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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신부님들이 쇄신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둘째, 사람들의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셋째, 평신도들도 수준이 훨씬 높아졌다.
그래서 신부님들도 이에 걸맞게 변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그저 옛날식만 고집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다. 신부님들이 이런 이야기를 잘 귀담아 들어야 하겠다.
1500년대 유럽 마르틴 루터시대 때도, 많은 사람들이 신부님들이 쇄신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당시에도 세상이 많이 변하고 있었다. 중세 천년이 끝나고 르네상스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래서 교회도 변해야 한다는 요구가 컸다.
첫째, 무조건적인 교회의 법보다는 사람의 인격을 존중해야한다.
둘째, 무조건적인 명령보다는 서로 대화하고 더 좋은 결정을 얻어내자.
셋째, 성직자들은 권위적인 태도를 버리고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신부님들이 귀담아 듣지를 않았다.
급기야 가톨릭을 부정하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생겼다.
마르틴 루터신부도 교회의 개혁을 간절히 원했던 젊은 신부였다.
하지만 결국은 루터신부는 극단적인 길을 가게 되었고, 가톨릭교회를 부정하고 새로운 교회를 세움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개신교가 시작되었다.
교회가 나누어지는 것... 얼마나 안타깝고 분한 일인가... 다들 같은 식구들인데...
루터와 같은 개혁가가 극단적인 길을 택한 것도 문제이지만, 개혁의 요구에 귀를 막고 듣지를 않았던 당신 교회의 지도부도 큰 문제였다.
오늘날도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얼만큼 변하고 있나?
1. 오늘날의 세상변화
오늘날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포스트 모더니즘(Post-Modernism)이라고 부른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특징은 '개인과 자유'다.
첫째, 개인
옛날에는 개인보다는 단체가 더 중요했다. 그때는 한 사람 한 사람보다 공동체가 더 중요했다. 개인은 희생되어도 단체가 살아야 했다.
근데 이제는 개인이 더 중요하다. 집집마다 아이들이 하나둘이다. 그러니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하다. 자기 생각, 자기 방식이 중요하다.
둘째, 자유
옛날에는 형제들도 여럿이니까 뭐라도 내 마음대로 못했다. 근데 이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귀하다보니 내 마음대로 한다. 물어보지도 않고 한다. 간섭하면 싫어한다.
1) 동등성 : 사람들의 의식이 이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인식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교회는 아직 서열주의를 고수하고 있다.
2) 개방성 : 의사결정과정도 투명하게 되었다. 이제는 정보를 함께 공유하고 개방되었다. 하지만 교회는 아직 비밀주의를 고수하고 있다.
3) 대화 : 소통방식도 이제는 맹목적인 순명만을 요구해서는 효과를 내기 어렵게 되었다. 대화를 통해 가장 좋은 결정을 얻는다. 하지만 교회는 아직 순명체계를 고수하고 있다.
가톨릭교회의 시스템은 오늘날 세상정서에 아직 익숙하지 않다.
교회조직자체가 군주시대방식과 비슷해서 오늘날 시대와는 많이 다르다. 오히려 교회의 권위와 순명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많은 경우 교회지도부가 당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하여 시대적 흐름을 분석하고 세상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보다는, 권위와 순명을 더욱 강조하면서 뒷전에서 탄식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경직된 사고에서 유연한 사고로, 명령에서 대화로, 위계질서에서 평등의식으로, 밀실에서 개방으로, 독선에서 함께 하는 연대에로의 변화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특히 주교는 신부들의 마음, 신부는 본당식구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어야 하겠다.
우리가 교회의 쇄신에 대해 말할 때, 그 첫 번째는 성직자들의 쇄신을 말한다. 신자들에게 쇄신하라는 것은 그 다음이다. 교회쇄신은 반드시 성직자들의 쇄신이 먼저이고 성직자들이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사제와 관련하여 몇 가지 주제를 함께 생각해 본다.
1. 신원문제(身元)
한국사제문제의 핵심은 '권위주의'라고 할 수 있다.
중세, 장구한 세월동안 정교혼합의 폐해는 '복음의 교회'를 권력과 결탁한 '제도의 교회'가 되게 했다. 그리하여 교회가 교황제국, 성직자가 권력자가 되어 권위와 특권의식이 몸에 배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사제를 'sacerdos'라고 강조함으로써 위계적으로 평신도 위에 있는 신분질서로 고착시켰고,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강조함으로써 성직자 중심주의를 낳았다. 사제를 '지휘자, 장교, 천인대장'이라고 강조함으로써 평신도를 부하, 졸병으로 전락시켰고, '교회의 관리자'로 강조함으로써 교회의 관료화를 낳았다. 그리하여 교회가 구청이나 동사무소와 같은 제도로 인식되었고, 사제는 교회라는 국가의 공무원처럼 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일부이겠지만 사제들은 권유하기보다는 명령하고, 의논하기보다는 판단하고, 제시하기보다는 지시하고, 봉사하기보다는 군림해왔다는 말을 듣는다. 여전히 본당신부의 위세는 막강하다고 할 수 있다.
성직자들은 직무를 행함에 있어 거의 독재적인 자유가 있어 그 남용을 견제할만한 장치가 별로 없다. 사회에서는 회사의 경영자가 경영실적에 따라 책임을 지도록 되어 있지만, 교회는 본당신부의 사목실적에 따라 책임을 지게 하기가 어렵다. 종교는 실적으로 따질 성격이 아니라는 이유다.
또한 한국교회의 성직자들이 받는 대우는 거의 세계 최고 수준일 것이다.
그러다보니 주교는 도지사, 신부는 시장이나 군수와 같은 대우를 받아야 위신이 서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은데... 특권의식이라 아니할 수 없다.
원래 교회의 일을 가리키는 말은 '봉사'라는 말이었다. 성직자들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도와주는 봉사자들이다. 말씀을 전하는 봉사자, 전례를 거행하는 봉사자, 사목을 실천하는 봉사자들이다. 이제부터 사제에게 '봉사자'로 그 강조점을 바꾸어야 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사제쇄신의 첫 번째는 '성직자가 봉사자가 되는 것'이다.
2. 사제양성문제
오랫동안 사제양성의 내적 강조점은 '착하고 말 잘 듣는 신부'였다.
과연 현대사제에 필요한 영성으로 '착하고 말 잘 듣는' 영성이 첫 번째인가에 대해 오늘날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우선, '성소동기의 순수성'을 회복해야 하겠다.
동기정화(淨化)가 필요하다. 모든 것이 풍족해진 오늘날 '과연 왜 사제가 되려고 하는가?'하는 근본적인 동기가 중요하다고 하겠다.
또, '현대사제에게 참으로 필요한 영성'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반성해야 하겠다.
과거, 대다수가 문맹이거나 배우지 못했던 시절, 성직자는 많은 정보를 독점할 수 있었고, 그것이 권위를 가능하게 했다. 그땐 성직자는 묵주를 들고 수단자락으로 성당마당의 먼지를 쓸고 다니기만 해도 그 신비로움으로 사람들의 호기심과 동경을 불러 일으켰다. 그런 시절의 신부는 자리만 지키고 앉아 있어도 '신부님, 우리 신부님'이 가능했다. 착하고 말 잘 듣는 신부로 충분했다.
이제는 시대가 완전히 바뀌었다. 무엇보다도 실력을 갖추어야한다.
현대의 사제들은 첫 번째로 '선교를 위한 투사'가 되어야 하겠다.
사제들은 비교적 안정된 교회제도 안에서 살다보니 선교의식이 상대적으로 약한 것이 사실이다. 예비자모집을 부담스러워하는 사제들도 있는 것 같다. 그래서는 안된다.
선교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복음(福音)은 기쁜 소식이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그 가르침대로 살면 이 세상에서 복되고, 저 세상에서는 천국에 간다는 소식'이다.
오늘날 정신없이 바쁘게 사는 사람들 너머로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많다.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들... 그들이 주옥같은 하느님말씀을 목말라 하고 있다. 하느님말씀은 생명을 준다. 하느님말씀이 그들 인생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선교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내가 무슨 덕을 보겠다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교회가 가진 보물이다. 이 좋은 보물을 나누는 것이다. 이 좋은 보물을 나누어 사람들에게, 특히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가진 사람들에게 힘이 되도록 해주는 것이다. 그 힘은 약하게 보이지만 진정으로 강한 힘이다. 세상 그 어떤 힘보다도 강한 힘... 죽음도 두렵지 않은 힘이다. 일찍이 간음한 여인이나 창녀와 같은 보잘것없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힘을 얻었잖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돈을 1억원씩 주지 않았다. 생명의 말씀을 주셨다. 희망 없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단 한 번 만나고 생명의 말씀을 얻었다. 그리고 너무나 기뻐했다. 그 기쁨은 행복을 주었고, 죽음도 두렵지 않은 행복을 주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의식이 더욱 강해지고 자유로운 삶을 찾고 있다. 그러다보니 정신적인 가치들이 점점 뒤로 밀려나고 있고 입교시키기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민주화되고 정보화된 사회, 오늘날 사제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사도 바오로와 같은 '불굴의 의지'다. 우리는 투사, 선교를 위한 투사가 되어야한다. 선교에 모든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미구에 유럽교회처럼 급격하게 추락할 수 있다. 위기의식을 가지고 선교에 모든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위해 급변하는 사회에 적응하는 '넓은 안목, 유연한사고, 균형감각, 정확한 판단력'을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 21C에 필요한 진취성을 갖추어야 하겠다.
3. 안일과 태만함
살면서 점점 현실에 안주하고 타협함으로써 첫 미사 때 결심했던 성소의 순수한 동기들이 퇴색되기 쉬운 것이 사제생활의 딜레마라 할 수 있다.
보통 사제서품 10년 정도가 지나면 새신부 때의 성령의 기운이 떨어지는 것 같다. 그러다보면 타성에 젖어서 명확한 목표의식을 잃기 쉽다. 자칫하면 방황하기 쉽다.
초심을 유지하기가 어려운 것이 인간이다. 세상 속에 안주하고 경험과 관행의 숲에서 무디어지기 쉬운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거듭 성찰이 필요하고 새로운 각성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사제들도 평가를 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한다. 평가가 없으니 태만하기 쉽고, 평가가 없으니 동기부여가 약하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사제들에 따라 본당운영이 들쑥날쑥이다. 어떤 신부는 열심해서 본당을 일으키는 반면, 어떤 신부는 본당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뚜렷한 대책을 찾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사제들의 동기를 부여할 긍정적인 대안은 없는 것인가...
이제는 사제도 사목활동에 대한 평가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교회는 엄격한 서열주의를 고수하고 있다. 신부들은 나이보다는 서품연차에 따라 서열이 지어진다. 보수도 서품연차에 따라 정해진다. 그러니 공평하기는 하다. 공산주의처럼...
공산주의는 모두가 번 것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똑같이 나눈다. 좋기는 하지만 경쟁이 없고 발전이 없다. 그래서 결국 공산주의는 100년 만에 문을 닫았다.
교회도 서열주의에서 능력주의로 바꾸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교회의 능력주의는 평가를 해서 기업처럼 잘라내는 것이 아니다. 잘라낼 수는 없다.
교회의 능력주의는 평가에 따라 '적재적소에 적임자를 배치하는 것'이다.
** 사제평가 기준
1) 세례자숫자 2) 판공성사자수 3) 교납금증감율
이 세 가지를 최소한 3년 치를 평가해서 사제인사의 기초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임.
본당도 여러 가지 기준으로 평가를 해야 한다.
- 도시본당, 중소도시본당, 시골본당
- 발전가능성이 많은 본당, 현상유지본당
- 노인본당, 젊은 층이 많은 본당 등
이런 자료를 통해 사제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서 역량을 발휘하도록 하는 방안이 제안되고 있다.
4. 본당운영문제
본당운영의 독선적 태도도 문제다. 권위주의가 그 원인일 것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이 '연대성'이다. 연대성은 혼자하지 말고 함께 하자는 것이다.
본당운영을 본당 봉사자들과 논의하고 의견을 듣고 가장 좋은 결정을 통해 하는 것이다. 두 가지 회의가 기본일 것이다.
첫째, 가족회의 : 본당신부, 보좌신부, 본당수녀, 유치원수녀, 사무직원들이 매주 한 번, 보통은 화요일 오전에 회의를 통해 한 주간의 본당계획을 점검하고 협조하는 회의.
둘째, 사목회의 : 본당사목위원들의 회의로 매달 한번, 보통은 마지막 주 금요일 저녁에 회의를 통해 다음 달 본당사목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회의.
회의를 통해 결정하면 결정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고, 여러 사람의 책임감을 느낀다.
회의를 하지 않으면 소통이 어렵고, 소통이 없으면 공동체가 잘 돌아가기 어렵다.
5. 사제들에 대한 감독
사제들에 대한 감독자는 주교다.
주교임무의 구체적인 첫 번째는 '사제들을 양성하고 감독하는 일'이다. 초대교회시절 신자들이 적었을 때, 주교는 신자들과 직접 상대해야 했다. 오늘날, 신자들을 직접 접촉하는 사람은 사제들이다. 따라서 주교는 사제들을 잘 감독해야할 것이다.
주교는 무엇보다 신부들과 대화해야 하겠다. 주교와 대화가 안된다는 신부들의 불평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하겠다. 신부들에게 신바람을 주어야 하겠다. 신명이 나면 120%를 할 수 있는 게 한국 사람이다. 주교는 무엇보다도 신부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아야 한다. 존경심이 떨어지면 순종이란 말이 강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급변하는 세상이 현대사제들이 처한 환경이다.
세상은 변했는데 사제들의 처지가 손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말만 빤질빤질 늘어놓고, 장터에서 인사받기 좋아하고, 잔치집에서는 대접받기 좋아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빼다박지는 않았는지를 반성해야 할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 내린 예수님의 판정은 '위선자'였다.
특별히 성직자들에 대한 의존도가 유달리 높은 우리나라 신자들의 종교적 심성도 고려해야 한다. 평신도들의 자생적 활력이 부족하다. 사제가 있으면 잘되고, 하던 일도 사제가 없으면 안되는 게 우리 정서다. 이런 풍토를 인정한다면 한국교회문제의 중심에는 성직자들이 있다. 주교를 포함한 사제들이 먼저 각성해야 한다. 특별히 신자들과 직접 접촉하는 본당신부들의 각성이 시급하다 하겠다. 사제들의 어깨에 한국교회의 미래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