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주간 화요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 (마르3,31-35)

2026. 1. 25. 오후 8:2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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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27일 화요일

[연중 제3주간 화요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 (마르3,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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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주님의 궤를 모시고 올라갔다.>(2사무6,12-15.17-19)

12 다윗은 기뻐하며 오벳 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하느님의 궤를 모시고 올라갔다.

13 주님의 궤를 멘 이들이 여섯 걸음을 옮기자, 다윗은 황소와 살진 송아지를 제물로 바쳤다.

14 다윗은 아마포 에폿을 입고, 온 힘을 다하여 주님 앞에서 춤을 추었다.

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집안은 함성을 올리고 나팔을 불며, 주님의 궤를 모시고 올라갔다.

17 그들은 다윗이 미리 쳐 둔 천막 안 제자리에 주님의 궤를 옮겨 놓았다. 그러고 나서 다윗은 주님 앞에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바쳤다.

18 다윗은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다 바친 다음에 만군의 주님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였다.

19 그는 온 백성에게,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이스라엘 모든 군중에게 빵 과자 하나와 대추야자 과자 하나, 그리고 건포도 과자 한 뭉치씩을 나누어 주었다. 그 뒤 온 백성은 저마다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화답송>시편24,7.8.9.10(8ㄱㄴ) 영광의 임금님 누구이신가? 그분은 바로 주님이시다.

성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영원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임금님 들어가신다.

영광의 임금님 누구이신가? 힘세고 용맹하신 주님, 싸움에 용맹하신 주님이시다.

성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영원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임금님 들어가신다.

영광의 임금님 누구이신가? 만군의 주님, 그분이 영광의 임금님이시다.

 

복음<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3,31-35)

31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32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어머니고 내형제들이냐?” 하고반문하셨다.

34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연중 제3주간 화요일 제1독서 (2사무 6,12ㄴ-15.17-19)

 

그 무렵 다윗은 기뻐하며 오벳 에돔의 집에서다윗 성으로 하느님의 궤를 모시고 올라갔다. (12) 주님의 궤를 멘 이들이 여섯 걸음을 옮기자,다윗은 황소와 살진 송아지를 제물로 바쳤다. (13) 다윗은 아마포 에폿을 입고, 온 힘을 다하여 주님 앞에서 춤을 추었다. (14)

 

사무엘서 하권 6장 1~11절은 다윗이 성의를 기울여 시도한 계약 궤 운반 시도가 우짜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중단되었음을 보도하였다. 이제 이어지는 사무엘 하권 6장 12~23절은 드디어 계약 궤 운반이  성공하여 다윗성에 안치한 사건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다룬다.

 

다윗이 계약 궤를 다윗성으로 운반하려는 생각을 다시 가진 것은 하느님의 궤로 인하여 오벳 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재산에 주님께서 복을 주셨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거 우짜의 죽음이 계약 궤를 잘못 다룸으로 인한 재앙이었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었기에 다윗은 이번이야말로 계약 궤 운반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던 것이다.

 

여기서는 이런 준비 상황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이와 병행되는 역대기에서는 무려 24절을 할애하여 계약 궤를 모실 처소를 준비하고(1역대15,1) 계약 궤를 운반할 레위인들을 임명할 것과(1역대15,2-15) 계약 궤의 이동에 있어서 성가대와 악대부들의 찬양이 있었으며(1역대15,16-21) 계약 궤를 운반하는 레위인의 직책까지(1역대15,22-24) 기술하고 있다.

 

즉 다윗은 계약 궤의 먼저번 운반 시도의 실패를 통해 두번째 운반은 더욱 철저하게 준비했던 것이다.

 

또한 여기서는 자세히 나타나지 않았지만, 다윗은 하느님의 궤로 인하여 오벳 에돔의 집이 복을 받은 것을 하느님의 궤로 말미암아 장차 자신과 자신의 나라에 복을 주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이며 계약 궤를 옮겨도 좋다는 하느님의 승인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사무엘 하권 6장 12절에 '모시고 올라갔다'로 번역된 '야알'(yaal)은 '올라가다'라는 뜻의 '알라'(alla) 동사의 사역형으로서 '올라가게 하다', '올리우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사역형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다윗이 직접 메고 올라간 것이 아니라 단지 계약 궤를 다윗성으로 올리우도록 명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계약 궤는 반드시 레위 지파 가운데서도 크핫 자손만이 어깨에 메고 운반해야 했기 때문에(민수4,2-6) 유다 지파인 다윗이 이 일을 직접 할 수가 없었다.

 

또한 여기서 '올리우다'라는 뜻의 단어를 사용한 것은 예루살렘의 지형이 높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의 궤를 다윗성으로 들여오는 일이 갖는 긍정적인 의미의 회복의 뉘앙스를 전달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다윗은 오벳 에돔의 집에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보면서 과거에 자신을 축복해 주셨던 그 하느님을 다시 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윗은 두번째 계약 궤 운반시 하느님의 거룩함을 가볍게 홀대한 자신의 경솔한 모습을 깊이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1역대15,13).

 

사무엘서 하권 6장 12절에서 '기뻐하며'로 번역된 '뻬시므하'(besimhah; with rejoicing)가 나오는데, 이 '기쁨'은 하느님과 멀어진 상황에서 다시 가깝게 된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전에는 악대부가 악기를 연주하는 것에 머물렀지만(2사무6,5) 지금의 상황에서는 기쁨에 겨워 다윗이 주님 앞에서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2사무6,14).

 

'주님의 궤를 맨 이들이 여섯 걸음을 옮기자,  다윗은 황소와 살진 송아지를 제물로 바쳤다.' (13)

 

사무엘서 하권 6장 13절은 두번째 계약 궤의 운반이 얼마나 주의 깊고 경건하게 이루어졌는지를 잘 보여준다. 여기서 '멘 이들이'로 번역된 '노세에'(nosee)는 '나르다'라는 뜻의 '나사'(nasa) 동사의 복수 분사형으로 '나르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역대기 상권 15장 26절에는 이들이 '레위 사람들'로 분명히 밝혀져 있고, 역대기 상권 15장 15절에서는 하느님의 궤를 채에 꿰어 그들이 어깨에 매었다는 말이 나온다.

 

이것을 보면, 우짜의 사건 때에 다윗이 미리 생각하지 못해 마비되었던 모든 것이 이제는 하느님의 뜻대로 지켜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역대기 상권 15장 13절에 나오는데로 하느님의 궤를 레위의 자손들 중에 크핫의 자손들이 어깨에 메지 않고 수레를 통해 운반하였기 때문에 우짜가 벌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옮기자'로 번역된 '와예히 키 차아두'(wayehi ki tsaadu)에서 '와예히 키'(wayehi ki)는 관용적인 표현으로서 '그리고 ~할 때에'로 번역할 수 있고, '차아두'(tsaadu)는 '걸음을 걷다'라는 뜻의 '차아드'(tsaad)의 완료형 3인칭 복수형으로서 '그들이 걸음을 걸었다' 이다.

 

여기서 '와예히 키 차아두'(wayehi ki tsaadu)는 '그들이 걸음을 걸었을 때에'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이처럼 완료적인 의미가 사용된 것 매 여섯 걸음마다가 아니라 처음 여섯 걸음을 걸은 후에 제사를 드렸음을 암시한다.

 

즉 다윗은 계약 궤를 멘 레위인들이 여섯 걸음을 걸어 아무런 이상이 없자, 처음 계약 궤를 운반했을 때와는 달리 하느님께서 계약 궤 운반을 허락하신 것으로 알고 하느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린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왜 하필 여섯 걸음을 걸은 후에 제사를 드렸는가 하는 것은 알 수 없다. 아마도 다윗은 걸음의 수와 관계없이 계약 궤를 멘 사제들이 몇 걸음을 걸어도 별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병행 구절인 역대기 상권 15장 26절에는 걸음의 수가 언급되지 않고 있다.

 

한편 본문은 제사를 드린 주체를 다윗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중대한 문제를 야기시킨다.

왜냐하면 과거 사울은 필리스티아와의 미크마스 전투 전(前)에 사무엘 예언자의 지시를 어기고 스스로 제사를 집전했다가 사무엘로부터 책망을 듣고 왕위 폐위 예고까지 받았으며(1사무13,8-14) 그 예고는 실제로 성취되었다.

 

그러나 본문은 다윗의 제사 행위에 대해 아무런 책망도 언급되지 않으며, 다윗이 계약 궤를 다윗성에 모신 이후에도 제사를 드린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당시는 이미 제사 제도가 확연히 구축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윗이 사제직을 수행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훗날 우찌야 임금이 분향 제단 위에서 향을 피우려고 주님의 성전에 들어갔다가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아 나병에 걸렸던 사실(2역대26,16-21)에서도 알 수 있듯이 왕정 시대의 사제 직분은 어느 누구도 결코 침해할 수 없는 성역이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는 다윗이 제물을 바쳤다는 본문의 표현을 그가 직접 제사를 집전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기보다는 다윗이 제사를 드릴 때이 중심 인물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당시 이 제사는 사제에 의해 집전되었지만, 사무엘서 하권 저자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의 상징인 계약 궤를 다윗성으로 모신 다윗이야말로 명실상부한 신정(神政) 왕국인 이스라엘의 중심 인물임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제사가 다윗 중심으로 진행된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열왕기 상권 3장 3~4절에서 솔로몬이 직접 제물을 바친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이것 역시 제사 집전은 사제가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역대기 상권 15장 26절에 보면, 이때 드린 제물이 황소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로 언급하고 있는데, 제사를 드린 주체가  '다윗'이 아닌 '그들'로 언급되고 있다.

 

 '다윗은 아마포 에폿을 입고, 온 힘을 다하여 주님 앞에서 춤을 추었다.' (14)

 

다윗이 입었던 옷은 '아마포 에폿'이었다. '에폿'(epod)은 사제들이 입는 겉옷을 나타낼 때 흔히 쓰이는 단어이다(탈출28,4.6-14).

다윗은 사제가 아니었으므로, 이때 다윗이 입은 옷은 사제 에폿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표현하기 위해 왕복을 벗고 입은 예복이었을 것이다.

 

하느님 앞에서 다윗의 겸손함은 그가 임금의 체면까지 버리고(2사무6,20) 몸소 춤을 추었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더욱이 '춤을 추었다'로 번역된 '메카르케르'(mekarker; danced)는 '빙빙 돌다', '춤추다'라는 뜻의 '카라트'(karad) 동사의 분사형이기 때문에 한 번 추고 그만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었음을 나타낸다.

아마도 그가 이처럼 빙빙 돌면서 춤을 추었기 때문에 '아마포 에폿'(베 에폿) 속의 맨 살이 드러나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하여'로 번역된 '뻬콜 오즈'(bekol oz)인데, 이것은 힘차게 빙글빙글 도는 다윗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한편 '주님 앞에서'는 '하느님의 궤 앞에서'를 상징적으로 묘사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원문은 '리프네 예흐와'(lione yehwa; before the LORD)인데, '주님이 보는 앞에'로 번역할 수 있다. 이것은 주님의 실제적인 임재와 현존을 나타내 준다.

아마도 다윗은 자신이 주님의 임재 가운데 있으며, 하느님의 목전에 서 있다고 느끼고 온 힘을 다하여 기쁨의 춤을 추었을 것이다. 특히 이러한 춤이 당시 임금의 즉위를 축하하는 백성의 춤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볼 때 춤을 추는 다윗은 이스라엘의 참된 통치자는 하느님이시고, 자신은 다만 하느님의 대리자일 뿐임을 겸손히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024년 01월 23일 화요일

[연중 제3주간 화요일오늘의 묵상 (사제 김재덕 베드로)

 

혈연관계는 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관계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내주게 만들고무엇보다도 먼저 사랑하게 하여 줍니다.

혈연관계보다 앞서는 관계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이 혈연관계와 똑같은 관계를 맺게 하여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이의 신앙이 혈연관계 앞에서 무너집니다.

자녀들을 대하는 몇몇 부모들의 모습을 보면하느님의 뜻이 그 관계 안에서 절대로 앞설 수 없는 듯 보입니다.

자녀의 행복이 신앙보다 더 앞서고자녀의 성적이 하느님의 뜻보다 먼저입니다.

자녀들에게는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 신앙의 길을 가르치지 않으면서그런 자녀를 위하여 열심히 기도합니다.

좋은 대학좋은 직장더 좋은 삶의 환경을 얻을 수만 있다면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하느님께 기도할 마음을 가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면서 생각합니다. ‘목표한 대학에 들어가면 신앙생활을 할 것이다.’

그 직장에 취업하게 되면 신앙생활을 할 것이다.’

냉정하게 생각하여 봅시다하느님을 왜 믿어야 하는지믿음을 지키고자 때로는 소중한 것을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하나도 배우지 않은 자녀가과연 자신이 바라는 것을 다 얻은 뒤에 하느님께 돌아올 수 있을까요?

돌아올 수야 있겠지만그리 쉽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신앙을 가르쳐 주십시오.

여러분의 자녀들이 예수님과 형제요 누이의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여러분의 자녀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그 말씀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도록 듣는 마음을 가르쳐 주십시오.

이 길은 예수님과 가장 특별한 관계를 맺는 길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정말로 믿는다면여러분의 자녀들이 무엇보다도 먼저 꼭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신앙이 아닐까요?

 

(김재덕 베드로 신부)

 

 

 

 

 연중 제3주간 화요일 복음(마르3,31~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35)

 

예수님의 말씀의 초점이 당신 자신의 혈연적인 가족 관계를 부정하려는 데에 있지 않고, 영적 의미의 가족 관계를 강조하려는 데에 있었음을 잘 드러내주는 표현이다.

 

만일 예수님의 가르침의 초점이 혈연적 가족 관계의 부정에 있었다면, 가르침의 대상은 당신을 미쳤다고 생각하여 강제로라도 데리러 온(마르3,21) 가족들이 되었을 것이고, 가르침의 내용도 그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하는 데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르코 복음 3장 31~35절의 결론은 영적 의미의 가족이 누군가에 대한 정의에만 머물고 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혈연적 가족의 중요성을 부인하신 것이 아니고, 오히려 영적 의미의 가족에 대한 정의를 통해 당신 공동체의 내적 결속을 강화하신다.

당시 열 두 제자를 제외하고는 특별한 공동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자들은 보잘것 없었다(마르3,32).

 

이러한 보잘 것 없는 공동체에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학자들의 베엘제불 논쟁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당시 예수님께서 마귀 들렸다는 그릇된 풍문과 더불어 이제 막 시작된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에 막대한 타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예수님의 친척들이 가세하여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예수님의 공동체는 크나큰 위기에 직면하였다.

바로 이런 위기에 들려주신 예수님의 말씀이 누구든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가족이 된다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 도래하는 시대는 사회적 신분이나 가문, 지식에 상관없이  오직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들어갈 자격이 주어진다.

또한 세상적으로 낙오된 자들도  영적으로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예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는 자부심을  갖도록 하기에, 이런 위기의 순간에 펼쳐진 예수님의 가르침은 모든 상황을 반전시키는 힘있는 메시지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예수님께서 집에서 어떤 가르침을 주시고 계실 때 육신의 가족이 찾아왔다고 해서 가르침을 중단하고 가족들을 만나셨다면, 당신을 추종하던 제자들에게도 교육상 좋지 않은 예를 남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 3장 32~33절의 정황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께서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인 제자들을 둘러보시며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고 말씀하셨을 때의 표정과 어투의 단호함과 엄격함은, 공사를 명백히 구분하고, 혈연과 육정을 초월해서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위해서만 자신들을 온전히 헌신해야 할 제자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고 본다.

 

 


  

20260127일 화요일

[연중 제3주간 화요일(안젤라메리치)] (이철구 요셉 신부)

 

참으로 냉정하십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는 당신 어머니와 형제들을 두고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마르 3,33)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이 말씀을 어머니와 형제들이 들었다면 많이 서운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끊으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3,35)라고 말씀하셨듯이 예수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한 가족이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제로 살아가면서 이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가 그 어떤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것을 알지만, 사제의 삶은 직접 부모님께 보답하는 삶이 아님을 또한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자리에서, 주님께서 바라시는 방법으로 주님의 뜻이 제 삶을 통하여 이루어질 때, 부모님을 향한 사랑이 있는 그대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도 미사를 드리는 가운데 부모님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세상을 향한 사랑으로 넓어지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우리의 발걸음 안에서 열매 맺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의 뜻 안에서 모두 한 가족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실천하여 모두 한 가족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철구 요셉 신부)

 



 

[연중 제3주간 화요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

여러분은 말씀을 올바로 듣고 예수님의 가족이 되었는지 물으십니다.

 

(마르3,32-35)

32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3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34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실행마음 안에 지키는 것, 킵(행함)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의 일하심말씀을 진리로 깨닫지 못한그 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자신들의 생각과 달라 믿지 못하는 그래서 미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선이 악을 덮는 그 대속의 십자가예수님께서 내 죄의 죗값으로 대로 죽으신 그 십자가가그 십자가 였음을 깨닫지 못해십자가의 그 예수님과 하나 되지 못한 그래서 의탁하지 못하고내 현실의 십자가에 매여 있는, 그래서 신앙이 무거운 짐이 되어버린 사람그가 십자가 밖에 예수님 밖에 있는 신자(가족)입니다.

 

(히브3,18-19. 4,1) 18 또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 당신의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맹세하셨습니까순종하지 않은 그 사람들이 아닙니까? 19 우리가 보듯이과연 그들은 불신 때문에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1 그러므로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약속이 계속 유효한데도여러분 가운데 누가 이미 탈락하였다고 여겨지는 일이 없도록우리 모두 주의를 기울입시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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