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장례 날을 위하여 (요한 12,1-11)

2013. 3. 25. 오후 9:25:01

글자

2013년 3월 25일 성주간 월요일

 

 

복음
<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1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었다. 2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 3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4 제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하였다. 5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6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
7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8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9 예수님께서 그곳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많은 유다인들의 무리가 몰려왔다. 예수님 때문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도 보려는 것이었다. 10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11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요한 12,1-11)

 

 

 

 

말씀의 초대

 하 느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종이 있다. 이 종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모든 민족들에게 성실하게 공정을 펼 것이다(제1독서). 죽었던 라자로를 살리신 예수님을 환영하는 잔치가 벌어졌다. 그런데 이 기쁜 날 라자로의 동생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린다. 이는 예수님의 장례를 예고하는 행위이다. 역설적이게도 라자로를 살리신 예수님을 환영하는 기쁜 날에 예수님의 죽음이 선포되는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는 죽음과 부활, 섬기는 것과 섬김을 받는 것이 대조됩니다.
첫 번째는 죽음과 부활의 대조입니다. 죽었던 라자로를 살리신 예수님을 환영하는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중심은 거기에 있지 않고,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닦아 드리는 장면에 있습니다. 향유를 붓고 닦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분의 ‘장례’를 위한 것입니다. 사실 라자로를 살리신 직후 최고 의회에서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습니다(요한 11,45-53 참조). 라자로를 살리신 것이 오히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게 된 계기가 된 것입니다. 이는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고 하신 당신의 말씀대로 지상에서의 최고의 사랑을 보여 줍니다.
두 번째 대조는 섬기는 것과 섬김을 받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는 다른 이의 발을 씻는 장면이 두 번 나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어 주시는 장면입니다(요한 13,4-5 참조). 또 다른 하나가 바로 오늘 복음으로,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리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실 때가 되자 손수 제자들의 발을 손으로 씻어 주십니다. 그러나 제자들 가운데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린 이는 없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을 예감하고 예수님의 발을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립니다.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극진하게 섬기는 모습은 요한 복음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신비에 참으로 깊이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또한 마리아처럼, ‘친구’를 살리시고자 죽음을 각오하신 예수님을 온전히 섬기며 그분의 수난과 죽음의 신비를 깊이 묵상해 봅시다.

☆☆☆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루카 10,38-42 참조) 속에 예수님 발치에만 앉아 있던 마리아를 기억하시지요? 그토록 사랑하는 예수님께 마리아는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리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나르드 향유의 가격이 얼마인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을 향한 사랑만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행동을 지켜보는 한 제자가 있었습니다. 유다입니다. 그는 마리아의 행동을 보자마자 곧바로 나르드 향유 가격이 떠오릅니다. 노동자 1년의 임금에 해당하는 300데나리온 어치의 향유 값이 그의 머릿속에서 계산됩니다. 이런 비싼 향유가 그냥 낭비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불만스러운 심정을 그냥 내보일 수 없습니다. 자신의 불만의 정당성을 내세우려고 가난한 이들을 핑계 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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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에서사랑의 관계이해관계의 차이를 보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계산하거나 따지는 법이 없습니다. 마리아의 사랑으로 나르드 향유 냄새가 온 방에 가득합니다. 사랑의 향기입니다. 반대로 유다는 머릿속에서 이해득실만 따지고 있습니다. 정의를 내세우지만 스승이신 예수님에게 사랑의 마음이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일차적인 사랑 없이 가난한 이들을 팔아 내세우는 정의 뒤에는 권력욕과 탐욕이 숨어 있게 마련입니다. 신앙인의 중요한 덕목은 계산하지 않고 따지지 않고, 예수님을 그냥 사랑하는 것입니다. 정의는 그다음에 자동으로 따라오는 덕목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찾아가십니다. 그는 정성을 다해 모십니다. 한때 죽었던 자신을 다시 살리신 분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라자로의 가족 역시 남다른 마음으로 맞이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리아는 고급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립니다. 애틋한 정성입니다. 사람들은 숙연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 이스카리옷은 어색한 표정이 됩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그는 이렇게 되뇝니다. 정성을 정성으로보지 못한 것이지요.
마리아는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오빠를 살려 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발에 향유를 부은 것은 감사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방문에 감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향유가 아무리 비싼들마리아에게는 조금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돈을 먼저 생각합니다. 마리아의 마음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순수함을 헤아려 보지 않았기에 낭비라고 판단합니다. 살면서 쉽게 빠지는잘못입니다. ‘너무나 쉽게걸려드는 유혹입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모두를 배려하시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덮어 주시는 예수님의 따뜻함입니다.
우리는 어느 쪽인지요? 마리아입니까? 유다의 모습입니까? 성주간 동안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 구인회-

 

 

 

오늘 복음에서 많은 유다인 무리가 예수님을 보려고 몰려온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예수님에 대한 순수한 믿음보다는 그분이 일으킨 기적을 눈으로 확인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복음은 이렇게 전한다. “예수님 때문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도 보려는 것이었다.”(9)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은 정말 놀라운 기적이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되었다. 여기서 눈여겨보고 싶은 것이 있다. 순 나르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린 마리아의 행동이 그분의 죽음을 미리 드러내는 것이라면, 그에 앞서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기적은 당신 부활을 알리는 표징이라는 점이다.

신앙인한테는 부활이 주는 희망이 크다. 세월이 유수와 같이 흐른다고 하는데 나도 나이를 더할수록 흐름의 속도가 더욱 빨라짐을 실감한다. 그만큼 죽음의 문이 가까워짐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한순간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 영원한 세계로 옮겨갈 것이다. 우리보다 앞서 죽음의 문을 넘어가신 그분 안에서 우리도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갖고 그 순간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도록 깨어 기도해야겠다

사랑이 무르익어 
반영억신부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좋은 사람, 아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에게는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 주고도 더 주지 못해 안타까워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모두를 줄 수 없다면 아직 사랑이 무르익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마리아는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3키로 그램)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하였습니다(요한12,3).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해 자기의 아주 소중한 것을 바쳐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냄새가 가득했다는 것은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집안에 가득한 것을 나타냅니다. 이럴 때는 냄새가 아니라 향기라고 해야 하는데…… 그런데 이 상황을 곱지 않게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지 않는가?(요한12,5)하며 향유의 값어치를 계산 하였습니다. 향유를 붓는 행위를 존경과 사랑, 믿음의 표현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간적으로 계산하였습니다. 부처 눈에는 부처가, 돼지의 눈에는 돼지가 보이는 법입니다. 유다의 눈에는 돈이 보일 뿐이었습니다. 돈주머니를 관리하면서 돈을 가로채던 유다에게는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자기 배를 채우는 수단으로 전락시켜 버렸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지금 나를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님께 바쳐드려야 함을 알지만 아는 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큽니다. 나의 시간과 능력, 재물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에 기꺼이 사용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죽었던 라자로를 살리심으로써 부활의 생명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수석사제들은 라자로를 죽이기로 결의 하였습니다.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들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요한12,11). ‘좋은 일에는 항상 마가 낀다.’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일일수록 드러내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살리는 일을 하시는 예수님 곁에서 죽음의 어둠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좋은 일을 하는 곳에 기쁨이 넘쳐 나야 하는 데 유다의 모습도 있고, 수석 사제들의 모습도 있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생명의 문화와 더불어 죽음의 문화가 함께 있습니다. 살리는 일에, 생명의 문화에 우리의 마음이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시기와 질투, 미움, 분노, 적개심, 기득권을 누리려는 곳에 어둠의 그림자가 밀려옵니다. 그러나 사랑의 마음이 있는 곳에 모두를 주고도 더 주고 싶은 마음이 커집니다. 나보다는 너를 위한 배려를 통해 예수님을 위로해 드리고 마리아처럼 존경과 사랑으로 모두를 바칠 수 있는 한 주간 되시길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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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게서 하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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