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1월 03일 토요일
[주님 공현 대축일 전 토요일] 하느님의 어린양 (요한1,29-34)
제1독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1요한2,29-3,6)
하느님께서 29 의로우신 분이심을 깨달으면,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3,1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4 죄를 저지르는 자는 모두 불법을 자행하는 자입니다. 죄는 곧 불법입니다.
5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분 안에는 죄가 없습니다.
6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모두 그분을 뵙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자입니다.
<화답송>시편98,1.3ㄷㄹ-4.5-6(◎3ㄷㄹ) ◎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그분의 오른손이, 거룩한 그 팔이 승리를 가져오셨네. ◎
○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
○ 비파 타며 주님께 찬미 노래 불러라. 비파에 가락 맞춰 노래 불러라. 쇠 나팔 뿔 나팔 소리에 맞춰, 임금이신 주님 앞에서 환성 올려라. ◎
복음<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1,29-34)
그때에 29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0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31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32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33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34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주님 공현 전 토요일 제1독서(1요한2,29-3,6)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3,1)
요한은 앞의 요한1서 1장과 2장에서 성도가 하느님과 친교하는 자라는 사실에 촛점을 맞추어 그들이 추구해야 할 신앙과 생활에 대하여 권면하였다.
이제 이어지는 요한1서 3장 1절에서 4장 6절까지에서는 성도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점에 촛점을 맞추어 그들이 지향해야 할 신앙과 생활을 천명한다.
먼저 요한1서 3장 1-3절에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입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성도의 신분을 밝히고 성도가 가져야 할 장래의 소망과 현재의 거룩하고 순결한 삶에 대하여 밝힌다.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의 자녀'로 번역된 '테크나 테우'(tekna theu)에서, '하느님의'로 번역된 '테우'(theu)는 소유격으로서 우리가 하느님의 소유임을 가리킨다.
또한 '자녀'로 번역된 '테크나'(tekna)는 동의어 '휘오스'(hyos)가 법적 의미에서의 자녀란 의미가 강한 것에 비교하여, 혈육의 의미가 강한 단어이다.
즉 '휘오스'(hyos)가 양자를 나타낼 때 자주 쓰이는 한편, '테크나'(tekna)는 친자를 가리킬 때 자주 쓰인다.
바오로는 성도가 사탄의 자녀에서 그리스도의 구속 성혈의 공로로 하느님의 자녀로 그 신분이 바뀐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휘오스'(hyos)란 용어를 주로 사용한(로마8,14.15 ; 갈라4,7) 반면에, 요한은 하느님과 성도간의 친밀감을 강조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테크나'란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대속의 값으로 지불하고 우리를 자신의 소유로 삼으셨기에, 우리는 그분의 소중한 소유가 되었다는 사실이 이러한 표현 가운데 잘 드러나는 것이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떄문입니다'
원문상으로는 주절만 현재 시제일뿐 '호티'(hoti)이하의 종속절은 부정 과거 시제(Aorist)이다.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로 번역한 '호티 우크 에그노 아우톤'(hoti uk egno auton)에서, '에그노'(egno)는 '기노스코'(ginosko)의 부정 과거형으로서,'우크 에그노'(uk egno)는 과거에 '알지 못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이 하느님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 공생활을 하실 때에 유대인들이 그를 하느님의 아드님,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어떻게 갈릴래아에서 나오겠느냐고 하면서 갈릴래아 출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았고(요한7,41), 산헤드린 최고 의회는 예수가 자칭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말하자 그를 신성 모독자로 몰아 처형했다(미태26,63-66).
요한이 여기서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언급하는 것은 바로 여기의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며, 이것은 나아가 본절 상반절과 관련시켜 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성부 하느님과 동일한 분으로 규정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본문의 '그분'(auton)은 분명히 상반절의 '아버지','하느님'을 받는 대명사이다.
그런데 요한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한다'가 아닌 '알지 못했다'는 부정 과거 시제를 사용함으로써, 세상이 역사적으로 특정한 기간에 그 하느님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나타내어, 그들이 알지 못한 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며,그분은 하느님과 동일한 분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세상이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으므로 그에게 속한 그리스도인까지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요한15,19)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과 그리스도인과 세상과의 관계를 설명하셨던 적이 있다.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2)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으로 번역된 '호모이오이 아우토 에소메타'(homoioi auto esometha ; we shall be like him)에서, '호모이오이'는 '~처럼'(like)이고, '아우토'는 '그분'(him)이며, '에소메타'는 '우리가 될 것이다'(we shall be)이다.
이것은 '신을 보면 신처럼 된다'라는 그리스의 신비적 사상과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영광가운데 머무르게 되면, 하느님의 영광과 임재가 나타난다'라는 유대적 사상과 유사성을 지닌다.
그러나 요한은 여기서 위와같은 사상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계시를 근거로 진리를 설파하고 있다.
성도가 완전히 영광스런 상태가 되는 시점은,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 성도들이 완성된 하느님 나라의 일원이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머무르며, 그리스도를 온전히 보게되는 그 때이다(1코린13,12).
우리가 그리스도를 볼 수 있을 때 우리의 영광스러움(glorification)이 시작되고 완성된다.
영광스럽게 완성된 후의 성도의 모습이 어떠할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아마 타볼산에서 예수께서 영광스럽게 변모된 모습과 유사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마태17,2).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하느님을 경험하고 만나는 자가 즉각적으로 완전한 자로 변모된다고 가르쳤다.
요한은 이와같은 영지주의자들의 잘못된 사상을 의식하면서, 현재에 완전해지는 것은 없으며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 후에야 완전한 상태로 변모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신적 지식과 경험이 이 세상안에서 사람들을 완전하게 변화시킨다는 교리의 허구상을 직접적으로 지적하는 것이다.
동시에 고난의 현장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장차 이루어질 영광스런 모습을 바라보며 종말론적 희망을 갖게 해준다.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3,3)
여기서 '희망'으로 번역된 '엘피다'(elpida)의 원형 '엘피스'(elpis)는 '바라는 것' 또는 현재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소망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특히 성도들의 현재의 삶 속에서 경험되는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약속된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며 기다리고 인내하는 문맥에서 많이 사용되었다(로마4,18 ; 2코린10,15 ; 필리1,20).
본절에서도 이 '희망'은 그리스도의 재림시 그를 대면할 때, 그를 따라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변모될 것을 기대하는 희망을 가리킨다.
그러한 희망을 가진 자는 누구든지 주님의 순결하심과 같이 자신을 순결하게 해야 한다.
여기서 '순결하게 하다'라는 뜻으로 번역된 '하그니제이'(hagnizei)의 원형 '하그니죠'(hagnizo)는 '깨끗하게 하다', '정결케 하다', '정결례를 행하다'라는 뜻으로 거룩함과 정결함을 위해 정결례를 행하는 거룩한 행위를 뜻한다.
즉 종말에 영광스런 모습으로 주님을 대면할 것을 기대하는 성도는 자신들을 마치 구약의 성별된 자들이 정결례를 행하듯이, 거룩함으로 자신을 정결케 해야 한다는 말이다.
요한은 여기서 하느님의 자녀가 가져야 할 중요한 삶의 자세가 죄로부터 떠나 자신을 순결하게 하는 삶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하느님의 자녀는 죄를 떠나 죄를 짓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순결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종말론적인 신앙을 소유한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이다.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에서 '순결'로 번역된 '하그노스'(hagnos)는 마치 남자를 알지 못하는 순결한 처녀와 같은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서, '정결', '순전', '성결', '깨끗' 이라는 뜻을 가지나,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무죄성을 나타낸다.
그리고 여기서 '처럼'(같이)로 번역된 '카토스'(kathos)는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의 순결함의 모범이 됨을 잘 보여준다.
모든 성도들이 추구해야 할 정결함의 목표와 모델은 바로 무죄하여 한 점의 티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순결'이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영이 이미 신적 지식과 경험을 통해 완전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며 또한 육체를 악한 것으로 보아 경시하면서 윤리적 삶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고 오히려 방종한 생활을 했다.
요한은 이러한 그들의 비윤리적인 종말론적 구원관을 견제하고 있는 것이다.
2026년 01월 03일 토요일
[주님 공현 대축일 전 토요일] (이철구 요셉 신부)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4).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왜 참될까요? 그의 증언은 상상이나 소문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가 직접 보고 들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모습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듣고 본 것으로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증언하였고, 덕분에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세례자 요한의 사명이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이시며, 세상의 죄를 없애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심을 증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이 사명에 충실하였고, 자신의 증언으로 ‘구원의 문’이신(요한 10,9 참조) 예수님께 사람들을 이끌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도 하느님께서 저마다 주신 소명이 무엇인지 식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는 올바로 식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자신의 욕망이 반영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도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야고 4,3)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뜻을 올바로 식별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이 무엇이든지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소중합니다.
작은 밀알 하나가 많은 열매를 맺듯, 우리도 주님의 은총 안에서 작은 일에도 충실한 일꾼, 주님의 뜻이 세상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충실한 일꾼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이철구 요셉 신부)
주님 공현 전 토요일 복음(요한1,29~34)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29ㄴ)
여기서 '없애시는'에 해당하는 '호 아이론'(ho airon; who takes away)에서 '아이론'(airon)은 '아이로'(airo)의 현재 분사이다.
지속과 반복의 의미를 갖는 현재 시제는 무죄하신 그리스도의 대신 속죄가 십자가 위에서 단 한번에 성취된 것이기는 하지만,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그 효력이 영원토록 유효함을 드러낸다.
희랍어의 '아이로'(airo)는 '지고 간다'는 뜻도 있지만, 여기서는 '없이하거나 제거한다'는 의미가 더 적합하다.
즉 그리스도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속죄의 제물로서의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이것은 구약 시대에 죄를 완전히 없게 할 수 없어서 성전에서 매일 반복적으로 드려지던 동물의 희생 제사와는 확실히 구별된다.
구약의 제사들은 아자젤 염소에게 죄를 지어서 광야로 가게 하거나 (레위16,8.21~22), 제물을 번제단 위에서 불살랐는데, 이것은 죄를 없애지 못하고 죄를 기억하게 할 뿐 이었다(히브10,3.4).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몸을 단 한 번 바치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거룩함을 얻게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히브10,10)라는 감격적인 말씀은 그분의 속죄가 완전한 것이었음을 명시적으로 드러낸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세례자 요한에 의해 예수님께 붙여진 이 위대한 칭호는 요한 복음사가의 기록들에서만 발견되며, 다른 세 복음서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사도행전 8장 32절과 베드로 1서 1장 19절에 각각 한번씩 나오는 것을 제외하고, 요한 복음사가의 기록들에 집중되어 있다.
'어린양'을 뜻하는 '암노스'(amnos; Lamb)는 신약 성경에서 네 번밖에 나오지 않는다(요한1,29.36; 사도8,32; 1베드1,19).
요한 복음사가의 기록들에서도 같은 뜻을 가진 '아르니온'(arnion)이 더 많이 발견된다.
요한 복음사가가 예수님께 이 칭호를 사용할 때에는 유대인들의 의식 속에 들어 있는 어린양에 대한 독특한 관념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암노스'(amnos)의 히브리어 상응어는 '케베쉬'(kebesh)이다. 이 용어는 '어린양' 뿐만 아니라 '양'(sheep)을 가리켜서 쓰이기는 하는데, 대부분 희생 제물의 문맥에 나타난다(탈출29,38; 레위4,32; 민수15,5).
요한 복음사가는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예수님을 어린양이라고 부를 때에 과월절(유월절; 해방절) 어린양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탈출12,3).
시기적으로 과월절이 멀지 않았고(요한2,13), 이스라엘 후손들이 이집트에서 나오던 바로 그 밤에, 이스라엘의 집을 보호해 준 것이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피(탈출12,11.13)였음을, 유대인들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의 증거는 예수님께서 당신 백성을 구원할 분이시며, 과월절 어린양처럼 자기 희생을 통해 이것을 성취할 것임을 강하게 암시한 것이다.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호 암노스 투 테우'(ho amnos tu theu; the Lamb of God)라는 세례자 요한의 선언은 구원의 주체가 하느님이심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사람이 잡아서 제단에 드리던 양은 그 수가 무수히 많아도 인간의 죄를 완전히 씻어 주지 못했다.
흠없고 티없는 어린양, 곧 죄 없으신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만이 이 일을 하실 수가 있었다.
2026년 01월 03일 토요일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김동희 모세 신부)
주님 공현 대축일을 앞뒤로 하는 성탄 시기에 우리는 독서 말씀으로 요한의 첫째 서간을 계속해서 듣습니다.
요한 서간은 사람이 되시어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의 외아드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을 확고하게 가르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주님의 오심을 부인하고 거절하는 완고한 세상에 휩쓸려 흔들리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으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1,33)으로 소개합니다.
그러면서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1,31)라고 거듭해서 증언합니다.
‘전에는 그분을 알지 못하였다.’는 말이 제게는 무엇보다 강렬한 증언으로 다가옵니다.
‘전에는 알지 못하였다.’는 이 말이 ‘지금은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는 뜻을 품고 있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신학교 입학을 위한 교리 시험을 치르는데 이런 문제가 나왔습니다.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한참을 고민한 뒤 ‘진리의 길로 나를 부르시는 완고한 스승’이라는 요지로 답안을 적었습니다.
다행히 신학교에 합격하였지만 저는 분명히 압니다.
그때 저는 그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어느 때인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턱없이 부족함을 고백하며 도와줄 이 예수님밖에 없노라 매달렸더니 그 비참에서 손을 잡아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더 이상 스승이 아닌 주님이셨습니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하고 또렷하게 말하는 이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김동희 모세 신부)
2026. 1. 3. 주님 공현 전 토요일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
(1요한 2,29―3,6)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29 의로우신 분이심을 깨달으면,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 하느님이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바룩2,6 주 우리 하느님께는 의로움이 있지만, 우리와 우리 조상들 얼굴에는 오늘 이처럼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
= 그리고 그 하느님의 의로움이란?
(1요한2,1-2) 1 나의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 죄인들을 위해 속죄 제물로 오셔서 그 죄의 상태가 되지 않도록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그 의로움입니다. 그 속죄 제물로 죽으신 예수님을 진리로 믿고 의탁하는 것이 의로움의 실천입니다.(요한 14,6) 인간들의 의로움이라는 것이 개짐, 곧 걸레로(이사64,5) 아무 소용없는 것이라(이사57,12) 하셨으니 우리가 의로운 자가 된다면 그것은 분명 하느님에게서 얻는, 하느님에게서 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태6,33)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 죄인들을 위해 대신 죽으신 그 예수님을 의로움으로 먼저 깨달으라 하심입니다. 어디서? 성경속에서 찾아 깨닫고 믿고 의탁해야지요.
(로마4,22) 22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 믿음이 우리의 의로움입니다.
(요한1,27) 27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 세례자 요한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루가7,28) 2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 의인은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도록 내 죄를 고백하는 것, 구원 신앙입니다. 그 더러운 죄의 나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는 의로움입니다.
3,1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많은 신학자들이 이 세상에 하느님은 없다 인간들이 자신의 뜻을 위해 만들어낸 조작된 하느님만이 있다고 합니다.(마르코7,7-13참조) 예수님도 또한 그렇습니다.
(마태20,28) 28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 우리의 죗값으로 당신의 목숨을 바치러 오신 그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닌 내 뜻, 내 만족을 위한 예수님 섬기기의 그 헛된 신앙을 삽니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예수님이 나타나시면, 섬김의 대상이 아닌 대속의 예수님이 나타나시면~ 우리는 그 예수님의 대속으로 깨끗해져 그분처럼 되어 그분과 함께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3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 인간들이 자신들의 생각, 뜻을 보태고 뺀 사람의 규정 교리로 섬기는 그 예수님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순결하신 예수님처럼~ 우리 자신도 인간들의 규정 교리로 스스로 의롭다, 깨끗하다 하지 않게 되는......
티끌, 죄의 본질 그 있는 그대로’ 주님 앞에 나와 그분의 피로 깨끗해지는 그 순결하게 됨입니다.
4 죄를 저지르는 자는 모두 불법을 자행하는 자입니다. 죄는 곧 불법입니다.
= 불법을 인간들의 계명이 아닌 하느님의 뜻 그분 말씀 안에서 찾읍시다. (마태721~23.28참조)
5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분 안에는 죄가 없습니다.
= 예수님은 흠도없고 티도 없는 깨끗하신 분이시기에 그분의 깨끗한 피로 더러운 죄가 씻겨 지는 것입니다. 더러운 물로 열심히 씻어 내봐야 더럽습니다. 걸레는 빨아도 걸레입니다.
(히브9,14) 14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6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모두 그분을 뵙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자입니다.
= 그 분 안에~ 죄인들의 속죄 제물로 오셔서 그 죗값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하신, 또 누가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 의로우신 예수그리스도(1요한 2,2)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이 용서 받지 못한 그 죄의 상태로 있는, 그 죄인이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는 하늘의 덮으심 대속, 그 하늘의 진리를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것이지요.
(로마7,22-25) 22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23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24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나 자신이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으로는 죄의 법을 섬깁니다.
= 사도 바오로는 십자가의 대속 만을 의지 했습니다.
(히브4,1) 1 그러므로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약속이 계속 유효한데도, 여러분 가운데 누가 이미 탈락하였다고 여겨지는 일이 없도록, 우리 모두 주의를 기울입시다.
아멘. -*^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