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20일 사순 제5주간 수요일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 8,31-42)
"If you remain in my word,
you will truly be my disciples,
and you wi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will set you free."
말씀의 초대
바빌론의 임금 네부카드네자르는 다니엘의 세 동료가 자기 나라의 신들을 섬기지 않자 그들을 불가마 속에 던져 버렸다. 그러나 그들이 불 속에서 천사의 보호를 받는 것을 보고 이들의 하느님께 찬미드리게 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진리를 통해 자유로워지기를 바라신다. 그러나 그들은 죄에 사로잡혀 있어 진리를 알아듣지 못한 채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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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진리를 깨닫고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종살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깨닫지 못합니다. 과연 우리는 종살이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악마 대학’의 한 실험실에서 교수가 학생들을 모아 놓고 개구리 실험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팔팔 끓는 물에 개구리를 집어넣었습니다. 그랬더니 개구리는 깜짝 놀라 물 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다음에는 개구리를 찬물에 집어넣고 나서 개구리가 느끼지 못할 만큼 조금씩 알코올램프의 온도를 높여 나갔습니다. 개구리는 그릇 속에서 뛰쳐나가지 않고 놀다가 서서히 정신을 잃어 가더니 나중에는 아예 네 다리를 쭉 뻗은 채 죽어 버렸습니다.
실험이 끝난 다음 교수가 학생들에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서서히 법칙’이다. 사람들도 이렇게 파멸시켜야 한다. 미움 중독, 거짓 중독, 뇌물 중독, 쾌락 중독 등 모든 중독을 이렇게 서서히 맛들이게 하는 거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잘 모르다가 조금씩 조금씩 서서히 죄에 물들어 가면 거기에 중독되어 버립니다. 그리하여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를 향해 늘 깨어 있지 못한다면, 어느새 우리는 죄로 중독되어 죄의 종이 되어 버립니다. 결국 유다인들처럼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할뿐더러 그분을 배척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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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인간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동경하며, 하느님 안에서 비로소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성인은 『고백록』에서 “오, 하느님, 당신께서는 우리를 당신을 향해 발돋움하도록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쉬게 될 때까지 쉴 줄을 모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성인은 이 진리를 터득하기까지 수없이 갈등하고 방황하다가 서른세 살의 나이에 하느님을 알고 방황을 끝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가 무엇일까요? 하느님에게서 비롯한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세상 것은 채우면 채울수록 더욱 갈증이 심해집니다. 이 세상 것으로는 영원한 행복을 결코 누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 안에는 근원적인 동경과 목마름이 있습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느님을 향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해바라기가 해를 따라 움직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하느님을 벗어날 때 불안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 사랑함으로써 행복하게 살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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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진리는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사랑하며 사는 일입니다. 자유는 무엇이나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린이의 생각입니다.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사랑이 곧 자유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뛰어넘는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동문서답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내세워 종노릇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핀트’가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인내를 갖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의 사랑입니다. 그분의 자유로움입니다.
누구라도 ‘나만 잘났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어른과 아이 사이에서도 때로는 아이가 옳을 수 있습니다. 큰 그릇의 사람은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지만, 옹졸한 사람은 허세를 부립니다. 복음의 유다인들 역시 만용을 부리고 있습니다.
누구나 자유로워지고 싶어 합니다. 삶의 두려움과 불안에서 해방되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서도 ‘구체적인 노력’은 게을리합니다. 사랑하며 사는 일은 소홀히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사랑하면 자유스러워진다’는 사실을 체험해야 합니다. 용서하면 미움이 사그라지고, 절제하면 욕망이 가라앉습니다. 선행을 베풀면 삶의 허무마저 기쁨으로 바뀝니다. 진정 진리는 사람을 자유롭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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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내세워 손사래를 치고 있습니다. 그들이 믿는 분과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분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그런데도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습니다. 선입관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신원을 의심하는 선입관입니다.
그분의 기적을 보았고 ‘하늘의 소리’를 들었건만 편견을 깨지 못합니다. 마음을 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닫은 마음에는 기적도 지나가는 추억일 뿐입니다.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오.” 그들은 이 말만 되풀이합니다. ‘작은 것’에 집착해 ‘큰 것’을 외면하는 모습입니다. 전형적인 아집입니다.
남의 말을 듣는 것도 능력입니다. 마음을 열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타인의 말을 귀담아듣는 것은 이 시대의 ‘덕’입니다. 복 받을 일이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제대로 듣지도 않고 판단하는지요? 사람의 말도 듣지 않고 자연의 속삭임도 외면합니다. 신문과 텔레비전의 소리에만 반응합니다. 복음의 유다인과 다를 바 없는 일입니다.
마음을 열면 새로운 소리를 듣습니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입니다. 그만큼 자유롭고 풍요로워집니다. 하지만 닫힌 마음에는 들리던 소리도 작아집니다. 늘 보이던 것도 희미해집니다. 당연히 움켜쥐게 되지요. 놓으면 달아날까 두려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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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리와 자유는 이렇듯 가까이 있습니다. 자유를 느껴야 진리가 되고, 진리가 아니면 자유를 주지 못한다는 표현입니다.
자유는 홀가분합니다. 불안을 제압하는 기쁨입니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능력입니다. 완벽한 그 자유를 어디에서 만날 수 있겠습니까? 답변은 ‘진리가 자유롭게 한다.’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자유 역시 깨달음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입니다.
유다인들은 아브라함에게서 그 자유를 찾습니다. 그의 자손임을 내세워 종살이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율법에 매여 삽니다. 율법 때문에 예수님마저 배척하려 합니다.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무엇에서 자유를 찾고 있습니까? 재물이 아닌지요? 재물을 자유의 출발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재물 때문에 신앙마저 귀찮은 것으로 여긴다면 유다인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자유는 선물입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기쁘고 당당하게 살아가라고 자녀인 우리에게 주시는 그분의 능력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믿음의 길을 간다면 누구에게나 그분께서는 주십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진리 역시 사랑
- 허광철 신부-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에는 이런 말이 씌어 있습니다.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ARBEIT MACHT FREI).’ 실제는 그렇지 않은데,
수용소 사람들을 농락한 나치들의 구호였습니다. 극심한 노동 후 그들이 얻게
된 자유란 진짜 자유가 아니라 죽음이었지요. 하지만 수감자들은 대문자로
씌어 있는 글자 중 B를 교묘히 뒤집어 놓음으로써, 그러니까 보기엔 B자가
맞지만 뚱뚱한 아랫부분이 위쪽에 있도록 하여 나치들에게 무언의 항의를
했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나치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패러디합니다. 하지만 진짜 진리와 관련이 없다면 그 어떤 것도
결코 인간을 궁극적으로 자유롭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자유롭게 하기는커녕
진짜 진리가 들어갈 자리조차 막아 버리기에 그러한 이들은 살인까지
저질러 버릴 정도로 위험합니다(37절 참조). 우리의 신앙은 진리를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발견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1요한 5,6) 진리는 곧 하느님, 하느님의 이름은 사랑이기에
‘진리 역시 사랑’입니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에는 이런 말이 씌어 있습니다.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ARBEIT MACHT FREI).’ 실제는 그렇지 않은데,
수용소 사람들을 농락한 나치들의 구호였습니다. 극심한 노동 후 그들이 얻게
된 자유란 진짜 자유가 아니라 죽음이었지요. 하지만 수감자들은 대문자로
씌어 있는 글자 중 B를 교묘히 뒤집어 놓음으로써, 그러니까 보기엔 B자가
맞지만 뚱뚱한 아랫부분이 위쪽에 있도록 하여 나치들에게 무언의 항의를
했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나치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패러디합니다. 하지만 진짜 진리와 관련이 없다면 그 어떤 것도
결코 인간을 궁극적으로 자유롭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자유롭게 하기는커녕
진짜 진리가 들어갈 자리조차 막아 버리기에 그러한 이들은 살인까지
저질러 버릴 정도로 위험합니다(37절 참조). 우리의 신앙은 진리를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발견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1요한 5,6) 진리는 곧 하느님, 하느님의 이름은 사랑이기에
‘진리 역시 사랑’입니다.
되뇌어 봅니다. “진리가(하느님이/사랑이) 나를 자유롭게 하리라.”
영안이 자유롭게 되기를
반영억신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름다워지는 일입니다. 사랑하면 그를 닮게 되고 상대방의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사랑하는 이와 하나가 됩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사랑하는 이에게 맞춰주기 보다는 나에게 맞추려 하고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면 아직 깊은 사랑을 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주님의 삶의 모습에 이끌려 그분의 모습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야말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사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얼마나 마음에 새기고 사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하였다고 하더라도 마음에 주님의 말씀을 새겨 두지 못하였고 실행하지 못한다면 그는 겉모양만 제자처럼 보일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요한8,38)고 하셨습니다. 결국 주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참된 제자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나 깨나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을 생각하고, 당신의 삶으로 하여금 오직 그 말씀이 실현되게 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고 하면 하루에 하느님의 말씀을 몇 번이나 기억하고 실행하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제자는 한시도 스승의 가르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할 때 우리는 세상의 흐름, 세속의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써 우리에게 죄악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말씀을 깊이 새겨 말씀 안에서, 말씀과 함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말로만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일상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언제나 실천을 요구 합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노예가 될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강요하지도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발적인 협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는지 곧 잊어버립니다.”(야고1,25) 자기 얼굴을 비추어 보고 무엇이 흉하게 묻었으면 지워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에 마음을 비추어 무엇이 잘못되었으면 고쳐야 합니다. 우리 영혼을 비추는 거울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그 말씀에 비추어 영혼이 자유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함으로써 주님과 하나가 되는 기쁨을 차지해야 하겠습니다.
매 순간을 하느님의 뜻에 견주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택을 할 수 있고 그 안에 자유를 누리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조재형(가브리엘)신부
그래서 우리는 농사를 지을 수 있고, 뚜렷한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도 어린아이, 청소년, 어른, 노인의 시기가 있습니다. 몸이 자연의 이치에 따라서 변하듯이 사람의 마음도 점차 성숙해야 합니다.
가을이 되면 과일이 익어가듯이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서 겸손의 열매, 사랑의 열매, 희망의 열매, 믿음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렇게 믿음 안에서, 사랑 안에서, 희망 안에서 진리의 빛을 볼 것이고, 그 진리가 참된 자유를 줄 것입니다.
요즘 미군 범죄가 자주 보도 되고 있습니다. 미국은 한국과 군사 동맹을 맺었고, 한국의 안보를 위해서 미군을 파병하고 있습니다. 파병된 미군은 한국과 주둔지 미군의 보호에 대한 협정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미군이 한국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게 하는 것이라면 합당하지만 한국에서 잘못을 저지르고, 범죄를 저지른 미군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라면 부당한 것입니다. 몇 번의 개정 작업이 있었지만 아직도 주둔지 미군에 대한 협정은 다른 나라에 비하면 훨씬 관대하다고 합니다.
주둔지 미군에 대한 보호는 그들이 주한 미군으로서 합당한 임무를 수행 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한 미군으로서의 역할과 본분을 망각하고 범죄를 저질렀을 때는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의 자손답게 행동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면서 아브라함이 보여주었던 믿음과 순명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겉모습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그 심성과 마음은 이미 악에 물든 사람이라고 말을 합니다.
주한 미군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한국에 주둔하는 것은 공짜가 아닙니다. 합당한 급여를 받고 있으며, 한국에서 존중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주한 미군으로서 합당한 역할과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범죄를 저지른다면 미군 군복을 입었지만 범죄자일 뿐입니다.
고위 공직자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인사청문회의 취지는 고위 공직에 오르는 이들이 그에 걸맞은 능력과 자질이 있는가를 검증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부정과 불의를 행하지 않았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군복무 면제의혹, 위전 전입, 투기, 이중국적, 세금탈루’와 같은 행위를 하였다면 이는 주한 미군이면서 범죄를 저지른 이와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마당을 가득 채웠던 눈들은 이제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파란 싹들이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그렇게 자연은 눈을 녹이고 새로운 생명을 시작합니다. 사순시기입니다. 우리들의 삶 안에 그릇된 것들이 있다면, 잘못된 것들이 있다면 그것들을 치워버리고 주님께서 보여주신 진리의 빛을 담아야 하겠습니다. 그것만이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