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15일 토요일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루카18,1-8)
제1독서<홍해에 마른땅이 나타나자 그들은 어린양들처럼 뛰었다.>(지혜18,14-16; 19,6-9)
14 부드러운 정적이 만물을 뒤덮고 시간은 흘러 한밤중이 되었을 때
15 당신의 전능한 말씀이 하늘의 왕좌에서 사나운 전사처럼 멸망의 땅 한가운데로 뛰어내렸습니다.
16 그는 당신의 단호한 명령을 날카로운 칼처럼 차고 우뚝 서서 만물을 죽음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그가 땅 위에 서니 하늘까지 닿았습니다.
19,6 당신의 명령에 따라 온 피조물의 본성이 저마다 새롭게 형성되어 당신의 자녀들이 해를 입지 않고 보호를 받았던 것입니다.
7 진영 위는 구름이 덮어 주고 물이 있던 곳에서는 마른땅이 나타나는 것이 보였으며 홍해는 장애물이 없는 길로, 거친 파도는 풀 많은 벌판으로 바뀌었습니다.
8 당신 손길의 보호를 받는 이들은 그 놀라운 기적을 보고 온 민족이 그곳을 건너갔습니다.
9 그들은 풀을 뜯는 말들 같았습니다. 또 어린양들처럼 이리저리 뛰면서 주님, 자기들을 구해 내신 당신을 찬양하였습니다.
<화답송>시편105,2-3.36-37.42-43(◎5ㄱ) ◎ 주님이 이루신 기적을 기억하여라.
○ 그분께 노래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그 모든 기적 이야기하여라. 거룩하신 그 이름 자랑하여라.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
○ 그분은 그 땅의 모든 맏아들을, 모든 정력의 첫 소생을 치셨네. 이스라엘이 은과 금을 들고 나오게 하셨네. 그 지파들에는 낙오자가 없었네. ◎
○ 당신 종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 거룩한 말씀 기억하셨네. 당신 백성을 기쁨 속에, 뽑힌 이들을 환호 속에 이끌어 내셨네. ◎
복음<하느님께서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루카18,1-8)
1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2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3 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4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5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6 주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7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제1독서 (지혜18,14-16 ;19,6-7)
"당신의 전능한 말씀이 하늘의 왕좌에서 사나운 전사처럼 멸망의 한가운데로 뛰어내렸습니다. (지혜18,15) ~~
당신의 명령에 따라 온 피조물의 본성이 저마다 새롭게 형성되어, 당신의 자녀들이 해를 입지 않고 보호를 받았던 것입니다." (지혜19,6)
지혜서의 제3부인 지혜서 10-19장은 이스라엘 초기 역사에서의 지혜의 역할을 다룬다.
지혜서 10장 1-21절에서 아담으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에서 지혜가 한 역할을 추적하는 것은 지혜서 6-9장에서 지혜를 묘사한 부분을 마치고, 이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 이집트 탈출 때 있었던 사건들에 초점을 맞추는 전이의 기회를 제공한다.
가장 기본이 되는 주제는 하느님 백성의 초기 역사에서도 지혜가 활동하였고, 하느님께서 역사의 흐름을 이끌어 가신 수단이 바로 지혜였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구절들에서 구체적인 이름을 대지 않으면서 성서에 나오는 여러 사람의 영웅들(과 몇몇 악인들)을 지적한다.
이 수사학적 기교는 그들의 정체를 식별해 낼 수 있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라는 것을 전제한다.
지혜서 11장 1-14절의 첫 번째 대조를 시작으로 이집트 탈출과 연관된 일곱 가지 대조가 시작된다.
일곱 가지 대조를 모두 뒷받침하는 기본 원칙은 지혜서 11장 5절에서 처음 밝혀진다.
그 원칙은 "그들의 원수들에게는 징벌의 도구가 되었던 바로 그것이 곤경에 빠진 그들에게는 득이 되었다." 는 것이다.
첫 번째 대조가 끝나면서 신학적 성찰(지혜11,15-12,27)과 우상 숭배에 관한 기록(지혜13-15장)으로 대조가 중단된다.
그리고는 지혜서 11장 1-14절에서 시작된 일련의 대조로 돌아가서, 두 번째 대조(지혜16,1-4)는 하느님께서 이집트인들과 이스라엘인들을 대하신 상이한 방식을 다룬다.
세 번째 대조(지혜16,5-14)는 메뚜기(탈출10,1-20참조)와 등에(탈출8,20-32) 재앙에서 이집트인들에게 있었던 일을 광야에서 구리뱀 이야기로 이스라엘에게 일어난 일과 비교한다(민수21,5-9참조).
네 번째 대조(지혜16,15-29)는 하늘에서 이집트인들에게 내려온 것(우박과 번개)과 이스라엘인들에게 내려온 것(만나)를 다룬다.
다섯 번재 대조(지혜17,1-18,4)는 이집트 땅을 덮친 암흑과 이스라엘이 이집트 탈출 때 체험한 빛을 다룬다.
여섯 번째 대조(지혜18,5-25)는 이집트인들과 이스라엘인들의 죽음을 다룬다.
일곱 번째 대조(지혜19,1-22)는 홍해 바다에서 있었던 사건들을 해석한다(탈출14장참조).
오늘 독서 말씀은 지혜서 18장 14-16절과 19장 6-9절로서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대조에 속하는 말씀이다.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의 적들을 파멸시킨 대행자는 "당신의 전능한 말씀"이었다(지혜18,15).
그 말씀은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인 지혜, 고대 근동 문학과 히브리 성서에서 친숙한 모습인 전사이신 하느님, 그리고 "땅 위에 서서 하늘까지 닿는"(지혜18,16) 거대한 천사가 합쳐진 것이다.
하느님과 이스라엘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과 이집트인들이 재앙을 겪게 된 것은 바로 자신들의 잘못 때문이라는 사실이 줄곧 제시된다.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인들의 아기들을 죽였고(지혜18,5), 요술에 마음을 빼앗겼으며(지혜18,13), "무서운 꿈"으로 미리 알려 주었고(지혜18,17), 자기들이 그토록 고통을 받는 이유를 알았다(지혜18,19).
어린이들과 물이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이었으나 이집트에게는 파괴였다.
한편 일곱 번째 대조(지혜19,1-22)에 나오는 홍해 사건에서 하느님의 뜻하신 목적은 "당신의 백성은 경이로운 여행길을 체험하는 동안 저들(이집트인들)은 이상한 죽음을 맞게 하려는 것"(지혜19,5)이었다.
지혜서 19장 1-4절에서 지혜서의 저자는 하느님께서 미리 알고 계셨다는 사실과 도망가는 이스라엘인들을 뒤쫓아가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에 이집트인들에게 잘못이 있다는 사실을 균형있게 점검한다.
이집트인들이 이스라엘인들을 뒤쫓아 간 것은 "저들의 고통에 아직 남아 있는 징벌을 마저 채우게"(지혜19,4) 하려는 것이었다.
지혜서 19장 6-12절에서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헤매는 것을 놀랍게도 긍정적으로 묘사한다(민수11장 참조).
이스라엘의 길을 평탄하게 하기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창조의 다양한 요소들을사용하시어 사람들이 "온 피조물의 본성이 저마다 새롭게 형성되어" (지혜19,6)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기뻐하며 자기들을 구원해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고,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동물, 물고기 그리고 메추라기를 양식으로 주셨지만, 이집트인들은 모기와 개구리들로 징벌하셨음을 상기하였다.
그리고 지혜서 19장 13-17절에서 지혜서의 저자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이집트인들을 징벌하시는 하느님의 정의를 주장한다(지혜19,13).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청원 기도에 대하여 오래전부터 전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께 청하는 기도는 모두 다 이루어진다.
만일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 기도의 청원이 올바르지 않았거나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청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첫 번째로 그 청한 것이 올바른지 살펴보아야 하고, 두 번째로는 주님께서 바라시는 때를 기다리며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끈질긴 과부의 비유는 바로 기도의 가르침에 관한 것입니다.
과부는 재판관을 찾아가 “올바른 판결”을 요구합니다.
한 번의 요구로 그치지 않고, 거듭하여 요구합니다.
과부는 올바른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끊임없이 재판관을 찾아갈 것이고, 재판관은 마침내 과부의 요구를 들어줄 것입니다.
우리도 올바른 것을 청할 줄 아는 지혜와 낙심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도하는 인내를 지녀야 하겠습니다.
청원 기도에 대하여 조금 더 깊게 묵상해 보면, 끈질기게 요구하는 모습은 우리 인간보다 하느님의 모습과 닮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청원하는 쪽은 언제나 우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렇게 끈기 있고 한결같이 청하지 못합니다.
정작 성실하고 한결같이 청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돌아오도록 끊임없이 요청하시고 우리가 회개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응답을 갈망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간절히 우리의 응답을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인내하며 한결같이 하느님께 청원하는 것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는 것입니다.
그렇게 닮아 가며, 주님께서 우리의 청원에 빠르게 응답하시듯 우리도 그분 청원에 재빠르게 응답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청원을 기억하여 청원 기도가 내 뜻을 이루는 주문이 아니라, 주님과 대화하며 주님을 닮아가게 하는 일치의 기도가 되게 합시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그리스도교는 찾아오신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루카18,1-8)
1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2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3 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4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5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6 주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 불의한 재판관의 말을 새겨보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그 불의한 자 이기에 오랫동안 찾아가서 호소하는 그 과부의 청을 들어주지 않고 미적 거렸던 것이다.
그 불의한 재판관이 자신을 귀찬게 하는 것이 싫어서 그 자신을 위한 판결이 올바른 것일까? 아니다 그가 올바른 판결을 해 주겠다고 한 것은 하느님의 듯을 무시한 자신의 생각, 자신을 위한 올바른 판결, 즉 불의한 판결을 내려준 것이다.
(오늘 복음을 하느님의 지혜, 뜻이 아닌 사람의 지혜로 읽었다면 불의한 재판관의 판결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의 생각을 다른 이에게 말한다면 불의한 깨달음, 판결을 주는 것이다.)
7그러나,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8ㄱ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 올바름을 주시기 위해 찾아오신 그 하느님께서 왜 미적 거리시겠는가? 그 하느님의 뜻을 받는 것, 올바른 판결이다. 즉,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지혜로 생각, 뜻으로 읽고 깨달아 믿으면, 올바른 판결을 지체 없이 받는 것이다.
(루가4,21)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 그러나 내 뜻, 사람의 뜻을 위한 말씀으로 들으면 지체 없이 내려주시는 올바른 판결(깨달음)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요한16,23-24) 23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뜻)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24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뜻)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 말씀은 전능 하시다. 없음에서 만물을 창조하셨고 또 그 만물을 지금도 말씀으로 지탱하고 계신다.(히브1,3)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받아야 할 와와 적대자와의 올바른 판결은 무엇인가?
한 분, 중재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받는 적대자와 나의 화해, 화합이다. 그래야 나와 너, 함께 하느님께 갈 수 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다.
(에페2,14-18)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대속)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15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16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17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18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나와 너, 우리의 구원의 진리로 믿어 받는 올바른 판결이다.
8ㄴ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 뜻을 믿어, 구원의 믿음과 상관없는 곧 하느님의 뜻과 상관없는 신앙을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이다. 만은 사람들이 가는 길이 올바르다 생각하고 안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넓은 길은 그리스도 신앙의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태7,13-14) 13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14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 오늘 과부가 하느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뜻으로 불의한 재판관을 찾아갔던 것이다. 우리를 찾아오신 보이지 않는 그 하느님을 믿을 수가 없어, 보이는 사람을 찾아가 스스로 의존하려 했던 큰 잘못인 것이다.
전능하신 분, 그 하느님을 믿지 못한, 그래서 우리의 남편이라 하신(예레31,32) 그 하느님을 잃어버린 과부인 것이고, 하느님의 뜻을 적대(敵對)한 자신이 하느님의 적대자 였던 것이다.
그 적대자 과부가 세상을, 사람을 더 의존하는 우리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오늘 ‘기도하라’ 당부하시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올바로 깨달으라고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 하십니다. 그러면, 지체 없이 적대자인 나를 용서하는 그 올바른 판결, 깨달음을 내려 주신다는 구원의 약속을 주시는 것이다.
(로마5,10)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천주의 성령님, 우리와 적대자 모두를 의탁합니다. 이끌어 주소서 ~아멘!!!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사제 김상우 바오로)
오늘 복음의 요점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입니다.
그런데 무턱대고 기도만 많이 하는 것이 언제나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복음에서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달라고 청하는 장면이 소개됩니다.
성경 전통에 따르면, 과부는 사회적 약자를 대표합니다.
한편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재판관은 과부의 청을 마지못하여 들어줍니다.
그는 과부가 자신을 계속 귀찮게 할 것 같아 이기심에서 청을 들어줍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이러한데, 하물며 정의로우시고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자녀들의 청을 얼마나 잘 들어주시겠는가 하는 것이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자주 내가 바라는 것을, 내가 바라는 방식으로, 내가 바라는 때에 이루어지게 하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차려진 밥상 위에 숟가락 하나 얹듯이, 하느님께서는 내가 미리 정하여 놓은 답을 들어주시면 된다는 식입니다.
물론 하느님께 끊임없이 청하는 모습도 신앙생활에서 중요하지만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 청원이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맞는지, 내 기도가 이기심을 충족시키려는 수단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올바른 방향성 없이 열심히만 기도하는 것이 최고라고 판단하기는 조금 어렵습니다.
잘못된 방향과 건강하지 못한 지향으로 무조건 많이 기도할 경우, 정상적인 길에서 더 빨리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도할 때 두 가지를 명심하여야 합니다.
첫 번째로 올바른 지향으로 기도하는 것이고, 두 번째로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기도는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김상우 바오로 신부)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성경의 제목은 물론 장, 절도 사람들이 찾아보기 쉽게 후대에 붙여진 것이다. 오늘 제목처럼 불의한 재판관이 과부의 청을 들어주었는지 살펴보자.
복음(루카18,1-8)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2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불의다.
3 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 자신을 대수롭게 생각하는 그 불의 한 재판관에게 올바른 판결을 원한다? 참 어리석은 과부다.
4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5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6 주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 귀찮아서, 괴롭힐까 봐 내려주는 판결이 과연 올바를까? 그래서 그의 말을 ‘잘 새겨 들어라’ 하신 것이다. 그의 판결은 올바를 수가 없음을 알아들으라는 말씀이다.
7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 사람을 귀(貴)하게 당신의 목숨을 바쳐 사랑하신 하느님이시다.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 많은 신앙인들이 하느님의 올바른 판결을 믿지 않고, 사람의 판결을 의지하는 삶을 산다고 지적하시는 말씀이다.
과부의 청을 다시 보자,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 먼저 과부의 적대자가 누구인가 부터 알아야 한다.
우리는 어제 앞17,35절에서 ‘두 여자가 함께 맷돌 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 하시고 그 죄의 육은 버리시고(부인) 영으로 살려 당신과 하나, 한 몸의 지체(신부)로 데리고 가신다는 것을 공부했지요.
그러니까 과부의 적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 과부의 짝, 신랑으로 주지 못하는 율법(제사와 윤리)주의 자들이며, 재판관처럼 하늘의 진리를 모르는 세상이다. 곧 세상의 말, 가르침이 들어와 판을 치는 *‘믿음 없는 교회’를 비유하신 말씀인 것이다.(요한16,8참조) 다른 말로 성경을 하늘(예수)의 대속, 그 의로움, 사랑을 구원의 길, 진리로 주지 않는 것이 적대자다.
하느님께서 세상의 노예 생활에서 우리를 구하시려 당신의 외아들 예수를 이 땅에 구원자(말씀)으로 보내셨다(요한1,1-14참조)
오늘 독서를 보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적대자인 이집트(세상)의 노예생활에서 그들을 하실 때, 지체 없이 말씀을 보내시어 온갖 기적으로 그들을 구하셨다.
독서(지혜18,14-16; 19,6-9)
14 부드러운 정적이 만물을 뒤덮고 시간은 흘러 한밤중이 되었을 때 15 당신의 *전능한 말씀이 하늘의 왕좌에서 사나운 전사처럼 멸망의 땅 한가운데로 뛰어내렸습니다. 16 그는 당신의 단호한 명령(말씀)을 날카로운 칼처럼 차고 우뚝 서서 만물을 죽음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그가 땅 위에 서니 하늘까지 닿았습니다.
= 말씀의 힘, 권능이 온 세상에 가득 찬 것이다.
19,6 당신의 명령(말씀)에 따라 온 피조물의 본성이 저마다 새롭게 형성되어 당신의 자녀들이 해를 입지 않고 보호를 받았던 것입니다. 7 진영 위는 구름이 덮어 주고 물이 있던 곳에서는 마른땅이 나타나는 것이 보였으며 홍해는 장애물이 없는 길로, 거친 파도는 풀 많은 벌판으로 바뀌었습니다.
= 구름, 곧 하느님의 영광이 덮으셨을 때(탈출16,10) 우리 삶의 장애물이 나(과부)를 살리는 쉼(안식)의 풀밭이 된다.
8 당신 손길의 보호를 받는 이들은 그 놀라운 기적을 보고 온 민족이 그곳을 건너갔습니다.
= 이스라엘이라 하지 않고 ‘온 민족’이라 함은 오늘날 세상에서 구원하실 과부(우리)를 말씀 하시는 것이다.
9 그들은 풀을 뜯는 말들 같았습니다. 또 어린양들처럼 이리저리 뛰면서 주님, 자기들을 구해 내신 당신을 찬양하였습니다.
= 세상의 죄에서 자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기쁨으로 구원의 완성인 하느님을 찬양한 것이다. 그 모든 것은 말씀을 구원의 진리로 ‘아!’하고 깨달았을 때 이루어진다. 곧 깨달았을 때, 지체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를 ‘아!~’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때 말씀이 일(활동)을 하시기 때문이다. 말씀은 살아 움직이신다.(히브4,12)
(루가4,21)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1테살2,13) 13 우리는 또한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도덕과 윤리, 계명)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뜻, 약속)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 사람의 뜻, 영광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 영광을 위한 말씀인 것이다.
(로마3,23-25)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25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1요한4,10)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과부)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과부)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사람의 말을 의지하는 어리석음은 과부가 아닌 하느님의 말슴(판결, 약속)을 의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맞는 슬기로운 과부가 되게 하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와 같이 땅(흙인 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복음 (루카18,1-8)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8)
여기서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가리킨다.
그런데 바로 그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는 말은 무슨 뜻인가?
여기서 '믿음'은 지속적으로 항구하게 하느님께 간구하는 실천적인 믿음을 말한다.
앞의 불의한 재판관 비유에 등장하는 과부에게서 나타났던 것처럼, 이러한 곤경에 처할지라도 낙심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간구하는 믿음을 말한다.
그리고 '찾아볼 수 있겠느냐'에 해당하는 '아라 휴레세이'(ara heuresei; will he find)에서, '아라'(ara)는 부정적 대답이 기대되는 추론적 질문을 의미하고, '휴레세이'(heuresei)의 원형 '휴리스코'(heurisko)의 본래 뜻은 '만나다', '마주치다', '우연히 발견하다'이다.
따라서 '아라 휴레세이'(ara heuresei)에는 세상에서 밤낮으로 부르짖는 믿음을 발견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뜻이 들어있다.
사람의 아들이 다시 올 때에 사람들의 마음은 완고하고 사악해져서, 하느님께서 당신이 간택한 백성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너무나 분명한 사실조차도 거부하며, 그들의 마음에 의로움보다는 악(惡)이 가득차서 간구조차 하지 않을 것이 예언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응답이 있을 때까지 하느님의 신실한 약속과 말씀을 의지하면서 믿음을 수호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느냐고 반문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루카 복음 17장에 나오는 노아와 롯의 시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2025년 11월 15일 토요일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김동희 모세 신부)
지혜서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지혜의 인격화’입니다.
지혜서의 저자는 지혜를 하느님의 속성이라고 하면서 ‘삶의 반려자’ 곧 ‘아내’로 묘사하기도 하고(8장 참조), 지혜가 세상 처음부터 하느님과 함께 있었으며(9,9 참조), 창조된 첫 사람부터 노아, 아브라함, 야곱, 요셉 등을 줄곧 이끌었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억압에서 건져 냈다고 합니다(10장 참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루카 18,1)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교우들과 면담하거나 대화하다 보면 낙심하고 체념하여 ‘그냥 그렇게’ 살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 보시면 어때요?’, ‘저렇게 해 보시면 어때요?’ 하고 권유해 보지만 대부분 “괜찮아요, 됐어요.”라고 대답하기 일쑤입니다.
오늘 복음의 과부는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18,3)라고 하며 끈기 있게 매달립니다.
자기 편을 들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자기 편이 되어 달라는 염치없는 부탁은 한두 번은 할 수 있어도 들어줄 때까지 끈질기게 되풀이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과부가 바라는 것은 진실을 밝혀 달라는 것입니다.
진실을 통하여 올바른 결과가 나오기를 바라는 간절함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지혜서가 알려 주듯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온 삶을 이끌어 가십니다.
사랑의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아 주십니다.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는 이는 이러한 하느님께 믿음과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과녁을 겨냥하는 화살촉처럼 그의 눈은 반짝입니다.
(김동희 모세 신부)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비 진리의 판결은 올바르지 않다.
복음(루카18,1-8)
1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2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3 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4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5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6 주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귀찮아서 해주는 판결이 올바르겠는가? 곧 불의, 비 진리의 재판관에게 올바른 판결을 바라는 어리석은 과부다.
재판관, 과부, 모두 세상의 힘의 원리로 사는 육(肉), 비 진리의 사람이다. 많은 사람이, 아니 내가 그랬다. 사람들이 내리는 판결, 사람들의 의견을 먼저 묻고 믿고 따랐다.
미사(제사)드리러 성당은 매일 갔지만, 그래서 성체는 열심히 받아먹었지만, 말씀 안에 들어있는 하느님의 뜻,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에 하느님을 두렵고, 엄한 분으로만 알았고, 또한 그분의 올바른 판결인 용서, 그리스도의 대속, 그 피의 새 계약의 말씀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히 믿음은 없었고, 그러니 사람을 더 믿고 의지하며 살았던 것이다.
*하느님을 엄하신 아버지로, 성모님을 인자한 어머니로, 그래서 그 어머니의 전구를 통하여 기도를 드리면 하느님은 그 성모님의 중재 기도를 더 잘 들어 주신다고 배운 것도 한 몫 했던 것이다. 하느님이 내 남편임을 모르는 과부 신앙 이었던 것이다.(예레31,32) 그래서 하느님께 기도 드리기보다 성모님께 의탁하는 빈말 기도만 열심히 했다.
(로마8,26) 26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1티모2,5) 5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도 한 분이시니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로마8,3) 3 율법이 육으로 말미암아 나약해져 이룰 수 없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루셨습니다. 곧 당신의 친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을 지닌 속죄 제물로 보내시어 그 육 안에서 죄를 처단하셨습니다.
7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 많은 사람들이 믿음과 상관없는 과부의 신앙을 산다는 말씀이다. 곧 말씀을 진리로 깨닫기 위해 말씀 안에 머무르는 신앙이 아니라, 말씀을 도덕과 윤리, 그 법(法)으로 받아 행위로 지키기에 바쁜 헛된 신앙을 산다는 것이다.(에페2,8-9)
*인간, 재판관의 판결은 졸라대야 되지만 하느님의 판결은 지체 없다. 왜? 나와 적대자 사이의 문제, 곧 모든 인간은 서로 용서할 수 없는 죄인(罪人)이며, 그 모든 죄의 용서는 이미 창조 이전부터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셨기 때문이다.(에페1,4~ 묵시22,13) 그래서 말씀 안에서 찾아 깨닫기만 하면 지체 없이 해결, 이루어짐이 되는 것이다.
(루가4,21)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마르11,24)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
= 그러니 ‘낙심하지 말고 꾸준히 말씀을 되새기는 기도를 하라’ 하심이다. 사람의 판결, 의견보다 하느님의 판결, 구원의 약속을 먼저 찾고 믿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2티모1,9-10) 9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은혜)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은총은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10 이제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환히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 주셨습니다.
(히브4,3) 3 *믿음을 가진 우리는 안식처로 들어갑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리하여 나는 분노하며 맹세하였다. ‘그들은 내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안식처는 물론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은 세상 창조 때부터 이미 다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필리3,12) 12 나는 이미 그것을 얻은 것도 아니고 목적지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차지하려고 달려갈 따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미 나를 당신 것으로 차지하셨기 때문입니다.
* 사람은 언제나 답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그 답에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하느님의 뜻을 듣는 답이고, 하나는 내 뜻, 세상적인 답을 찾는 답이다.
☨보호자 천주의 성령님!
하느님의 올바르신 판결, 구원의 말씀을 빼앗기지 않고 지킬 수 있도록 제 마음에 담아주신 모든 이들의 마음(길)에 충만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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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신부님_“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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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8 ㅣNo.186307 * 오늘의 말씀(11/15) :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 독서 : 지혜 18, 14-16; 19, 6-9 * 복음 : 루가 18, 1-8
1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2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3 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4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5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6 주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7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 <오늘의 강론>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막바지 길에서 “기도”에 대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기도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는 뜻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비유입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말씀은 대체 어떤 기도를 말하는 걸까? 흔히 ‘기도의 황금률’이라 불리는 이 기도를 우리는 “끊임없는 기도”(항구한 기도, 지속적인 기도, 중단 없는 기도)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교회전승 안에서, 주로 서방교회에서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의 형태로, 동방교회에서는 ‘예수기도’(εύχη Ιησοû)의 형태로 전승되어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말씀은 대체 무슨 뜻일까? 그것은 우선, ‘끊임없이 주 하느님을 향하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기도는 하느님을 ‘향하여’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마음이 동반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기도가 주님을 향하여 있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의 넋두리요, 하소연이요, 자기 한탄이요, 독백일 뿐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그 어떤 누군가가 아닌, 바로 우리 ‘주님을 향하여’ 있고, 우리 주님과 관계 안에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곧 그것은 주님을 믿고 주님께 희망을 두고 주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언자 사무엘은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죄”(1사무 12,23 참조)라고 말합니다. 만약 하느님과 관계 맺지 않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지 않는다면, 곧 하느님이 아닌 다른 우상을 향하게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말한 대로, 인간은 ‘하느님을 향하여 방향 지워진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우리보다 앞서 우리의 주님 하느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그분이 계시기에, 기도하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희망하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마치 과부가 판결해주지 않는 재판관 앞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간청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듯이 말입니다. 사실,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음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서 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우리의 믿음’을 찾으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8) 그러니 이 “끊임없는 기도”는 “사람의 아들이 올 때”까지의 지속되어야 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이를 <루카복음의 소묵시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도하기를 결코 멈추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곧 하느님을 향하여 있기를 멈추지 말아야 하고,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머물러 있기를 멈추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
주님! 제 마음이 당신을 향하게 하소서. 이미 제 마음 안에 와 계신 당신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늘 저를 향하여 있는 당신을 외면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 믿음을 두고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당신의 희망이 저의 희망이 되게 하시고, 낙심하지 말게 하소서. 늘 제 안에 살아계신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