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0주간 월요일] 등굽은여인 치유 (루카 13,10-17)

2015. 10. 26. 오전 7:47:44

글자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등굽은여인 치유 (루카 13,10-17)

 

우리가 받은 성령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며, 그 성령에 힘입어 우리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른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느님의 상속자가 된다.(로마 8,12-17)
12 형제 여러분, 우리는 육에 따라 살도록 육에 빚을 진 사람이 아닙니다. 13 여러분이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14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15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16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17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계심

시편 68(67),2와 4.6-7ㄱㄴ.20-21(◎ 21ㄱㄴ)
◎ 우리 하느님은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
○ 하느님이 일어나시니, 그분의 적들은 흩어지고, 원수들은 그 앞에서 도망치네. 의인들은 기뻐하며 춤을 추리라. 하느님 앞에서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
○ 고아들의 아버지, 과부들의 보호자, 하느님은 거룩한 거처에 계시네. 하느님은 외로운 이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시고, 사로잡힌 이들을 행복으로 이끄시네. ◎
○ 주님은 날마다 찬미받으소서. 우리 짐을 지시는 하느님은 우리 구원이시다. 우리 하느님은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 죽음에서 벗어나는 길, 주 하느님께 있네. ◎      


[햇밤] 햇밤 줍는 여인(?) 울 엄니

예수님께서는 오랜 기간 병으로 고통받던 여인을 구해 주시며, 안식일에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이를 비판하는 이들을 위선자들이라 부르신다. 안식일은 인간이 자유와 생명을 누리는 날이 되어야 한다.(루카13,10-17)
10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11 마침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다. 12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부르시어,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 13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14 그런데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분개하여 군중에게 말하였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15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16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17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그분의 적대자들은 모두 망신을 당하였다. 그러나 군중은 모두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뒷모습

<오늘의 묵상>

십계명을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계명으로 나눌 때, 안식일 준수는 보통 하느님에 대한 계명으로 분류되지만, 안식일 계명에는 특별한 점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안식일을 당신께 축성된 날로 지내라고 하시면서, 아울러 이웃을 돌보라고 명하십니다.
탈출 20,8-10은 하느님께서 엿새 동안 창조하시고 이렛날에는 쉬셨다는 것을 근거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너와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그리고 너의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합니다. 법을 지키는 주체는 자유민이고 가장인 ‘너’입니다. 가장이 가족과 일꾼들에게 일을 시키지 말아야 하는 것이지요.
신명 5,12-15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직접 이스라엘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셨음을 강조하시고 안식일 계명을 지시하시는데, 탈출기와 비슷하게 노동을 금하시면서 “너의 남종과 여종도 너와 똑같이 쉬게 해야 한다.”고 명하십니다.
이와 같이 안식일 계명은 하느님의 창조와 이집트 탈출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이 계명은 주간의 하루를 주님께 봉헌하라는 규정이면서도 동시에 다른 사람의 인권도 존중할 것을 명합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가장이나 고용주가 자기에게 딸린 이들에게 인간답게 살 권리를 보장해 주어야 하는 날입니다.
오늘 복음의 회당장은 짐승들의 처지는 안쓰럽게 생각하여 배려하면서도, 18년 동안이나 병마에 사로잡혀 시달리면서 처절하게 싸워 온 여자를 안식일에 사탄의 손아귀에서 해방시키신 예수님의 치유 행적을 단죄하는 이율배반을 범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람보다 제도를 더 사랑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이 여인의 병을 안식일이 아닌 다음날 고쳐주실 수 있으셨겠지만, 오늘 할 수 있는 사랑의 행위를 내일까지 연기하지 않으셨다는 점도 중요하게 생각됩니다.      


노틀담의 꼽추

<등 굽은 여자를 안식일에 고쳐 주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어떤 여자의 병을 고쳐 주시자(루카 10,10-13), 회당장이 분개하면서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루카 13,14)."

이 말은, 겉으로는 사람들을 꾸짖는 말이지만, 사실은 예수님을 비난하는 말입니다. 아마도 회당장은 예수님께 직접 말할 용기가 없어서 사람들을 꾸짖는 방식으로 예수님을 비난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치료를 하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돈을 벌기 위해서 그 여자의 병을 고쳐 주셨다면, 그래서 병을 고쳐 주신 다음에 치료비를 받았다면, 안식일에 생계를 위한 노동을 한 것이 되고, 따라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것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비를 베풀기 위해서 여자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회당장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한 말은, "안식일에는 자비를 베푸는 일도 하면 안 된다."가 됩니다. (아무리 선한 일이라고 해도 안식일에는 무조건, 절대로 '일'을 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당시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사고방식이 그랬습니다. 바로 그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을 선, 사랑, 자비보다 더 위에 놓는 것.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루카 13,15-16)"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소나 나귀에게 물을 먹이러 끌고 가는 것을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에도 소나 나귀를 풀어서 물을 먹이러 끌고 갔습니다. 그들에게 그것은 안식일 율법과 상관없이 날마다 늘 반복되는 생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나 나귀에게 물을 먹이는 일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소나 나귀보다 훨씬 더 귀한 사람을 고쳐 주는 것은 왜 '일'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선자들'이라고 부르시는 것은, 그들이 입으로는 선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선의 실현을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선자들은 겉으로는 선한 척 하지만 선을 행하지는 않는 자들입니다.

지금 예수님 말씀의 뜻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는 일은 안식일 율법과는 상관없는 일이다."입니다. '안식일일지라도' 라는 말은 '안식일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라는 뜻입니다. 소나 나귀에게 물을 먹이는 일이 요일과 상관없는 것처럼 사람의 병을 고쳐 주는 일도 요일과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 말씀에는,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일은 미루면 안 되는 일이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사랑과 자비는 언제나 항상 '지금 즉시' 실행해야 하는 일입니다. 안식일이라고 해서 미루고, 대축일이라고 해서 미루고, 무슨 중요한 날이라고 해서 미루고... 그러다가 영영 실행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과 자비와 선을 미루는 것은 악입니다. 선을 실행해야 할 때 하지 않는 것은 악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중에, 또는 내일 실천하겠다는 생각이 진심이라고 해도, 지금 안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지금은 악을 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율법 때문에 악을 행하게 된다면, 그런 율법은 버려야 합니다. 악법은 법이 아닙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은 '사랑'입니다. 그 관점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하면, '안식일일지라도' 라는 말은, '안식일일수록'이라는 뜻이 됩니다. 안식일은 다른 날보다 더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날입니다. 또 '사랑'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생각하는 그런 '일'이 아닙니다. '사랑'은 그냥 '사랑'입니다. '일'이 아니기 때문에 안식일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안식일 율법을 어기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율법의 근본정신이라는 것은 율법보다 상위법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상위법과 하위법이 충돌하는 상황이 생기면 상위법을 지키고 하위법은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상위법을 지키셨고, 회당장은 하위법을 지키는 것만 생각하느라고 상위법을 부정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회당장은 안식일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예수님은 당신 마음대로 안식일을 어기신 분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셨고, 회당장이 안식일을 안 지켰습니다.

오늘날의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모습을 반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주일미사 참례한 것으로 주일을 지켰다고 생각하고서 그 나머지 시간에는 사랑과 자비와 선을 실천하는 일과는 거리가 먼 일만 한다면, 그것은 주일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을 지킨다는 것은 그저 한두 시간만 지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일의 전체 시간을, 즉 주일 하루를 온전히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 주일을 제대로 지키는 것입니다. (미사 참례는 주일을 지키는 일 가운데 한 부분일 뿐입니다.)

주일 하루를 온전히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는 말을 율법주의로 오해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주일의 근본정신을 제대로 알고, 제대로 실천하자는 말은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자는 권고입니다.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복음 (루카13,10-17)

 마침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부르시어,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11~13) 

루카 복음 13장 10절에서부터 17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마귀가 들려 허리가 굽어진 병에 걸린 한 여자를 고쳐줌으로써 말미암아 야기된 안식일에 관한 논쟁이 소개되고 있다. 13장 11절'마침'으로 번역된 '카이 이두'(kai idu; and behold)에서 '이두'(idu; behold)라는 표현은 뒤따라 나오는 말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바로 '여자'라고 번역된 '귀네'(gyne; a woman)가 강조되는 것은 사탄한테 묶여(16절) 병중에서 고생하고 있는 이 여자의 불행한 처지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또한 이것을 드러냄으로써 이후에 나타나는 회당장과의 안식일 논쟁에서(14~17절)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불행한 이 여자에게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주는  정당한 행위임을 독자들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시달리는'으로 번역된 '아스테네이아'(astheneia; crippled; of infirmity)'병', '연약함'을 가리키는 '아스테네이아'(astheneia)의 소유격이다. 소유격은 '결과'를 가리키는 용법으로 사용되었는데, '마귀'를 가리키는 '프뉴마'(pneuma; a spirit)와 연관시켜 볼 때, 이 병은 마귀로 말미암은 것을 표현해 주고 있다. 16절에서는 이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사탄이 ~ 묶어 놓았는데'로 묘사해 주고 있다.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다' '결과'를 가리키는 접속사 '카이'(kai)로 시작된 본문은 그 여자의  비정상적인 상태에 대한 여러 묘사가 모두 마귀들림으로 나타난 결과들임을 보여 주고 있다. 즉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는 상태에 이른 것은 마귀들림(부마)으로 나타난 결과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여자의 굽어진 상태를 표현하는 '슁큅투사'(syngkyptusa; bowed together;bent over) 기본형 '슁큅토'(syngkypto)'함께'라는 뜻의 전치사 '쉰'(syn)'몸을 구푸리다', '몸을 굽히다'는 뜻의 '큅토'(kypt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몸을 완전히 구푸리다'는 뜻이다. 이 병은 아마도 척추염이나 다른 원인으로 말미암아 등뼈가 고부라져 허리를 펼 수 없는 곱사병을 말하는 것 같다. 

한편, 원문에서는 '슁큅투사'(syngkyptusa) 앞에 과거에 계속적 사실을 가리키는 미완료 과거형인 '엔'(en; was)를 사용하여, 그 여자의 이러한 상태가 과거로부터 18년 동안이나 계속 되었음을 표현해 주고 있다. 또한 본절의 후반부에 '조금도 ~없는'이라는 관용구인 '에이스 토 판텔레스'(eis to panteles; in no wise; (not) at all)를 첨가해서, 이 여자가 가지고 있는 병의 증세가 지속적이면서도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매우 심각한 것이었다는 것을 부각시켜 준다.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예수님께서는 병을 여자나 주변 사람들의 아무런 요청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능동적으로 병을 고쳐주시는 자비를 베푸셨다.여기서 '풀려났다'에 해당하는 '아폴렐뤼사이'(apolelysai; you are loosed;you are set free) '아폴뤼오'(apolyo) 동사의 완료형이다.

이 동사가 완료형으로 사용된 것그 여자가 18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몸이 굽어진 상태를 가리키고 있는 11절의 미완료 과거 시제 '엔'(en; was) 동사와 대조를 이룬다. 말하자면, 이 여자가 예수님의 이러한 선포로 말미암아 18년 동안이나 계속된 마귀와 질병의 속박(병마)에서 완전한 자유를 맛본 것을 나타내기 위해 완료형 동사가 쓰인 것이다. 

그리고 특히 예수님께서 이 여자의 치유를 가리킬 때 '치유'의 의미가 아닌 '자유'의 의미를 갖고 있는 '아폴뤼오'(apolyo)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아폴뤼오'(apolyo)'~로부터'라는 뜻의 전치사 '아포'(apo; from)'풀다'는 뜻의 동사 '뤼오'(lyo)가 결합된 합성어로서 '놓아주다', '해방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마치 소나 나귀가 마구에서 자유를 얻는 것처럼, 마귀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는 표현이다. 12절14~16절에 나오는 예수님과 회당장과의 안식일 논쟁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참된 안식이란 마귀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임을 드러내 주고 있다.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여기서 '찬양하였다'에 해당하는 '에독사젠'(edoksazen; glorified; praised)'영광을 돌리다', '찬양하다'는 뜻의 '독사조'(doksazo) 동사의 미완료 과거형으로서, '그녀가 계속해서 영광을 돌리고 있었다' 또는 '찬미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원문은 이 동사가 계속적 사실을 가리키는 미완료 과거형으로 사용되어 '계속적으로 굽어져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11절의 '엔'(en; was)동사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계속적 고통'에서 '계속적 찬양'으로 상황이 완전히 바뀐 것을 묘사해 주면서 참된 안식이 무엇인지를 가리켜 주고 있다.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제1독서 (로마8,12-17)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마르14,36)<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갈라4,6)<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8,15)

어째서 그리스어를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때까지 그들이 새겨듣는 복음서와 바올의 서간안에서

여전히 예수님의 모국어인 아람어 표현 '압바' 호칭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이 'Abba'호칭을 특별히 예수님께서 몸소 사용하신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유다인들의 기도문에서는, 당시 아람어를 쓰는 백성들 사이에서 아이들이 그들의 아버지를, 신뢰를 갖고 친숙하게 부르는 호칭, 오늘날 우리가 '사랑하는 아빠'라고 번역할 수 있는 'Abba'라는 호칭을 감히 사용하지 못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의 대화에서 당시의 언어 용법을 거슬러 가족들안에서 관습적으로 사용하였던 '압바', 즉 '사랑하는 아빠'를 사용하였다. 

그렇다면, 루카복음이 전해 주는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Pater)라는  그리스어의 단순한 호칭은 일종의 번역으로, 아람어의 가족적 신뢰를 드러내는 'Abba'라는 호칭의 의미를 가장 가깝게 드러내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가족적이고 신뢰성을 드러내는 호칭임에도 불구하고, 성부 하느님께 하느님의 위대함과 그 거룩함의 지위를 드러내는 예수님께서 칭하신 '압바'라는 호칭은, 그 거룩함을 모르는 사람이 부른다 하더라도, 그 의미가 감소되는 것이 아니다. 

올리브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는 꾸준히 아빠에게 호소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데, 그것은 하느님께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예수님이 이미 믿고, 또 알고 있음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갈라디아 4,6과 로마 8,15에서도 아빠앞에서 자식의 특권(신뢰)를  강하게 보여주는 것이지, 그들간의 어떤  특별한 사랑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이 지상에서의 아버지 상(像)이 예수님이 하느님과 맺으신 결속 관계를 위한 상징으로 비쳐졌다면, 우리는 아버지가 곧 주인이기도 한 팔레스타인 문화권의 가부장적 대가족 제도도 유념해야 하는 것이다.  창세기 9장에 노아와 그 아들들 (셈, 함, 야펫)의 이야기에서, 아버지는 자신의 치부를 덮어 준 셈과 야펫을 축복하고, 자신에게 잘못을 저지른 둘째 아들 함을 저주하며, 형 셈과 동생 야펫의 종이 되게 한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부르신 '압바' 호칭은 상징이 아니라, 상호 신뢰와 존중이 깔려있는, 피와 생명과 인격이 오고 가는 결속 관계를 드러낸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를 전수받은 사람들, 마르코 3,33 이하에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인 '형제들', '자매들', 예수님의 말씀안에서 종말의 때에 드러나실 하느님께 마음을 쏟는 자들, 예수님을 중심으로 작은 형태의 '추종하는 이들'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예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며' 그분에게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을 포괄하는, 보다 확장된 형태의 무리가 다 같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Abba 호칭은 그것을 부르는 사람들의 공동체 형성과 관련된 호칭이고, 교회를 구성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Abba를 부르는 사람들이 주님의 기도에서 '저희에게' '저희의' 라는 표현을 쓸때, 우리는 수평적으로 하느님을 한 아빠, 아버지로 고백하고 섬기는 한 자녀들이고, 한 가족이고, 한 공동체라는 말이다. 

쉽게 이야기 하자. 우리 가족이 전부 믿음을 가진 가족이라면, 할아버지,할머니, 부모, 형제, 자매,

조카, 손자도 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른다. 나의 부모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으니, 자식인 나는 '하느님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는가? 성경을 믿고, 주님의 기도를 아는 타 종파 신자들도 똑같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른다. 그러면, 수평적으로는 우리 모두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더군다나,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아버지의 신뢰를 받는 자녀로서의 특권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고, 자녀들은 아버지의 상속자이니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상속자임을 드러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의 영광, 축복의 상속자인데, 그 영광과 축복을 누리려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로마8,17참조) 

사도 바오로는 갈라디아 4,4-7과 로마 8,14-17 에서, 우리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고, 또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 능력과 자유는, 우리가 받은 성령에게서 온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나에게서 성부 하느님은 진짜 아버지이신가?  어떤 마음으로 '아빠, 아버지' 호칭을 부르는가? 우리가 가정이나 직장, 본당이나 교구,수도 공동체에서 체험된, 좋지 않은 아버지 상이나 상처때문에, 하느님 아버지를 부를 때마다 어려움은 없는가? 

하느님을 '아빠,아버지'라고 부르는 우리들은 같은 믿음의 자녀로서, 수평적으로 가족적 사랑이나 우애, 형제애를 서로 느끼는가? 서로 원수처럼 살고 미워하고 싫어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한 아버지라 부르는 같은 자녀라고 볼 수 있는가?


( 5 / 06 ): 하느님 아버지의 계명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로마 8,17)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이고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랍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쁘십니까?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지금 어떤 상태에 있든
여러분은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아 하느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였고
예수님의 형제가 되었습니다.

부모의 유산을 자식들이 함께 물려받듯이
이미 잘 살든 못 살든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무조건 기뻐하십시오.

다만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답니다.
참다운 상속자가 되고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누릴려면
우리의 맏형이신 예수님처럼 이승에서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답니다.
그러니 이런저런 고난을 겪더라도 그 때문에 실망하지는 마십시오.
그 영광된 복락을 누리기 위해서는 필수과정이니까요.
오히려 고난이 없다면 그걸 문제시해야 할 겁니다.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누리지 못할 수도 있다는 표시니까요.

오늘 우리가 받은 엄청난 축복에 대해 기뻐하며 감사드립시다.
그리고 지금 겪고있는 고난 때문에 아파하고 실망하지 말고
그 축복에로의 여정을 인내하며 잘 걸어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화이팅!


북청사자놀음 꼽추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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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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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0주간 수요일] 12사도 (루카 6,12-19)15.10.28조회 48[연중 제30주간 화요일]하느님 나라 (루카 13,18-21)15.10.27조회 106[연중 제30주간 월요일] 등굽은여인 치유 (루카 13,10-17)15.10.26조회 46[연중 제29주간 토요일] 회개하지 않으면 (루카 13,1-9)15.10.24조회 46[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이 시대징표 (루카 12,54-59)15.10.23조회 66[연중 제29주간 목요일]성령의 불 (루카 12,49-53)15.10.22조회 47[연중 제29주간 수요일]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 (루카 12,39-48)15.10.21조회 69[연중 제29주간 화요일]깨어있어라 (루카 12,35-38)15.10.20조회 803[연중 제29주간 월요일]탐욕 (루카 12,13-21)15.10.19조회 78[연중 제28주간 토요일]성령모독 (루카 12,8-12)15.10.17조회 102[연중 제28주간 금요일]바리사이 누룩 (루카 12,1-7)15.10.16조회 88[연중 제28주간 목요일] 책임져야할 것 (루카 11,47-54)15.10.15조회 141[연중 제28주간 수요일] 불행하여라, (루카 11,42-46)15.10.14조회 45[연중 제28주간 화요일] 위선 (루카 11,37-41)15.10.13조회 69[연중 제28주간 월요일]요나의 표징 (루카 11,29-32)15.10.12조회 123[연중 제27주간 토요일]참 행복 (루카 11,27-28)15.10.10조회 70[연중 제27주간 금요일]되돌아오는 악령 (루카 11,15-26)15.10.09조회 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