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10일 수요일
[대림 제2주간 수요일] 내 멍에를 메고 (마태11,28-30)
제1독서<전능하신 주님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신다.>(이사40,25-31)
25 “너희는 나를 누구와 비교하겠느냐? 나를 누구와 같다고 하겠느냐?” 거룩하신 분께서 말씀하신다.
26 너희는 눈을 높이 들고 보아라. 누가 저 별들을 창조하였느냐? 그 군대를 수대로 다 불러내시고 그들 모두의 이름을 부르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능력이 크시고 권능이 막강하시어 하나도 빠지는 일이 없다.
27 야곱아, 네가 어찌 이런 말을 하느냐?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 이렇게 이야기하느냐? “나의 길은 주님께 숨겨져 있고 나의 권리는 나의 하느님께서 못 보신 채 없어져 버린다.”
28 너는 알지 않느냐? 너는 듣지 않았느냐? 주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시고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다.
29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
30 젊은이들도 피곤하여 지치고 청년들도 비틀거리기 마련이지만
31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
<화답송>시편103,1-2.3-4.8과10(◎1ㄱ) ◎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
○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없애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의 관을 씌우시는 분. ◎
○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 우리를 죄대로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갚지 않으시네. ◎
복음<고생하는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11,28-30)
예수님께서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대림 제2주간 수요일 제1독서(이사40,25~31)
"너희는 나를 누구와 비교하겠느냐? 나를 누구와 같다고 하겠느냐? (25) 너희는 눈을 높이 들고 보아라. 누가 저 별들을 창조하였느냐? (26) 야곱아, 네가 어찌 이런 말을 하느냐?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 이렇게 이야기 하느냐?"나의 길은 주님께 숨겨져 있고, 나의 권리는 나의 하느님께서 못 보신 채 없어져 버린다." (27)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 (31)
이스라엘은 지금 바빌론에 포로가 되어 있으며, 더 이상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민족의 형태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불신과 의심과 회의는 자신의 비극적인 현실적 상황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음을 보는데 근거한다.
이교 강대국은 여전히 굳게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이스라엘인들은 아직도 정치적, 군사적인 면에서 전적으로 무능한 상태이다. 예루살렘은 페허 상태이다. 정말로 인간(육체)은 '풀'이다(이사40,6~7).
제국의 장악하는 힘이 약해지거나 혹은 혁명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이스라엘의 힘이 강해진다는 아무런 희망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라고도 불리는 불신의 자리에 빠져 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에게 확신을 주시기를 원한다.
즉 그들이 아는 주변 강대국들과 하느님을 비교하려는 그들의 계획에 귀기울여 주시기를 바란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당신 계획을 그들 자신의 명세서에 맞추어 주시기를 바란다.
'야곱아, 네가 어찌 이런 말을 하느냐?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 이렇게 이야기 하느냐? "나의 길은 주님께 숨겨져 있고, 나의 권리는 나의 하느님께서 못 보신 채 없어져 버린다." (27)
그래서 오늘 독서는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영원한 계획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태도를 공격하면서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그들 자신의 일시적 경험을 통해 하느님을 과소 평가하고 또 판단했다.
하느님을 판단하려면, 차라리 별의 시간이나 공간을 통하여 판단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차원이다.
별들을 공간 안에 두는데 걸리는 시간, 별들이 이동하고 존재하는데 요구되는 거리를 인간이 어떻게 가늠할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차원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와 비교하겠느냐? 나를 누구와 같다고 하겠느냐? 너희는 눈을 높이 들고 보아라.누가 저 별들을 창조하였느냐?
'그 군대를 수대로 다 불러내시고 그들 모두의 이름을 부르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능력이 크시고, 권능이 막강하시어 하나도 빠지는 일이 없다.'(25~26)
인간이 풀과 들의 꽃처럼 잠정적이거나 일시적이며, 연약하고 무력한 것이라는 불평과 원망에 맞서서 포커스를 하느님께로 맞춘다.
주님은 긴 안목을 가지신 하느님이시다.
그 표현이 '주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28)이다.
그분의 계획은 순간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다.
'땅끝까지 창조하시는 분'이란, 그분의 창조적 활동이 특별히 정해진 장소에 한정되지 않고 원대한 거리의 땅 전체를 포함한다는 말이다.
이스라엘은 이제 하느님의 계획이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바빌론에도 해당됨을 배우고 있다.
이스라엘의 시간 감각은 당장의 만족만을 요구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긴 시간을 위하여 준비하셨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시고,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다.'(28)
그분은 수 십년, 수 세기, 심지어는 수천 년 동안 자신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신다.
이제 논쟁은 이사야서 40장 6~7절에로 돌아간다.
거기서 이스라엘의 인간성이 '시드는 풀'과 '지는 꽃'으로 묘사되는데,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제공하신다.
그러한 연약함과 무능함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힘)과 기력(힘)을 제공하신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 (29)
바야흐로 최선의 상태에 있는 사람일지라도(젊은이들과 청년들) 피곤하여 지치고 비틀거릴 수 있는 인간적 상황 가운데서(30), 하나의 특별한 무리가 '보다 새롭고 위대한 활력'을 가지고 달려 나간다.
이들은 '주님께 바라는 이들'(주님을 앙망하는 자들)이다.
여기서 '바라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와'(qawa)는 '기다리다'(wait for) 혹은 '바라다'(hope)를 의미한다.
여기서는 두 가지 개념이 중첩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기다리는 희망'혹은 '희망에 찬 기다림'을 가리킨다.
마치 해바라기가 태앙만을 바라보듯이 늪에 빠져서도 눈과 코와 입을 하느님께로만 두는 것을 말한다.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 (31)
높이 나는 독수리는 자신의 강한 날개 때문에 높이 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날개를 받처 주는 기류 때문에 떠 있는 것이다.
'주님께 바라는 이들'(주님을 앙망하는 자들)이란, 하느님의 때에 하느님의 방법으로 하느님의 영(성령)에 의해서 들려져서 높이 날 수 있도록 준비된 사람을 말한다.
아무런 희망의 끈이 보이지 않는, 연약함과 무기력의 인간 한계를 체험하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영원하신 하느님과 그분의 계획을 끝까지 '기다리고', '희망'(바람)하는 태도가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그러한 포기하지 않는 믿음의 태도는 고통의 극한적이고 절망적인 순간을 뛰어 넘어서 위로 올라 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고, 지치지도 피곤하지도 않으며, 게속 전진하게 한다.
하느님의 시간은 우리 인간의 시간이 아니다.
하느님의 시간과 하느님의 방법을 기다리고 희망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을 새롭게 할 것이고, 달려도 지치지 않을 것이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기도공동체 698번 '주님 손잡고 일어서세요'가 말씀을 사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여러 가지로 힘듦을 체험하는 분들에게 오늘 말씀이 도움이 되길 바란다.
[대림 제2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마태오 복음 11-12장은 메시아 예수님에 대한 부정적 반응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각 장의 마무리(11,25-30; 12,46-50 참조)는 긍정적 분위기가 만들어지면서 13장 1-8절에서 소개되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준비합니다.
오늘 복음은 11장의 마지막 부분으로, 앞선 25-27절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11장 25-30절은 같은 문학적 형식을 가진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는 않지만, 같은 주제(하늘나라의 역설적 가치,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 백성이 되는 특권)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시선은 잠재적 제자들, 곧 아직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향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초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그들이 짊어지고 있는 ‘무거운 짐’은 사람들의 행위를 지나치게 규제하려는 율법 학자들의 요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23,4 참조). 예수님께서는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하는 이들을 초대하시며 그들에게 ‘안식’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안식을 누리려면 먼저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5,5; 21,5 참조).
율법 학자들이 토라(율법)의 멍에로 사람들을 얽매고 구속하였다면, 예수님의 멍에는 관계를 새롭게 만들고, 그 관계는 배움으로 깊어집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안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의 초대는 모두에게 열려 있지만, 그 초대에 모든 사람이 응답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면, 무엇이 선택과 결정을 주저하게 하는지요?
(정진만 안젤로 신부)
[대림 제2주간 수요일]
안식은 인간의 죄의 뿌리가 해결 됐을 때 비로서 얻는다.
복음(마태11,28-30)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 무거운 짐 같은 제사(祭祀)와 윤리(倫理), 그 율법의 사람의 의(義)로 얻는 안식(安息)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고생하며- 세상의 힘, 돈, 명예, 건강을 지키려 애쓰지만, 그것들로 얻는 안식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쉼, 안식은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주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십자가)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 우리의 모든 죄(罪)를 넘겨 받으신 예수님께서 저주의 십자가에서 대신 못 박혀 죽으셨고, 그 흘리신 피로 모든 죄가 깨끗이 씻겨 거저 의롭고 거룩하게 되어 흙인, 죄인(罪人)인 우리가 하늘의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믿었을 때, 안식(安息)이다.
흙, 그 없음이 더러운 양심의 죄가 대속(代贖)의 십자가(十字架)로 해결되어 얻는 쉼, 안식(安息)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멍에,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당신의 제자라 하신 것이다.
(루가9,23)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 무거운 짐 같은 신앙, 고생(苦生)인 세상의 것으로 안식을 누리려 했던, 그 자신을 버리고 참 안식(安息)을 주는 ‘그리스도의 멍에,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이다.
(루가14,27) 27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내 죄(罪)로 십자가(十字架)에서 죽으신, 흘리신 피,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 십자가로, 곧 구원의 새 계약으로 지고 따르는 것, 그리스도인이며 그분의 제자다.
(히브8,7-10) 7 첫째 계약(율법)에 결함이 없었다면, 다른 계약을 찾을 까닭이 없었을 것입니다. 8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결함을 꾸짖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으리라. 9 그것은 내가 그 조상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이끌고 나올 때에 그들과 맺었던 계약과는 다르다. 그들이 내 계약을 지키지 않아 나도 그들을 돌보지 않았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10 그 시대(옛 계약)가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새 계약)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 구약(舊約 율법, 옛 계약)을 신약(新約 십자가, 새 계약)으로 결론 짖지 않으면 결함, 곧 ‘죽음의 법(法’)일 뿐이다.
(루가22,20) 20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미사 때>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제사 제물이 아닌 그 제사를 “다 이루었다” 하신 새 계약의 말씀으로 먹는 것이 자유(自由), 안식(安息)이다. 곧 내 뜻(소원)을 이루기 위해, 내 의(義)를 쌓기 위해 ‘제사(祭祀) 제물(祭物)인 살과 피’로 먹는다면, 피의 새 계약이 주시는 하늘의 용서, 자유, 평화, 쉼, 안식은 얻지 못한다. 모두 ‘고생하는 무거움 짐’일 뿐이다.
(창세2,2) 2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 쉼, 안식, 하느님께서 창조를 엿새 동안 하셨다. 그런데 이렛 날에 ‘다 이루었다’ 하신다. 왜? 첫날부터 엿새 날 까지 하신 모든 창조(創造) 안에 구원의 뜻, 의미를 깨닫게 되면 쉼, 안식이라는 것이다.
(갈라6,15) 5 사실 할례(세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2코린5,17) 17 누구든지 그리스도(십자가, 피의 새 계약)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사람)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저희들 마음 안에 충만 하소서. 새로운 피조물(사람)로 새 창조하신 그리스도의 대속, 그 새 계약의 말씀 안에 살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대림 제2주간 수요일 복음(마태11,28~30)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28~30)
'고생하고'로 번역된 '코피온테스'(kopiontes)는 '육체적으로 피곤하고 지치다', '감정적으로 용기를 잃고 낙담하다'는 뜻을 가진 '코피아오'(kopiao)의 현재분사 2인칭 복수 호격이다.
희랍어에 있어서 분사형이 진행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것은 한 번 낙담하거나 지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계속 지치고 낙담 중에 있는 사람들아' 라는 뜻이다.
그리고 '짐을 진 너희는'으로 번역된 '페포르티스메노이'(pephortismenoi)는 '남에게 어떤 짐을 지우다'라는 뜻의 '포르티조'(photizo)의 현재 완료 수동 분사 2인칭 복수 호격이다.
그러니까 이들은 '누군가에 의해 무거운 짐이 지워진 자들'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지워진 짐은 무엇인가?
그 짐은 일차적으로 바리사인들과 율법학자들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요구한 무거운 율법적 관행들(마태23,4)이며, 더 나아가 '마귀들의 꾐에 넘어가 지은 죄의 짐'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란, 당시 로마의 압제 속에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치고 낙담한 사람들이며, 당시 종교적 관행이 요구한 율법의 짐과 마귀들의 꾐에 넘어가 지은 죄의 짐 사이에서 눌려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한편,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에서 '안식을 주겠다'에 해당하는 '아나파우소'(anapauso)는 '쉬게 하다','영적인 휴식을 주다', '안식하다'라는 뜻을 가진 '아나파우오'(anapauo)에서 유래했다.
특히 '아나파우오'에서 유래한 명사 '아나파우신'(anapausin)은 '쉼'이라는 뜻인데, '안식'과 동의어이다(히브리서3~4장).
그리고 '내가'에 해당하는 '카고'(kago)는 '카이'(kai; and)와 1인칭 대명사인 '에고'(ego)의 복합어로서, '그러면 내가'라는 뜻이다.
본문에서 인칭대명사를 사용한 것은 동작의 주체를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원어의 뉘앙스를 살리면,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오는 지치고 피곤한 죄인들에게 '쉼'을 주시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쉼'(안식)은 인간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인데, 현재적인 '쉼'도 의미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안식'을 의미한다(히브3,18~4,11; 묵시14,13).
한편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마태11,29)에서 '온유'로 번역된 '프라위스'(prays; gentle meek)은 '친절하고 너그러운 태도'를 가리킨다(마태5,5).
그리고 '겸손'으로 번역된 '타페이노스'(tapeinos; humble; lowly)는 높아짐과 반대인 '낮아짐'(야고1,10), 심지어 지위와 신분을 낮춘 '비천함' (2코린7,6), 혹은 자신을 일부러 낮추는 '겸허','겸비'(2코린10,1)를 나타낸다.
이것을 종합하여 반영하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오는 사람들을 향하여 친절하고 너그러운 마음가짐과 일부러 자신을 낮추는 겸허한 자세를 가졌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지만 고난받는 인자(人子)의 모습을 취하셨고 (이사42,2.3; 53,1.2), 모든 권세를 받으신 만왕의 왕이셨으나 동시에 종이 되어 오셨으며, 높은 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종으로서의 삶을 사셨다.
그리고 당신 제자들에게도 그런 삶을 요구하셨다(마르10,43.44).
예수님께서는 낮고 비천한 자리에서 지치고 피곤한 자들에게 '눈높이 교육'을 하기위해 자신을 낮추셨으며,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취하시고 비천한 자리로 내려오셨던 것이다.
'진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30)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gar; for)로 시작되는 본문은 '주님의 멍에를 메고 그에게 배우면 왜 마음에 안식(쉼)을 얻는지'에 대한 이유를 밝혀 주는 이유 부사절이다.
그 이유는 주님의 멍에가 편하고 그의 짐은 가볍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본문은 '내 멍에는 편하고'의 전반부와 '내 짐은 가볍다'의 후반부가 동의적 평행 대구로 나열된 형태인데, 둘은 본질적으로 같은 뜻이다.
여기서 '멍에'로 번역된 '쥐고스'(zygos; yoke)는 가축이 짐수레를 효과적으로 끌 수 있도록 목에 씌우는 것을 가리키며, '짐'에 해당하는 '포르티온'(phortion)은 주로 배에 싣는 무거운 짐(burden)을 가리키는데(사도27,10), 여기서는 둘 다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이 '짐'은 율법학자들을 비롯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백성들에게 지운 무거운 종교, 의식적 행위들을 가리킨다(마태23,4; 루카11,46).
또한 '멍에' 역시 유대주의자들이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까지 강요한 무거운 율법적 행위들을 가리킨다(사도15,10).
반면에 주님의 멍에와 짐은 유대주의자들이 구원의 방도로 지키고 가르쳐 온 613가지의 교훈 및 규칙과는 다르게, 주님 자신의 가르침의 핵심인 '사랑의 계명'을 비유하는 표현이다.
2025년 12월 10일 수요일
[대림 제2주간 수요일]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이는 모든 사람을 향한 보편적 초대이지만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이라는 조건이 있습니다.
이어지는 다른 초대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11,29)입니다.
이는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자신의 마음에 대해 말씀하시는 유일한 구절입니다.
온유와 겸손은 그분께서 하시는 모든 일과 말씀을 설명하는 내적 원리입니다.
온유는 외적 유순함과 소극성, 무른 성품과는 다르며, 겸손도 자기 비하가 아니라 남을 위하여 자신을 내놓고 남을 돌보느라 자신을 잊어버리는 데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온유와 겸손은 그분께 배워야 할 내용일 뿐 아니라 그 동기로 드러납니다.
곧 온유하고 겸손하시니 그분께 배워야 한다는 것이지요.
“내 멍에”(11,29)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멍에만이 아니고 그분께서 지고 가시는 멍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세상의 멍에로부터 우리를 지켜 줄 것입니다. 그분의 짐은 세상의 짐보다 가볍습니다.
“세상 주인들의 짐은 종들의 힘을 점점 더 빠지게 하지만, 그리스도의 짐은 그 짐을 진 이들을 오히려 도와줍니다.
우리가 은총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지고 가기 때문입니다”(『그리스 교부 총서』(Patrologia Graeca), 56, 780).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대림 제2주간 수요일]
그리스도 예수님의 멍에(십자가)
복음(마태11,28-30)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 율법의 삶으로 신앙이 고생하는 무거운 짐이 되었기에 하신 말씀이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 온유(溫柔 프라우스- 풀어주다), 그런데 그 고난(苦難)의 멍에를 메고?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 육(肉)의 안식이 아니다. 하느님의 뜻에 죽기까지 순명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멍에(십자가)의 온유, 겸손으로 우리가 얻는 영(靈)의 안식(安息)이다. 곧 마음을 바꾸어주는 안식이라는 말씀이다.(요한20,19-20)
예수님의 겸손~
(마태21,5) 5 “딸 시온에게 말하여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암나귀를, 짐바리 짐승의 새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 우리의 임금, 왕께서 보잘것없는 짐바리 짐승의 어린나귀를 타고 오시는 겸손(謙遜)이다. 곧 건장한 청년 예수님의 발이 땅에 닿아 끌려오는 모습, 겸손이다. 유대인들이 원하는 육(肉)의 부귀, 안식, 평안, 목숨, 영광을 위한 메시아가 아님을 보여주심이다.
메시아는 죄인(罪人)들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로 저주(咀呪)의 십자가(十字架)에 대신 죽으러 오신 분이시다. 그 길이 생명, 구원(안식)의 진리다.
(요한14,6)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8,31-32) 31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32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 진리는 성령이시다.(1요한5,6)
☀책(冊) ‘황금률’ 중에서~
<예수님은 동족들이 율법과 죄에 짓눌려 신음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옳게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너무도 마음 아파 하시며 복음을 듣고 깨달아서 안식을 얻기를 원하신다.
고생하고 무거운 짐진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고자 십자가 희생 제물(아벨의 제물)이 되시어 모든 인간의 죄를 없애시고, 그리스도인 안에 성령을 넣어 주시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아듣게 해 주셨지만 그리스도의 본 뜻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유대인들이야 아직도 하느님의 은총을 거부하고, 고집스럽게 율법을 신앙하고 고수함으로서 무거운 짐을 지고 하느님을 섬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유대인들의 율법주의 신앙을 흉내 내는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 제물을 헛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리사이 율법 교사들을 꾸짖으며 “모든 예언자들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할 것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쇄를 치워 버리고,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루카11,52) 라고 하신다. 얼마나 가슴 아픈 말씀인가?
예수님이 율법 교사들을 ‘불행한 자’들이라고 하시는데 이는 예수님시대에 유대교 율법 교사들에게만 한 말씀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의 율법 교사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하느님과 하늘나라에 대한 신비를 알도록 허락된 사람은 ‘예수님이 신비를 알도록 가르쳐준 사람 (너울이 벗겨진 사람), 즉 신약의 때에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다.(마태13,10-17)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는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고 하신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께서 꾸짖는 율법학자는 이 시대에 성경을, 너울이 덮인 채 율법주의, 문자적 말씀으로 가르치는 이들을 말한다. 자기들도 하늘나라의 신비를 깨닫지 못하고 신들 마저 깨닫지 못하도록 막아선 자들을 질타하시는데 정작 본인들은 알지 못하고 있다.>
사제☞ <아침, 저녁기도, 주일 대축일 미사참례, 고해성사 등은 귀찮고 무거운 짐이 아니라 하느님을 잊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다. 사람은 본시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으면 그 즉시 세상사에 영혼을 빼앗긴다. 하느님을 잊으면 영혼을 잃어버린다. 영혼을 잃어 버리면 인생은 허무다.>
= 그러나 아쉽다. 가장 중요한 말씀이 빠져있다. “성경, 말씀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아다.”(성 예로니모) 곧 말씀 안에 머물며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예수님의 멍에(십자가의 복음)도, 하느님도 알 수 없고, 믿을 수도 없다. 그래서 하느님의 구원의 힘, 지혜, 진리이신 그리스도, 그 분을 통한 영원한 안식, 영혼 구원도 받지 못한다.
다른 사제☞ <이 땅에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소개하시며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표현하시니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고생하고 방황하는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 안식을 주시긴 하시는데, ‘당신의 멍에를 메는 사람’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편안한 안식을 주시겠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복된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 한번 보십시오. 그 큰 고통에다, 그 숱한 짐을 지고 힘겹게 하루하루를 걸어가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 특히 죽음과 내세에 대한 공포로 더욱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분께서 친히 우리 짐을 가볍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모두가 외면할지라도 나만은 너를 외면하지 않겠다. 나만은 너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고 언약하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겪고 있는 여러 가지 고통, 지고 가는 많은 짐들을 순식간에 없애 주시겠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나눠지겠다고 하십니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우리와 함께 나란히 걸어가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결국, 고통 중에 가장 큰 고통인 마음의 고통, 정신적인 고통을 없애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거기다 고통의 끝판왕인 죽음의 고통을 덜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언제나 고통과 십자가를 이고, 지고, 손에 들고,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오늘, 우리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을 완전히 없애 주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다만 주님께서는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 곁에 늘 함께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에 못이겨 신음할 때, 우리 옆에서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더 이상 고통도 눈물도 없는 당신의 나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복된 그날까지 매일 고통을 기쁘게 인내하면서 살아 내야겠습니다.>
(로마8,17-18) 17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18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아버지!
아버지의 뜻인 그리스도의 멍에로 영원한 안식,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율법의 너울을 벗고 말씀 안에서 진리를 깨닫게 하소서. 진리의 성령님과 그리스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