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의 때 (요한 7,1-2.10.25-30)

2013. 3. 14. 오후 7:10:31

글자


2013년 3월 15일 사순 제4주간 금요일

복음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돌아다니셨다.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2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10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도 올라가셨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
25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26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27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28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29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30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7,1-2.10.25-30)

 말씀의 초대

악인들은 의인을 자신들을 성가시게 하는 사람으로 본다. 그래서 그들은 의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려고 계략을 꾸민다. 의인의 모습은 예수님의 운명을 미리 보여 주고 있다(제1독서). 초막절 축제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두고 유다인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예수님께서는 참되신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유다인들을 나무라신다. 분노에 찬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잡아 넘길 때를 기다린다(복음).

☆☆☆

 악인들이 의인을 죽일 음모를 꾸민다. 스스로 하느님의 아들이라 하며 자신들의 죄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의인의 행동이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지혜서의 이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는 대표적인 구절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유다인들이 호시탐탐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아직 그분의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복음).

오늘의 묵상
개구리 한 마리가 평생 홀로 우물 속에서 살았는데 어느 날 다른 개구리를 발견하곤 깜짝 놀랐습니다. “어디서 왔소?” 다른 개구리가 대답하였습니다. “바다에서 왔습니다. 난 그곳에서 살고 있지요.” “바다는 어떻게 생겼습니까? 내 우물만큼이나 큽니까?” 바다에서 온 개구리가 폭소했습니다. “아예 비교할 수 없소.” 우물 개구리는 바다 개구리의 말에 관심을 보이는 척했으나 사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내 평생 만나 본 거짓말쟁이 중에서 이 개구리가 가장 대단한 거짓말쟁이구나.’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왔는지 안다고 자신하였습니다. 나자렛 출신으로, 마리아에게서 태어났고, 목수의 아들이라는 것을 두고 그들이 자신하는 것입니다. 물론 맞습니다. 그러나 이는 지상의 논리입니다. 우물 안의 논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당신이 어디에서 왔으며, 누구에게서 왔는지 제대로 모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천상적인 분이시고, 천상의 주인이신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은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우물 안의 개구리가 바다에 대해서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다릅니다. 천상의 논리, 바다의 논리는 지상의 논리, 우물 안의 논리와 다릅니다. 자꾸 우리의 논리로 하느님을 재거나 판단하고, 그분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방식과 응답하실 때를 정하신다고 해서, 결코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갇혀 계시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은 우리의 논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신비와 섭리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죽이려고 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논리로 하느님을 가두려는 완고함 때문입니다.
☆☆☆

다음은 갓 그리스도 신자가 된 사람과 신자가 아닌 친구의 대화입니다.
“그래, 자네 그리스도 신자가 되었다지?” “그렇다네.” “그럼 그리스도에 관해 꽤 알겠군. 어디 좀 들어 보세. 그는 어디에서 태어났나?” “모르겠는 걸.” “죽을 때 나이는 몇 살이었지?” “모르겠네.” “설교는 몇 차례나 했나?” “몰라.” “아니, 그리스도 신자가 되었다면서, 정작 그리스도에 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잖아!” 그러자 신자가 말했습니다. “자네 말이 맞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아는 게 너무 없어 부끄럽구먼. 그렇지만 이 정도는 알고 있지. 3년 전에 난 주정뱅이였고, 빚을 지고 있었어. 내 가정은 산산조각이 되어 가고 있었지. 저녁마다 처자식들은 내가 돌아오는 걸 무서워하고 있었던 걸세. 그러나 이젠 난 술을 끊었고, 빚도 다 갚았다네. 이제 우리 집은 화목한 가정이라네. 저녁마다 아이들은 내가 돌아오기를 목이 빠져라고 기다리게 되었거든. 이게 모두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이루어 주신 걸세. 이만큼은 나도 그리스도를 알고 있다네!”
알기에 내가 달라지는 것, 그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사랑의 차원입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머릿속에 많이 쌓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깊은 신뢰와 일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기에 가치관이 바뀌고 예수님 때문에 삶이 충만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얼마나 예수님을 알고 있습니까?

 ☆☆☆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 이야기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러시아의 반정부 비밀 결사대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시베리아 움스크 감옥에서 수형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곳에는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는 성경 한 권뿐이었습니다. 그는 수형 생활 동안 여러 번 성경을 탐독하였는데, 그러던 어느 날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습니다. 그러고 나서 무신론자였던 그의 삶과 문학 세계가 바뀝니다. 그가 1866년에 발표한 그 유명한 『죄와 벌』은 변화된 그의 문학 세계의 한 모습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어떻게 그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그분을 깊이 깨달을 수 있을까요? 성경에서안다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안다의 의미를 훨씬 넘어서는깊은 인격적 만남을 말합니다. 이런 앎은 바로 성경을 읽고 깊이 묵상하는 데서 옵니다. 예로니모 성인은성경을 모르면 하느님을 모르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심이 부족하다고 탓합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성경을 읽고 있는지 물어보면 됩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주님을 알게 되고 어느새 믿음의 눈이 열립니다. 진정한 앎은 굳건한 믿음을 줍니다. 그리고 우리의 굳건한 믿음은 실천적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우리는 아는 만큼 믿고 믿는 만큼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

 예수님에 대한 청중들의 발언은 유치합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들은 예수님의 출신지를 알고 있다고 합니다. 메시아가 아니라는 표현입니다. 출신이 그렇게도 중요한 것인지요? 다 큰 어른이 너무 순진해도 문제입니다. 복음의 유다인들은 아직도 어린이의 믿음으로 남아 있습니다.
신앙의 세계에는 어린이의 모습으로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자기만의 살아 있는 믿음을 갖지 못한 이들입니다. 그러기에 바람이 불면 흔들립니다. 아무리 오래된 신앙이라도 어른의 믿음으로 승화시키지 못하면 작은 유혹에도 헤맵니다. 작은 충동에도 쉽게 반응합니다.
그렇다고 아이의 세계를 건너뛰어 곧바로 어른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의 과정을 철저히 거쳐야만 다음 과정을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 생겨납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시련과 고통을 주십니다. 보이지 않는 십자가로 깨달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어린이의 신앙에서는 받는 것이 기쁨입니다. 그러나 어른의 신앙에서는 깨닫는 것이 기쁨입니다. 몸은 어른인데 믿음은 어린이로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그토록 많은 기적을 보고 들었지만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신들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삶의 고통에서 기적의 모습을 찾아내야 어른의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 

한 무명 수영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수영에는 남다른 재주가 있었지만 제대로 된 강습을 받거나 과학적인 훈련을 통하여 자신의 실력을 점검 받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처음으로 국제 대회에 참가하여 경기 전 자신이 평소 하던 대로 준비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내로라하는 세계적인 선수들은 그를 은근히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영락없는 촌뜨기의 준비 운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윽고 경기가 시작되었고, 결과는 예상 밖으로 이 무명 선수가 1위를 차지하였습니다. 그 뒤로 많은 선수가 이 무명 선수의 일거수일투족을 주목하기 시작하였고, 다음 경기부터는 다른 나라 선수들이 이 선수의 준비 운동을 따라 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더 많은 선수가 이 준비 운동을 꽤 권위 있는 준비 운동으로 채택하여 실시하였습니다. 이 무명의 선수는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박해를 받았던 것은 한마디로 ‘촌뜨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떠들면서 예수님의 출생과 신분을 보아 분명 메시아가 아니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부활하신 이후에야 비로소 자신들이 얼마나 무지했는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이후의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촌뜨기가 아닌,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이 온 세상에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양승국신부- 

누군가가 이유도 없이 노골적인 적개심을 품고 내 목숨을 해치려 할 때 가까스로 피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작정해서 나를 폄하하고 나를 음해하고 나를 못살게 군 끔찍한 경험이 있는지요?  
 그럴 경우 통상 즉시 나타나는 우리의 반응은 어떠한 것입니까? 대체로 동태복수법에 따라 처신하든지 아니면 더 센 반응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내가 살기 위해, 내가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겠지요.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는 지속적인 생명의 위협 상태에 놓이셨습니다. 유다 지도층 인사들과 사사건건 대립각을 내세우다 보니, 특히 그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던 안식일 규정이나 정결예식 등을 예수님께서 보란 듯이 파기하다보니 예수님께서는 자연스럽게 그들과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노기등등하던지, 얼마나 살기가 번득이든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이 위태롭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셨습니다. 이런 연유로 예수님께서는 유다 지방보다는 위험부담이 조금은 덜한 갈릴래아 지방에서 더 많이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살기등등한 유다 지도층 인사들의 지속적인 압박 속에서,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매일 수시로 죽음의 위협을 겪으면서도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시기 위해,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부여하신 인류 구원 사업의 완수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셨습니다.
이윽고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다가왔습니다. 유다 지도층 인사들의 예수님을 향한 살의(殺意)는 더해갔고, 더 이상 드러내놓고 다니기조차 어렵게 되었습니다
 초막절은 당시 유다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가야 하는 세 명절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 명절은 오늘날 추수감사제 비슷했습니다. 그해 수확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동시에 이집트를 빠져나온 히브리인들이 사막을 횡단하면서 보낸 오랜 체류 기간을 기념하는 축제였습니다.
 일주일간 지속된 이 명절기간에 유다인들은 초막 안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남자들은 매일 아침 봉헌제사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제물을 바치며 사람들은 하느님께 풍부한 비를 내려주실 것을 청했습니다  
저명한 성경학자 플라비우스 요셉푸스에 따르면 유다 사회 안에서 이 명절은 1년 중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명절이었습니다
 이런 중요한 명절이었기에 예수님께서도 축제를 지내기 위해 조용히, 그리고 남몰래 예루살렘 입성을 시도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들은 또 난리들입니다. 입을 다물지 못하고 떠벌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유다 지도층 인사들의 끝도 없는 불신,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함, 도를 넘어선 적개심 앞에 예수님께서 느끼셨을 비애와 배신감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집니다.
 예수님 당신은 어떻게 해서든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돌려보려고, 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죽음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돌아서게 하려고 외치고 또 외쳐보지만 끝까지 귀를 굳게 막은 그들은 절대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담하지 않고, 단 한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묵묵히 당신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정말 대단해보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그 숱한 배신과 사악함에도 불구하고 그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최선을 다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눈물겨워 보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당신을 핍박해도 개의치 않습니다. 더 큰 선, 더 큰 희망, 더 큰 사랑을 위해 꿋꿋이 그리고 당당히 뚜벅뚜벅 당신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정체성과 삶

-허광철 신부-
 지난겨울 신학생들의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 영성수련에 함께했습니다.
한 달여 오로지 말씀과 깊은 대침묵 속에서 신학생들은 ‘살아 있고 힘이 있는 하느님의 말씀’(히브 4,12)에 깊이 동화되어 갑니다.
말씀을 통한 하느님 체험은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에 대한 신학생들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합니다. 그러한 체험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들의 삶은  더 그리스도를 닮아 갈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시작부터 벌써 예수님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1절). 유다교 지도자들이 이미 예수님을  죽이려 작정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당신이 누구신지
‘큰 소리로’ 말씀하시며 가르치십니다. 과연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그분 행동의 당당함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바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누구이시며, 어디에서 왔고 어떤 사명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뚜렷한 정체성이 확립되신 분이었기에 언제 어디서나 당당하게 말씀하고 행동하셨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과 신앙은 얼마나 당당합니까? ‘말씀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금 되짚어 볼 일입니다.
모토로 삼고 있는 성경 구절을 ‘큰 소리로’ 외워봅시다. 없다면 만들어 보십시오!

 

 가엾은 친구이신 예수

 -서춘배 신부-

 소위 ‘보이스피싱’이라는 사기에 피해를 입은 본당 자매가 있습니다. 어설픈 사기행각에 속아 넘어갈 것 같지 않은 자매지요. 그런데 어디 그 자매뿐이겠습니까. 우리 주변에 그런 피해자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을 당할까요. 뭔가에 사로잡혀 있을 땐 새롭게 볼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 뭔가라는 것이 욕심에 기초했을 땐, 더 헤어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몰이해에 시달리십니다. 당신의 형제들까지도 믿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예수님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문제일 겁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그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머릿속엔 목수인 요셉의 아들, 예수로만 각인되어 있었습니다.(마르 6,3) 그들은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습니다. 예수에 대한 자신들의 앎을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있고 어떤 분으로 알고 있는지요? 물론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요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합니다. 복음의 수석 제자 베드로 사도의 고백이지요. 정답입니다. 그런데 권위 있는 누가 말하니까 나도 그렇게 믿는 것인가요?
또 그분에 대한 앎이 하나로 고정되어서 앵무새처럼 늘 그렇게 고백하는 것인가요? 매번 새롭게 보고 달리 보지 않으면 사이비가 될 가능성이 많은 것 같습니다.
달리 볼 수 있는 힘, 이것은 회개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선 예수님을 위로해 주고 싶은 가엾은 친구로 만나고 싶습니다.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매일말씀묵상

목록 전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