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29일 월요일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주님께 봉헌 (루카2,22-35)
제1독서<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릅니다.>)1요한2,3-11)
사랑하는 여러분, 3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4 “나는 그분을 안다.”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5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6 그분 안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7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이 아니라, 여러분이 처음부터 지녀 온 옛 계명입니다. 이 옛 계명은 여러분이 들은 그 말씀입니다.
8 그러면서도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도 또 여러분에게도 참된 사실입니다. 어둠이 지나가고 이미 참빛이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9 빛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자입니다.
10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르고, 그에게는 걸림돌이 없습니다.
11 그러나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화답송>시편96(95),1-2ㄱ.2ㄴ-3.5ㄴ-6(◎11ㄱ) ◎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여라.
○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주님께 노래하여라, 온 세상아. 주님께 노래하여라, 그 이름 찬미하여라. ◎
○ 나날이 선포하여라, 그분의 구원을. 전하여라, 겨레들에게 그분의 영광을, 모든 민족들에게 그분의 기적을. ◎
○ 주님은 하늘을 지으셨네. 존귀와 위엄이 그분 앞에 있고, 권능과 영화가 그분 성소에 있네. ◎
복음<그리스도는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십니다.>(루카2,22-35)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성탄 팔일 축제 내 제5일 제1독서(1요한2,3~11)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이 아니라, 여러분이 처음부터 지녀온 옛 계명입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속에 머무르고, 그에게는 걸림돌이 없습니다."(3-10)
'계명'으로 번역된 '엔톨라스'(entollas)의 원형 '엔톨레'(entole)는 구약에서 하느님이 주신 율법 중에 하느님의 백성이 지켜야 할 '도덕적 규례'들을 뜻하는 것으로 '십계명'이 대표적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지키다'에 해당하는 '테로멘'(teromen)의 원형 '테레오'(tereo)는 '시선을 '고정시키다', '준행하다'라는 뜻이다.
하느님이 주신 명령에 자신의 시선을 고정하여 철저하게 준행하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을 알고 있음'(3)과 '나는 그분을 안다'(4)에 나오는 '안다'는 동사 '기노스코'(ginosko)는 단순히 지식적 차원의 앎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관계성 속에서 참된 체험으로 아는 것을 말한다. 본래 체험적이고 관계적인 앎을 의미하는 동사이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5)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은 단순히 사실에 대한 판단과 지식적 인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의 말씀을 순종함으로써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데까지 나가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본문에 '완성된다'는 단어 '테텔레이오타이'(tetelleiotai)의 원형 '텔레이오오'(teleioo)는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의 의미를 포함한 개념으로서 '완전하게 하다', '성취하다'라는 뜻이다.
하느님께 대한 자녀들의 사랑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지속적인 순종과 복종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이 아니라, 여러분이 처음부터 지녀온 옛 계명입니다.'(7)
저자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예컨대 구약의 레위기 19장 18절 등에도 이미 기록되어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요한 복음 13장 34절에 다시 강조하셨다는 것을 말한다.
즉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유대적 노선과 그리스도교적 노선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정통적인 교훈이라는 것이다.
초대 교회 영지주의 이단 중 한 사람인 마르시온(Marsion)은 구약의 하느님과 신약의 하느님을 날카롭게 분리시켜 구약의 하느님은 분노와 증오에 사로잡혀 잔인한 짓을 일삼는 저열한 신인 반면에, 신약의 하느님은 그리스도에게 임한 영으로서 자비롭고 은혜가 풍성하고 사랑으로 다스리는 우등한 신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런 마르시온에게 있어 '서로 사랑하라'는 개념이 구약에 있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저자는 마르시온의 그런 주장이 비성경적이고, 자신이 지금 권면하는 계명이 오래된 정통 신앙을 따른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새 계명'(엔톨렌 카이넨; entolen kainen)(8)이란 말은 요한복음 13장 34절의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라는 말씀을 염두에 두었기에 나온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계명은 구약의 레위기 19장 18절과 같은 맥락에서는 새 계명이 아니지만, 레위기 19장 18절에 없는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마태5,44)라는 사상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세족례때 당신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가리옷과 십자가의 길에서 다 도망간 사도들의 발을 닦아 주시며, 몸소 자신의 교훈을 실천해 보였다는 차원에서는 새 계명인 것이다.
그리고 8절 이하에 나오는 '어두움'으로 번역된 '스코티아'(skotia)는 '흑암'(darkness)을 뜻하는 단어로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으로부터 가려진 상태, 빛이 없는 혼돈과 절망의 상태를 의미한다.
반면 '빛'으로 번역된 '포스'(phos)는 하느님의 진리 및 생명을 의미한다. 이것은 세상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와 그분이 행하신 십자가상 구속사업을 의미한다.
저자는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사랑의 계명을 알지 못하던 시간을 어두움에 비유하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으로 이 계명의 의미를 알게 된 사실을 참 빛이 비친 것에 비유하고 있다.
'빛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9)의 표현은 요한복음 12장 46절에도 나오는데, 빛의 비추심을 받는 자의 삶은 그리스도의 계명에 대한 사랑의 순종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 자녀의 거룩한 성품을 말하는데, 빛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 살면서 그분의 빛을 반사하는 반사체로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삶으로 나타내야 하는 것이다.
9절의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에서 '미워하다'로 번역된 '미손'(mison)의 원형 '미세오'(miseo)는 '싫어하다','증오하다'라는 뜻으로써 형제에 대하여 깊은 증오심을 품고 적대적으로 행동하거나 용서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형제'로 번역된 '아델폰'(adelphon)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된 교회 내 구성원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빛 가운데 있는 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한 자로서 마땅히 그 사랑을 이웃들에게 실천해야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러한 형제의 사랑의 실천이 없는 자는 아직까지 어두움에 속한 자요,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도 못하고 그 사랑 안에 머무르지 못하는 자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속에 머무르고, 그에게는 걸림돌이 없습니다.'(10)
10절의 '걸림돌'로 번역된 '스칸달론'(skandalon)을 '덫', '올무', '거리낌'으로도 번역된다.
이 단어의 동사형인 '스칸달리조'(skandalizo)는 '올무를 놓아 걸려 넘어지게 하다', '실족하게 하다'라는 뜻이다.
형제를 사랑하는 그안에 걸려 넘어질 요소가 전혀 없음을 보여준다.
낮에 다니는 자는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심지어 밤이라 할지라도, 빛과 같이 동행하는 자는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빛이 그가 걸어가고 있는 길을 밝히 비추어 주어 발의 걸려 넘어짐을 막아주고, 지속적으로 걸어가야 할 길의 방향과 목표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10절이 형제를 사랑하는 자에게 임한 축복을 보여 준다면, 11절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에게 임한 불행을 보여준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움 속에서 진리의 길을 알지 못해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자신의 현재 위치가 어디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인데, 여기서 '눈'은 비유적으로 '판단력'을 가리키며, '멀게 하였음'은 '시력을 잃다', '정확하게 보지 못하다'는 뜻으로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판단이 불가능한 상태를 가리킨다.
실례로 어두움 가운데 잠시 머무는 것은 시력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오래 머물게 되면 점차적으로 시력을 잃어 마침내는 소경이 될 수도 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항상 어두움 가운데 있게 되고, 또한 그 가운데서 움직이게 되어 머지 않아 영적 시력을 잃고 멸망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인간에게 명하신 계명의 절반이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문제의 실패자는 이미 자기 인생의 반을 실패한 자이다.
12월 29일 월요일 [성탄 축제 제5일] 사제의 묵상 (서철 바오로 신부)
마리아와 요셉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하고 첫아들을 주님께 봉헌하고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출산한 여인은 사십 일 동안 불결한 사람으로 간주되었기에,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일년생 어린양 한 마리와 비둘기 한 마리를 제물로 바쳐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만 다시 정결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첫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맏배는 하느님의 것이요 주님을 섬겨야 하기에 하느님께 봉헌해야 하였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이집트인들의 맏배를 치실 때 자기의 맏배들을 죽음에서 구해 주신 것을 기억하고, 그 후손들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레위인들은 첫아들을 사제로 봉헌하여 성전에서 봉사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맏아들을 봉헌하는 대신에 다섯 세켈(20데나리온)의 돈을 성전에 바쳤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그 아들은 내게 가장 소중한 것, 가장 소중한 열정, 가장 소중한 사람, 가장 소중한 사랑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처럼 이렇게 소중한 것을 하느님께 봉헌해야 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봉헌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들어 알기는 하지만, 그래도 쉽게 놓을 수 없습니다.
그리 쉽다면 우리는 나약한 인간이 아닐 것이고, 아마도 그것이 소중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또 한 번 매달립니다.
“제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 바치고서 홀로 어찌하란 말씀입니까?
이것마저 없으면 저는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엎드려 통곡합니다.
“다른 모든 것을 내드릴 터이니 제 아들만 제게 남겨 주십시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하느님과 씨름한 뒤에야 비로소 애착에서 벗어나 평화 속에 하느님과 함께 걸을 수 있습니다.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요?
(서철 바오로 신부)
12월 29일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하느님의 계명은 도덕과 윤리의 인간들의 계명이 아닙니다. 구원의 새 계명이 나타났습니다.
(1요한2,3-11)
3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 하느님의 계명 안에 예수님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4 “나는 그분을 안다.”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 계명은 진리인 것이고 하느님의 계명은 예수님께서 진리라는 것이다.
앞 2절 2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죄인들의 속죄 제물로 내주신 예수님이시다.
(요한3,16)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 우리의 속죄 제물로 죽으신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이 생명(구원)의 진리인 것이고 계명인 것이다.
(요한14,6)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예수님께서 구원의 진리이심을 믿지 않는 것이 거짓말쟁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계명은 도덕과 윤리의 인간들의 계명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늘 조심해야한다.
(티토1,14) 14 유다인(사람)들의 신화, 그리고 진리를 저버리는 인간들의 계명에 정신을 팔지 않게 하십시오.
그리고 지킨다는 것, 행위를 말씀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말씀, 계명을 구원의 진리로 깨달아 마음 밖으로 흘리지 않고 마음 안에 간직하는 그 지킴인 것이다.
(야고1,25) 25 그러나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십자가)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물면,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
5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 말씀을 지키는 것, 간직한다는 것은 또한 믿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인 말씀, 곧 십자가의 대속 그 예수님의 길을 구원의 진리의 계명으로 지키면(믿고 전하면) 인간의 지각으로 알 수 없는 당신 아드님을 죄인들의 속죄 제물로 내주신 그 하느님의 사랑이 내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그 사랑을 믿는 그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은 ~
6 그분 안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 예수님께서 당신의 말(뜻)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뜻)만 전하셨다. 일만 하셨다. 우리 또한 우리의 말, 일이 아닌 하느님의 뜻인 예수님의 말씀만 진리로 믿고 말해야한다. 곧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구원의 진리로 전해서 이웃이 하늘의 대속, 그 진리의 용서를 깨닫고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 그것이 이웃 사랑이며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갈라5,14) 14 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계명입니다.
= 예수님처럼 내 생각과 뜻을 버리고(죽이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다른 이를 살리는 그 삶이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7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이 아니라, 여러분이 처음부터 지녀 온 옛 계명입니다. 이 옛 계명은 여러분이 들은 그 말씀입니다. 8ㄱ 그러면서도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도 또 여러분에게도 참된 사실입니다.
= 구약의 모든 계명이 새 계명이었다는 것이다. 아담이 하느님의 말씀을 선악의 계명으로 받은 것을 치우시고 새 계명을 주셨다는 것이다. 곧 아담이 뱀의 유혹으로 선악의 열매(계명)를 먹고, 스스로 지킨 그 열심히 만들어 입은 옷은 죄를 덮을 수가 없어 벗기시고(치우시고) 하느님께서 친히 당신의 열심히 가죽 옷을 만들어 입히시어 죄(수치)를 덮으신 그 하느님의 사랑인 어린양의 죽음이 새 계명인 것이다.
인간의 열심, 의로움, 그 계명이 아닌 하느님의 열심, 대속의 그 의로우심으로 얻는 구원, 그것이 새 계명인 것이다. 그렇게 새 계명은 옛적부터 있었던 것이고 그 새 계명을 오늘 다시 말씀하시는 것이다.
8ㄷ어둠이 지나가고 이미 참빛이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어둠의 계명을 대속하시고 생명의 계명, 그 빛이 오셨다는 것이다.
(요한1,4-5) 4 그분(말씀, 예수)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세상)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세상)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9 빛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자입니다.
= 구원의 빛이신 그리스도, 그분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얻는 용서는, 믿는 이는 누구나 다 얻는 용서다. 나와 너가 함께 받는 것이다. 그 진리를 믿는다면 형제를 미워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속의 죽음, 그 용서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워한다면, 뱀의 유혹인 선악의 법, 그 도덕과 윤리의 세상의 법, 그 어둠속에 있다는 것이다.
10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르고, 그에게는 걸림돌(어둠)이 없습니다.
=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형제에게 주는 사람은, 세상의 법이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1코린4,3-4참조) 그러나 하느님의 계명을 인간의 계명으로 지켜 버리면, 구원의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오히려 구원의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1고린1,23) 23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 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 그 모든 것을 깨달은 사람에게서는 가식(假飾)이 아닌 인간적 사랑과 진실된 기도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11 그러나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 예수님께서 그릇되다 하신 세상의 논리로, 세상으로 형제를 판단하고 미워한다면(요한16,8참조) 그 세상의 법, 어둠이 눈을 멀게 해 구원의 길을 잃게 된다. (그것이 제사와 윤리의 율법이다.)
구원이라는 신앙의 목적도 잊고, 세상과 율법으로 이리저리 끌려 다니게 된다는 것이다.
(마태6,23) 23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
= 그래서 구원의 그 하늘의 의로움을 깨닫는 신앙이 아닌, 인간의 뜻, 욕망을 위한 자기 의로움의 신앙에 열심을 부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 곳에는 용서, 구원이 없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로마10,2-3) 2 나는 그들에 관하여 증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위한 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깨달음에 바탕을 두지 않은 열성입니다. 3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알지 못한 채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힘을 쓰면서, 하느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하느님의 계약, 계명(할례)을 자신들의 복수(뜻)에 이용한, 그래서 하느님의 진노로 저주를 받았던 그 선조의 후예로 구원이 없는 죽음이 늘 두려웠던 시메온, 그가 새 계명이신 아기 예수를 그리스도(구원자)로 깨닫고 마음에 품어 구원의 희망으로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되었듯이 주님! 당신의 새 계명, 그 구원의 말씀에 저희를 의탁합니다. 어둠의 법에 묶여 살지 않게 받아주소서~ 아멘!!!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오늘의 묵상 (사제 정천 사도 요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시메온은,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꼭 만나게 될 것이라는 성령의 약속을 믿으며, 그때를 간절히 기다리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가게 된 시메온은 마리아의 품에 안긴 아기가 자신이 그토록 기다려 온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심을 알아봅니다.
그 귀중한 존재를 자신의 두 팔에 받아 안고, 눈을 마주치며, 성령께서 약속하신 위로와 구원의 때가 다가왔음을 온몸으로 깨닫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시메온은 ‘계시의 빛’이며 ‘이스라엘의 영광’으로 오신 분의 모습을 자기 눈에 직접 담을 수 있었던, 참으로 복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을 직접 뵐 기회가 주어진다면, 정말 단 한 번만이라도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의 약한 믿음이 더욱 굳건하여질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천 년 전 예수님을 목격한 이들 모두가 그분을 구세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음을 떠올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그토록 많은 표징을 일으키셨지만, 그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요한 12,37).
이는 눈으로 보는 것이 반드시 신앙과 곧바로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비록 육의 눈이 그분을 보지는 못하더라도, 이미 본 사람들의 증언으로 그분을 알게 되고 또 믿게 된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중요한 것은 결국 ‘신앙의 눈’이 아닐까요? 이천 년 전 예수님을 목격한 이들의 생생한 증언은 성경 말씀으로 남아, 우리가 영의 눈으로 그분을 바라볼 수 있게 하여 줍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이 말씀은 당대의 목격 증인들뿐만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바라보았음을 세상에 전하는 신앙 고백이 될 수 있습니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12월 29일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하느님 앞에 둘은 하나 다.
복음(루카2,22-35)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 구약에 산비둘기, 집비둘기는 양(羊)대신 바친 작은 제물이다.
(레위12,8) 8 그러나 양 한 마리를 바칠 힘이 없으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두 마리를 가져다가, 한 마리는 번제물로, 한 마리는 속죄 제물로 올려도 된다. 그리하여 사제가 그 여자를 위하여 속죄 예식을 거행하면, 그 여자는 정결하게 된다.’”
= 신약에서 루가는 두 마리를 한 쌍으로 표현했다. (둘을 하나로 바친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둘이 아니라 하나(짝)로 사람이듯이(창세1,27참조).....
인간이 만든 선(善)과 악(惡)의 그 둘은 사실은 하느님 앞에 하나(쌍)라는 것이다. 곧 선이 악을 품어 죽어 용서, 생명을 주는 ‘그 사랑, 하나’를 뜻한다. 아기를 대속(代贖)의 사랑, 그 하나로 바친 것이다.
참고로 외아들-‘모노게네스’로 ‘하나를 갖은, 하나로 갖은 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선악의 계명은 인간의 도리를 위한 지침이지, 신앙의 목적이 아니다. (티토1,14)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 하느님의 진노에서 위로 받기를, 곧 죄에서 풀려나기를 기다렸던 시메온이다.(창세49,5-7 참조) 그런 그와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약속하신)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 양 대신 작은 예물을 드리는 작은 아기(善)를 자신의 악(죄)을 품고 생명(용서)을 줄 사랑으로 본 것이다. 그 작은 아기를 큰 자, 구원자로 품은 것이다. 악인인 자신이 선과 하나가 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죄에서 풀리게 되고, 세상의 욕망에서도 자유하게 되어 이제 평화로이 죽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믿어지니, 그 모든 것을 약속하시고 베푸신 그 하느님께 감사의 찬미가 어찌 나오지 않겠는가... 성령께서 함께 하시며 이끄셨기 때문이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 만물을 창조하신 온 세상의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 아기(예수)는 사람의 뜻, 길인 그 둘(선악) 생각을 부수고 하느님의 뜻, 길인 하나(대속, 사랑)로 일으키기 위해, 곧 다시 살리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의 반대를 받을 수 밖에 없다.
하느님의 말씀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뜻(재물, 의, 명예)을 이루려는 그 헛된 욕망, 속셈을 드러내시어 부수시니 말이다. 물론 선(하늘)의 대속, 그 사랑 하나로 다시 살리시기 위한 하느님의 자비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 말씀이 칼(劍)이 되어 찔러 부수신다.
(히브4,12-16) 12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영혼)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13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헛된)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14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고 하늘의 용서, 기룩을 주는 그리스도 신앙이다.
15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16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은혜)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 필요할 때- 말씀이, 예수님이 어떨 때 필요할까? 내 뜻, 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아 실망했을 때?, 착하게 살려는 데 죄로 넘어졌을 때?, 자주 일어나는 시련, 고남으로 두렵고 좌절했을 때?, 그랬을 때 예수님께서 이루신 복음 말씀이 필요하다.
(로마 8,28) 28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喜怒哀樂)이 함께 작용하여 선(용서, 구원)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 선(구원)이란 선이신 하느님께서 악인 우리(나)를 너무 사랑하셔서 선이신 당신 아드님을 우리의 속죄(贖罪)제물로 내 주시어 악인 우리를 선(하늘의 존재)으로 재 창조, 새 창조하시어 영원한 빛의 나라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영원한 어둠, 두려운 무덤(地獄) 속에서 구출된다는 것이다. 다시는 비난도, 괴롭힘도, 두려움도, 속임, 실망이 없는 곳에서 살게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수고했다’ 안아 주시는 곳이다.
(묵시21,3-4) 3 그때에 나는 어좌에서 울려오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4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 하느님의 사랑, 그 하나로!
☨영원한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저희 모두에게도 늘 함께 하시며 보호자로 이끌고 계시니 감사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반대하는 그리스도를 구원의 진리로 품을 용기와 지혜를 주소서. 하느님의 위로의 품에 들게 하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성탄 팔일 축제 내 제5일 복음(루카2,22~35)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34~35)
시메온이 축복하는 대상을 '그들', 즉 요셉과 마리아로 밝히고 있다. 당시 시메온은 아기 예수님을 꽤 오랫동안 안고 있었으며, 깊은 관심을 나타내 보였기 때문에, 예수님께 대하여 축복하는 것이 보다 자연스러운 듯 하지만, 시메온은 자신이 감히 구세주 예수님을 축복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 부모들만을 축복했다고 본다.
이제 아기 예수님의 부모를 향해 시작된 시메온의 축복은 곧 마리아에게로 이어진다. 이것은 아마도 마리아가 요셉보다 더 깊은 영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거나, 예수님으로 인해 직접적인 고통을 받는 당사자가 마리아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요셉은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 즈음에 일찍 죽은 것으로 전해지며, 마리아는 그 이후까지 살아 예수님께 대한 온갖 비방과 더불어 십자가 처형까지 목격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많은 사람들'로 번역된 '폴론'(pollon; many)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향력의 지대함과 그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 이가 없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쓰러지게도 하고'로 번역된 '프토신'(ptosin; falling)의 기본형은 '프토시스'(ptosis)이며, 그 뜻은 '무너짐', '넘어짐'을 뜻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어지게 될 자들은 교만하여 꼿꼿이 서 있는 자들이다. 이들은 구세주 예수님께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비참하게 넘어질 것이다.
반면에 '일어나게도 하며'로 번역된 '아나스타신'(anastasin; rising)의 기본형 '아나스타시스'(anastasis)는 '일어서다'를 의미하는 동사 '아니스테미'(anistemi)의 명사형으로 '일어섬'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의 비참한 죄의 상태(예레17,9)로 인해 절망하여 넘어져 있던 자들은 대속의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 그 은총으로 말미암아 일어설 것이다.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루카 복음 2장 12절에서도 나오지만, 예수님 자신은 '표징'(sign)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표징이 되기 위해서 '정해지시는 분'으로 묘사된다.
'반대를 받는'으로 번역된 '안틸레고메논'(antilegomenon; which will be spoken against)는 '반대'를 뜻하는 '안티'(anti)와 '말하다'를 뜻하는 '레고'(lego)의 합성어로서 '반대하여 말하다', '적대적으로 말하다'는 의미이다.
특히 여기서는 수동태 현재 분사로 쓰여 '적대적인 말을 듣는', '비방을 받는' 이라는 뜻이며, 이 상태가 예수님께는 항상 현재적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항상 반대를 받으신 예수님의 공생활을 생각해볼 때, 이러한 표현은 과장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반대와 비방의 최고 절정은 인류 구속을 위한 성혈의 제단인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자 되심을 믿는 이들에게는 '구원'의 표징이었지만, 그를 반대하는 사람에게는 '멸망'의 표징인 것이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여기서 '칼'로 번역된 '롬파이아'(romphaia; a sword)는 전쟁 때 살상용으로 사용되는 '큰 칼', '긴 창'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여기서 비유적으로 영혼을 가득 채운 '큰 고통'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당신의 피'로 번역된 '수 ~아우테스'(sou ~autes; your own)는 고통을 당하게 될 대상을 강조하는 표현이며, 직역하면 '너 여자 자신의' 이다.
마리아의 영혼에 칼에 찔린 듯한 아픔이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루카 복음 2장 34절 후반절을 염두에 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생애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부하는 자들의 마음속 생각까지도 다 드러내 단죄하며, 하느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 의해 배척과 수난과 죽임을 당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아들의 그러한 모습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영혼을 뒤흔들 듯한 고통으로 가득하게 될 것이 예언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이 땅에서 수난은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세사의 섭리 안에서 이미 계획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여기서 '생각'으로 번역된 '디알로 기스모이'(dialogismoi; the thoughts)는 '마음속의 궁리', '뒤틀어진 생각'등을 의미하는 '디알로기스모스'(dialogismos)의 복수이다.
신약에서 이 단어는 대체로 부정적인 뜻으로 사용되었다(루카5,22; 6,8).
여기서도 이 단어를 사용해 장차 예수님께서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이 실제로는 어떤 마음을 품고 살아가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내실 것이 예언되고 있다(마태23,25~27; 마르7,20~23).
2025년 12월 29일 월요일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오늘 복음의 이야기가 성가정 축일인 어제 복음의 이집트 피난보다 시간 순서로는 앞서는 것으로 보입니다.
젊은 부부는 율법에 따라 아기가 태어난 지 40일이 지난 뒤 제물과 맏아들을 봉헌하고자 예루살렘의 성전을 찾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저 율법에 따라 봉헌한다는 사실을 넘어서는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일찍이 말라키 예언자는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3,1)라는 말로 구원자가 성전에 오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성전에서 부부는 한 노인을 만나는데 루카 복음사가가 그를 소개할 때 ‘성령’을 세 번이나 이야기할 만큼 성령으로 충만한 시메온입니다.
그는 내일 복음에서 보게 될 한나와 함께 구원자를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백성이 수 세기에 걸쳐 기다리던 구원자가 드디어 성전에 오시어 처음 당신 백성을 만나는 일종의 상견례라고도 하겠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동방 교회의 전통을 따라 이 이야기를 “만남의 축제”(14년 2월 2일 강론)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과 당신 백성의 만남, 젊은이들(마리아와 요셉)과 노인들(시메온과 한나)의 만남이 이루어지니까요.
아기 예수님을 안고 걸어가시는 성모님의 모습을 그려 봅시다.
성모님께서는 아기 예수님께서 당신 백성을 만나시도록 그분을 성전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께서 성모님보다 앞서가십니다.
노인 시메온이 아기를 팔에 안지만 사실 그를 이끄시는 분은 아기 예수님이십니다.
젊은 어머니 마리아와 나이 든 시메온을 이끄시는 분은 아기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그 아기가 우리도 이끌어 주시기를 청합시다.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오! 복(福)된 죄(罪)여!
복음(루카2,34-35)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 사람의 마음속 생각, 속셈이 드러나 쓰러졌다가 그리스도로 다시 일어나는 것, 하느님의 뜻, 계약, 계명, 곧 구원의 말씀이다. 율법의 이스라엘, 곧 하느님의 선택, 부르심 받은 이들에게.......
(로마8,28) 28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독서(1요한2,3-11)
3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 하느님의 계명 안에 그리스도가 들어있음이다. 하느님의 계명은 인간들의 계명과 다르다.(티토1,14 이사29,13참조) 인간들의 선악의 계명으로 하느님을 섬기면 하느님이 아니다. 사랑, 은혜, 진리의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4 “나는 그분을 안다.”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5ㄱ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 말씀을 선악의 두 법이 아닌 선(善)이 악(惡)을 대속(代贖)하시고 생명을 주는 그 하나로 그 진리를 깨달아 마음에 간직, 지키면~
5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요한3,16)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속죄제물)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6 그분 안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 아버지의 뜻,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곧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 살면서 내 뜻,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곧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 살면서 내 뜻, 육(肉)의 욕망을 버리는, 부인(否認)하는 삶이다.
7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이 아니라, 여러분이 처음부터 지녀 온 옛 계명입니다. 이 옛 계명은 여러분이 들은 그 *말씀입니다. 8 그러면서도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도 또 여러분에게도 참된 사실입니다. 어둠(구약, 옛계명, 법)이 지나가고 이미 참 빛(신약, 새계명, 십자가)이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옛 계명은 새 계명이었다는 것인데 모두 진리의 말씀이다. 곧 구약의 율법(제사와 윤리), 구약의 십계명에 머물면 죽음의 옛 계명이, 그 모든 것을 대속으로 이루신 신약의 십자가의 그리스도께로 오면 생명의 새 계명이다. 또한 성경의 모든 말씀을 선악의 도덕과 윤리로 보면 옛 계명인 것이고, 선악을 벗어난 진리로 보면 새 계명인 것이다.
(요한1,4) 4 그분(말씀, 예수)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9 빛(말씀, 예수, 진리)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법) 속에 있는 자입니다. 10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르고, 그에게는 걸림돌이 없습니다. 11 그러나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 옛 계명, 그 어둠의 계명에 눈이 멀어 선악의 눈으로 형제를 판단, 미워하지 말고 그 모든 것을 대속하신 피의 새 계약이신 십자가의 그리스도로, 그분의 용서로, 보는 것, 빛 속에 머무는 것이다.
인간적으로는 미움이 없어지지 않는다. 징글징글하게 없어지지 않는다. 그때 나의 부족함, 악한 고집, 악한 마음을 보고, 그런 나를 위해 대신 죽으신 십자가의 그리스도께 납작 엎드리게 된다.
그리고 새 계약으로 주신 구원자 그리스도를 내 속의 미움, 죄(罪)의 속죄(贖罪) 제물로 내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리게 된다. 그것이 신앙의 최종 목적지다. (이사43,7)
그렇게 내 죄, 미움을 통해 깨달은 결과, 진리라면 내 죄, 미움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사45,7) 7 나는 빛을 만드는 이요 어둠을 창조하는 이다. 나는 행복을 주는 이요 불행을 일으키는 이다. 나 주님이 이 모든 것을 이룬다.
(로마8,28) 28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로마5,20) 20 율법(옛 계명)이 들어와 범죄가 많아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 은총이신 그리스도의 성령님!
옛 계명으로 쓰러졌다 새 계명, 새 계약의 그리스도로 일어나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