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어둠 (요한 8,12-20)

2013. 3. 26. 오전 5:03:13

글자

2013년 3월 26일 성주간 화요일

“주님, 그게 누굽니까?
(요한 13,21-33.36-38) 

 

"Master, who is it?"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당신 종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셨다. 그러나 그 종은 실패를 맛보았고,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고 토로한다. 그럼에도 그는 주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민족들의 빛으로 세우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수난 전날 저녁 당신을 배반할 제자들이 있음을 알고 계셨다. 한 사람은 유다였고, 다른 한 사람은 시몬 베드로였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 두 사람의 배반을 예고하십니다. 바로 유다와 베드로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유다를 배반자라고 하고, 베드로를 성인(聖人)이라고 합니다. 그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요?
사실 베드로도 유다도 모두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후회로만 그친 것이 아니라 회개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 무리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자신이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배반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세 번 고백합니다(요한 21,15-19 참조). 그 반면, 유다는 후회만 하였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잘못을 깨달은 뒤 절망에 빠져 자신의 목숨을 끊어 버리고 맙니다(마태 27,5 참조). 잘못한 줄은 알았지만, 그 잘못을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지 못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는 이미 그를 용서하려고 하셨으나, 유다 스스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것입니다.
‘성인’이란 죄를 전혀 짓지 않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죄에 빠져도 매번 회개하여 새롭게 출발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배반자로 남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 역시 죄를 짓고 난 뒤 후회는 하겠지만, 이에 따른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새롭게 출발할 수 있음에도 스스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채 자포자기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그 죄를 후회하는 것으로 그치는지 회개까지 이어지는지에 따라, 성인이 될 수도 있고, 배반자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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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는 3년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지 못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유다는 돈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고, 돈 때문에 결국 스승을 팔아넘기게 된 것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또 하나의 이유는 자기 뜻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로마에게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메시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의 생각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자신의 생각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에게 여러 번 경고하시면서 회개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귀담아 듣지 않았으며 자신만의 자유를 찾아 떠납니다. 유다는 빛에서 나와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그때는 밤이었습니다. 유다가 밖으로 나간 시간이 밤이었을 뿐만 아니라, 유다의 마음속도 밤이었다는 뜻입니다. 유다는 이제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 죄의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1티모 6,10)라고 했습니다. 돈에 대한 집착과 욕심이 지나치면 돈은 우리를 멸망의 길에 빠뜨립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자기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뜻이 예수님의 것과 다르면 자신을 굽히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유다를 통해 거울 속에 비친 우리 자신을 살펴봅시다. ‘나는 과연 소유에서 자유로운가?’ ‘나는 하루하루 삶에서 주님의 뜻을 물으며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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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어제 복음에서 본 것처럼 유다는 셈이 참 빨랐습니다. 세상의 이치에 밝은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어 드린 순 나르드 향유의 가격이 얼마인지 그는 그 가치를 금방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 가운데 세리 마태오를 제치고 제자들의 돈주머니를 관리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수님 제자단의 재무를 담당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기려고 예수님 일행에서 떠납니다. 유다는 본능적으로 예수님께 닥칠 위기를 감지했나 봅니다.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이 늘어났지만 당시 유다 사회를 이끌고 있는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능적으로 계산이 빠른 유다는 무엇인가 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스승을 위기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그가 지금껏 보아 온 예수님의 능력이면 위기 때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일이 시작될 것 같았습니다
.
유다는 빛을 떠나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남에게 빛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의 밤은 오로지 자신에게만 보입니다. ‘유다의 밤은 바로 이렇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오로지 자기 안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거기에는 스승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도 사랑도 없습니다. 끊임없이 계산하고 판단하는 냉혹한 생존 본능만 남게 됩니다. 마음 밑바닥까지 주님은 없고 철저하게 자기만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도 이런 유다의 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어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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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은 믿음과 의리를 저버리는 일입니다. 평생 후회할일인데 일부러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하찮아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역사 안에는 숱한 배신과 배은망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감을 얻은 것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은 개인적인 욕심이었습니다. 아무리 명분이 거창해도 시간이 지나니까 모든 것이 드러났습니다.
누구나 살면서 조금씩은 배반합니다. 은혜를 잊고, 도와준 것을 망각합니다. 조금 섭섭하다고 예전의 좋았던 관계마저 의심합니다. 푸념하고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그러면서 소문에는 민감하고, 베푸는 일에는 냉정해집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유다의 모습입니다
.
유다는 명석했습니다. 주님께서 먹고 자고 관리하는 일을 맡길 만큼 능력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도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매일 그는 기적을 체험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미루어 보건대,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엉뚱한 생각이 자리하기 마련입니다
.
우리에게는 유다의 모습이 없는지요? 내게 있는 모든 것을 감사의 시각으로 보지 않으면 별 볼 일 없는 것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남의 것을 기웃거리게 합니다. 자신의 소유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우직한 사람도 마침내 자만하게 됩니다. 감사와 겸손이 언제라도 삶을 풍요롭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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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유다에게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의 배반을 알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유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아무리 동기가 옳아도 배신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유다 역시 스승님을 따라나섰던 사람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기적을 보았던 사람입니다. 무엇이 그에게 차가운 마음이 들게 했을까요? 그를 움직였던 분명한 무엇이 있을 것입니다.
인간만이 배신을 합니다. 동물의 세계에는 배반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짐승만도 못하다는 말을 합니다. 계산하고 따지기에 등을 돌립니다. 이해타산에 얽히기에 배신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모두 판단의 잘못입니다. 영악하게 생각하는 것이 원인입니다
.
복음의 베드로 역시 스승님의 예언을 듣습니다. 하지만 그는 실수를 바로잡았기에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뉘우침이 빨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순간의 잘못을 계속 붙잡고 있었습니다. 결과는 파멸입니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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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돌아서야 했습니다. 우리 역시 살다 보면 우리를 붙잡는 말들을 만납니다. 사건들을 만납니다.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느낌이 앞섭니다. 그때 멈춰야 합니다. 그 순간 멈출 수 있는 힘을 지니라고 작은 시련들이 끊임없이 주어집니다. 진정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합니다.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배반을 예언하십니다. 또한 베드로의 배반까지 예고하십니다. 유다는 스승의 말씀에 밖으로 나갔지만 베드로는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펄쩍 뛰었을 겁니다. 주님을 위해서는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말했던 베드로입니다.
그런데 스승이 붙잡히자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납니다. 주위를 맴돌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합니다.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 했는데 막상 부딪히자 엉뚱한 말이 튀어나온 겁니다. 그것도 스승의 예고처럼 세 번이었습니다.
그의 행동을 굳이 배반이라 몰아세울 수 있을는지요?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모른다고 말했을 겁니다. 어정쩡한 자세였기에 마음에 없는 말이 튀어나왔을 겁니다. 베드로는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직 부활에 대한 믿음의 은총이 내리지 않은 탓입니다.
누구라도 은총이 없으면 흔들립니다. 아무리 우직한 사람이라도 은총이 붙잡아 주지 않으면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겸손해야 합니다. 쉽게 장담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이 말씀은 용서를 전제로 한 말씀이었습니다

배신의 죄보다 사랑입니다
반영억 신부
배신은 한솥밥을 먹는 사람이 합니다. 멀리 있는 사람은 서로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등질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사람은 서로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고 그것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 마음이 상하게 되며 차라리 몰랐던 사람만도 못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잘 안다는 것이 오히려 별것도 아닌 것에 서운함을 갖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강한 것 같지만 연약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폭과 깊이, 넓이를 더해야 하겠습니다. 내 마음의 문을 열어 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해야 주님께서 우리 삶의 역사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오실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비록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여전히 예수님의 제자였고,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마음을 알고 내내 번민하셨습니다. 속을 다 아시고 그것을 품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 안에서 침묵으로 철저히 고독을 이기셨습니다. 마침내 유다는 스승을 배반하였고 그 자책 때문에 목숨을 끊었습니다. 

사실 누구나 유다처럼 약한 마음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양상이 다릅니다. 베드로나 바오로는 주님을 등졌던 사람이지만 회개하여 주님의 도구로 항구 하게 살았습니다. 한때 주님을 배반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주님의 자비를 믿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유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주님의 자비가 심판을 이긴다.는 진리를 믿지 못한 탓입니다. 우리는 어떤 처지나 상황에서도 주님의 자비 안에 굳건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가장 큰 약점은 어떠한 죄도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유혹은 나를 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유혹 앞에서 나를 가장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 의탁할 수밖에 없는 나의 한계성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혹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시험입니다. 하느님 편에서 생각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커다란 공로가 될 것이고, 사탄의 편에 서서 그 유혹을 받아들이면 파멸의 길, 죽음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리가 살아가는 일상에는 항상 사탄의 말만 있는 것도, 그렇다고 늘 하느님의 말씀만 들리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끊임없는 선택의 길에 서게 됩니다. 단호하게 하느님을 선택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유혹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요, 나에게 자유가 주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하느님 앞에서의 그만한 책임을 져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심판보다는 자비를 갈망하는 만큼 예수님 곁에 꼭 붙어 그분만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절대 놓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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