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0주간 수요일] 12사도 (루카 6,12-19)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시몬 성인과 유다 성인은 열두 사도의 일원이다. 시몬 사도는 카나 출신으로 열혈당원이었다가 제자로 선택되었다. 그는 주로 페르시아 지역에서 선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유다 사도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과 구별하여 ‘타대오’라고 불리기도 한다. 『신약 성경』의 유다 서간 저자인 유다 사도는 유다 지역에서 선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사도는 예수님의 친척일 가능성도 있다. 예수님의 형제로 언급되는 복음 구절에 같은 이름이 나오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마태 13,55)
에페소서는 교회의 신비를 밝힌다. 교회의 모퉁잇돌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기초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이다. 그들을 기초로, 우리는 성도들과 함께 세워진 건물로서 하느님께서 머무르시는 거룩한 성전이 된다.(에페2,19-22)
형제 여러분, 19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20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21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22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시편 19(18),2-3.4-5ㄱㄴ(◎ 5ㄱ)
◎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네.
○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고, 창공은 그분의 솜씨를 알리네.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밤은 밤에게 앎을 전하네. ◎
○ 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고, 그 말은 땅끝까지 번져 나가네. ◎
시몬
많은 제자와 수많은 군중이 예수님 주변에서 그분을 따랐지만,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며 기도하신 다음 그 가운데 열둘을 특별히 뽑으시어 사도라고 부르신다.(루카 6,12-19)
12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13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14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15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17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18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19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늘 위로가 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마음이 불편하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제가 외국인 입장이기도 했지만, 국적이 다르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낯선 이방인이라는 이질감을 느끼며 살아야 할 필요까지는 없었을 텐데 …….
아무리 국적이 다르고 기질이 달라도, 민족주의적인 열혈당원 시몬과 외세의 끄나풀로 여겨지던 세리 마태오가 한 울타리 안에 있어도, 장차 배반자가 될 유다를 열둘 가운데 한 사람으로 품고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잇돌로 하여 사도들을 기초로 세워진 공동체 안에서는 이방인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서는 어느 누구도 이방인으로 여겨져서는 안 되지요. 모퉁잇돌이 하나이고 기초가 하나인데, 그 위에 지어진 건물의 여러 부분들이 어떻게 서로 너는 이방인이라고 배척하면서 떨어질 수 있겠습니까?
모퉁잇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기초인 사도들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일치의 근원이 되십니다. 같은 신앙 안에서 서로를 한 시민으로,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공동체가 하나둘 모여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아름다운 꼴을 갖춘 성전이 지어집니다. 그런데 교회 공동체 안에 일치가 없다면 그것은 심각한 병의 징후입니다. 그것은 그 공동체 안에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거나, 공동체에 믿음이 없거나, 그 공동체가 사도들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에서 떠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즈음 학교에서, 사회에서, 심지어는 교회와 가정 안에서까지 다민족, 다문화에서 비롯되는 어려움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조국을 위한 열혈당원이라는 신분에서 하느님과 복음 선포를 위하여 열혈당원이 된 시몬과, 불가능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힘겨워 하는 이들을 돕는 주보성인으로 알려진 유다 타대오(용감한 사람이라는 뜻) 사도의 전구로 여러 가지 차별을 극복하여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사도, 사도직, 섬김> 송영진 모세 신부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 (루카 6,13)"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두 사도를 따로 뽑으신 것은 그들에게 특별하고 중요한 임무를 맡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신자들)보다 더 높은 사람을 뽑으신 것은 아닙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6)." 여기서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다스릴 열두 명의 지도자를 뽑으셨지만, 군림하고 권세를 부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들'을 뽑으셨습니다.(사도들은 교회의 지도자들이지만 가장 낮은 사람들입니다.)
열두 사도는 교회의
주춧돌입니다."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두 초석이 있는데,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묵시
21,14).""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에페
2,20)."
건물에서 주춧돌은 특별하고 중요한 일을 합니다.그러나 가장 낮은 곳에 있습니다.기둥을 떠받치고 있는 주춧돌의
모습은 '섬기는' 모습입니다.
그러면 '높은 사람'은 누구인가? ('섬김'을 받는 사람은 누구인가?)없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섬기는 사람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3-4). "여기서 '누구든지' 라는 말은 사도들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모두가 다 높은 사람이고, 모두가 다 낮은 사람이고, 모두가 다 섬기는 사람이고, 모두가 다 섬김을 받는 사람입니다. 하늘나라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자신을 낮추고 '서로 섬기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서로 섬기는 일을 지금 이곳에서부터 실천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요한 13,14)." 이 명령은 사도들에게만 하신 명령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에게 하신
명령입니다.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긴다면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받아야 하고, 주님이신 예수님의 명령을 그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에
'신앙인들끼리만' 서로 섬기면서,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당신들이 신자가 되면 그때 당신들을 섬기겠다." 라고
말한다면, 그들에게 전하는 복음을 복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끼리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섬겨야 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남도 아니고 적도 아닙니다. 가족이고 형제입니다. 서로 섬기는 일은 교회 안에서만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온 세상으로 확대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16)."
이 말씀에서 '착한 행실'이라는 말은 '선행'만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그대로 실천하는 '신앙인의 삶'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착한 행실'에는 사랑, 섬김, 겸손 등도 모두
포함됩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세상 사람들을 진심으로 섬기면, 그 섬김은 사람들을 비추는 하나의 빛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빛을 받아서 세상 사람들도 주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이 말씀은, "사랑으로써 복음을 선포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이라는 말은, "배타적으로 너희끼리만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뜻이 아닙니다. "너희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여라."입니다. 이 말씀을 "서로 발을 씻어
주어라." 라는 명령과 합하면, "서로 섬김으로써 사랑을 실천하여라.", 또는 "사랑으로써 서로 섬겨라." 라는 명령이
됩니다.
'사랑'은 곧 '섬김'입니다. 만일에 사랑 없이 섬기기만 한다면, 그것은 노예의 굴종이 될 뿐입니다. 또 섬기지는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그 말은 거짓말입니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진심으로 섬기게 됩니다.
사도직 수행은, 즉
선교활동은 말로만 해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과 '섬김'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과 '섬김' 자체가 복음
선포가 됩니다. 혹시 세상 사람들을(안 믿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해도, 그들을 섬겨야 한다는 말에는 거부감을 느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6)."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몇 명이나 있었습니까? 성모님과 요셉 성인 외에는, 전부 다 '안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안 믿는 사람들'을
섬기신 분인데, 그 사람들이 나중에 '믿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복음 (루카6,12-19)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12~13)
루카 복음 6장 12절에서 16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임명하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내용은 공관 복음서(마태10,1~4; 마르3,13~19)에 다 나오는데, 마태오 복음에서는 제자들의 사명이 복음 전파에 있음을 보여 주는 문맥에서 12사도의 명단이 나오는 반면에, 마르코와 루카 복음에서는 제자들을 택한 이유가 예수님께 임박한 고난과 핍박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는 관점이 부각된다.
루카는 마르코와 같은 관점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산으로'에 해당하는 '에이스 토 오로스'(eis to oros; into a mountain)라는 장소를 제외하고는, 열두 사도를 택하기 직전의 장면을 다르게 소개한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의 임명 전에 홀로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셨다는 사실은 루카 복음사가만이 기록하고 있다.
루카 복음에 있어서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은 특히 중대한 사건을 앞두고 종종 나타난다(루카3,21; 9,18.28.29; 11,1; 22,41). 그렇기 때문에 열두 사도를 뽑기 전에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는 것은, 열두 사도를 선택하는 일이 그리스도교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전기를 이루는 너무나 중요한 일어라는 것을 암시한다. 실제로 사도들은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 동고동락하며 예수님께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성령강림 이후에는 복음 전파의 주역이 되며 또한 교회의 초석이 되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밤새 기도하신 후 그 다음 날에 제자들을 부르셨으며, 이들 중에서 열두 제자를 뽑으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다수의 제자들의 무리 속에서 열두 제자를 특별히 구별하신 것이다. 여기서 '뽑으셨다'에 해당하는 '에클렉사메노스'(ekleksamenos; he chose)의 원형 '에클레고마이'(eklegomai)에 남성 단수 주격 접미어가 붙어 있어서 예수님 당신 자신이 택하심의 명백한 주체임을 보여 주고 있다.
특별한 자격 요건을 갖추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예수님의 깊으신 뜻과 은총으로 부름받은 열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는 '사도'라는 직책을 주셨다. '사도' 즉 '아포스톨로스'(apostolos)라는 단어는 '어떤 자에게 특별한 사명을 주어 파견하다'라는 의미를 지니는 '아포스텔로'(apostello)의 명사형이다. 희랍어에서 이 단어는 황제의 명령을 받고 파견되는 전권대사를 가리키는 뜻으로도 사용되지만, 성경에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사람들에게 선포할 사람에게 붙여졌다.
루카 복음사가는 '사도'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는데(루카9,10; 11,49; 17,5; 22,14; 24,10), 이렇게 사도직에 대한 잦은 언급은 예수님의 지상 선교 활동과 예수님 구원 사업의 동역자로 부름받은 제자들에 의한 교회 시대의 연속성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뜻이 들어있다.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에페2,19-22)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어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19~20)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19) 에페소서의 주제는 교회의 일치의 당위성이다. 에페소서 2장 19~22절은 교회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 포함된 절대 유일한 하나의 구원 공동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구원받기 이전의 이방인들은 아무런 희망이 없는 상태였으나(에페2,11~12절),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더불어 수평적 평화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에페2,13~15절), 구원받은 성도들 모두가 하느님과 수직적 평화를 이루었다는(에페2,16~18절) 사실에 근거를 두고 에페소서 2장 19절 이하의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서 2장 11~18절에서 갓 교회에 속하게 된 이방인 출신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원 공동체인 교회가 어떻게 신약 시대에 이르러 자기들 이방인들까지 포함시키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설명하였다.
이제 에페소서 2장 19~22절 단락에서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통하여 구원을 얻은 자들을 대상으로 교회가 오직 그리스도만을 머리로 하여 형성된 단일 공동체라는 중요한 사실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우케티'(uketi)는 '더 이상 ~이 아니다'(no more)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강조 부정어이다. '크세노이'(ksenoi)와 '파로이코이'(pharoikoi)는 '외국인' 혹은 '이방인'(나그네)이라는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이다.
이처럼 사도 바오로는 강조 부정어와 더불어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는 명사를 반복 사용하여 그리스도를 통해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 하느님께 나아감을 얻는 특권을 받았으므로, 이제부터 이방 성도들 역시 더 이상 천국의 시민권과 거리가 먼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본절에서 영어의 'not ~ but'의 용법과 동일하게 앞선 부분의 부정을 통하여 뒷부분의 내용을 더욱 강조하는 '우케티~ 알라'(uketi ~alla) 용법을 사용하여 이방 성도들이 '외국인'과 '이방인'이 아니며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고 '하느님의 한 가족' 이란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갖는 신분의 변화는 첫째,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 되는 것이다. '성도'에 해당하는 '하기온'(haghion)은 구약의 관점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사용되던 구약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뜻이다(다니7,18). 사도 바오로도 본문에서 성도를 구약적 개념으로서 사용하였다. 즉 유대인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방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유대인들과 동일하게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민족적, 지리적으로는 비록 외국인이지만, 한 성령 안에서 완전히 성도와 동일한 시민으로 대접받을 수 있게 된다.
둘째,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인은 '하느님의 한 가족'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갖게 된다. 여기서 '가족'에 해당하는 '오이케이오이'(oikeioi)의 원형 '오이케이오스'(oikeios)는 '가족','식구','권속'이라는 뜻이다. '하느님의 한 가족'이라는 표현은 과거에 자신들이 하느님으로부터 간택받은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임을 자랑하며 유대인들이 자주 사용하던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으로 말미암아 육체적인 혈통을 뛰어넘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이 말이 적용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한 가족'은 하느님을 가장으로 모시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이 말은 더 이상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어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20) 에페소서 2장 20~22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교회를 건물에 비유하고 있다. 단순히 건물이 아니고 예루살렘 성전을 자기 육체로 허무신 그리스도께서 새롭게 세우신 성전이다. 이 성전 건물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터)위에 세워졌고 그 모퉁잇돌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에페2,20~21), 건물의 재료는 그로 말미암아 새로 난(거듭 난) 성도들이다(에페2,22;1코린3,9). 여기서 '사도들'과 병행하여 쓰인 '예언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신약 교회를 창설한 후에 교회가 이 땅에 뿌리 내리던 초대 교회시대에만 있었던 신약 교회의 예언자들을 가리킨다(1코린12,10.28.29; 에페4,11).
한편,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란 표현은 다음의 두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①먼저 코린토 전서 3장 11절에서는 성전 건물의 기초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으며, 바로 그 전절인 코린토 전서 3장 10절을 보면 사도 바오로 자신이 그 기초를 놓았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본문의 기초 역시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라고 보고, 그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 위에 놓여 있으며, 이러한 교회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복음 전파에 의하여 확장되어 간다는 의미가 된다.
②둘째로, 본문의 '기초'를 건물의 '기초'라고 보지 않고 '시작'이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 위에 지어진 새 성전에 놓인 최초의 돌로서, 그 위에 계속해서 다른 성도들이 돌이 되어 세워질 수 있는 '시작'이 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기초'로 번역된 '테멜리오'(themelio)가 '기초','토대','터' 뿐만 아니라 '시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이 두 견해 모두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사도들과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구원 경륜을 따라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비밀의 복음을 깨달은 자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깨달은 복음을 전함으로써 교회의 '기초'를 닦았고, 또한 친히 교회 구성원의 구심점이 되어 다른 모든 성도들이 그들을 따라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본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모퉁잇돌'에 해당하는 '아크로고니아이우'(akrogoniaiu)의 원형 '아크로고니아이오스'(akrogoniaios)는 '끝'(마태24,31), '머리'(히브11,21)를 의미하는 '아크론'(akron)과 '모퉁이'(마태21,42), '구석'(사도26,26)을 의미하는 '고니아'(gonia)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는 '모퉁잇돌'(the chief corner stone), '구석머리'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는 건물의 벽과 벽이 만나는 지점에 세워서 건물의 기초로 삼을 뿐 아니라 벽과 벽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기초들을 말한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건물을 세우는 자가 자신의 이름을 바로 이 모퉁잇돌에 새겨 건물이 자신의 소유임을 표시하였다. 본문은 이사야 28장 16절의 말씀의 성취라고 볼 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기초이실 뿐 아니라 교회가 그분의 소유임을 나타내는 모퉁잇돌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사람을 시키지 않고, 친히 자신이 직접 교회의 모퉁잇돌이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시온에 돌을 놓는다. 품질이 입증된 돌, 튼튼한 기초로 쓰일 값진 모퉁잇돌이다. 믿는 이는 물러서지 않는다."(이사28,16)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루카 6,12-13)
여러분은 밤을 새워 본 적이 있습니까?
뜬 눈으로 밤샌 적도 꽤 있지요?
잠못 이루는 그 숱한 밤의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예수님께서도 밤을 새운 적이 꽤 많았나 봅니다.
예수님은 중대한 일이 있을 적마다 밤새워 기도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밤새 고민은 많이 합니다.
그러나 안돌아가는 머리로 이 생각 저 생각하고 걱정하고 고민하지만
정작 기도는 안 하는 것 같습니다.
기도하는 것과 걱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기도하면 하느님과 함께 고민하는 것이고
걱정하면 나 혼자 고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걱정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느냐고 하십니다.
여러분 오늘 고민거리가 있으세요?
그렇다면 걱정은 내려놓고 하느님께 기도하십시오.
열심히 기도하고나서 나오는 답으로 결론을 자신있게 내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