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24일 월요일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과부의 렙톤 두 닢 (루카21,1-4)
제1독서<다니엘, 하난야, 미사엘, 아자르야만 한 사람이 없었다.>(다니1,1-6.8-20)
1 유다 임금 여호야킴의 통치 제삼년에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쳐들어와서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
2 주님께서는 유다 임금 여호야킴과 하느님의 집 기물 가운데 일부를 그의 손에 넘기셨다. 네부카드네자르는 그들을 신아르 땅, 자기 신의 집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기물들은 자기 신의 보물 창고에 넣었다.
3 그러고 나서 임금은 내시장 아스프나즈에게 분부하여,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왕족과 귀족 몇 사람을 데려오게 하였다.
4 그들은 아무런 흠도 없이 잘생기고, 온갖 지혜를 갖추고 지식을 쌓아 이해력을 지녔을뿐더러 왕궁에서 임금을 모실 능력이 있으며, 칼데아 문학과 언어를 배울 수 있는 젊은이들이었다.
5 임금은 그들이 날마다 먹을 궁중 음식과 술을 정해 주었다. 그렇게 세 해 동안 교육을 받은 뒤에 임금을 섬기게 하였다.
6 그들 가운데 유다의 자손으로는 다니엘, 하난야, 미사엘, 아자르야가 있었다.
8 다니엘은 궁중 음식과 술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자기가 더럽혀지지 않게 해 달라고 내시장에게 간청하였다.
9 하느님께서는 다니엘이 내시장에게 호의와 동정을 받도록 해 주셨다.
10 내시장이 다니엘에게 말하였다. “나는 내 주군이신 임금님이 두렵다. 그분께서 너희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정하셨는데, 너희 얼굴이 너희 또래의 젊은이들보다 못한 것을 보시게 되면, 너희 때문에 임금님 앞에서 내 머리가 위태로워진다.”
11 그래서 다니엘이 감독관에게 청하였다. 그는 내시장이 다니엘과 하난야와 미사엘과 아자르야를 맡긴 사람이었다.
12 “부디 이 종들을 열흘 동안만 시험해 보십시오. 저희에게 채소를 주어 먹게 하시고 또 물만 마시게 해 주십시오.
13 그런 뒤에 궁중 음식을 먹는 젊은이들과 저희의 용모를 비교해 보시고, 이 종들을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14 감독관은 그 말대로 열흘 동안 그들을 시험해 보았다.
15 열흘이 지나고 나서 보니, 그들이 궁중 음식을 먹는 어느 젊은이보다 용모가 더 좋고 살도 더 올라 있었다.
16 그래서 감독관은 그들이 먹어야 하는 음식과 술을 치우고 줄곧 채소만 주었다.
17 이 네 젊은이에게 하느님께서는 이해력을 주시고 모든 문학과 지혜에 능통하게 해 주셨다. 다니엘은 모든 환시와 꿈도 꿰뚫어 볼 수 있게 되었다.
18 젊은이들을 데려오도록 임금이 정한 때가 되자, 내시장은 그들을 네부카드네자르 앞으로 데려갔다.
19 임금이 그들과 이야기를 하여 보니, 그 모든 젊은이 가운데에서 다니엘, 하난야, 미사엘, 아자르야만 한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임금을 모시게 되었다.
20 그들에게 지혜나 예지에 관하여 어떠한 것을 물어보아도, 그들이 온 나라의 어느 요술사나 주술사보다 열 배나 더 낫다는 것을 임금은 알게 되었다.
<화답송>다니3,52ㄱ.52ㄷ.53.54.55.56(◎52ㄴ) ◎ 세세 대대에 찬송과 영광을 받으소서.
○ 주님,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
○ 영광스럽고 거룩하신 당신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
○ 거룩한 영광의 성전에서 당신은 찬미받으소서. ◎
○ 거룩한 어좌에서 당신은 찬미받으소서. ◎
○ 커룹 위에 앉으시어 깊은 곳을 살피시는 당신은 찬미받으소서. ◎
○ 하늘의 궁창에서 당신은 찬미받으소서. ◎
복음<예수님께서는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루카21,1-4)
1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2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셨다.
3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제1독서 (다니1,1-6.8-20)
"부디 이 종들을 열흘 동안만 시험해 보십시오. 저희에게 채소를 주어 먹게 하시고 또 물만 마시게 해 주십시오. 그런 뒤에 궁중 음식을 먹는 젊은이들과 저희의 용모를 비교해 보시고, 이 종들을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12-13)
다니엘은 자신을 감독하는 자에게 진지하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그것은 특정한 기간을 정해서 임금의 진수성찬을 먹지 않는 자신과 이를 먹는 다른 친구들을 비교해 보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열흘 동안'에 해당하는 '야밈 아사라'(yamim asarah)는 문자 그대로 10일을 의미한다.
다니엘서 1장 14절과 15절에 열흘 동안 시험했다는 사실이 부가적으로 진술되고 있다.
열흘은 동료들과 다른 음식을 먹고 얼굴빛을 통해 그 결과를 드러내기에 충분한 기간이다.
그러나 고기와 기름진 음식을 먹는 자들보다 채소와 물만을 먹으면서 얼굴빛이 더 좋아지기를 바란다는 것은 비상식적인 일이다.
하지만 다니엘은 그 결과에 대해 전적으로 주권자이신 주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고 그런 제안을 했을 것이다. 여기서 다니엘의 신앙이 얼마나 확고했는지가 드러난다.
'시험해'에 해당하는 '나쓰'(nas)는 '시험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나싸'(nasa ;test,prove)의 강조 능동 명령형이다.
여기서는 윗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명령하는 뉘앙스가 아니라 뒤에 이어지는 불변사 '나'(na; please)와 더불어 문장을 구성하여 '시험해 보십시오', '시험하실 것을 부탁드립니다'라는 정중한 청원의 의미가 된다.
말하자면, 특정 기간동안 특정한 대상에게만 시범적으로 어떤 특별한 조치를 취하여 그 조치에 따른 결과를 조사해 본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채식을 주어 먹게 하시오'
'채식'에 해당하는 '핫제로임'(hazeroim)의 원형 '제로아으'(zeroah)는 씨를 뿌리는 행위를 나타내는 동사 '자라으'(zarah)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씨를 뿌려 싹을 내는 것, 또한 씨를 맺는 곡물 종류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것은 야채(vegetable)만을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육식과 생선을 제외한 모든 종류의 곡식류 및 그 곡식으로 만들어진 빵과 과일류까지 다 포함한다.
이 단어가 여기서는 복수형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이것이 입증된다.
이어서 다니엘은 포도주 대신에 물을 줄 것을 청원한다.
다니엘서 1장 8절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술은 이교도의 제사와 관련되었을 수도 있으며, 방탕한 생활을 지양하고,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영위하게 위해 율법이 금하지 않은 술까지도 거부하며 오로지 물만을 마시기를 원했을 수도 있다.
'그런 뒤에 궁중 음식을 먹는 젊은이들과 저희의 용모를 비교해 보시고'(13)
다니엘은 자신이 시험을 요청한 사안에 대해 자신감있는 태도로 말한다.
다니엘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역사하심을 통해 놀라운 일을 기대하고 있다.
그는 진수성찬과 포도주를 먹지 않고 채식과 곡식 위주의 식사를 하는 자신과 자기 친구들의 얼굴빛과 건강 상태가 다른 동료들의 그것보다 훨씬 더 좋을 것임을 확신한다.
여기서 '비교해 보시고'에 해당하는 '웨예라우'(weyerau)는 '마르예'(marye; '얼굴')의 어원이기도 한 동사 '라아'(raah; '보다')의 수동태 3인칭 복수로 '(젊은이들의 용모와 저희들의 용모가) 보일 것입니다'라는 의미이다.
즉 얼굴빛과 건강 상태는 감독관이 면밀히 살펴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확연하게 드러날 정도로 분명하다는 것이다.
다니엘서의 이러한 자신감은 주 하느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 종들을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다니엘은 자신의 신앙적 신념대로 행한 후에 나타나는 결과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바빌론 감독관의 결정에 맡겼다.
여기서 '하십시오'에 해당하는 '아세'(aseh; deal,treat)는 번역 그대로 행하라는 의미인데, 문맥에서는 '처분하십시오'라는 뜻이 들어있다.
이러한 처분은 음식에 관한 결정권뿐 아니라 다니엘과 그 동료들에 대한 징계도 포함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다니엘의 자신들에 대한 처분에 대한 의탁 역시 하느님께 대한 확신에 근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되지않아 죽임을 당한다고 하여도, 자신들의 신앙의 정절을 포기할 수 없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볼 수도 있다.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사제 김상우 바오로)
이번 주 제1독서로 다니엘서가 봉독됩니다. 전례력의 끝자락에 읽는 이 책은 어떤 메시지를 전합니까?
다니엘서는 구약 성경 가운데 비교적 나중에 쓰인 책으로 분류됩니다.
마카베오기 상권의 저자는 이 책을 알고 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1마카 1,54; 다니 9,27; 11,37 참조).
다니엘서의 저자는 ‘하시드인들’이라 불리는 경건한 유다인 그룹에 속하는 듯 보입니다.
현재 상황을 뒤집으시며 당신 통치를 확립하실 하느님의 직접적 개입에 기대를 걸기 때문이고, 아직 유다 마카베오와 그 형제들만큼 적극적으로 ‘이교 풍습’에 저항하는 모습은 발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니엘서는 당시 통용되던 두 가지 문학 유형(‘학가다’라는 교훈적 이야기와 묵시 문학)으로 이루어집니다.
교훈적 이야기는 신학적, 도덕적, 지혜 문학적 가르침을 독자에게 제공하고자 활용되는 방식으로, 이야기 속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잘 파악하여야 제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묵시 문학은 신앙적 박해와 세상 권력이 현실에서 득세하는 현재 상황에도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심판자이신 하느님께서 몸소 개입하실 ‘마지막 때’, 곧 종말에 악의 세력을 심판하시고 승리하실 것이라는 희망을 많은 상징과 함께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서 안에는 고통받는 선인에 대한 위로와 악인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가 교차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악의 세력이 곳곳에 있는 오늘도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나라의 실현과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 그리고 종말을 준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복음에서 자신을 깨닫고 보고 버리라 하신다.
(루카21,1-4)
1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2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 궁핍한 과부가 생활비를 다 넣었다고 좋아하실 주님이실까? 肉의 부모도 가난한 자식이 생활비를 다 털어 용돈을 준다면 마음이 아파, 받을 부모 없다.
그렇듯 가난한 당신의 자녀가 생활비를 헌금으로 다 넣었다고 칭찬하시는 주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본문 1절을 다시보면,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 이 부분에서 ‘눈을 들어’~를 빼고 ‘예수님께서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로 하셔도 어색하지 않다.
요점은 헌금을 하는 사람의 눈이 아닌, 주님의 눈으로, 하느님의 관점으로 보셨다는 것이다.
헌금은 내 죄를 대속하시고 죽으셔서 나를 살리신 그 예수님의 죽음, 그 사랑이 감사해서 내 목숨과 같은 돈을 드리는 것이 헌금이다. 죄의 나(목숨)는 죽었습니다, 버립니다. 라는 신앙 고백인 것이다.
과부의 생활비, 곧 자신의 목숨을 다 버린 것을 칭찬하신 것이다. 부지들은? 자신의 목숨, 돈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곧 감사의 헌금이 아닌 자신들의 의로움을 위한 예물로 드렸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속, 십자가로 죄의 용서, 의로움을 위한 예물이 이제는 필요 없게 되었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히브10,18) 18 이러한 것들이 용서된 곳에는 더 이상 죄 때문에 바치는 예물이 필요 없습니다.
= 그들은 제사와 윤리의 그 자기 의로움이 컸기에 그리스도의 대속, 그분의 의로움으로 받는 구원의 의미, 필요성, 간절함이 없기에 자신들의 의로움, 자신의 목숨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들의 그 빛이 어둠인 것을 모르기 때문에~ 헌금을 감사의 새 노래로 드릴줄 모르는 형식과 의무로만 했던 것이다.
그들의 예물이 그들 자신을 위한, 그 자신을 더 믿는, 그래서 버리지 못하는 그들의 속셈, 위선을 주님의 눈이 보신 것이다.
(루가9,23)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태16,25) 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아멘!!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복음 (루카21,1-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4)
예루살렘 성전은 이방인의 뜰, 여인의 뜰, 이스라엘의 뜰, 사제들의 뜰 이렇게 네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방인의 뜰은 성전의 마당으로 예수님께서 성전 정화를 하실 때 장사치들과 환전상들을 몰아내셨던 곳으로 이방인들도 들어올 수 있었던 곳이고, 여인의 뜰은 성전에 들어가기 전의 홀에 해당하는 곳으로 성전 안에 들어갈 수 없는 여인들의 장소이며, 이스라엘의 뜰은 성전 안의 회중석에 해당하는 이스라엘의 남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며, 사제들의 뜰은 성전 안의 제단에 해당하는 사제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이들 성전의 네 지역에서 헌금함은 바로 여인의 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시다가 갑자기 헌금하는 가난한 과부가 당신의 시야에 들어와 보시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님 당시 성전에는 13개의 나팔 모양을 한 헌금함이 있었으며, 각각의 용도와 지향이 그 위에 기록되어 있다.
13개의 헌금함 중에 한 개는 자발적인 기부금을 모으는 헌금함이었다. 아마도 빈곤한 과부는 일반인들을 위한 자발적인 기부금을 모으는 헌금함에 렙톤 두 닢을 넣었다고 본다.
여기서 '빈곤한'으로 번역한 '페니크란'(penichran; poor)의 원형 '페니크로스'(penichros)는 극도로 가난한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이며, 당시 '과부'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경제적 활동이 극히 제한을 받았던 가장 가난한 계층의 사람으로서 늘 구제의 대상이 된 신분이었다.
그리고 '두 렙톤'으로 번역된 '렙타 뒤오'(lepta dyo; two mites)에서 '렙톤'은 유대 화폐의 최소 단위로서 로마 화폐 과드란스의 2분의 1에 해당한다(마르12,42).
한 렙톤은 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이었던 데나리온의 128분의 1에 해당된다.
그리고 당시의 성전 규정상 한 렙톤을 헌금하는 것은 금지되었기에, 두 렙톤은 당시 헌금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액수의 헌금이었다.
이것은 여기에 등장하는 빈곤한 과부가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적 통찰력으로 두 렙톤이 그 과부의 생활비 전부이며,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었음을 아셨다.
예수님께서는 루카 복음 21장 4절에서 그 과부가 가장 많은 헌금을 했다고 판정하신 이유에 대해 설명을 해 주신다.
예수님께서 판정을 내리는 두 대상의 형편과 관련된 두 단어가 나온다.
하나는 '풍족한'으로 번역된 '페릿슈온토스'(perisseuontos; abundance; wealth)이고, 다른 하나는 '궁핍한'으로 번역된 '휘스테레마토스'(hysterematos; penuary; poverty)이다.
'페릿슈온토스'(perisseuntos)의 원형 '페릿슈오'(perisseuo)는 '양과 수를 초과하다'(exceed)는 뜻으로 어떤 것이 풍부하여 흘러 넘치는 상태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부자들의 경제적인 상태가 흘러 넘칠 정도로 풍부했다는 것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그들은 이렇게 흘러 넘치는 재물 중에 일부를 하느님께 바쳤다.
이것과 대조를 이루는 '궁핍한'으로 번역된 '휘스테레마토스'의 원형 '휘스테레마'(hysterema)는 '부족', '모자람'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물질이 부족해 기본적인 필요조차 채우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과부의 철저하게 빈곤한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단어이다. 모든 것이 부족한 과부는 너무나 빈곤한 가운데 헌금을 바쳤는데, 그것은 과부의 생활비 전부였다.
여기서 '생활비'로 번역된 '비온'(bion)의 원형 '비오스'(bios)는 '삶', '생명' 자체를 가리키거나, 또는 '생존을 위해 필요한 자원'을 뜻한다.
말하자면 이 과부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물질마저 모두 바쳤고, 이것은 그녀의 생명을 바치는 것과 같음을 가리킨다.
이렇게 과부는 양적인 면에서 부자의 헌금에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적은 금액을 하느님께 바쳤지만, 그것의 가치는 절대적 양의 개념에 있어서 흘런 넘치는 부자의 헌금보다 더 귀한 것을 바치는 자들의 마음과 태도로 평가되어야 한다.
인간의 겉이 아니라 속 마음을 보시는 예수님께서는 부자한테는 있으나마나한 헌금과, 과부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헌금의 가치를 절대적 양의 개념으로 평가하지 않으시고, 그 바치는 자의 마음을 기준으로 평가하신 것이다.
2025년 11월 24일 월요일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김동희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모습을 유심히 보시고는 말씀하십니다.
그 과부가 바친 헌금은 비록 액수는 적었지만, 부유한 어떤 사람보다도 더 많이 바친 것이었다고요.
다른 이들은 자신이 가진 것의 일부를 바쳤지만,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서도 자신의 생활비를 송두리째 바쳤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가진 전부를 바치는 이들은 어떤 이들일까요?
그들은 하느님께 참으로 감사하는 이들일 것입니다.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사오리? 구원의 잔 받들고서 주님 이름 부르리라’(시편 116[114─115],12-13 참조). 어느 신부님의 서품 성구입니다.
갚을 길 없는 사랑과 은혜를 입었다면, 남은 삶도 하느님께서 보살펴 주신다는 강한 믿음이 있다면 내가 가진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하느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자신의 것을 기꺼이 바친 이들을 보았습니다.
어떤 분은 작은 집 한 채를 가지고 있었는데 재개발되어 보상금을 받았다면서 봉헌하고, 고생하며 꽃 농사를 짓던 부부는 그 일을 정리하면서 꽤 큰 액수를 봉헌하였습니다.
제가 늘 병자 영성체를 해 드리던 혼자 사시는 할머니 한 분은 자신의 전 재산 가운데 절반을 교회에 흔쾌히 봉헌하였습니다.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은 전쟁에서 큰 부상을 입고 삶의 변화를 맞이하면서, 깊은 회심 끝에 자신의 모든 자유와 기억과 지성,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 가진 모든 것을 본디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받아 주십사 간청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주님의 사랑과 은총만을 겸손히 청하였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입니다.
우리도 인생의 어느 순간에는 모든 것을 다 바치고 겨울나무처럼 서 있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김동희 모세 신부)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헌금(獻金)은 나를 드리는 것.
복음(루카21,1-4)
1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 주님은 헌금을 준비하는 속마음을 아신다. 어떤 마음, 어떤 정성으로 준비하는가를...
(요한2,25) 25 그분께는 사람에 관하여 누가 증언해 드릴 필요가 없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
2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셨다.
= 렙톤 두 닢- 당시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 렙톤은 한 데나리온의 144분의 1의 작은 돈으로 오늘날로 계산하면 하루품삯을 10만원이라 할 때 렙톤 한 닢은 700원정도로 과부가 헌금함에 넣은 돈은 겨우 1,400원정도이다.
3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 생활비를 다 넣었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소문으로 들은 예수님이 아닌 말씀 안에 머물며 예수님이 구원의 진리이심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죄인이며 과부인 자신을 구해주실, 곧 새 생명이 되어주실 참 빛이신 분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다른 헌금함 곁에서 하신말씀으로~
(요한8,12.15.20) 12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15 너희는 사람의 기준(선,악)으로 심판하지만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 20 이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곁에서 하신 말씀이다.
오늘 본문 앞 절로 가보면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 하시면서~
(루가20,47) 47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욱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 율법을 열심히 지키며 기도했던 자기 의로움으로 자신의 뜻을 이루려는, 자신의 이름을 높이려는 그 자신을 버려야(힘을 빼야) 생명의 빛이신 분으로부터 새 생명을 받는다. 오늘 과부(寡婦)처럼...
율법(제사와 윤리)의 의로움, 선과 악, 도덕과 윤리의 가르침에 흔들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주는 하늘의 용서, 의로움, 생명, 그 복음을 구원의 진리로 믿었을 때, 믿음을 빼앗기지 않고 지켰을 때다. 그렇게 오늘 과부는 새 창조로 새 생명을 얻었다.
(갈라6,15) 15 사실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2코린5,17)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 다른여자~
(마르14,3-5) 3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에 있는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의 일이다. 마침 식탁에 앉아 계시는데, 어떤 여자가 *값비싼 순 나르드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그분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 4 몇 사람이 불쾌해하며 저희끼리 말하였다. “왜 저렇게 향유를 허투루 쓰는가? 5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을 터인데.” 그러면서 그 여자를 나무랐다.
= 남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마태20,2) 이었으니까, 여자가 ‘300 데나리온’어치의 향유를 모았다는 것은 분명 여자의 전 재산 이었다는 것이다.
(마르14,6.8) 6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가만 두어라. 왜 괴롭히느냐? 이 여자는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다. 8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내 *장례를 위하여 미리 내 몸에 향유를 바른 것이다.
= 죄인인 자신에게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 자신의 죄를 대속하실 그 예수님께(그것도 미리) 향유, 곧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린(버린) 것이 죄인인 여자가 할 수 있었던 ‘좋은 일’인 것이다.
요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여자는 미리 ‘좋은 일’을 했는데. 우리(나)는 성경을 통해 이미 “다 이루어졌다” 하신 말씀을 듣고, 알면서도 풍족한 데에서 얼마 씩 넣는 헌금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생활비를 다 넣자는 말이 아니다. 하느님은 그것 바라시지 않으신다. 어느 아버지가 자식이 생활비를 다 드리는 것을 좋아하시겠는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희생하며 자신을 키워주신 그 사랑을... 그리고 그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자녀 답게 감사하며 아버지의 뜻에 합당한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다른 형제(이웃)와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갈라5,14) 14 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계명입니다.
= 이웃은 나를 힘들게 하는 원수까지 포함한다. 그러나 그 원수를 나 자신처럼 사랑할 사랑이 우리에게는 없다.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 곧 당신 아드님을 우리 죄의 속죄 제물로 내주신 그 이타의 사랑을 주는, 서로 나누는 그 사랑을 하라는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이나 미워하는 사람이나 차별 없이, 특히 원수 같은 사람에게 자존심을 죽이는, 그 나를 죽이는 그 죽음으로 구원의 진리, 새 계약인 십자가의 복음을 주는 그 사랑을 하라는 말씀이다. 그 모든 것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할 수 있는 좋은 일인 헌금이다.
그렇다 보면, 곧 하느님께 받은 의무, 직분으로 하다 보면(기도와 함께) 진심에서 나오는 시간(생명), 재물 등을 정성 된 헌금으로 하느님께 드릴 수 있게 되고 이웃과 나누는 형제 사랑도 하게 된다.
(1요한3,16) 16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빠진 부분을 보면~
(다니엘1,7. 19-20) 7 내시장(內侍長)은 그들에게 *다른 이름을 지어 주었다. 곧 다니엘은 벨트사차르, 하난야는 사드락, 미사엘은 메삭, 아자르야는 아벳 느고라고 지어 주었다.
= 히브리 이름을 바벨론의 이름으로 바꿔준 것이다.
19 그런데 (바벨론)임금이 그들과 이야기를 하여 보니, 그(세상) 모든 젊은이 가운데에서 다니엘, 하난야, 미사엘, 아자르야만 한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임금을 모시게 되었다.
= 성경은 히브리 이름을 강조한다.
20 그들에게 지혜나 예지에 관하여 어떠한 것을 물어보아도, 그들이 온 나라의 어느 요술사나 주술사보다 열 배나 더 낫다는 것을 임금은 알게 되었다.
= 궁중음식과 술(酒), 곧 우상을 섬기는 이방(세상)의 최고 음식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자신들이 더럽혀지지 않게 해 달라고 감독관에게 간청했던 것이고, 하느님께서 그 감독관의 마음을 열어 주시어 다니엘과 친구들의 청을 들어주게 하셨다. 곧 사람의 최고의 음식(말)보다, 하느님의 양식(말씀)을 먹었을 때 세상에 그 어떤 이들보다 지혜롭게 된다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까 영혼의 구원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니 그 말씀을 먹기(채우기)위해, 육신의 만족을 위한 사람의 말, 가르침과 행위를 버리는 것, 곧 자기를 비우는 것, 그것이 헌금의 삶이다.
☨보호자 성령님! 오늘 깨닫게 하신 자신을 버리는(죽이는) 그 헌금의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천주의 성령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해 간구해 주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흙인 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