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12일 금요일
[대림 제2주간 금요일] 먹보요 술꾼 (마태11,16-19)
제1독서<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이사48,17-19)
17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너의 구원자이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
18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19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화답송>시편1,1-2.3.4와 6(◎요한8,12) ◎ 주님, 당신을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이다.
○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
○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
복음<그들은 요한의 말도 사람의 아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마태11,16-19)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16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17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18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19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대림제2주간 금요일 제1독서(이사48,17-19)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18)
이사야서 48장 18절과 19절은 주님을 떠나 징계를 받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의 안타까운 심정이 토로된다.
하느님께서는 궁극적으로 당신 백성이 번성하고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명령과 규정을 주심으로서 옳은 길을 걷도록 인도하셨지만, 그들은 오히려 하느님의 명령 듣기를 싫어하였다.
본문의 서두에 나오는 '루'(lu)는 가정법을 이끄는 접속사로서 '~했더라면' 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에 대한 하느님의 안타까운 심경을 반영한다(민수20,3; 22,29; 여호7,7; 판관8,29).
새 성경은 이러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하여 '아~'로 시작하였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축복의 근원이신 하느님, 그들의 삶을 복되게 하시는 하느님의 명령(신명10,13)을 경청했더라면, 그들의 삶은 이러한 고통이 없었을 것이고, 평화롭고 복된 삶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으므로, 축복이 아닌 스스로가 자초한 고통스러운 징계를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는 풍성한 평화를 경험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그 심령과 삶에 놓인 무거운 짐을 대신 지고서(시편68,20) 자유를 누리며 살도록 이끄시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너의 평화'에 해당하는 '셸로메카'(shellomeka)의 원형 '샬롬'(shallom)은 단순히 전쟁이나 불화, 분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어떤 측면에서도 부족함이 없는 온전한 상태(well-being)를 나타낸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인생 최대의 축복으로 여긴 것이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이 평화를 강물에 비유한다.
이것은 생명을 공급하는 풍성한 소출을 맺게하는 물이 풍성한 강처럼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넘치는 삶, 풍족하고 풍성한 삶을 살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함으로 인해 얻어지는 축복은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린다는 것이다.
여기서 제시되는 '의로움'은 앞에 제시된 '평화'와 더불어 주님의 통치의 성격과 관련된다(이사32,17). 사실 의로움은 평화를 초래하는 원천이다.
여기서 '의로움'(정의)에 해당하는 '체다카'(tsedakah)는 하느님의 백성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올바른 삶의 태도, 의롭고 정직한 행위를 의미한다.
이것은 단지 법적으로 의로움을 구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의로움을 누릴 수 없는 약한 자들을 돌보며, 그들에게 자비와 연민을 베푸는 삶으로까지 확대된 표현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다 물결 같다는 표현은 그러한 삶이 끊임없이 계속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비유이다.
바다 물결은 그 흐름이 끊이지 않고, 한 파장이 다른 파장으로 연결되면서 계속된다.
하느님의 백성이 그의 명령을 겸손한 마음으로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삶을 산다면, 그들의 삶에서는 마치 바다 물결같이 의로운 행위, 자비로운 행위가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은 그와 그가 속한 공동체로 하여금 하느님의 자비와 연민을 힘입게 하며, 그야말로 '샬롬'(shallom), 즉 완전한 평화를 누리는 형통한 삶, 부족함이 없는 삶의 자리로 이끌어 세울 것이다.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19)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이란 표현은 주님의 명령을 듣고 순종하는 삶은 창세기 15장 5절과 22장 19절에 있는 아브라함이 받은 언약의 축복을 성취하는 첩경이 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러나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는 이와 정반대의 결과 즉 저주스러운 일이 이루어졌을 뿐이다.
즉 북부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서 멸망당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흩어졌으며, 남부 유다가 바빌로니아에 정복당하면서도 동일한 결과가 일어났던 것이다.
또한 하느님의 언약을 받은 다윗 왕가는 무너졌으며, 왕의 자손들 역시 포로로 끌려가고 말았다.
민족 자체가 멸절된 것은 아니었지만, 민족의 수효는 급감하고 말았다.
고대 세계에서는 자손이 번성하는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큰 축복으로 여겨졌었다.
이스라엘은 범죄함으로써 아브라함에게 언약된 번성의 약속을 누리지 못하고 불순종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쇠퇴와 멸망의 길을 걷고 만다.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본문은 완료 시제가 아닌 미완료 시제로 되어 있다.
이것은 이사야서 48장 18절과 19절 상반절이 완료 시제로 되어 있는 것과 다르다.
따라서 본문은 이스라엘 자손의 이름이 이미 끊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해서 주님의 계명과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그렇게 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하느님의 명칭 정도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 이름을 지닌 대상의 존재와 성품, 사명과 활동 등을 함축한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이름이 하느님 대전에서 끊어진다는 것은 그들에 대해 하느님께서 더 이상 어떤 기대도 하지 않으시며,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과, 사제들의 나라(탈출19,5.6)로 삼으시고 축복의 통로로 삼으신 거룩한 직책을 박탈하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이 하느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이같은 영예로운 이름, 그 안에 함축된 복된 직책과 임무들을 잃지 않았을 것이며 더 나아가 하느님의 축복을 누리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명령을 업신여김으로써 그 모든 축복에서 멀어지고, 심지어 바빌론에 의해 패망을 당하여 결국 그들이 지닌 거룩한 이름과 정체성까지 포기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다.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마태오 복음 10장의 파견 설교 이후, 11-12장에서는 메시아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부정적 반응과 함께 예수님과 적대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논쟁이 다루어집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그분의 활동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평가(11,2-6 참조)와 그에 대한 예수님의 긍정적 평가(11,7-15 참조)에 이어지는 부분으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의 부정적 반응을 비유적 표현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를 장터에서 놀이를 하는 아이들과 견주십니다.
여기서 “세대”는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적대자를 부정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1장 17절의 비유는 두 가지 상황을 떠오르게 합니다. 하나는 혼인 예식이고, 다른 하나는 장례 예식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보여 준 금욕주의적 삶은 그를 장례 놀이와 연결시킵니다.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반대자들은 세례자 요한의 설교에 대한 응답으로 회개하기보다 그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였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비금욕주의적 삶은 혼인 놀이로 확인됩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다.”
예수님의 반대편에서 적대자들은 죄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잔치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기보다 날 선 시선으로 예수님을 비판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을 거부한 반대자들이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이 시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입니다. 진심으로 회개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정진만 안젤로 신부)
[대림 제2주간 금요일]
감사가 병든 나를 변화, 구원으로 이끈다.
복음(마태11,15-19)
15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 ‘성령의 귀로 들어라’로 공부했다.
16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17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마르1,15)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속량의 때가 왔다는 기쁜 소식이다. 평화의 하늘나라가 왔다는 기쁜 소식이다. 그런데 기쁜 소식(복음)으로 기뻐할 줄 몰랐고, 자신의 뜻을 위해 열심히 지켰던 율법 신앙이 헛된 것이니 '버리고 돌아오라'고 해도 가슴을 칠 줄(否認) 모른다는 말씀이다, 성경을 인간의 지혜, 도덕과 윤리로 보면 절대 기뻐할 수도 가슴을 칠 수도 없다.
18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19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의 뜻을 위한 율법으로 살지(먹지) 않았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인 율법의 완성을 위해 죄인들과 함께 살았다는 말씀이다.
(마태9,12-13) 1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죄의 용서를 위한 제사가 아닌 하늘의 대속으로 주시는 용서, 자유, 생명, 그 자비의 말씀을 주라는 말씀이다. 곧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말씀, 지혜)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용서, 구원이 “다 이루어 졌다” 하신 일이다.
세리, 죄인들의 죄로 죽으시고 그 죄인들을 살리신 일이다. 십자가의 대속, 그 일이 옳은 일, 하느님의 정의. 공의인 것이다.
병든 이들을 의사가 고쳐주듯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해 그들의 죄로 죽으심, 곧 흙(땅)의 존재들이 어떻게 스스로 하늘의 존재가 되겠는가? 하늘이 내려 오셔서 들어와 한 몸이 되어 주셨듯, 그 일이 하느님의 지혜요 옳은 공의, 정의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필리1,10-11) 10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고, 1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 사람의 착한 행실 그 의로움과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얻는 의로움을 분별해야 한다. 사람의 의로움은 땅의 한시적인 것이나,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거저 받는 의로움은 하늘의 생명이다.
착하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더 착하게 열심히 살아야 한다. 아니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죄의 용서를 받았음을 믿는 이들은. 하느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착한 삶을 살게 된다. 그것이 어울리는 합당한 삶이다. ( 가끔. 아니 자주 넘어지기는 하지만) 그럴 때 마다(어제 주셨던) ‘내 손을 잡고~’ 하느님을 기억해야 한다.
(이사41,13-14) 13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14 두려워하지 마라,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 너의 구원자이다.
= 그런데 오른 손을 붙잡고 계신단다. 사람의 의로움과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 그 의로움을 분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 전가 받은 의로움을 생명의 진리로 붙들고 있는 옳은, 오른 손이다.
그리스도의 대속, 그 하느님의 용서는 오늘도 내일도 영원한 것이다.(히브10장 참조) 그러니 어찌 감사가 나오지 않겠는가? 하느님께 영광 드림이 어찌 나오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 감사기 병든 나를 치유로, 변화로, 구원으로 이끌고 간다.
(로마7,18-25. 8,1-3) 18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19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20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21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22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23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24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나 자신이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으로는 죄의 법을 섬깁니다.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2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3 율법이 육으로 말미암아 나약해져 이룰 수 없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루셨습니다. 곧 당신의 친 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을 지닌 속죄 제물로 보내시어 그 육 안에서 죄를 처단하셨습니다.
=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은 세상의 육적인 내가 죽고(否認) 머리(주인)이신 그분의 지체로 그분을 붙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오로 자신에게 이롭던 것을 해로운 쓰레기로~
(필리3,6-9) 6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고,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7 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8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 저희 죄인을 위해 간구해 주소서. 지혜가 이루신 옳은 일을 위해 율법의 나를 부수고 율법을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게 하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대림 제2주간 금요일 (마태11,16-19)
진정 하느님의 수행자는 선인善人입니다. 진인眞人입니다. 현인賢人입니다. 착하고 참되고 슬기로운 하느님의 사람이 수행자 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믿는 이들의 유일한 삶의 목표입니다.
수행자의 본연의 자세는 무엇일까요?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단지 귀로 듣는 것 뿐 아니라 수용受容하고 이해理解하여 실행實行함으로 말씀과 동화同化되어야 비로소 진짜 수행자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전 말씀입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11,15).
들어야 소통입니다. 부단히 들어야 자신을 압니다. 듣지 않아 듣지 못해 불통입니다. 소통은 생명이요 불통은 죽음입니다. 불통에서 파생되는 온갖 문제들입니다. 분도 규칙도 ‘아들아, 들어라.’로 시작됩니다. 잘 듣기 위한 침묵이요 잘 들어야 순종이요 겸손입니다.
진정 '마음의 귀'로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는 이가 진인이요 선인이요 현인입니다. 막연한 수행자가 아니라 ‘말씀의 수행자’가 진정한 수행자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예수님이말로 참 수행자의 모델입니다. 오늘 복음은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세대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는다.”
듣지 못하는, 반응할 모르고 공감할 줄 모르는 회개를 요하는 불통의 세대를 뜻합니다. 무감각, 무의욕, 무의미의 삶의 늪에 빠져있는 사람들입니다. 제대로 볼 줄도 생각할 줄도 모르는, 참으로 무뎌지고 굳어진 생각이 없는 사람, 관념이 없는 사람, 주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요한이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단정하고, 예수님이 먹고 마시자.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죄인의 친구다.’ 하며 일방적으로 매도합니다. 들을 수 있는 귀는 물론 볼 수 있는 눈도 없습니다. 끊임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때 누구나의 가능성입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물론 무수한 성인들의 삶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참 수행자의 삶이 바로 지혜로운 삶임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주님은 이사야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그 안타까움을 토로하시며 진정 당신의 계명을 듣고 실행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꼭 오늘의 우리 세대에 주는 엄중한 예언 말씀 같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스승이자 인도자이신 주님을 잊었기에 불의 불화가 만연된 정의와 평화平和가 없는 세상입니다. 혼인율, 출산율의 저하와 이혼율 증가로 후손들이 끊어질 것 같은 예감도 듭니다.
어제 어느 노자매의 ‘오늘날 성당에는 젊은이도 아이들도 없고 온통 노인들뿐’이라는 탄식어린 말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정말 이렇게 가다가는 우리들의 이름도, 하느님의 이름과 말씀도 끊어질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도 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 수행의 삶을 축복하시어 우리의 평화가 강물처럼, 우리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리게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여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시편1,20). 아멘.
2025년 12월 12일 금요일
[대림 제2주간 금요일]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예수님께서는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마태 11,16) 기쁘게 놀 줄 모르고 늘 불평하는 아이들과 같은 당신 세대를 꾸짖으십니다.
세례자 요한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모든 유다의 지도자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위한 회개를 요구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열린 마음으로 들었지만, 권력과 풍요를 누리는 이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말씀에 열려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들으려고 하지 않는 이보다 더 귀먹은 이는 없고, 보려고 하지 않는 이보다 더 눈먼 이는 없습니다.
회개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은 회개로 초대하는 이들을 비난함으로써 자기를 옹호합니다.
그들이 거부하는 것은 말씀 자체가 아니라 말씀의 전달자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거부하고자 그를 ‘마귀 들린 자’라고(11,18 참조) 부르고, 예수님을 거부하고자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11,19)라고 일종의 인신공격을 하면서 핵심인 하느님 말씀을 피하는 것이지요.
말씀을 전하는 이들의 말에 불만을 가지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도 현실에서 만나는 사람들한테 불만의 이유나 핑곗거리를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과 그분의 나라가 이미 가까이 와 있다고 믿는다면, 오늘 독서의 이사야서가 말하는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48,17)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2025년 12월 12일 [대림 제2주간 금요일]
복음(마태11,16-19)
예수님께서 16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 신앙생활을 자신들의 뜻, 유익을 위해 거래하는 장터의 치열한, 고난의 삶에 비유하신 것이다.
17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기쁜 소식에 기뻐하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죽음의 제사에 회개하지 않았다.)
= 고난의 삶에서 해방, 구해줄 그 기쁜 소식, 복음을 주었는데 기뻐하지 않았고, 그 기쁨을 위한 회개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루카2,8-12) 8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 (고난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9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10 그러자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11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12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구유(짐승의 먹이통)에 누워있는 아기가 구원자의 표징이다. 곧 죄인(짐승)들의 양식인 생명의 말씀으로 오신 구원자 주 예수님이시다.
(요한1,29) 29 이튿날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 세례자 요한은 율법으로는 죄를 없앨 수 없음을 알고, 예수님을 죄에서 구원하실 기쁜 소식으로 전한 것이다. 곧 죄를 대속하시고 주시는 하늘의 생명, 구원의 십자가의 복음, 말씀이다. (로마3,20-25) 그래서 회개하라고 선포했다.(마태3,1-2)
사제☞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모든 답은 그곳에 있습니다. 십자가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모든 답이 담겨져 있는 곳입니다.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영광에 이르게 하는 답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18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 요한은 육의 명예, 만족을 위한 유대의 율법의 신앙을 살지 않았던 것이다.
19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 죄인들과 먹고, 마셔, 그들과 한 몸이 되기 위해오신 주님이시다. 곧 그 주님이 하느님의 지혜, 말씀, 계명, 구원의 힘이다.(1코린1,24)
(잠언3,18) 18 지혜는 붙잡는 이에게 생명의 나무 그것을 붙드는 이들은 행복하다.
= 십자 나무를 생명 나무로 붙드는 이는 복이라는 것이다.
(요한15,1-2) 1 “나는 참포도(생명)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 다 쳐내시고(아이로) 하느님께서 잘라 버리신다는 말씀이 아니다. 열매를 맺도록 해(빛)를 향해 자리를 옮겨주는, 들어 올려줌(아리오)을 뜻한다. 곧 육의 편안한 자리에서 영의 유익한 하늘의 생명 열매를 맺도록 영의 자리로 옮겨주시는 농부의 인도하심이다.
그 농부(하느님)의 옮겨 주시는 수고, 열심은 우리 육에게는 불편한(고난) 삶이 된다. 그러나 하느님의 이끄심, 인도하심을 받는 상속자, 곧 그리스도의 특권이기도 하다.
(로마8,17-18) 17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18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필리1,29-30) 29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30 전에 나에게서 보았고 지금도 나에 대하여 듣는 것과 똑같은 투쟁을 여러분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48,17) 17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너의 구원자이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
= 우리가 가야 할, 영의 유익한 진리의 길로 인도하심이다.
(요한3,14)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십자가에) *들어 올려 져야 한다.
(요한15,3-4) 3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복음)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4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 열매? - 하늘의 지혜, 생명, 의, 진리, 평화, 상속자 등...
(요한15,5)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야고1,18) 18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복음)으로 우리를 낳으시어, 우리가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이를테면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 아버지!
아버지(농부)의 지혜, 열심, 열정으로 들어 올려 지는 그 고난의 특권을 그리스도 안에서 잘 지켜낼 수 있도록 힘과 지혜, 용기를 주소서. 성령님과 구원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