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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선교역사는 놀라움의 역사다.
한국교회역사에는 세계교회사에 유례가 없는 아주 특별한 것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우리 한국교회는 선교신부님이 와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우리들 스스로 먼저 신앙을 찾고, 세례를 받고, 그 다음에 신부님을 모셔왔다는 사실이다.
둘째, 한국교회는 첫 번째 신부님이 오셨을 때 벌써 3천명의 신자가 있었는데, 그 동안 신자들이 잘 몰라서 신자들끼리 주교를 뽑고, 신부를 임명하고 해서 교회조직을 만들고, 미사도 드리고, 고해성사도 주고 했다. 가성직제도라고 한다.
셋째, 동정부부순교이야기인데, 마리아와 요셉 같은 이 동정부부순교사화는 우리 순교역사의 꽃이라 할 수 있다.
1. 천진암주어사모임과 이승훈세례(1784)
중국을 유일한 대국으로 극진히 섬겨온 조선은 해마다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어 중국의 비위를 맞추었다. 이러한 사신일행이 두 달여 동안 북경에 머무르면서 반드시 구경했던 곳이 북경에 있던 네 곳의 성당이었다. 사신들은 성당에서 신부의 안내를 받고 서양을 소개하는 책들과 천주교교리서인 '천주실의' 등을 선물로 받아 가지고 오게 되었다.
당시 조선의 학문은 유학이었는데, 학자들은 이론에 치우쳐 실속없는 토론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유학에 식상해 있었다.
중국에서 갔던 유학자들은 중국에 들어와 있던 천주교를 알게 되었는데, 자세히는 알지 못했고, 그냥 서양학문 중에 하나로 생각했고, 천주학이라고 불렀다. 근데 천주학은 보통학문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주인을 섬기고,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대해 가르치고, 올바르게 살다가 마침내 하늘로 돌아간다는 아주 심오한 학문으로 알게 되었다.
학자들은 중국에서 돌아올 때 천주학 책을 몇 권씩 사들고 들어와서 틈틈이 읽었다. 이런 학자들이 점점 늘어나게 되자, 뜻 있는 학자들이 연구모임을 갖게 되었다. 이 모임을 했던 곳이 바로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천진암 주어사라는 암자였다.
당시 모임을 주도했던 사람이 이벽(1754-1786)이었다. 모임을 계속하면서 드디어 한 사람을 뽑아서 대표로 중국북경에 보내서 보다 자세하게 천주학을 배워오게 하였다. 이렇게 뽑힌 사람이 이승훈(1756-1801), 이승훈은 북경에 가서 3달 교리를 배우고 드디어 영세를 받았다. 이때가 1784년이었다.
1784년, 이승훈은 많은 책과 십자가와 상본 등을 가지고 서울로 돌아왔다.
이승훈은 이벽과 권일신(1751-1791)에게 세례를 주었고, 이벽의 노력으로 많은 사람들이 입교하게 되었다.
이벽, 이승훈, 권일신 이 세 사람은 조선천주교회의 실질적인 초석이 되었다. 그 가운데 이벽이 으뜸이었다.
1784년부터 이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지금의 명동성당자리인 서울 명례동 중인출신 김범우의 집을 교회로 주일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리더였던 이벽이 중앙에 앉아 설교하고, 이승훈, 권일신과 정약전, 약종, 약용 등 3형제가 좌우에 앉아있었다.
1789년경 이 집회는 점점 알려져 형조의 금리는 이것이 술 마시고 도박하는 것이라 의심하고 들어가 보게 되었는데, 모두들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어서 모두 형조로 연행하였고, 십자가 등의 물건들도 압수하게 되었다.
형조판서가 이들을 심문하였는데, 이들이 모두 명문대가출신의 학자들임을 알고 놀라 타일러서 석방하고 그 가운데, 중인 김범우만을 가두고 배교를 강요하게 되었다. 김범우는 온갖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굳게 신앙을 지키니, 형조판서는 그를 충청도 단양으로 귀양을 보냈다. 김범우는 거기서 고문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니, 김범우는 조선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였다.
이벽과 이승훈은 천주교의 두목이요 선동자로 지목되어 집안과 친척들로부터 강한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
이승훈은 가족들로부터 박해를 받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천주교서적을 불태우고 천주교를 그만 둘 것을 약속하고, 자신이 천주교신자이었음을 사람들 앞에 반성하는 반성문을 썼다.
이벽도 집안에서 갖은 박해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되돌릴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목을 매달았다. 이것을 목격한 이벽은 결국 흔들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천주교를 그만두겠다고 말하였다. 이벽은 명백한 배교는 할 수가 없어서 자기 신앙을 감추었다. 집안은 그를 일체 천주교와 접촉할 수 없도록 감금하였다. 이벽은 이후 심한 자책감으로 말을 하지 않고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렸다. 그렇게 1년 가까이 식욕도 없이 지내다가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조선천주교회의 실질적인 개조(開祖)인 이벽은 그 뜻을 펴지 못하고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으나, 그의 뜻은 다른 동지들에게 계승되어 이어지게 되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벌써 신자들이 3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2. 가성직제도(1787-1789)
지금 명동성당 자리인 김범우의 집을 중심으로 주일 신앙모임을 하던 때에 세계교회역사에 유례가 없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된다. 이 모임을 주도했던 유학자들은 복음을 더 체계적으로 전하고, 신입교우들의 신앙을 굳게 하기 위해서 자기들끼리 교회조직을 만들기로 합의를 보았다.
하지만 아직 사제직이 뭔지 잘 알지 못했고 어떻게 사제가 되는지도 잘 몰랐다. 그냥 책에 있는 데로, 덕망이 있는 사람들을 주교와 신부로 뽑아 세우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승훈은 중국교회의 기억을 더듬어서 여러 가지 교리서를 참고로 주교와 신부를 뽑았다. 그래서 당시 지위와 학식, 덕망이 가장 뛰어났던 권일신이 주교로 추대되었고, 이승훈, 이존창, 유항검, 최창현 등등이 신부로 뽑히게 되었다.
이렇게 선출된 주교와 신부들은 각자 자기 임지를 정해서 교회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책을 보면서 세례도 주고, 고해성사도 주고, 미사도 드리고, 신자들을 관리하는 행정도 하기 시작했다. 이 가짜 주교와 신부들이 준 영세는 유효했지만 다른 성사들은 무효였다. 그렇지만 이런 행동들이 당시 천주교인들에 열심을 불러일으키고, 전국적으로 신앙을 전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미사를 드릴 때는 금잔을 사용했고, 제의는 중국비단으로 화려하게 해 입었는데, 그 모양은 제사드릴 때 입는 옷과 비슷했다. 신부들은 신부관을 만들어 썼다.
고해성사는 단위에 높은 의자를 놓고 신부가 앉고, 신자는 그 밑에 서서 보았다.
이렇게 조선의 가짜 성직제도는 많은 성과를 거두면서 2년 동안 계속되었다.
근데 교회서적들을 더욱 더 자세히 연구하면서, 주교와 신부들은 자기들의 선출과 직무가 유효한 것인지 의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회의를 열고 즉시 일체의 성무수행을 중지하고 북경주교님께 문의하는 편지를 쓰게 되었다. 서울에서 북경까지는 삼천리가 넘는 길, 육로로 석 달이 걸리는 길이었다. 이 임무를 맡았던 사람이 윤유일이었다.
한참 후에 북경주교님 답장이 왔다. 북경주교님은 그들이 신품성사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미사를 거행할 수 없고 영세 말고 다른 성사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교우들을 가르치고 미신자들을 입교시키는 온갖 노력을 격려하였다. 주교님의 이 편지는 완전히 복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졌고, 가짜 주교와 신부들은 성직수행을 즉시 중단했던 결단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조선 교우들은 성사를 받을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게 되었다. 신자들은 북경주교님께 새로 편지를 내서 신부님을 보내달라고 간청하게 된다.
윤유일이 이 편지를 들고 다시 북경으로 가서 주교님께 편지를 전하게 되었고, 주교님은 드디어 신부님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주교님은 신심과 학식에 출중하고, 조선사람과 비슷한 중국사람 주문모신부님을 선발하였다. 그때 나이 24세. 주신부님이 서울로 왔을 때 이미 3천명이나 되는 교우들이 주신부님을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주신부님은 교회에 조직을 구성하였다. 1795년 우리나라 최초의 평신도단체인 '명도회'를 조직하고 남자회장에는 정약종, 여회장에는 강완숙을 임명하였다.
당시 교리서는 중국에서 활동한 예수회신부 마태오 리치가 썼던 교리서 '천주실의'를 번역해서 보았는데, 정약종은 우리의 실정에 맞게 천주교교리서 '주교요지'를 써서 수많은 사람이 입교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분들의 노력으로 조선교회는 이후 몇 년 동안 점차 발전하게 되었지만 1801년 신유박해를 겪으면서 주신부님을 비롯한 정약종, 강완숙 등 초대교회 주역들이 모두 순교하고 만다.
비참하게 파괴된 조선교회는 그로부터 조금씩 다시 일어서기 시작하였는데, 바로 그 중심인물이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바오로였다. 정하상바오로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프랑스신부님을 모셔오고, 최양업, 최방지거, 김대건을 선발하여 마카오로 유학 보내는 등 조선교회는 조금씩 활기를 찾게 되었지만, 1839년 기해박해로 정하상바오로를 비롯한 교회 주역들이 또 모두 순교하게 되었다. 이렇게 초토화된 조선교회를 다시 재건한 사람이 바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1821-1846)였다.
3. 동정부부이야기(1797-1801)
이 시기 한국순교역사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동정부부순교가 있었다.
1797년, 전주의 갑부였던 유항검의 집안에서는 기가맥힌 일이 벌어졌다. 유항검의 아들 유중철요한과 서울서 시집온 이유혜누갈다가 그들 부모 앞에서 결혼식을 가장해서 동정서원을 한 것이다. 형식은 부부지만 실제로는 남매처럼 살기로 작정하고 평생 동정을 약속한 것이다.
유중철요한은 전주갑부 유항검의 맏아들로 열심한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하느님께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유항검은 양반이면서 전주일대의 큰 땅을 가지고 있던 큰 부자로 가끔씩 전라도지방으로 전교여행을 다니던 주문모신부님이 그 집에서 머물곤했다.
이유혜누갈다는 서울의 왕족의 후손으로 지체 높은 집안이었는데, 일찍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려서부터 곧은 성품과 총명함을 가지고 있었다. 누갈다는 어머니로부터 신앙을 접하고 14살 때에 주문모신부님으로부터 영세를 받고 처음으로 성체를 모시게 되었는데, 성체를 받아 모시면서 하느님께 일생동안 동정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당시 동정생활은 유교사회에서는 가문을 끊고 나라에 불충을 범하는 일로 금지되어있었고, 처벌받게 되었다. 누갈다는 걱정 끝에 주문모신부님께 이 사실을 털어놓게 되었다. 주문모신부님은 벌써 전주에 있는 유중철요한도 하느님께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주문모신부님이 중신을 서게 되었다. 주신부님은 겉으로는 혼인의 형식을 빌려 남의 이목을 피하고, 실제로는 서로 남매처럼 지내면 되겠다는 기발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혼사가 준비되었다.
두 사람은 4년을 함께 오빠, 누이라 부르면서 남매처럼 살았다. 그러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함께 체포되어 순교하고 말았으니, 유중철요한 나이 23세, 이유혜누갈다 나이 20살이었다.
옥에 갇혀 모진 고문을 받던 유요한은 순교하기 전날 아내에게 짧은 글을 보냈다. "나는 누이를 격려하고 권고하며 위로하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이유혜누갈다는 체포될 때 손가락에는 있는데로 금가락지를 끼고, 치마는 있는데로 몇겹으로 해서 입고 갔다. 누갈다는 옥중에서 순교할 때까지 치마폭을 하나씩 찢어 그동안의 과정을 써서 서울에 있는 어머니와 언니에게 편지로 보냈다. 끼고 있던 가락지를 하나씩 빼주면서 포졸들에게 편지를 전하게 했던 것이다. 이 옥중편지는 당시의 상황을 전해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어머니 보셔요'라고 시작되는 이 편지는 눈물 없이 읽을 수가 없다. 특별히 순교직전에 쓴 유서는 신자들에게 두고두고 읽혀지면서 신앙에 커다란 힘이 되었고, 여러 사람이 베껴서 오랫동안 널리 읽히게 되었다.
"어머님, 제가 먼저 천주님의 명령을 따른 뒤에, 훗날 어머님이 이 세상을 떠나실 때에는, 제가 영원한 행복의 화관을 머리에 쓰고 어머님을 천국으로 모셔드리겠나이다...
처음 시집오던 날 남편과 아홉시에 함께 있게 되었는데, 열시에 우리는 둘이 동정을 지킬 것을 맹세하고, 4년 동안을 남매와 같이 지냈습니다. 그동안에 우리는 대개 열번가량 우리의 동정서약이 무너질뻔한 유혹을 받았지만, 공경하올 성혈공로로 마귀의 유혹을 이겨냈나이다..."
전주에 가면 숲정이라고 알려진 순교성지가 있다. 꽃다운 20의 청춘이 그곳에서 칼아래 스러져 이슬이 되었고, 조선교회의 한송이 백합꽃 같았던 누갈다는 깨끗한 몸과 마음을 그렇게 하느님께 바쳤다. 삼엄한 경비 속에 시신은 숲정이에 묻혀 있다가, 10년 후, 유항검의 노복들이 시신을 거두어 고향으로 이장하였다.
훗날 누갈다에게 아름다운 헌시가 바쳐졌다. "천사처럼 살다간 누갈다여, 왕가에서 태어난 존귀한 몸, 젊음과 미모, 욕정과 허영 그 어디다 모두 버렸나요, 깨끗한 열네살 가슴에 영원한 임을 모셔들였으니, 요셉을 섬기던 마리아를 본받아 스무고개를 못다 넘기고 임만을 위한 일생, 귀양살이마다 않고 오직 죽음을 달라, 칼아래 떨어진 한송이 백합이어라, 동녘하늘의 샛별이어라, 조선의 딸, 동정자의 영광이여, 치명자의 자랑이여."
지금 전주교구에서는 동정부부순교자가 성인으로 선포되도록 온 교구민이 힘을 모으고 있다. 동정부부는 참으로 불굴의 의지와 굳센 믿음을 가지신 분이셨다.
4. 교구설정
박해의 고통 속에서도 살아남은 신자들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조선교회가 조직을 갖추어 나가게 되었다. 그것이 교구였다.
1831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조선교구가 설정되었다.
초대교구장으로 임명되신 분이 당시 태국에서 선교중이시던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브뤼기에르 주교님이셨다.
1886년, 마침내 우리나라에 종교자유가 주어졌다.
1911년, 하나였던 교구가 서울교구와 대구교구로 분할되었고, 서울교구는 충청이북, 대구교구는 충청이남지역을 관할하였다.
그 후 1937년에 광주교구와 전주교구가 설정되었고, 계속해서 부산교구(1957년), 청주교구(1958년), 마산교구(1966년), 안동교구(1969년), 제주교구(1971년)가 설정되었고 지금은 군종교구 포함 16개 교구로 발전되었다.
5. 빠리외방전교회에 대한 감사
1831년 조선교구 초대교구장부터 1911년 조선교구가 서울과 대구교구로 나뉠 때까지 조선교구장은 파리외방전교회 주교님이었고, 주교님과 여러 프랑스 신부들이 조선교회를 위해 일생을 바치고 대부분 순교를 했다.
한국교회는 빠리외방전교회에 큰 감사를 드려야 마땅할 것이다. 빠리외방전교회는 해외 전교를 목적으로 1650년경에 세워졌는데, 한국, 베트남, 필리핀, 아프리카 등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한국외방전교회
1984년 한국에 천주교가 들어온지 200년, 우리도 외국에 선교를 해야겠다고 해서 한국외방전교회가 설립되었다. 아직 많지는 않지만 한국외방전교회소속 신부들은 파퓨아 뉴기니아나 동티모르 같은 곳에서 선교하고 있다.
대구대교구도 사할린, 카자흐스탄에서 선교하였고, 현재 남미 볼리비아에 5명의 선교사제를 파견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