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21일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 말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요한 8,51-59)
"Amen, amen, I say to you,
whoever keeps my word
will never see death."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신다. 그분께서는 아브람에게 후손과 땅을 약속하시며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시고 계약을 지키라고 명령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당신 말씀을 지켜 영원히 죽지 않기를 바라신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이 말씀을 믿지 못한 채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조상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당신께서 계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우리는 지난주부터 예수님과 유다인들이 대립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유다인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격분하여 그분을 죽이려고 한다는 내용의 복음을 계속 듣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립이 일어나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 말씀에 그 답이 있습니다. “너희는 그분(하느님)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어째서 예수님께서만 하느님을 아시고 유다인들은 모른다는 것인지, 다음의 두 가지를 통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영원으로부터 나신 분이시지만, 유다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시지만, 그들은 모릅니다. 우리는 ‘내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지만, 하루살이는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두 번째는 태도의 차이입니다. 사실 이것이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경의 요한 1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4,7-8).
이와 비슷한 말씀이 오늘 복음에도 나옵니다.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그렇습니다. 안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곧 사랑할 때에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유다인들이 하느님에 대해 모르는 것은 결국 그들에게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신원에 관해 예수님과 유다인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유다인은 스스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여겼고 신앙의 모범인 아브라함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런 유다인들에게 아직 쉰 살도 안 된 사람이 아브라함 이전부터 있었다는 말을 하니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을 모욕했다고 생각했고, 더욱이 유다교 신봉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했다며 돌을 들어 던지려고 합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이는 대로 생각하는 유다인들과 하느님의 관점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과는 대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유다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갖는 권위는 인간적인 권위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권위는 하느님의 권위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유다인들은 세속적인 권위에 압도되어 장님이 되었고 그 때문에 자신들 앞에 계신 구세주를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보고 듣고 만질 수 없는 저 너머까지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마음의 눈으로 볼 때 존재의 깊은 영혼까지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
어느 수녀님이 친구 수녀 어머니의 장례 미사에 참석하고 전한 이야기입니다. 그 친구 어머니는 한평생을 아름답게 사시다가 여든아홉의 연세로 선종하셨습니다. 평소 고인의 뜻대로 시신까지 기증한 터라 묘지까지 갈 필요도 없이 장례 미사로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너무 짧게 모든 장례 절차가 끝나서 한편으로 허망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수녀님은 삶과 죽음이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과 유다인들이 계속해서 갈등합니다. 유다인들은 삶과 죽음을 분리해서 이해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로 보기 때문에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유다인들 눈에는 자신들의 믿음의 조상들이 죽음과 함께 사라진 존재로 보이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모두 하느님 안에 살아 있는 존재로 보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삶과 죽음이 서로 다르지 않으며 하나로 통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영원성 안에는 시간도 공간도 삶도 죽음도 하나입니다.
따라서 주님 안에서 삶과 죽음을 분리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로마 14,8)이라고 고백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삶과 죽음을 분리하지 않고 통합적으로 보면 우리의 두려움과 슬픔이 훨씬 줄어듭니다. 나이가 들수록 죽음을 자신의 삶에 초대해서 함께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살아 있을 때 주님 안에 살면 죽음은 슬픈 현실이 아니라 삶의 한 과정이 됩니다.
☆☆☆
유다인들은 예수님과 엇박자를 놓고 있습니다. 말씀의 의미보다는 꼬투리를 잡으려 합니다. 대화가 되지 않는 모습입니다. 마음이 통할 리 없습니다. 그러기에 과격한 발언을 날립니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 당신이 우리 조상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
너무 지나친 말입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마귀 들렸다는 표현은 ‘해서는 안 될’ 표현입니다. 열심인 사람들이 가끔 그런 실수를 합니다. ‘건강한 열심’이 아닌 탓입니다. 신앙도 상식 위에서 뿌리를 내립니다. 그러므로 상식이 건전해야 신앙도 건전해집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고 지적하십니다. 유다인들도 하느님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율법의 주님만을 기억했고, ‘벌주시는 주님’을 먼저 가르쳤습니다. 결과는 독선입니다. 나와 다른 믿음은 무시하고 비난하는 어리석음입니다.
‘벌주시는 하느님’에서 ‘사랑의 하느님’으로 건너와야 합니다. 그래야 자유로운 믿음이 됩니다. 건강한 신앙이 됩니다. ‘자비의 주님’을 깨닫지 못하면 여전히 하느님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유다인의 모습으로 남는 것이지요. ‘신앙생활’에서 꼬투리를 잡으려는 말은 언제나 피해야 합니다. 아무리 합당한 이유라도 불평 속에는 은총이 자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 합니다. 아브라함을 모독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하느님보다 아브라함을 더 신뢰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안내자이지 그 이상은 아닙니다.
아무리 훌륭한 성인일지라도 안내자 이상은 아닙니다. 이것을 망각하면 잘못에 빠지게 됩니다. 유다인들이 그랬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자부심 때문에 예수님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보다 위대한 분은 나타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아브라함을 올바로 보지 못한 결과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바칠 만큼 철저하게 순명한 사람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보지 못하고 겉모습만 기억하고 있습니다. 주님과 아브라함의 관계는 제쳐 두고 엉뚱한 것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의 본모습을 일러 주는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 합니다.
교회 내의 교육이나 조직도 마찬가지입니다. 근본정신을 보고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의 신심을 엉뚱한 곳으로 몰고 간다면 예수님께 돌을 던지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따름 = 영원한 생명
- 진병섭 신부-
얼마 전, 급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부고 소식이었습니다. 전에 있던 본당에서 가깝게 지내던 할머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 정정하셨고 얼마 전에도, 조만간에 만나자는 통화가 있었기에 믿기 어려웠습니다. 장례식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더 놀랄 일이 생겼습니다. 돌아가셨다는 할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앉아 계시는 것입니다. 제가 전화 통화를 잘못한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로 잘못 들은 것입니다.
할머니는 평소 주변 사람들의 모범이 되시는 분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곳에 당신의 정성을 쏟으셨고, 물질적 도움뿐 아니라 기도로 함께하셨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한 할머님 덕에 많은 교우가 연도로 할아버지가 가시는 길을 편안하게 도와드렸고, 할아버지의 장례미사도 저를 포함한 네 명의 사제가 공동 주례했으며, 본당 안은 교우들로 가득 찼습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께 영원한 생명을 주시도록 청했습니다. 분명 할아버지는 하느님 나라에 가셨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일은 자신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도 아버지께 이끌어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라고 강조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재의 수요일이 엊그제 같은데 시간은 흘러 사순 시기도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이때 우리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사순 시기!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에 동참하며 우리를 정화하는 이때 예수님의 말씀을 얼마나 실천했는지 물어야 합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가지 말아야 할 길>
-양승국신부-
‘롤러코스트’(궤도열차)를 타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요즘 웬만한 놀이동산에 가면 다 설치되어있지요. 오르락내리락, 구불구불한 노선을 따라 초스피드로 달리는, 그래서 짜릿함이 느껴지는 놀이기구 말입니다.
아이들과 살다보면 자주 가게 됩니다. 너무 자주 가서 요즘은 멀찍이 떨어져서 아이들 타는 것 구경만 하는 편입니다.
롤러코스트의 백미는 아무래도 정점까지 올라갔다가 순식간에 떨어지는 그 맛일 것입니다. 아래로 ‘확’ 떨어지는 순간, 정말 섬뜩합니다. 충격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심장질환이 있는 분들은 가급적 안타시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 종류의 롤러코스트를 타면서 한 가지 느낀 점이 있습니다.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내려올 때 충격이 크다는 것입니다.
적당히 올라간다면, 혹은 아예 올라가지 않는다면, 그렇게 큰 충격은 받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 너무나 큰 충격에 크게 상심한 분들을 만납니다. 배신감에 치를 떱니다. 분노로 밤잠조차 설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너무 기대가 커서 그렇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과도한 기대치가 큰 실망, 큰 고통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관계 안에서 지속적으로 마음에 평화를 얻고 싶다면 방법은 한 가지입니다.
서로에게 걸고 있는 지나친 기대를 거두어야 합니다. 지나친 자기중심적 사고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평화롭고 행복한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유대인들, 참으로 불쌍하기 그지없습니다. 사랑으로 오신, 선물로 오신 메시아 예수님을 끝까지 이해 못합니다. 끝까지 화해하지 못합니다.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향해 던지기 위해 돌까지 집어 손에 듭니다.
그들이 이처럼 눈이 멀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이 자신들의 코앞까지 다가온 구원을 내팽개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의 메시아에 대한 과도한 기대, 그릇된 환상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고상한 메시아를 꿈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현실적인 요구를 모두 충족시켜줄 해결사로서의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오신 메시아 예수님은 그런 차원 낮은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그려온 자신들만의 메시아는 더욱 아니었습니다.
지나친 선민의식, 지적 우월감에 빠진 유대인들은 오직 학문적, 관습적, 의지적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관찰했습니다. 공부했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받아들이거나, 가슴으로 수용하려는 노력이 부족했습니다.
그들이 따지는 말들을 보십시오. 한심합니다.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
결국 그들은 인간적 울타리를 벗어나 하느님의 영역으로 들어서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초월하시는 분임을 그들은 간과했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시는 분, 인간적 혈연관계를 초월하시는 분, 국경을 초월하시는 분임을 망각했습니다.
그 결과 끝끝내 그들은 가지 말아야 할 길로부터 돌아서지 못했습니다.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반영억라파엘신부
창세기를 보면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2,7).고 적고 있습니다. 사람이 있기 전에 생명의 숨이 있었고 그 숨을 통하여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사람보다 앞서신 보이지 않는 분이 생명을 불어넣지 않으면 흙의 먼지로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숨을 받아 생명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습니다’(요한1,1-2). 그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완고하고 편협한 믿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이려 하였습니다.
유다인들은 아브라함을 권위가 있는 분으로 존경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미지의 세계로 떠났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니 유다인들에게는 조상에 대한 모욕이고 신성모독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들은 지금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히브11,3)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내가 모르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것을 먼저 내려놓고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주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필리4,6-7). 따라서 주님의 권위를 받아들임으로써 생명을 풍요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돌을 들어 던지려 할 때 그들과 맞서지 않으시고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억지를 이기는 길은 잠시 여유를 주는 것입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입니다. 때를 기다리며 자리를 비켜주는 모습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서로의 격한 감정을 삭이기 위해서는 때로 자리를 뜨는 것도 약입니다. 서로의 관계 안에서 서로의 다른 점을 인정한다는 것이 말같이 쉽지 않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부분입니다. 마음이 흔들릴 때에는 잠시 주님과 함께 자리를 비우십시오! 예수님과 함께하는 이는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죽음마저 극복하는 진정한 해방과 행복을 만끽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영광과 명예에 얽매여 살지 않으셨고 오직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사셨습니다. 우리도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님의 완전한 통교 안에 초대받고 있음을 결코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만드셨으니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아십니다.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주님의 권위 앞에 머리 조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이 때로는 인간적인 좌절과 실패를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차지하면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그것은 잠깐 지나가는 세상의 성공에 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권위도 중요하지만 하느님의 권위 앞에 순명한 아브라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느님을 보아야 하고 주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부디 세상의 권위를 쫓지 말고 천상의 권위에 머물러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