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기록하였다 (요한 5,31-47)

2013. 3. 14. 오전 7:21:57

글자

2013년 3월 14일 사순 제4주간 목요일

 

복음
<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31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유효하지 못하다. 32 그러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 나는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분의 증언이 유효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냈을 때에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다. 34 나는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35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너희는 한때 그 빛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다. 36 그러나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37 그리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다. 너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분의 모습을 본 적도 없다. 38 너희는 또 그분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
39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40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41 나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지 않는다. 42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 44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45 그러나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46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47 그런데 너희가 그의 글을 믿지 않는다면 나의 말을 어떻게 믿겠느냐?”
(요한  5,31-47)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을 당신 백성으로 삼으신 주님을 자신들의 주님으로 섬기기로 한 계약의 날에, 수송아지 상을 부어 만들고 거기에 경배하였다. 주님께서는 이 엄청난 죄에 대해 진노하셨으나, 모세의 탄원을 듣고 그들에 대한 재앙을 거두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대해 분노하는 유다인들에게 당신을 받아들일 것을 촉구하신다. 아버지 하느님과 요한 세례자,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과 성경 말씀이 이미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제가 다녔던 신학교는 일반 대학교 근처에 있었습니다. 선배 신부님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버스에 ‘차장’이 있던 시절 그들은 일반 대학생들 틈의 신학생들을 어찌 그리 잘 구분해 내는지, 신학교 앞 정류장에 도착할 때가 되면 신학생들만 잘도 골라서 차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차장들은 어떻게 신학생들을 가려낼 수 있었을까요? 여러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신학생들만이 풍기는 향기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른 학생들과는 구분되는 그 무엇이 있었을 것입니다.
수녀원을 방문했을 때 한창 수련기에 있는 수녀님들을 보아도 특별한 향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은퇴한 노사제의 집에서도, 늘 기도와 더불어 열심히 살아가는 교우 가정에서도 영적인 향기에 취할 때가 있습니다. 이미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만 보아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분은 훤칠한 외모를 지닌 분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따스함은 국민 모두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이러할진대, 이 모든 사람의 모범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야 오죽하시겠습니까? 그분께서 지니신 영적인 매력이 얼마나 충만했을까요? 그분께서 지니신 그 향기가 얼마나 대단했을까요? 예수님에 대한 비뚠 시선만 없다면, 누구나 다 그분에게서 영적인 매력과 향기를 진하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분의 행동과 말씀에서 이를 충분히 맛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통해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고 오히려 분노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한 증인들을 거론하시면서 당신에 대해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그리스도의 향기를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

 

 

 베트남 사이공의 부교구장이었던 구엔 반 투안 추기경(1928-2002년)은 베트남 전쟁이 끝난 후 반혁명 죄로 붙잡혀 13년 동안 감옥에서 지냈습니다. 감옥에서 풀려난 그는 자신이 감옥에서 겪은 일들을 세상에 알려 어려운 이들에게 희망을 심어 주었습니다.
다음 글은 그가 감옥에서 어떻게 하느님 말씀과 함께 살았는지 잘 보여 줍니다.
“푸칸 감옥에 있을 때 가톨릭 신자들은 몰래 가져온 신약 성경을 몇 장씩 뜯어 돌려 가며 나누었고 나눈 것을 외웠습니다. 그러다 경찰의 발소리가 들리면 그 말씀을 흙 속에 감추었습니다. 밤이 되어 어둠이 내리면 각자 돌아가며 외웠던 것을 암송했습니다. 침묵 가운데 어둠 속에서 하느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현존을 느낄 때, 살아 있는 복음을 온 힘을 다해 암송하는 소리를 들을 때 얼마나 인상적이고 감동적이었는지 모릅니다. 비신자들도 존경하고 경탄하는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구엔 반 투안 추기경의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며』에서).
반 투안 추기경은 감옥에서 그토록 하느님 말씀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는 하느님 말씀의 힘으로 외롭고 고통스러운 감옥 생활을 견디어 냈습니다. 요즘 신앙인들의 집에는 『성경』이 몇 권씩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이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신앙인은 곁에 있는 그 말씀을 가까이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펼쳐 읽고 마음에 새기는 시간을 갖기보다는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앞에서 더 많이 시간을 보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입니다.

☆☆☆

 

 

 

유다인들은 신심 깊은 민족입니다. 계율에 충실했고 철저하게 주님을 신봉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받아들이지못하였습니다. 그분의 숱한 기적을 보면서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서 그토록 예언했던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일는지요?
제도에 안주했기때문입니다. 그들은 비판을 가하시는 예수님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바랐던 메시아와 너무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의 판단을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독단은 무섭습니다. ‘자신의 틀안으로 하느님까지 끌어들이려 합니다
.
그러므로 진실은 알기 어렵습니다. 세상의 진실은 더욱 어렵습니다. 오늘은 사실로 믿었던 것이 내일은 아닌 것으로 나타납니다. 오늘 거짓으로 알았던 것이 내일은 진실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소문만으로 판단할 일은 아닙니다. 행동 몇 가지만으로 사람을 단정한다면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유다인과 같은 모습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배척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오해의 삶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신앙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노력하고 애쓰는 만큼 알아주지 않더라도섭섭해하면 안 됩니다. 불공평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한 차원높은 삶을 깨닫게 됩니다.

☆☆☆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증언하고 계십니다. 당신의 이러한 증언은 당신 자신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라고 밝히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존재를 요한 세례자가 이미 증언하였고, 더 나아가 하느님 아버지께서 이미 증언해 주셨지만, 유다인들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하지만,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주님 앞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지 못하는 것 역시 믿음이 없는 결과라고 한탄하십니다.
우리는 많은 강론과 강의 그리고 성경 공부와 피정 등을 통하여 주님에 관하여 그래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자신합니다. 그러나 주님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말을 할 수는 있어도, 주님을 제대로 알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요?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주님은 우리의 이성과 지성으로 이해한 주님에 관한 정보일 수 있습니다. 진정 주님을 만나 보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신부님에게선 하느님이 보이지 않아요!” 다행히 아직 들어 적은 없지만, 이런 말을 듣는다면 저는 아마 한동안 충격에 빠질 같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오늘도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얼마나 충실했는지 반성해 봅니다.
오늘 유다인들은 예수님에게서 매우 충격적인 발언을 듣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이에 대한 유다인들의 반응이 나오지는 않지만, 말씀을 듣고 일그러지는 그들의 표정이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예수님이 그리 질책하신 이유는 가지 때문입니다.
먼저 자기들끼리는 영광을 주고받으면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44)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인정받기를 좋아하고 그것만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하느님 사랑은 관심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을 연구하면서도 성경이 증언하는 당신을 믿지 않기 때문(38-40)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주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성경은 죽은  글자일 , 그의 성경 읽기와 설교는하느님 말씀을 팔아먹는 ’(2코린 2,17 참조)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진정 우리의 마음이 이렇지는 않겠지요?
‘너희’에 속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하는 증언…

-서춘배 신부-

 교회의 권위가 아무리 아니라고 말려도 무슨 성모 발현이라 하며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고 허약한 믿음의 반증이라 하겠습니다. 아예 뭔가 신묘한 기적들을 요구하며, 그렇게 되면 내가 믿어줄 것인데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런 것들과는 별 상관이 없다고 봐야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하늘의 징표를 보여 달라는 사람들의 성화에 예수님은 시달리십니다. 당신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이 어디 하나둘이겠습니까? 주님은 그들한테 믿고자 하는 마음이 애초부터 없다는 것을 아십니다.(38절) 그럼에도 일단 그들의 갈망을 채워줄 필요가 있다고 보신 걸까요. 친절하게도 당신에 관한 여러 증언들을 자세히 들려줍니다. 다만 몇 사람이라도 구원되길 바라는 착한 목자의 마음이겠지요.(34절)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비롯하여 당신 자신이 행한 일들과 성경을 들어 증언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증언들이 그들한테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신앙은 기적 같은 놀라운 일들을 통해서 생겨나지 않습니다. 어떤 변화의 계기는 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믿음이 없을 땐 더 완고한 마음이 되고, 왜곡으로 굳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마귀의 두목으로 몰기도 합니다. 기적이 아니라 오히려 선한 지향과 소박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신앙을 쇄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순수하게 진리 안에 살고자 해야 합니다.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44절)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순수한 신앙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작은 일상사에서도 하느님의 놀라운 현존을 알게 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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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웅 신부-

며칠 전 저희 본당에서 인형극 공연이 있었습니다. 공연팀원에 속한 젊은 부부가 예담이라는 일곱 살 된 남자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공연을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는데 자주 아이와 함께 다닌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교육적으로 아이한테 어떨지 걱정을 했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년에 학교에 가면 그때는 더 돌아다니기가 힘들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아이에게 무척 도움이 된답니다. 아이가 사교성이 좋아서 어느 유치원을 가도 곧바로 아이들과 친해지고, 그 아이들 교실에서 같이 놀다가 인형극을 보러 손잡고 함께 오고, 인형극이 끝나고 짐을 정리해서 떠날 때에는 아이들과 작별인사도 멋지게 한답니다.”

낯을 가리지 않고 누구하고든 친구가 되고, 누구하고든 손잡고 함께 놀 수 있다는 것,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떠오르게 했습니다.

달라이 라마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나는 사람을 대할 때 결코 그의 인종, 피부색, 신조와 지위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대할 때 내가 느끼는 감정은 인류라는 대가족의 또 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인물이 모두 한결같이 그런 태도를 가졌음을 기억합니다. 모든 사람이 종교나 인종, 기타 그 무엇과도 상관없이 한 분 하느님의 같은 자녀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해 증언하면서 “너희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설명하십니다. 그 ‘너희’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린아이처럼 처음 본 사람 누구와도 형제로 손을 잡을 수 있는 모습이 그리스도인에게 어울립니다. 특히 이민을 온 사람들에게 더욱 따뜻한 손을 내밀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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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먼 열심

반영억신부

열심히 일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만큼 풍성한 수확도 기대할 수 있으니 신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정작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열심히는 하지만 눈 먼 열심으로 쉽게 지치고 결과도 좋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물론 자기 자신 안에 화를 쌓게 됩니다. 따라서 참된 열심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요한5,39-40). 유다인들은 열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하느님에 관해서, 메시아에 대하여, 율법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두루두루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정작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심지어 하느님의 의를 세우고 하느님의 법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예수님을 처형 하였습니다. 아무리 많이 알고 연구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들은 헛일을 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우리도 참 바쁘게 움직이며 많은 일을 합니다. 또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들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지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 하느님 마음에 꼭 드는 일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우리는 실상 많은 일을 하면서도 주님의 일에는 소홀합니다. 많은 지식을 쌓으면서도 주님을 진정으로 마음에 모시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반 서적을 보는 시간의 극히 일부만이라도 신심서적을 읽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합니다. 텔레비전 앞에서는 몇 시간을 보내지만 성경을 펴 들고 있는 시간은 너무도 미약합니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모든 것의 원천이신 하느님에 관해서 열심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권고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의 노고가 헛되지 않음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1코린 15,58).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로마12,11) . 주님을 섬기는 일에 열심한 오늘이기를 기대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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