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9일 월요일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요셉 성인은 유다 지파로 다윗 가문에 속했다. 그는 마리아와 약혼하였는데, 마리아께서는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시게 된다. 그러나 이 사실을 몰랐던 요셉은 고뇌하지만 천사의 인도로 성가정의 수호자가 되었다. 요셉 성인에 대한 공경은 동방 교회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1870년 비오 9세 교황은 ‘교회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고, 비오 12세 교황은 5월 1일을 ‘노동자들의 수호자 성 요셉 축일’로 제정하였다. 요셉 성인은 성모 마리아와 더불어 한국 교회의 수호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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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마태오 1,16.18-21.24ㄱ)
“Joseph, son of David,
do not be afraid to take Mary your wife into your home.
For it is through the Holy Spirit
that this child has been conceived in her.
She will bear a son and you are to name him Jesus,
because he will save his people from their sins.”
When Joseph awoke,
he did as the angel of the Lord had commanded him
and took his wife into his home.
말씀의 초대
다윗이 계약 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자, 하느님께서는 나탄 예언자를 통해 다윗을 축복하신다. 다윗의 후손을 일으켜 세워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시며 영원히 굳건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제1독서). 아브라함이 신앙의 조상이 된 것은 그가 하느님의 약속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자식 하나 없는 그였지만, 후손들이 많아질 것이라는 하느님의 약속에 믿음으로 응답하여 ‘아브라함’(많은 민족의 아버지)이 된 것이다(제2독서). 다윗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약속이 마리아와 요셉의 응답을 통해 실현된다. 요셉은 약혼자인 마리아가 잉태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나 꿈에 나타난 주님의 천사에게서,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구세주라는 사실을 듣고서 자신의 뜻을 접고 주님께 순명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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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요셉은 끊임없이 도전을 받은 분입니다. 첫 번째는 약혼녀 마리아의 잉태입니다. 같이 살지도 않았는데 아기를 가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리아에 대한 배신감이 컸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이 도전을 이겨 나갑니다. 당시 율법에 따라 마리아를 길가에 내던져 돌에 맞아 죽게 할 수도 있었지만,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함으로써 사랑하는 마리아의 생명을 지켜 줍니다.
그런데 두 번째 도전이 찾아왔습니다. 마리아의 잉태가 그토록 믿어 왔던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그는 꿈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마리아와 결별하고 새로운 사람과 오붓한 가정을 꾸려 평범하게 살 수도 있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조차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을 책임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 도전도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아들! 하느님께서 이 아기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신다니 나에게도 그것은 큰 영광이고 보람이겠지.’
그러나 세 번째 도전이 이어집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아기이며 세상을 구원하실 분이시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아기를 비천한 곳에서 태어나게 하셨고, 헤로데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하도록 하셨습니다. 너무나 무책임하게 보이는 그 하느님을 요셉 성인은 얼마나 야속하게 생각했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이 도전도 이겨 나갑니다.
요셉 성인은 이처럼 끝없는 도전을 받으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과 함께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도전입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인간적인 감정에서 벗어나게 하는 도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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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기르신 요셉 성인의 축일입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혼인과 가난한 가정, 말 못하며 감당해야 했던 요셉 성인의 삶의 무게를 헤아려 봅니다. 오늘의 우리 아버지들의 모습을 생각하게 하는 글 “아버지는 누구인가”를 실어 봅니다.
아버지는 기분 좋을 때 헛기침을 하고, 겁이 날 때 너털웃음을 웃는 사람이다. 아버지는 자녀들의 학교 성적이 자기가 기대한 만큼 좋지 않을 때 겉으로는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도 속으로는 몹시 화가 나 있는 사람이다./ ……./ 아버지가 아침마다 서둘러 나가는 곳은 즐거운 일만 기다리고 있는 곳이 아니다. 아버지는 머리가 셋 달린 용과 싸우러 나간다. 피로와, 끝없는 업무와, 스트레스이다./ ……./ 아버지는 자식을 결혼시킬 때 속으로는 한없이 울면서도 얼굴에는 웃음을 나타내는 사람이다./ 아버지는 돌아가신 뒤에, 두고두고 그 말씀이 생각나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돌아가신 후에야 보고 싶은 사람이다. 아버지! 뒷동산의 큰 바위 같은 이름이다. 시골마을의 느티나무 같은 크나큰 이름이다.
요즘 많은 아버지가 힘들어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자녀들 교육비는 점점 늘어만 가는데 가정의 경제 사정은 전보다 더 어려워졌습니다. 직장에서 경쟁은 날로 치열해지고 젊은 사람들이 자꾸 뒤쫓아 옵니다. 퇴직 후의 노후 생활도 걱정거리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들의 시름은 늘어가고 주름은 깊어만 갑니다. 그러나 자녀들에게 아버지는 뒷동산 큰 바위 같은 이름입니다. 지치고 힘들게 살아가는 아버지들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힘으로 살아갈 용기를 얻었으면 합니다.
의로운 사람, 의리
-김귀웅 신부-
도종환 씨의 시 <따뜻하게 안아주세요>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 나를 정말로 포근히 안아주길 바랍니다. 편안하게 진심으로 따뜻하게 사랑해 주길 바랍니다. 그런 마음으로 안아주는 사람이 곁에 있기를 바랍니다.”
요셉은 결혼을 앞둔 약혼녀 마리아를 얼마나 꼭 안아보고 싶었을까요? 요셉은 마리아를 떠올리며 마음이 얼마나 따뜻하고 너그럽고 부드러워졌을까요? 사랑 가득한 마음으로 마리아의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싶었던 요셉의 마음을 떠올려 봅니다. 한 여인에 대한 요셉의 그러한 사랑이 진심이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를 위해 헌신하고 지켜주는 마음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동시에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도 충실해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하느님의 율법에 충실해야 했습니다.
결혼하기 전에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들었을 때 요셉은 갈등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그 사랑을 끝까지 지키고 싶고, 그녀를 어떻게 해서든 끝까지 보호하고 싶은 의리, 또 한편 하느님의 법을 지켜야 한다는 하느님에 대한 의리, 이 두 의리 사이에서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요셉은 마리아를 지키기 위해 마리아의 잉태 사실을 세상에 폭로하지 않습니다. 요셉은 남모르게 파혼함으로 하느님의 법을 지키기로 합니다. 그래서 마리아와 하느님에 대한 의리를 모두 지키고자 했던 요셉을 복음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렇게 의리를 지켰던 요셉, 그렇게 따뜻하게 마리아를 안아주고자 했던 요셉이 옆에 있어서 마리아는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요즘도 요셉 있습니다
-김기영 신부-
오늘은 요셉 성인의 축일입니다. 영명일을 맞이하신 모든 요셉 형제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요셉 성인은 구세사에 있어서 아주 크고,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에 비해 복음서에 드러나는 그분의 이야기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합니다. 아마도 복음사가들의 눈에 비추어진 요셉 성인은
그만큼 과묵한 분이 아니셨던가 생각해 봅니다. 우직과 과묵의 대명사이신
요셉! 뿌리 깊은 나무처럼 잦은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그 안에 감추어진
주님의 섭리를 오로지 믿음 하나로만 헤쳐가는 성 요셉의 영성이 얼마나
매력적인지요. 재작년 예비신자 교리반 중에, 성인의 매력에 흠뻑 빠져서
세례명을 요셉으로 정하신 분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분은 가정적으로
참 위태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만, 세례 후 소감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오늘 복음구절을 통해 큰 감동을 받았고, 요셉 성인처럼 자기도 하느님의
이끄심을 믿으며 가정을 지키는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그분 뒤에는 조용히 남편을 신앙으로 이끈 마리아 같은
부인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중학생, 초등학생 두 아들도 세례를 받고 복사를
서고 있습니다. 참으로 말씀과 성인들의 전구에는 힘이 넘치고, 한 사람,
한 가족의 인생을 바꾸어놓는 은총이 있음을 새롭게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기도 후, 주보성인의 이름을 부르며 천상교회의 전구를 청해 봅시다.
하느님의 권위로써 강해지는 인간적 연약함
-변종찬 신부-
어릴 적 저희 삼형제는 자신의 수호성인이 더 훌륭한 분이라고 다툼 아닌 다툼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큰형은 요셉이고 둘째 형은 사도요한 그리고 저는 마태오라는 세례명을 갖고 있는데, 결국 큰형의 한마디에 지고 말았습니다. 교회가 요셉 성인의 축일을 대축일로 지내고 있는 데 반해, 사도요한과 마태오는 축일로 지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마음이었지만 축일과 대축일의 차이를 알고 있었기에, 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요셉 성인을 생각하면 침묵의 성인이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성모님 역시 자신의 태중에 있는 아이에 대해 침묵하십니다. 이러한 침묵 앞에서 요셉 성인도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아 조용히 파혼하기로, 곧 자신도 침묵 속에 머물겠다고 결심합니다. 하지만 이 순간 요셉의 침묵은 성모님의 침묵과 질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힘에 의한 잉태임을 알고 있기에 갖는 침묵이지만, 요셉은 율법과 사람들의 비난을 예견하며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침묵입니다. 이러한 요셉한테 천사가 나타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라는 초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천사와의 만남을 통해 요셉은 이제 다른 의미에서 침묵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처럼, 인간적 연약함으로 혼란에 빠진 이가 하느님의 권위로써 견고해진 것입니다. 인간적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때 그래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때, 하느님은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어 말씀하십니다. ‘어리석기 때문에 믿습니다.’라는 테르툴리아노의 말씀처럼 요셉 성인도 어리석음 안에 숨어 있는 하느님의 의지를 받아들이신 분입니다. 오늘도 ‘오직 이성으로만’이 아닌 ‘이성을 뛰어넘는’ 삶으로 바꾸어 나가는 하루였으면 합니다.
믿음의 사람
반영억라파엘신부
우리는 가끔 화가 났다. 또는 홧 병이 났다는 말을 합니다. 정말 화는 불입니다. 아주 뜨거운 불입니다. 그러나 그 불로는 방을 따뜻하게 덥힐 수도 없고 밥을 지을 수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나무를 태울 수도 쇠를 달굴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속만 태울 뿐입니다. 그러니 병이 날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화를 다스리는 법을 터득하면 좋겠습니다. 화가 나도 무조건 참는다는 것은 용수철을 눌러놓는 것과 같습니다. 무조건 누르지 말고 하늘을 보면서 잘 풀어야 합니다.
오늘 기억하는 요셉은 정말 화를 다스릴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는 결혼하기 전에 임신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라보는 요셉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신명기22장을 보면 간음에 대한 규정을 말하고 있는데 “젊은 여자의 처녀성이 증명되지 않으면, 그 여자를 제 아버지의 집 대문으로 끌어내어, 그 성읍의 남자들이 그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여야 한다”(신명22,20-21.)고 되어 있습니다. 법대로 사는 요셉이 이러한 규정을 알진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1,19).고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결혼을 준비하며 꿈에 부풀었을 텐데 너무도 황당한 사실에 접하게 된 것이니 실망과 좌절감 속에서 마리아에게 망신을 주고 서운함을 되갚아 주어도 시원찮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드러낼 생각을 갖지 않았다니 그러한 마음이 어디서 왔겠습니까?
돌에 맞아 죽을 허물까지도 덮어줄 수 있었던 것은 사랑 때문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마리아를 사랑했기에 사랑하는 이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입니다. 사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이요, 능력입니다. 그리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은 일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화를 다스리는 방법은 결국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니 지금까지 내가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사랑받았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1,20).했을 때 곧바로 자기의 생각을 접고 천사가 일러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군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뜻을 따른 겁니다. 깊은 신앙은 어려울 때 드러난다고 했는데 바로 이 순간이 그의 믿음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화를 다스리는 또 하나의 방법은 철저한 믿음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믿음위에 서 있는 사람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요셉 성인은 아주 사소한 일에도 마음 상하고 서운함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우리들의 모범이십니다. 의로운 사람이란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며 기쁘고 진실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요셉이 그런 분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결코 그것에 대해 알려고 하거나 해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받아들이고 살았을 뿐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의로움을 간직한 성인의 마음을 닮고 싶습니다. “믿는 이에게는 질문이 없고, 믿지 않는 이에게는 대답이 없다”고 합니다. 오늘은 사랑으로 그리고 믿음으로 화를 다스리시길 바랍니다.
“성 요셉의 침묵과 겸손, 절대적인 신앙이 있었기에 하느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당신의 뜻을 온전히 행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완전히 내맡겨 드린다면 그분은 우리 안에서 당신의 일을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가경자 알베리오네). 사랑합니다.
+성 요셉에게 바치는 기도
○ 우리 주 예수님을 기르신 아버지시요
정결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시며
임종하는 이의 수호자이신
성 요셉께 간절히 청하오니
● 하느님께 빌어 주시어
저희가 예수님을 사랑하며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또한 죽을 때에 저희를 지켜 주소서.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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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성인의 일생에는 우여곡절이 많습니다. 약혼 시절 그는 약혼녀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놀람과 번민 속에서 조용히 헤어지리라 다짐합니다. 그는 착한 남자입니다. 하지만 그의 고뇌는 은총을 받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마음을 정한 그날 밤, 천사는 ‘하늘 나라의 비밀’을 알려 줍니다. 이후 요셉은 성가정의 수호자가 됩니다. 자신의 역할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성모님과 함께, 아기 예수님을 찾아온 동방 박사의 방문을 받습니다. 그 자리에 어떤 모습으로 계셨을까요? 아버지이면서 아버지가 아닌 모습으로 계셨을 것입니다. 이후 성가정은 헤로데의 학살을 피해 이집트로 피신했다가 나자렛으로 돌아와 삽니다.
요셉 성인은 성가정에 반드시 계셔야 할 분입니다. 그런데도 늘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꼭 필요한 분이었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살았습니다. 아름다운 겸손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모든 교회는 그분을 수호자로 모시고 있습니다. 성가정을 수호하였듯이 우리 교회도 보호해 주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에는 요셉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이미 운명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분의 죽음에는 분명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함께하셨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에게 주어진 당연한 위로입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살다 간 분이 요셉 성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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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성인은 착하고 순박한 사람입니다. 마리아의 잉태 사실을 알았을 때 가만히 헤어지려 했습니다. 약혼녀가 자신도 모르는 아기를 가졌다면 당황하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조용한 해결을 선택합니다. 그러한 결단이 있기까지 얼마나 고뇌했을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은 늘 고뇌와 함께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고뇌는 은총이었습니다. 아픔을 통해 성숙해지라는 하느님의 배려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의 ‘임마누엘’은 자신을 비우고 상처받고 포기한 뒤에야 깨달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 역시 또 다른 모습의 요셉입니다. 고뇌 없이 아버지가 되고 남편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누구라도 고통을 두려워하면 의심이 생기고, 편한 것만 추구하면 이기적으로 바뀝니다. 옆에서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옹졸한 남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훌륭한 남자는 자신을 감출 줄 아는 남자입니다. 그러면서도 있어야 할 자리에는 꼭 있는 남자입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살아가는 남자입니다. 요셉 성인에게서 그러한 모습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