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23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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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리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45-56 그때에 45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46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렸다. 47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48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49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해의 대사제인 카야파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50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51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52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53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54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유다인들 가운데로 드러나게 다니지 않으시고, 그곳을 떠나 광야에 가까운 고장의 에프라임이라는 고을에 가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머무르셨다. 55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많은 사람이 자신을 정결하게 하려고 파스카 축제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56 그들은 예수님을 찾다가 성전 안에 모여 서서 서로 말하였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가 축제를 지내러 오지 않겠소?” |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11,45-56)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양 떼이다. 양 떼들은 두 목자 밑에 있을 수 없다. 주님께서는 남북으로 갈라진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가 되게 하여 다윗을 영원한 제후로 삼아 평화의 계약을 맺고 복을 내리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표징들은 한편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고, 유다의 지도자에게는 예수님을 없앨 궁리를 하게 만든다. 이때 그해의 대사제였던 카야파는 의회에서 민족의 안전과 질서를 위해 예수님 한 사람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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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구약 성경의 레위기에 보면 속죄일에 바치는 속죄 제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숫염소 두 마리를 놓고 제비를 뽑아서 하나는 주님을 위해서 바치고 하나는 산 채로 세워 두었다가 속죄 예식이 끝나면 광야에서 떠도는 귀신인 ‘아자젤’에게 보냅니다. 이때 아론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죄와 그들의 허물을 이 숫염소의 머리에 씌우고서 불모지 광야로 내보냅니다.
오늘 복음에서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회의하는 모습에서 마치 예수님을 두고 숫염소에게 죄를 씌워서 광야로 내보내는 구약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카야파’가 한 말입니다. 사람들이 술렁대며 예수님을 믿고 따르자 사회 혼란과 로마의 위협을 들먹이며 예수님을 희생시키려고 합니다. 예수님께 모든 죄를 덧씌워서 희생 제물로 삼아 민족을 구하겠다는 것입니다.
현대에도 공동선과 정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소수의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단죄하고 희생시켰기에 아무도 책임을 질 사람이 없습니다. 공동체라는 실체가 없는 이름이 책임자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이든 교회이든 공동체가 가지는 이런 죄악을 우리는 늘 경계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희생시킨 그 죄를 우리도 똑같이 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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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나 ‘희생양’은 있습니다. 죄와는 무관하게 사라진 이들은 역사 안에 수없이 많습니다. 유다인들은 그런 희생양으로 예수님을 선택합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은 주님의 이끄심이었습니다. 다음 말은 ‘카야파’ 대사제의 발언입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예수님께서 백성을 선동하시어 로마에 반기를 들까 봐 우려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렇게 되면 ‘로마 군인들’이 성전에 쳐들어와 성전을 파괴한다는 논리입니다. 하지만 핑계입니다. 유다인의 최고 의회였던 ‘산헤드린’의 재가를 얻으려는 설득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전통’을 과감하게 비판하시는 예수님이 부담스러웠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살다 보면 희생양이 될 때가 있습니다. 이제는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받아들이려 애써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닮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 희생은 은총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상황의 반전’을 만나게 하십니다. 당신의 부활을 체험하게 하시는 것이지요. 희생은 언제나 또 다른 축복입니다.
제자는 스승을 닮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억울함을 당하고 불평등을 체험하게 됩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지게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끝은 언제나 부활입니다. 우리는 ‘그 부활’을 희망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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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에 나오는 ‘최고 의회’는 유다인들의 ‘산헤드린’을 번역한 말입니다. 모세는 광야 생활을 하면서 협조자들을 뽑았습니다. 열두 지파에서 70명가량을 선별한 뒤 자신을 돕게 했습니다. 이 조직이 훗날의 산헤드린으로 발전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사제들과 율법 학자와 지방 유지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산헤드린’을 인정했고, 종교 문제에 관해서는 그들의 판단을 존중해 주었습니다. 서서히 로마의 비위를 맞추는 조직으로 바뀐 이유입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는 이곳의 결정으로 빌라도에게 넘겨졌습니다. 첫 순교자 스테파노와 바오로 사도 역시 ‘산헤드린’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습니다.
당연히 이들은 로마와의 충돌을 두려워했습니다. 사람들이 봉기를 일으키면 로마의 개입이 시작되고, 그러면 ‘돌이킬 수 없는 불행’에 직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활동을 불순하게 보았고, 민중을 선동하는 일로 판단했던 것입니다.
카야파 대사제는 ‘민족의 멸망보다는 한 사람의 죽음이 더 낫다.’는 논리를 폅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의 모습이 여전히 ‘민중의 선동자’입니다. 고정 관념을 바꾸지 않았던 것이지요. 마음을 비우지 못한 결과입니다. 선입관을 극복해야 ‘보이지 않던 것’이 보입니다.
꼬리 자르기
-진병섭 신부-
도마뱀은 위기에 처하면 꼬리를 자른다고 합니다. 꼬리를 내줌으로써 위기를 극복한다는 말이지요. 요즘 뉴스를 보면 자주 나오는 이야기 중 하나가 ‘꼬리 자르기’입니다. 여론의 폭풍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꼬리를 잘라냄으로써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요즘에만 보는 양상이 아닙니다. 역사상 모든 독재자에게 위기란 억압을 정당화하는 데 더없이 좋은 구실이었습니다. 말이 좋아서 극복이지 그 본질을 보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며 사건을 덮으려는 또 하나의 폭력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카야파의 말이 떠오릅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 카야파 편에서 보자면, 예수님을 믿는 이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잠재우는 좋은 수단이 되고, 자신들의 세력을 결집하는 데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본 것입니다. 관점을 달리해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인간 사랑의 절정인 십자가 죽음은 ‘꼬리 자르기’란 이름으로 치부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사건입니다. 그 십자가는 2000년 전 끝난 사건이 아니라 해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현재의 사건이며, 우리에게 “너희도 그렇게 살아라.”라고 하는 모범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내일부터 예수님 수난의 절정인 성주간으로 들어갑니다. 당신 것을 철저히 내려 놓으셨던 예수님의 십자가는 권력자들 편의 ‘꼬리 자르기’가 아니라 인간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모범이 되어, 너희도 그렇게 살라는 초대입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는 삶을 철저하게 보여주신 예수님을 보며 우리 또한 그분의 삶을 닮아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반영억라파엘신부
박근혜정부의 인사스타일에 많은 사람들이 우려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여당 마저도 청와대의 인사검증에 구멍이 뚫려 있다고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당도 눈치 보기에 급급해 하다가 후보자들이 스스로 물러난 후에야 문제삼고 나서는 것을 보면서 그야말로 ‘사후약방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중도 탈락하는 사람들의 뻔뻔스런 항변을 들으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좋은 일에는 생색내기를 좋아하고 어려운 일에는 꽁무니를 빼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나에게 닥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시련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불똥이 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간절합니다. 그러다가도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으면 태연하게 “그 일을 위해서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느냐?”고 말합니다. 정말 속 보이는 일이죠. 그러나 이런 일이 비일비재 한 것은 그만큼 마음이 굳어진 탓입니다.
대사제인 가야파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는 명분을 내세워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왜 예수님입니까? 자기가 온 백성을 위하여 죽으면 안됩니까? 왜 나는 안되고 다른 사람이 십자가를 짊어져야 함을 당연하게 생각합니까? 유다인들은 거창한 명분을 내세워 희생양을 선택하였는데 안타깝게도 그들의 구원자 메시아를 제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명분을 내세워 자기 자신과 가문을 위하고 자기 실속을 차리려 하였습니다. 자기가 희생하려 하지 않고 명분을 내세워 남을 희생 시키는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 이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의 모습입니다.
때때로 나의 명분과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을 지니게 되는데 바로 그 순간이 메시아를 희생양으로 삼는 때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명분에 앞서 나의 진심을 볼 수 있는 지혜를 간직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나의 희생봉헌이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구원을 가져옵니다. 희생은 주님 사랑의 징표입니다. 따라서 누구의 희생이 아니라 바로 나의 희생을 통해서 구원이 온다고 생각하면 한 순간순간이 소중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함께 기도합니다. “주님, 저는 황홀한 환시보다도 숨은 희생의 단조로움을 선택하렵니다. 희생과 사랑으로 작은 핀 한 개를 줍는 것이 한 영혼을 구하고 회개 시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좀 더 청념하고 마음을 바로 하여 국민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공직을 맡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 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 놓아야 합니다”(1요한3,16).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