지 창궐하게 되는 불행한 결과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마르틴 루터가 가톨릭교회에서 떨어져나갈 때 유럽은 혼란과 공포의 도가니였다.
루터교는 가톨릭교회를 마구 공격했다. 루터추종자들은 성당과 수도원을 공격하여 성직자들을 죽이고 성당과 수도원을 강탈하였다. 독일 북부 대부분이 루터교 수중에 들어갔다.
혼란속의 가톨릭교회, 누가 그 혼란 속에서 가톨릭교회를 구할 수 있을 것인지...
프랑스 파리는 유럽의 중심도시 중의 하나다.
1200년에 세계최초의 종합대학이 설립된 곳도 파리와 이태리의 볼로냐였다.
당시 파리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스페인출신의 몇몇 젊은이들은 교회가 처한 혼란 앞에 의기투합하였다.
사나이들의 의기투합에 '도원결의(桃園結義)'라는 말을 쓴다.
중국 위, 촉, 오나라 삼국시대의 난세에 세력이 가장 약했던 촉나라 유비, 관우, 장비가 유비 집 뒤 뜰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소주를 한잔 하면서 서로 의형제를 맺게된다. '우리는 태어난 날은 서로 다르지만, 죽는 날은 같은 날에 죽는다'고 결의하면서, '마음과 힘을 합해 어려운 이들을 돕고 백성을 편하게 하자'고 맹세한 것이다. 후대 사람들이 이들의 의기투합을 '도원결의'라고 불렀다.
파리에는 복숭아밭은 없었지만... 강한 복음정신으로 뭉친 이들이 설립한 것이 예수회였고, 예수회의 젊은 선각자들은 만신창이가 된 가톨릭교회에 개혁의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의 리더였던 이냐시오 로욜라(1491-1556)는 개혁정신으로 뭉친 투사였다. 스페인 장교출신이었던 이냐시오는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다리에 부상을 입고 오랜 병상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에 수도생활을 결심하고 은둔하면서 깊은 영성을 쌓았다. 그러면서 피정책자 '영성수련'을 저술하였고, 이후 살라만카대학(1526-1527)에서 철학, 파리대학(1528-1535)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파리대학은 이태리 볼로냐대학과 함께 세계 최초의 4년제 대학이다. 그때가 1200년이었다.
파리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중에 이냐시오는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만났다. 때는 독일의 마르틴 루터에 의한 교회분열의 여파가 유럽전역으로 퍼지던 난세였다. 베드로 파베르,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야고보 라이네스, 알퐁소 살메론, 시몬 로드리게스, 니콜라오 보바딜라 등 6명의 동지들은 가톨릭교회를 위해 헌신하기로 맹세하고, 1534년에 예수회를 설립하였다. 저는 '예수회결사'라고 부른다. 이렇게 불러도 교회법에 저촉되지 않는지 모르겠다.
이냐시오는 위대한 영성가였다. 그의 영성에는 '주관적인 광신'이 전혀 없었다.
이냐시오는 루터가 말하를 교회는 '저마다 자기 양심에 따라 세우는 지극히 주관적인 교회'로 보았다. 가톨릭교회야말로 예수님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이며, 교회 내에 있는 인간들의 나약함으로 과오도 있었지만 세상 끝 날까지 정화와 쇄신을 계속하면서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수행해나가야 한다고 확신하고 교회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였다.
이냐시오는 가톨릭교회 교리를 알기 쉽게 설명하였다.
그러면서 루터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였다.
루터는 사람이 오직 믿음으로써만 의화(구원)된다고 하였지만, 이냐시오는 믿음뿐만 아니라 인간의 선행도 중요하다고 하였다.
루터는 오직 은총만으로 의화(구원)된다고 하였지만, 이냐시오는 은총뿐만 아니라 인간의 협력도 함께해야 된다고 하였다.
루터는 오직 성서만이 하느님말씀이라고 하였지만, 이냐시오는 아무도 성서를 자기 주관에 따라 해석해서는 안되고 예수님께서 맡겨주신 교도권의 해석을 따라야 한다고 하였다.
이냐시오는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협력'이라는 전통적인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쉽고 분명하게 해설했다. 이러한 가르침에 많은 사람들이 큰 감동을 받았다.
나아가 그의 제자들도 루터를 비롯한 당시 개신교 사상을 비판하였다.
첫째, 신앙은 공적이고 객관적이어야 하는데, 개신교는 '주관적 신앙'일 뿐이다.
둘째, 교회는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전통을 거역할 수 없는데(사도성), 개신교는 전통을 무시하고 마음 속의 영적인 교회만을 주장하는 임의적인 것이다(임의성).
셋째, 루터처럼 누구나 저마다 성서를 자유롭게 해석하면 신앙자체가 개인화된다.
예수회는 철저한 정신으로 무장하였고 불굴의 의지로 하나씩 계획을 실천해나갔다.
첫째가 '교육'이었다. 예수회는 먼저 대학을 세워 가톨릭신학과 신앙을 쇄신하면서 뛰어난 신학자들을 배출하였다. 예수회는 지금도 전 세계에 270여개 대학을 운영하면서 가톨릭정신을 가르치고 있다. 한국의 서강대학, 일본의 상지대학, 미국의 컬럼비아대학, 조지타운대학, 벨기에의 루벵대학, 로마의 성서대학, 그레고리안대학... 등, 그 가운데 독일어권 첫 대학이 바로 인스브룩대학이다.
교육에 드는 경비는 선교지역 신학생들을 독일지역 본당과 연결시켜서 그 본당에서 해결하도록 했다. 은인본당이라고 한다. 독일 베를린, 뮨헨 등등에 있는 본당과 연결되기도 하고, 나는 오스트리아 로이테라는 도시의 본당이 은인본당으로 연결되었다. 로이테에서 국경만 넘으면 독일의 유명한 백조의 성이 있어서 자주 갔었다.
둘째가 '영성'이었다. 이냐시오 영성수련은 지금까지 가톨릭의 대표적인 영성수련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예수회의 지칠 줄 모르는 도전정신과 진취적인 사고가 담겨있다.
셋째가 '선교'였다. 전세계 선교는 예수회의 업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남미전역, 아프리카,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인도, 일본, 그리고 그 후계자들인 마태오 리치, 아담샬 신부의 중국선교 등이 예수회의 업적이다.
예수회는 엄격한 조직, 유연한 사고, 불굴의 정신으로 교회분열이후 흐트러진 가톨릭교회에 엄청난 돌풍을 일으켰고, '교육과 영성과 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 알로이시오 곤자가(1568-1591), 칼 라너(1904-1984) 등이 뛰어난 예수회회원들이었고, 예수회 총장머리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 하느님도 모른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유연하고 진취적인 사고를 토대로 한 예수회 정신은 예수회를 100여년 만에 일약 가톨릭교회 최대 규모의 수도원으로 성장시키는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당시 무능하고 노쇠했던 가톨릭교회 지도부와 루터와 칼빈과 같은 극단적인 개혁가들의 도전 앞에 교회의 앞날은 암담했다. 또 누가 어떻게 그 상황을 극복해 나갈 수 있을지 그저 캄캄할 뿐이었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 놀랍게도 젊은 선각자들이 뭉쳐서 교육과 영성, 선교라는 세 가지 큰 틀을 잡고 불굴의 의지로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갔던 것이니... 이것을 다만 하느님의 은총이었다고만 말할 수밖에 없겠는가... 하느님의 은총도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인 것이다.
교회에 많은 성인이 계시지만, 이냐시오는 내 가슴을 뛰게 한다. '명석한 두뇌, 정확한 판단력, 불굴의 의지...' 이냐시오의 트랜드다. 우리 교회에 이냐시오 같은 리더들이 많이 나오기를 소망한다.
2. 불교 : 봉암결사(鳳岩結社)
불교는 삼국시대에 전래되어 이 나라 민중의 시름을 달래주는 피난처가 되었다.
고려시대, 태조왕건은 유훈 '훈요십조'에서 불교를 국교로 하라는 교시를 내렸고, 이후 불교는 이 나라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고려시대 불교는 만개했고, 팔만대장경이라는 보물을 만들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崇儒抑佛정책, 불교는 유교로부터 탄압을 받고 지리멸렬한 상태였다.
일제시대, 일제는 한국불교를 통제함으로써 한국민족을 통제하고자 했다.
1924년, 일제는 한국불교를 '조선불교조계종'으로 통합하여 조선총독부 밑에 두어 통제하였다. 나아가 조선인들의 정신을 흐리게 하려는 목적으로 스님들의 결혼을 장려하여 스님들의 90%가 결혼한 대처승들이었다.
해방 후 한국불교는 그야말로 만신창이였다.
어디서부터 한국불교를 바로잡아야 할지 암담했고, 또 누가 불교를 바로잡을 수 있겠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껍데기만 남아있던 한국불교를 살린 것은 놀랍게도 잘살아야겠다는 강력한 의지로 똘똘 뭉쳤던 젊은 수행자들이었다. 경북 가은에 희양산이라는 아름다운 산이 있다. 그 산 아래 봉암사라는 아담한 절이 있다. 봉암사는 1980년대부터 봉쇄사찰이 되어 스님들의 정진에만 전념하는 산문이 되었다. 우리로 치면 봉쇄수도원이다. 일년에 한 번, 부처님 오신 날에만 개방을 하는데... 그날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그날 그 많은 사람들 비빔밥은 공짜로 준다.
1947년, 그곳에서 수행하던 성철스님을 중심으로 청담, 혜암, 법전스님 등 당시 2,30대의 젊은 선각자들은 철저한 정신으로 뭉쳐 한국불교를 중흥시키자고 의기투합하게 된다. 이들은 후에 전부 이 나라 최고의 큰스님이 되었다. 많은 스님들이 이들과 뜻을 같이 하였고 그 영향력은 전국으로 번졌다. 후대사람들은 이것을 '봉암결사(鳳岩結社)'라고 불렀다. 불교에서 목숨을 걸고 수행하는 것을 '용맹정진'이라고 한다. 이들은 실제로 용맹정진을 통해 불굴의 의지를 쌓았고 한국불교를 기어이 일으키고야 말았던 것이다.
격동의 역사를 거치는 동안 불교의 중심을 잡은 사람들이 바로 봉암결사의 멤버들이었던 것이다. 지난 2007년 봉암사에서 15000명의 불자들이 봉암결사 60주년 기념대회를 하였다.
3. 조선의 개혁가
고려말... 권문세족들의 백성들에 대한 착취는 극에 달했다. 심지어는 하나의 군 전체가 권문세족 한사람의 소유였을 정도였다.
세도가들의 극심한 착취를 보다 못해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대를 이끌고 정도전과 함께 쿠테타를 일으켜 조선을 개국하였지만, 결국은 고려 권문세족을 내쫓고 나라 이름만 바꾸었지, 자기들이 새로운 권문세족이 되어 호위호식하고 백성들을 핍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성계는 지금의 두만강 시골출신으로 타고난 무인이었고 백전불패의 맹장이었다. 이성계의 책사가 정도전이었다. 두 사람이 의기투합한 것이다. 이성계의 활솜씨는 달인이었다.
1378년 황해도에서 왜구를 격퇴할때의 일화다. 이성계는 한 정자 안에서 왜구를 향해 활을 쏘았는데 쏘는 족족 왜구들이 나가떨어졌다. 전투 후에 이성계가, '오늘은 적의 왼쪽 눈만 쏘았다.' 확인해보니 과연 왜구들은 모두 왼쪽 눈에 화살을 맞고 거꾸러져 있었다. 또 화살 한 대로 비둘기 두 마리를 떨어뜨린 적도 있었다.
요즈음 세계 최강인 우리의 양궁선수들이 활의 원조달인인 고구려의 시조 주몽과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활솜씨를 이어받은 것 같다. 서양인들은 영국의 윌리엄 텔을 명궁으로 생각하는데, 머리 위의 사과를 맞추는 정도로는 주몽이나 이성계의 실력에 비할 바는 아니다.
이성계는 잠재적 저항세력인 고려왕족 왕씨들을 멸족시키기 위해 섬으로 이주하여 자유롭게 살도록 해주겠다고 모아 모조리 살육했다. 이를 피한 왕씨들은 성을 바꾸어 살아야했다. 온전 전, 밭전, 구슬 옥씨가 대표적이다.
조선은 사대부(양반)의 나라다. 양반에게는 좋은 나라, 백성들에게는 나쁜 나라였다.
그 원인이 다음 두 가지다.
첫째, 토지제도 : 양반은 지주, 백성은 소작인으로 백성은 땅을 부쳐 먹고 양반에게는 소작료를, 나라에는 세금을 내야했다.
둘째, 병역제도 : 양반은 병역이 면제된 반면, 백성은 병역의무를 지고 16세-60세까지 국방세금(군역, 군포)를 내야했다.
유학자들은 대부분 이론에 치우쳐 백성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했다.
양반들의 반대로 토지제도와 병역제도를 바꾸기는 매우 어려웠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조선시대에 오셨으면 백성들을 위해 양반들과 맞서서 싸우셨을 것이다. 양반들에 맞서서 힘없는 백성들을 위해 현실에서 투쟁하시다가 돌아가시지 않았겠나...
조선의 왕 27명 가운데 가장 백성들을 생각했던 왕은 아마도 정조대왕이었을 것이다.
세종대왕은 나라기틀을 세우는 일에 바빴고 사대부들에게는 성군이었지 백성들에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다. 정조대왕은 백성들을 위해 현실적인 개혁정책을 펴다가 보수사대부들의 끈질긴 저항에 부딪쳤고, 결국은 일찍 죽었다. 정조대왕의 죽음은 조선의 불행이었다.
조선역사에서 다음 3사람이 가장 대표적인 개혁가일 것이다.
1) 조광조(1482-1519). 2) 유성룡(1542-1607). 3) 정약용(1762-1836)
조광조는 아마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개혁가일 것이다. 연산군의 폭정을 뒤엎고 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중종은 조광조를 신임하여 오늘날의 검찰총장에 중용했다. 조광조는 중종이 진정으로 백성을 위하는 성군이 되기를 바랬고 강력한 개혁을 추진했다. 조광조는 보수기득권자들의 부패를 들추었고 갖가지 죄목이 폭로되었다. 조광조의 추상같은 개혁의지 앞에 보수기득권자들은 벌벌 떨었다. '백성들이 춤을 추는 세상...' 조광조가 간절히 바랬던 꿈이었다. 하지만 결국 보수우파의 저항에 반격에 밀려 죽음을 당하고 말았으니, 그것이 1519년 기묘사화였다. 조광조는 이담에 하늘에 가면 가장 뵙고 싶은 분 리스트에 올라 있다.
사실 민주주의의 전환점이 되었던 프랑스대혁명 모토가 '자유와 평등'이었다. 조광조의 정신이 백성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 아니겠나... 프랑스대혁명이 1789년이었다.
유성룡은 조선최고의 재상이다. 임진왜란의 풍파를 겪은 유성룡은 우리가 일본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이유를 깊이 생각했다. 그 결과 유성룡은 토지제도와 병역제도가 나라를 약화시키고 결국에는 망하게 할 수 있다고 간파했다. 그래서 토지제도를 개혁하여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누고, 사대부도 병역의무를 지게 하는 개혁을 추진하다가 결국은 삭탈관직 당했다. 유성룡은 고향인 하회마을로 낙향하여 은거하면서 임진왜란을 기록한 징비록을 썼다.
정약용은 불세출의 학자로 당시 거의 모든 유학서적을 읽고 그 요점을 파악했고, 아무도 섭렵하지 못했던 '주역'까지 통달하였으니... 조선최고의 학자였다.
정약용은 유학이 이론이 아니라 반드시 잘못된 현실을 고쳐서 백성을 구해야 한다는 실천적인 실학을 필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그 핵심이 토지제도를 개혁하여 백성들에 나누어주고, 병역제도를 개혁하여 양반에도 부여하는 것이었다.
정조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정약용은 정조가 죽고(1800년), 정순왕후 섭정치하에서 반대파의 탄압으로 철저히 몰락하여 폐족이 되었다.(정약전 유배, 정약종 사형, 이승훈 사형, 매부 황사영 사형).
영조의 두번째 왕비였던 정순왕후는 희대의 악녀였다. 정당 중에서는 노론벽파가 가장 극우보수당이었다. 이 두 세력이 다른 당파를 모조리 살육하고 권력을 독차지하였던 것이다.
정조대왕 사후 사실상 조선은 끝이었다. 백성들의 피눈물이 하늘에 닿았고, 조선은 나락으로 추락하여 결국은 100년 뒤에 망국의 길을 걸었다.
권력은 일당독재로 이어졌고 백성들은 무거운 세금에 먹고 살 길이 없어 도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곳곳에서 민란이 들끓었다. : 홍경래민란(1811년), 진주민란(1862년), 동학혁명(1894)...
진주지방에서 일어난 민란 당시 백성들의 참상이 어떠했는지를 기록한 글이 있다.
진주지방에 신혼부부가 있었다. 시아버지는 3년 전에 죽고 이제 막 아이가 태어났는데, 관청으로부터 죽은 시아버지와 남편, 아이 이렇게 3대의 군포를 내라는 명을 받았다.
원래 군포는 16세-60세까지 내는 세금이었는데, 돌아가신 시아버지, 남편, 갓 태어난 아이의 군포까지 내야하니 기막힌 노릇이었다. 세금을 받으러온 관리들이 집안에 남아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외양간에서 농부에게 유일한 재산인 소를 끌고 가자 이에 낙심한 남편이 아이 낳은 것을 한탄하면서 홧김에 부엌 식칼로 자신의 성기를 잘라버린 사건을 기록한 글이다. 아내는 잘린 남편의 성기를 들고 관가로 달려가 하소연하였지만 아전에게 박대를 당하고 울면서 돌아오는 길에 갈대밭에 퍼질고 앉아서 통곡하고 있다.
"갈대밭의 젊은 신부 곡소리 슬픈데...
관청문을 향한 곡소리 하늘에 퍼지네.
군인간 남편 돌아오지 않는 경우는 있다지만
이때까지 양근을 잘랐다는 말 듣지 못했네.
시아버지 삼년상은 이미 끝났는데 아이는 아직 피도 안말랐지.
그 이름 군적에 올라 있으니 삼대가 군포를 내야한다네.
달려가 하소연하니 문지기가 범처럼 지키고 있네.
아전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외양간 소를 끌고 가네.
남편이 칼을 들고 방에 들어간 뒤 붉은 피 자리에 가득하다.
아이 낳은 것을 한탄하며 양근을 잘랐구나...
호사한 집 일년내내 풍악소리 요란한데,
같은 동포로 태어난 백성이건만 어찌 이리 후하고 박한 것인가..."
변화와 개혁을 외면하면 권세가들은 호위호식 할 수 있겠지만 많은 이들이 고통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역사의 가르침이다. 교회도 세상의 변화와 개혁을 외면하지 말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