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1월 12일 월요일
[연중 제1주간 월요일] 사람 낚는 어부 (마르1,14-20)
제1독서<프닌나는 주님께서 태를 닫아 놓으신 한나를 괴롭혔다.>(1사무1,1-8)
1 에프라임 산악 지방에 춥족의 라마타임 사람이 하나 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엘카나였는데, 에프라임족 여로함의 아들이고 엘리후의 손자이며, 토후의 증손이고 춥의 현손이었다.
2 그에게는 아내가 둘 있었다. 한 아내의 이름은 한나이고, 다른 아내의 이름은 프닌나였다. 프닌나에게는 아이들이 있었지만 한나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3 엘카나는 해마다 자기 성읍을 떠나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주님께 예배와 제사를 드렸다. 그곳에는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가 주님의 사제로 있었다.
4 제사를 드리는 날, 엘카나는 아내 프닌나와 그의 아들딸들에게 제물의 몫을 나누어 주었다.
5 그러나 한나에게는 한몫밖에 줄 수 없었다. 엘카나는 한나를 사랑하였지만 주님께서 그의 태를 닫아 놓으셨기 때문이다.
6 더구나 적수 프닌나는, 주님께서 한나의 태를 닫아 놓으셨으므로, 그를 괴롭히려고 그의 화를 몹시 돋우었다.
7 이런 일이 해마다 되풀이되었다. 주님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프닌나가 이렇게 한나의 화를 돋우면, 한나는 울기만 하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8 남편 엘카나가 한나에게 말하였다. “한나, 왜 울기만 하오? 왜 먹지도 않고 그렇게 슬퍼만 하오? 당신에게는 내가 아들 열보다 더 낫지 않소?”
<화답송>시편116,12-13.14와 17.18-19ㄱㄴ(◎17ㄱ) ◎ 주님, 당신께 감사 제물 바치나이다.
○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 부르리라. ◎
○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주님께 나의 서원 채우리라. 당신께 감사 제물 바치며, 주님 이름 부르나이다. ◎
○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주님께 나의 서원 채우리라. 주님의 집 앞뜰에서, 예루살렘아, 네 한가운데에서. ◎
복음<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4-20)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15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16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18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19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20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연중 제1주간 월요일 제1독서 (1사무1,1-8)
"더구나 적수 프닌나는, 주님께서 한나의 태를 닫아 놓으셨으므로, 그를 괴롭히려고 그의 화를 몹시 돋우었다." (6)
한나의 불임 사실이 사무엘 상권 1장 5절에 이어서 6절에서도 반복됨으로써 한나의 절망적 상황이 다시 한번 더 강조된다.
5절의 '주님께서 그의 태를 닫아 놓으셨기'에 해당하는 원문은 '와이흐와 싸가르 라흐마흐'(waihwah sagar rahmah; but the Lord had closed her womb)인데, 6절에서는 '주님께서 한나의 태를 닫아 놓으셨으므로'에 해당하는 원문이 '키 싸가르 예흐와 뻬아드 라흐마흐'(ki sagar yehwa bead rahmah; because the Lord had closed her womb)로서, '뻬아드'(bead)라는 전치사가 더 첨부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뒤에'(behind), '위에'(up)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 '뻬아드'(bead)와 '못하게', '닫아'로 번역된 '싸가르'(sagar; had shut)와 결합하여 강조의 의미가 6절에 부가되었다.
사무엘서 저자는 주어 '주님께서'에 해당하는 '와이흐와'(waihwah)를 문장 서두에 배치시켜서, 한나가 임신하지 못하는 것이 한나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신 일임을 강조하고 있다.
5절의 본문을 직역하면 '그러나 주님께서 그녀의 자궁을 닫았다'인데, 이것은 아이를 임신하지 못하게 했다는 사실에 대한 히브리식의 완곡어법이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임신하지 못하는 여인은 신(神)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여겨졌다. 구약에서도 다산(多産)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상징으로서 자녀가 없음은 축복받지 못한 결과로 많이 나타난다(창세13,16; 15,5; 16,10).
그런데 여기 본문의 경우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 특별한 경우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한나의 경우에는 하느님의 특별한 계획이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하게 특별한 계획으로 하느님께서 여인의 자궁(태)을 닫아 임신하지 못하게 한 경우가 성경에 가끔 나타난다. 하느님께서는 사라이의 태를 닫으셨으며(창세16,2), 레베카의 태를 닫으셨고(창세25,21), 라헬의 태(창세29,21)도 닫으신 적이 있다.
이들은 모두 구세사의 중요한 인물들인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아내들로서 고통스러운 불임의 시기를 지난 후에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사악, 야곱, 요셉과 같은 아들을 얻었다.
이런 이스라엘 족장들의 역사를 잘 알고 있던 사무엘서의 독자들은 이러한 본문의 내용을 통해 이제 앞으로 한나도, 사라이가 이사악을 낳고 라헬이 요셉을 낳은 것처럼, 위대한 신앙의 인물을 낳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이러한 일들이 만군의 주님이신 하느님의 절대적 주권의 역사하심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짐작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본문은 사람의 잉태가 하느님의 절대적 주권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하느님께서 태를 닫으시면 새로운 생명을 볼 수 없고, 반대로 하느님께서 태를 여셔야 사람이 새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생명의 원천은 하느님께 있으며, 동시에 하느님의 절대적 주권의 역사하심은 한나 개인의 삶을 뛰어넘어 이스라엘 전체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것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적수 프닌나는'
원문에는 '프닌나'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고, '(그) 적수'로 번역된 '차라타흐'(tsarathah) 가 나온다. '차라타흐'(tsarathah)는 '고통', '환난'의 의미의 명사 '차타'(tsarah)에 여성 3인칭 단수 소유 접미어가 결합된 형태로서 직역하면 '그녀의 고통'이다.
여기서는 이 단어가 의인화되어 '그녀에게 고통을 가져오는 자'라는 의미의 '대적', '적수'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영어 성경은 '경쟁자'(rival)나 '적대자'(adversary)로 번역하였다.
프닌나를 이처럼 한나의 적수로 표현한 것은 한나 자신의 평가가 아닌 사무엘서 저자의 평가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무엘서 저자가 평가를 통해 남편인 엘카나가 '특별히 좋은 것이나 가치있는 것을 주었다'는 의미의 '한몫'을 준다는 이유(1사무1,5)와 또 아이를 못낳는다는 이유로 한나를 멸시한 프닌나의 악하고 교만한 성품을 알 수 있다.
프닌나는 자신에게 자녀들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축복을 이용하여 상대적으로 위축된 상태에 있는 한나를 괴롭히고 고통을 주는 적대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프닌나가 괴롭히려고 그의 화를 몹시 돋우게 한 것에 대한 한나의 반응은 단지 울기만 하고 아무 것도 막지 않으며(1사무1,7),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것뿐이었다(1사무1,10).
'그를 괴롭히려고 그의 화를 몹시 돋우었다'
프닌나는 자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으로부터 자신보다 더 사랑을 받는 한나를 시기 질투하여 괴로움과 고통을 주면서 한나를 적대했다.
'화를 몹시 돋우었다'에 해당하는 '웨키아쌋타'(wekiassatha)의 원형 '카아쓰'(kaas; provoke)는 '분노를 일으키다'(신명4,25), '진노하시게 하다'(신명31,29), '화를 돋우다'(판관2,12) 등으로도 번역되었다.
이 단어는 주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 때문에 나타내신 격렬한 감정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신명9,18; 1열왕14,7; 2역대33,6).
또한 '그를 괴롭히려고'에 해당하는 '빠아부르 하레이마흐'(baabur hareimah)에서 '빠아부르'(baabur)는 '때문에'(for)라는 의미의 전치사이며, '하레이마흐'(hareimah; to make her fret; in order to irritate her)는 원형 동사 '라암'(raam)의 사역형 부정사 연계형인데, 직역하면 '그녀를 괴롭히려고', '그녀를 괴롭게 만들기 때문에'이다.
프닌나가 한나를 어느 정도로 고통스럽게 했는지는 '괴로움을 당하다'라는 의미의 '라암'(raam)이라는 단어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사무엘서에서 이 단어는 모두 네 번 사용되는데, 이 본문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연 현상 중의 하나인 '천둥', '우뢰'( 1사무2,10; 7,10; 2사무22,14)를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늘에서 벼락과 함께 들리는 천지를 뒤엎을 듯한 '천둥 소리'는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는데, 사무엘서 저자는 바로 이 단어를 사용해서 프닌나에게 고통을 받고 있는 한나의 마음 상태를 표현하였다.
그리고 이 단어는 한나의 기도와 함께 특별한 의미를 갖는데, 사무엘서 상권 2장 10절에서 한나는 하느님께서 맞서는 자를 '천둥'으로 호령하실 것이라고 고백함으로써, 현재는 프닌나가 한나의 마음을 '천둥'과 같은 상태로 괴롭히지만, 결국에는 하느님께서 '천둥'과 같은 심판으로 그 서러움을 갚아 주실 것임이 암시되어 있는 것이다.
연중 제1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
어제 우리는 주님 세례 축일을 지내며 성탄 시기를 마무리하고 연중 시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연중 시기의 전례 말씀은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예수님의 걸음을 따르게 합니다.
그 시작에서 선포되는 예수님의 첫 말씀이 그분 공생활의 모든 것을 함축합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직접 다스리시는 나라로, 하느님께서 몸소 우리에게 오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사실이 바로 ‘기쁜 소식’(복음)입니다.
이는 천지 창조 때부터 계획되고, 많은 예언자를 통하여 예언되었으며, 이스라엘 백성의 간절한 기다림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 나라에 응답하는 우리의 태도는 ‘회개’와 ‘믿음’입니다.
‘회개’는 잘못된 길을 걷다가도, 다시 하느님께 돌아오는 행위입니다.
‘믿음’은 가까이 온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회개와 믿음은 “나를 따라오너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명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에 대한 본보기로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들을 소개합니다.
시몬과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은, 갑작스러운 예수님의 부르심에 갈등이나 망설임 없이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주저함이나 미련 없이 옛 삶을 포기하고(회개), 그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해야(믿음)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언젠가 우리도 베드로처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마르 10,28)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하신 말씀을 명심하며, 우리 앞에 놓인 연중 시기를 주님을 따르는 은총의 길로 만들어 갑시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
연중 제1주간 월요일 복음(마르1,14~20)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17)
한글 새 성경에 '오너라'라고 번역된 '듀테'(deute; follow)는 둘 또는 그 이상을 부를 때 사용되는 부사로서 동사적 의미도 갖는다.
즉 이 단어가 동사로 쓰일 때에는 '이쪽으로 오다', '자 오라' 등의 뜻으로 상대를 재촉하고 명령하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따라'로 번역된 '오피소'(opiso; after)는 장소적 의미로서는 '~뒤에', 시간적 의미로서는 '~후에'라는 의미를 가진 전치사이므로, '내 뒤에 오라'(follow me)는 뜻이다.
그런데 이 명령은 매우 간단하면서도 단호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제자로 부르시면서 내린 단 한마디 '나를 따라오너라'는 명령안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순전히 당신 자신만을 뒤따를 것을 원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 그들이 자신의 계획에 따라 자신들이 스스로 인생 행로를 결정하고 그것에 책임지는 삶을 살아 왔지만, 이제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에는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고, 오로지 그분의 뜻만을 쫓아 살아야 함을 뜻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시면서 외형적인 직업이나, 재산, 그리고 가족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버려야 하는 자아 부정의 삶과 그러한 결단을 요구하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리고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and I will make you fishers of men)는 말씀이 나온다.
여기서 '사람낚는 어부'로 번역된 '할리에이스 안트로폰'(halieis anthropon; fishers of men)에서 '안트로폰'(anthropon)은 보편적인 '사람'을 뜻하는 명사 '안트로포스'(anthropos)의 소유격 복수이다.
명사의 소유격에는 다양한 의미가 있는데, 여기서는 목적의 의미로 쓰였다.
말하자면 고기를 그물로 잡아들이는 어부와 같이, 사람들을 복음으로써 포획한다는 은유적 표현으로서, '사람들을 그물로 잡는 어부'의 의미로 '힐리에이스 안트로폰'(halieis anthropon)이 쓰였다.
특히 여기서 관사없는 복수형으로 사용해서 어느 특정한 사람이 아닌, 모든 인류를 복음 전파의 대상으로 해야 함을 암시한다.
사실 복음 선포자는 죄악과 어둠과 오류의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는 인간들을 구원의 배안으로 모아들이는 사람 낚는 어부인 것이다.
여기서 특징적인 단어인 '포이에소'(poieso; I will make)는 '만들다','되게 하다'는 뜻을 지닌 동사 '포이에오'(poieo)의 미래 능동태 1인칭 단수이다.
따라서 그 '만드는' 행동의 주체가 부름받은 베드로와 안드레아가 아닌 부르신 예수님 당신 자신임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들 스스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예수님 당신께서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가 되도록 만들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제자로 부름받은 자들은 자신들의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걱정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다.
한편 당시 고대 그리스나 근동의 문화적 관습은 제자될 사람들이 스승을 찾아가 스스로 제자가 되겠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인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스승이신 예수님 당신 자신이 먼저 찾아가 능동적으로 제자들을 선택하여 부르신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 1장 17절에서 '나를 따라오너라'(Come, follow me)는 말씀은 현재인데,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and I will make you fishers of men)는 말씀은 미래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부르시는' 현재와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미래 사이의 시간적 간격은 적어도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며 함께 한 3년간의 시간들, 즉 성령 강림 이후 초대 교회에서 본격적으로 그들이 주님의 사도로서 활동을 했다면, 그 기간들은 수련 및 양성 기간, 오늘날의 사제 서품 전의 신학교 과정과 종신 서약 전의 수도 생활이 된다고 볼 수 있다.
2026년 01월 12일 월요일
[연중 제1주간 월요일] (이철구 요셉 신부)
예수님께서 어부 시몬과 안드레아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마르 1,17). 이어서 야고보와 요한도 부르십니다.
그들은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부르심에 응답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구원’이라는 큰 사명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던 평범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1,17)라고 하시며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이 말씀은 삶의 방향을 바꾸는, 온 존재를 향한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부르심에 대한 응답은 세상의 조건이나 계산에 따른 것이 아닌 믿음의 결단이었습니다.
그 결단은 이렇게 드러납니다. 시몬과 안드레아는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1,18).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1,20).
예수님의 부르심에 그들은 곧바로, 전적으로 응답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1코린 1,27)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선택은 우리의 능력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곧바로, 전적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부르심은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임을 기억하며,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으로 응답합시다.
(이철구 요셉 신부)
[연중 제1주간 월요일]
하늘의 존재로 부활할 것인가
사람은 어디서 살든 영원히 산다는 것이다.
(마르1,14-20)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구약이 끝나고 신약의 시작이 되는, 곧 율법의 실체, 그리고 요한이 예고했던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때가 왔다는 것이다.(마태3,2) 또한 회개(메타노이아)는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라는 차원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왔던 구원이 없는 생활방식에서 돌아서서 구원의 진리의 삶으로 오라는 말씀이다.
(1베드1,18-19) 18 여러분도 알다시피,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 방식에서 해방되었는데, 은이나 금처럼 없어질 물건으로 그리된 것이 아니라, 19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그리된 것입니다.
= 율법 안에 하느님의 구원의 진의(진리)는 깨닫지 못하고 자신들의 뜻을 위한 법으로 지켜왔던, 그래서 그 하느님의 구원의 뜻을 속이는 헛된 신앙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돌아오라는 것이다.
(에페4,21-24) 21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하여 듣고 또 가르침을 받았을 줄 압니다. 22 곧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23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24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돌아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첫 창조의 하느님의 모습으로 회복이며(창세1,27) 그 하느님의 뜻인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 그 길이 구원의 진리임을 믿는(입는) 것이 거룩과 의로움의 하늘의 새 인간인 것이다.(로마3,24 히브10,10참조)
(2코린3,14) 14 그런데도 이스라엘 자손들은 *생각이 완고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까지도 그들이 옛 계약(율법)을 읽을 때에 그 *너울이 벗겨지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 율법의 제사와 윤리, 그 모든 것의 실체가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그 진실을 못 보는 이들이 많은데, 뱀의 유혹을 먹은 아담의 죄, 선악의 논리가 역사를 따라 흘러 하느님의 뜻을 가로막는 너울(수건)이 되어 인간의 뜻 지혜로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가던 길에서 방향을 바꾸어 돌아서는 것, ‘메타노이아, 회개’다.
내 뜻, 내 생각의 삶에서 돌아서서 하느님의 뜻으로 오는 것, 회개다. 죽음으로 끝나는 땅의 삶에서 돌아서서 영원한 하늘의 생명의 삶으로 오는 것, 회개다.
16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18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19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20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는, 그 모습이 사람을 낚는 어부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 사람의 일이 곧 하느님 나라의 모형이기 때문이다.
일을 해서 양식을 얻어먹어야 살 수 있는 것이 땅(육)의 사람이다. 그렇듯, 성경에서 ‘참 양식을 찾는일’을 해서 먹는 것이 영의 사람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풍랑이 이는 호수의 삶, 그 고달픈 삶의 사람들에게 그물을 던지는, 곧 하느님 나라의 양식인 하늘의 복음,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배(교회)- 옛 방식에 젖어있는 사람들에게 그 하느님의 바른 가르침을 주어 고쳐주는 것, 그 예수님의 뜻으로 보시고 곧바로 제자들을 부르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그 하느님 나라의 일을 했던가 하는 것이다. 그들이 그 하늘의 일을 하지 못했음을 우리는 안다.
그래서 너무 서둘러서 오늘의 제자들처럼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 안된다.
오늘 복음 묵상의 가르침-‘우리도 제자들처럼 모든 두려움, 걱정, 인간적인 나약함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기준으로 하는 복음의 삶을 살아 제자들처럼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이 언제 예수님 기준으로 살았던가?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말씀하시던 그 자리에서 까지 자신들의 욕망, 뜻을 드러냈던 제자들이다.(마태20,21-24참조) 그리고 예수님을 배반했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다들 도망갔던 제자들이다.
그런데 누구를, 무엇을 본받자고 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아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하신 일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의 뜻을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아닌 예수님께서 옛 방식에 젖어 고달프고 무거운 짐 같은 신앙을 사는 이들에게 하느님나라 생명의 복음을 전해서 사람들에게 쉼(안식)과 평화를 주는, 그 고쳐주시는 일은 예수님 혼자 하셨다.
일은 예수님 혼자 다 하시고 그 일에 제자들을 그냥 동참시켜 주신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일인 것이다.
하느님의 재 창조 일에 피조물인 인간들이 함께 하는 것이니 어떻게 은혜롭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본문에서 제자들이 ‘벌고 따랐다’한 것도 완전히 버린 것이 아닌 ‘버린 척’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자(죽음) 그 배를 다시 찾아서 고기 잡으러 갔지 않은가(요한21,3)
우리는 그 철없는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곧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예수님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만으로 ‘제자들을 본받자’하는 생각이 바로 인간의 뜻, 그 너울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 인간의 뜻 너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사라진다고 하셨으니 그 인간의 지혜를 벗고, 성경의 모든 인물들, 사람의 불가능을 보고 그 모습이 ‘나 자신의 모습임’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과 나,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하느님의 뜻에 죽기까지 순명으로 실행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 하늘의 사랑을 적어 놓은 것이 성경이다.
그래서 그 사랑을 내가 받아 전하는 것, 큰 계명의 실천이다. 그러나 성령이 함께 하셔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도 옛사람으로 돌아갔던 제자들이다.
그랬던 그들이 성령을 받은 후, 예수님을 기준 하는 삶으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목숨 바쳐 전했듯이, 성령을 청하고 그분의 이끄심을 받아야 하느님의 뜻을 깨닫는 올바른 진리의 신앙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나의 불가능을 깨닫고 하느님의 뜻(지혜)을 깨닫고자 하는 그 갈망하는 마음이 시작일 것이다.
(지혜6,11-13) 11 너희가 나의 말을 갈망하고 갈구하면 가르침을 얻을 것이다. 12 지혜는 바래지 않고 늘 빛이 나서 그를 사랑하는 이들은 쉽게 알아보고 그를 찾는 이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13 지혜는 자기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미리 다가가 자기를 알아보게 해 준다.
☨하느님의 지혜이신 성령님! 우리 모두가 당신을 갈망하게 하소서~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