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04일 화요일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하늘잔치에 초대받은 당신 (루카14,15-24)
제1독서<우리는 서로서로 지체가 됩니다.>(로마12,5-16ㄴ)
5 우리는 수가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을 이루면서 서로서로 지체가 됩니다.
6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따라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예언이면 믿음에 맞게 예언하고,
7 봉사면 봉사하는 데에 써야 합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사람이면 가르치는 일에,
8 권면하는 사람이면 권면하는 일에 힘쓰고, 나누어 주는 사람이면 순수한 마음으로, 지도하는 사람이면 열성으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면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9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악을 혐오하고 선을 꼭 붙드십시오.
10 형제애로 서로 깊이 아끼고, 서로 존경하는 일에 먼저 나서십시오.
11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
12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
13 궁핍한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손님 접대에 힘쓰십시오.
14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
15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16 서로 뜻을 같이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십시오.
<화답송>시편131,1.2.3 ◎ 주님, 제 영혼을 당신의 평화로 지켜 주소서.
○ 주님, 제 마음은 오만하지 않나이다. 제 눈은 높지도 않사옵니다. 감히 거창한 것을 따르지도, 분에 넘치는 것을 찾지도 않나이다. ◎
○ 오히려 저는 제 영혼을, 다독이고 달랬나이다. 제 영혼은 마치 젖 뗀 아기, 어미 품에 안긴 아기 같사옵니다. ◎
○ 이스라엘아, 주님을 고대하여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
복음<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루카14,15-24)
15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그분께,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다.
17 그리고 잔치 시간이 되자 종을 보내어 초대받은 이들에게,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오십시오.’ 하고 전하게 하였다.
18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양해를 구하기 시작하였다. 첫째 사람은 ‘내가 밭을 샀는데 나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고 그에게 말하였다.
19 다른 사람은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려고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였다.
20 또 다른 사람은 ‘나는 방금 장가를 들었소. 그러니 갈 수가 없다오.’ 하였다.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알렸다. 그러자 집주인이 노하여 종에게 일렀다.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22 얼마 뒤에 종이 ‘주인님, 분부하신 대로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하자,
23 주인이 다시 종에게 일렀다.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제1독서 (로마12,5-16ㄴ)
"형제 여러분, 우리는 수가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을 이루면서 서로서로 지체가 됩니다." (5)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따라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예언이면 믿음에 맞게 예언하고,(6) 봉사면 봉사하는 데에 써야 합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사람이면 가르치는 일에,(7) 권면하는 사람이면 권면하는 일에 힘쓰고, 나누어 주는 사람이면 순수한 마음으로, 지도하는 사람이면 열성으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면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8)
로마서 12장 5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몸인 교회 안에서 서로 간에 각각 지체로서의 역할을 해야 함을 알게 한다.
여기서 '지체'로 번역된 '멜레'(melle; members)는 복수형인데, 여러 기능을 가진 각기 다른 몸의 여러 지체들을 나타낸다(마태5,29; 에페4,25; 로마6,13.19; 12,4.12.18; 1코린6,15; 12,12.18.20.22.25.26.27).
사도 바오로가 여기서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교회가 실제와 기능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교회를 구성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성령께로부터 받아서 봉사하는 은사는 교회 전체와의 '코이노니아'(koinonia)관계, 즉 친교 안에서만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신이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그분과의 관계 의식과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체가 된 성도들에 대해 책임을 느끼는 공동체 의식이 필요하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교회를 이루고 있는 지체들인 성도들의 주인이시다(1코린12,27; 콜로1,18; 에페1,22.23).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언제든지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그분의 명령 아래 두지 않으면 안된다(갈라2,20).
누구든지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한다면, 자신의 중심에 그분이 계셔야 한다(마태16,24).
또한 우리는 함께 지체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에 대한 책임도 가지고 있기에 언제든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몸의 한 부분이 이상이 생기거나 병에 걸리면, 그것은 몸 전체에 영향을 주어 다른 지체들도 그 고통을 공유하게 마련이다. 몸을 구성하고 있는 지체는 서로 유기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생각을 버리고 각자가 자기 몫을 다해야 한다.
'나'라는 존재가 분명히 하나의 독립된 개체이기는 하지만, 교회라는 거룩한 공동체 속의 개체이며, 교회와의 관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 가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12장 5절에서 각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임을 밝혔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는 각 지체라는 것은 즉 그 기능과 역할이 서로 다르다는 뜻이 된다.
사도 바오로는 이제 로마서 12장 6-8절에서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언급하며, 동시에 각 지체에게 부여된 다양한 은사들을 소개한다.
로마서 12장 6절의 '저마다 ~서로 다른'으로 번역된 '디아포라'(diapora)는 '다양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디아페로'(diapero)에서 나온 형용사로서 '다른','여러 가지의'등을 의미한다.
이 형용사는 우리 성도가 하느님께로부터 은혜로 받은 은사의 다양성을 나타낸다.
이 은사들은 각자의 열심에 따라서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그리고 모든 은사가 하느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고 또한 공동의 유익을 위해 봉사하도록 주어진 것이기에 아무도 그 은사를 가지고 교만이나 허영, 특권 의식을 가질 수가 없다.
'은사'라고 번역된 '카리스마'(charisma)의 뜻은 '거저 받은 선물', '부여된 은총', '특은'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 단어를 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각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한 은혜가 다양하게 드러나는 것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이 단어는 점차 교회 공동체 생활에 있어서 봉사와 섬김을 위한 특별하고도 영적인 의미가 부여된 말로 발전되었다.
로마서 12장 6절에 나오는 '은사'라고 번역된 '카리스마타'(charismata; charisma의 복수; gifts)는 우리 개인의 취향이나 선호도, 기대치 같은 것은 전혀 고려되지 않으며(1코린12,11), 그것을 주시는 하느님의 의지만이 작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은사'는 성령께서 구원이 보장된 성도들에게 임의로 나누어 주시는 영적 선물인 것이다.
'예언이면 믿음에 맞게 예언하고'(6)
'예언'으로 번역된 '프로페테이안'(propeteian)의 원형 '프로페테이아'(propeteia)는 주로 신약에서 '예언 활동', '예언의 말씀' 등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으나 여기서는 '예언하는 은사'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예언하는 은사'란 성령이 감도하심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것을 말하는데, 사도 바오로는 이 은사를 가진 이들에게 '믿음에 맞게' 예언하라고 권한다.
'믿음에 맞게'라고 번역된 '카타 텐 아날로기안 테스 페르테오스' (kata ten anallogian tes pisteos; according to the proportion of faith)에서 '맞게', '분수'로 번역된 '아날로기안'(anallogian; proportion)는 '유사한', '닮은' 등을 뜻하는 '아날로고스'(anallogos)에서 나온 단어이다.
신약에서는 여기에서만 나오는데, 보통 '바른 관계', '균형', '조화', '어울림'등을 뜻하며, 때로는 수학적 의미로 사용되어 완전히 하나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여기서 '예언'이란 하느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특별히 부여한 은사를 가리킨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각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깨달아 알 수 있는 정도는 믿음의 성장에 준하기 때문에, 각 사람의 믿음의 성숙도 만큼만 보여 주시고 깨달아 알게 하시므로, 알지도 못하는 것을 말하려 하거나 받지도 않은 것을 보여주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경우에도 예언을 한다는 명목하에 과장을 한다거나 부풀리는 것, 그리고 각색하는 것은 그 내용이 무엇이든지 하느님을 기만하고 거짓말 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봉사면 봉사하는 데에 써야 합니다'(7)
여기서 '봉사면'으로 번역된 '디아코니안'(diakonian)의 원형 '디아코니아'(diakonia; ministry,serving)는 '섬기는 일', '준비하는 일', '구조','원조', '기증', '부제직'을 뜻한다.
신약에서는 사도행전과 사도 바오로의 서간에서 주로 발견되는데,
① 식탁에서의 봉사(루카10,40; 사도6,1), ② 사랑의 봉사(1코린16,15),
③ 헌금 모금을 통한 봉사(사도11,29; 2코린8,4; 9,1.22),
④ 말씀의 선포와 전교(사도20,24; 2티모4,11),
⑤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의 모든 봉사(에페4,12),
⑥ 천사의 봉사(히브1,14), ⑦ 사도로서의 직무(로마11,13; 사도1,17) 등이다.
이처럼 이 단어는 다양한 용례로 사용되었지만, 초대 교회에서는 부제 직분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사도 바오로는 여러 은사들을 열거하면서 이러한 의미를 내포하는 섬기는 일을 비교적 상위에 둔 것은 의미있는 일로 보인다.
이러한 섬김의 직책이나 섬김의 모범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6장 1-6절, 요한복음 13장 1-17절, 마르코 복음 10장 43-45절을 참조하면 된다.
'가르치는 사람이면 가르치는 일에'(7)
'가르치는 사람'에 해당하는 '호 디다스콘'(ho didaskon)을 뉘앙스를 살려 다시 번역하면 '계속해서 가르치는 자'이다.
즉 이것은 '가르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디다스코'(didasko)에 관사를 가진 현재분사이며, 희랍어에서 현재 분사형은 계속의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이 단어는 교회 안에서의 '교사' 즉 '디다스칼로스'(didaskallos)의 직책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교사의 직무는 신앙의 원리들을 잘 해설해 주는 것이며, 세상 속에서 영적 전투를 제대로 수행하도록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것이다(사도13,1; 2티모4,1-5; 1티모5,17참조).
'권면하는 사람이면 권면하는 일에 힘쓰고'(8)
'권면하는 사람'에 해당하는 '호 파라칼론'(ho parakallon)을 뉘앙스를 살려 다시 번역하면 '계속해서 권면하는 자', '계속해서 격려하는 자'가 된다.
이것은 '곁으로 부르다', '소환하다', '호소하다', '권면하다', '위로하다' 등의 뜻을 가진 '파라칼레오'(parakalleo)에 관사를 가진 현재분사이다.
이것은 신앙이 약한 자를 격려하여 힘을 북돋워주는 은사이다.
이 은사를 받은 사람은 격려하거나 위로하는 자로서 자기 역할에 충실해야 하며, 입법자나 재판관이 되지 않도록 주의 해야 한다.
권면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상대방을 단죄하여 두려움에 떨게 하거나 낙담하도록 한다면 그것은 은사를 잘못 쓰는 것이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 상처가 많은 사람들, 희망을 상실한 사람들, 목표가 없는 사람들, 허무한 것에 굴복한 사람들, 기쁨이나 평화를 알지 못하거나 잃은 사람들을 진심으로 격려하고 위로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 일을 잘 수행하려면 먼저 그리스도의 마음과 관용을 가져야 한다.
'나누어주는 사람이면 순수한 마음으로'(8)
'나누어주는 사람'으로 번역된 는 '호 메타디두스'(ho metadidus) '한 부분을 주다', '나눠가지다'라는 뜻을 가진 '메타디도미'(metadidomi)에 관사를 가진 현재분사이다.
원문의 뉘앙스를 살려 번역하면, '계속해서 한 부분을 주는 자'인데, '구제하는 자'라는 뜻이다.
'구제'란 자신이 가진 것 중에 한 부분을 주는 것,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이것이 필요한 사람들과 조건없이 나누어 가지는 것을 말한다.
사도 바오로는 이 은사를 가진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순수함'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순수한 마음으로'라고 번역된 '하플로테티'(haplloteti)의 원형 '하플로테스'(hapllotes)는 일반적으로 순진, 순박, 고결, 순수성, 일편단심, 관용, 관대함 등의 의미를 지닌다.
신약에서 통상 '순수성', '일편단심'의 의미로 사용되지만(2코린11,3; 에페6,5; 콜로3,22), 여기서와 코린토 후서 8장 2절, 9장 11절, 13절에서는 '관용'이나 '관대함'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나누어주는 사람', '구제하는 사람'이 개인적인 명예나 이익을 추구하거나 아까워하는 마음, 인색한 마음에 이끌린다면, 그것은 본질에서 벗어난 잘못이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이것을 잘 실천하는 모범을 보여 주었다(사도2,44.45; 4,32.34.35).
'지도하는 사람이면 열성으로'(8)
'지도하는 사람'으로 번역된 '호 프로이스타메노스'(ho proistamenos)는 '~앞에'라는 뜻을 지닌 전치사 '프로'(pro)와 '서다'(마태2,9), '세우다'(마태4,5)라는 뜻이 있는 동사 '히스테미'(histemi)의 합성어로서 '앞장서다', '지향하다'등을 뜻하는 '프로이스테미'(proistemi)의 현재 분사 중간태에 관사가 붙은 형태이다.
신약에서는 사도 바오로의 서간들에게서만 나오는데, 다른 사람들을 바르게 이끄는 역할을 해야 할 지도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열성', '열심', '진실', '부지런함', '열정'으로 번역되는 '스푸데'(spude)라고 말한다.
이 단어는 단순히 행동으로 나타나는 부지런함만을 가리키지 않고, 그 마음이 진실되며 열정적이라는 의미까지 포함된다.
누구든지 인생과 신앙의 안내자가 되어 다스리거나 다른 이들의 길을 안내하도록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열심이 있어야 하고, 진실해야 하며, 부지런해야 한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면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8)
'자비를 베푸는 사람'으로 번역된 '호 엘레온'(ho eleon)은 '불쌍히 여기다', '자비를 베풀다'라는 뜻을 가진 '엘레에오'(elleeo)에 관사를 가진 현재분사이며, '계속해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엘레에오'는 '동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랑에 가득한 온유함이라는 의미이다.
사도 바오로는 특별히 이러한 은혜를 받은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즐거움으로'으로 번역된 '힐라로테티'(hillaroteti)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거나 자비를 베풀고자 할 때에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가 뽐내거나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하는 자발적 태도여야 하며, 친절을 베풀 때에도 즐겁고 기꺼운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또한 상대방이 모욕감을 느끼지 않도록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뜻도 있으며,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자비로우심을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처럼 하느님께서 주신 각자만의 고유한 은사가 있음을 명심하고, 이것을 발견하여 유용하게 사용하도록 힘써야 하며, 자기 자신의 명예나 이익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 사용해야 한다.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사제 김상우 바오로)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오감으로 온전히 파악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우리에게 알려 주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비유로 설명하여 주십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는 잔치를 벌이기 한참 전에 미리 손님들에게 초대되었음을 알리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잔치가 다 준비되면 주인이 다시 종을 보내, 초대받은 이들을 찾아가 직접 데려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미리 잔치에 초대받았으면서도 잔치에 오지 않습니다.
혼인 잔치에 초대된 첫째 부류는 구약 성경이 증언하듯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았지만,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지 않았기에 그들 스스로 참된 구원의 길에서 멀어집니다.
이어서 주인은 종들에게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하고 이릅니다.
그 결과 잔칫집은 뒤늦게 초대된 손님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길이 참으로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보편적 구원의 길임을 가리키는 대목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초대는 선물처럼 거저 주어지며 보편된 구원을 실현합니다.
그럼에도 초대받은 이는 초대에 합당한 최소한의 준비를 하고 품격에 맞는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성사와 성체성사로 하느님 나라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초대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습니까?
하느님 나라에서 거행될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저마다 일상에서 생각과 말과 행위로 어떤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김상우 바오로 신부)
하느님 나라 잔치 비유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서 이어지는 큰 잔치의 비유 이야기 입니다.
오늘 비유에서는 잔치에 초대를 받고서도 하나같이 참석하지 못하겠다고 핑계를 대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밭을 샀으니까 다른 사람은 겨릿소 다섯 쌍을 샀기 때문에 또 다른 사람은 장가를 들어서 아내 때문에 가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어떻게 잔치에 참석할 수 없는 이유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밭은 그가 사기 전에 이미 보았을 것이고, 소도 그가 사기 전에 이미 살펴보았을 것이며, 장가를 들었다고 해서 하루 종일 아내하고만 지내야 하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잔치에 비유해서 자주 말씀해 주셨는데, 그 잔치가 우리의 잔치와 다른 점은, 바로 초대된 사람들이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절하거나 그 잔치에 불만을 품는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잔치 때문에 지금까지 잘 감추었던 그들의 정체가 확연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되찾은 아들, 일명 탕자의 비유(루카 15,11-32)를 보게 되면, 잔치가 벌어지기 전까지 큰아들은 아주 성실하고 모범적인 사람으로, 작은 아들은 반항적이고 방탕한 사람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작은 아들이 돌아오자, 아버지가 따뜻하게 그 아들을 영접하며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벌일 때. 아버지의 가없는 사랑과 용서가, 그리고 큰 아들의 편협함과 탐욕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큰 아들이 보여 주었던 성실했던 모습은 단지 그가 아버지의 재산을 챙기려고 했던 계산된 것이었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에서도 이른 아침에 온 일꾼들은 모두 성실하고 근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오후 늦게 온 일꾼들에게도 자기들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의 품삯을 주자. 이들은 모두 안색이 변합니다. 그리고 온종일 수고한 자기들과 똑같이 대우를 한다고 거칠게 항의를 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저들의 성실했던 모습은 한낱 계산된 행동이었음이 들어납니다.
그것은 “그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지 못하게 될 때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굶주리게 될 것이라는 것을 저들이 생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인이 오후 늦게 온 일꾼들에게도 그날의 생계비인 한 데나리온씩을 주었다고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 나라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하느님 나라 잔치인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 잔치에서는 성실하고 모범적인 큰아들과 이른 아침에 온 일꾼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말씀하셨든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하느님 나라의 현실입니다.
오늘 큰 잔치의 비유에서도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잔치에 갈 수 없다고 하자, 주인은 노해서 종에게,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사람들과 불구자들, 소경들과 절름발이들을 데려오라고 합니다. 주인은 처음에 사람들을 초청할 때, 미리 초대하고 종을 보내 정중하게 초대했습니다. 그러나 거리의 사람들을 부를 때는 그들의 의견도 묻지 않고 그저 자리를 채우기 위해 데려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여전히 자리가 남아 있게 되자, 주인은 다시 큰길과 울타리 밖에 서있는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채우도록 하라고 합니다. 때문에 저들은 가난하거나 몸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아닐 수도 있고. 어쩌면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부유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큰길과 울타리 밖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한마디로 제도나 사회적 통념 밖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정식으로 초대받은 사람들이 거절한 하느님 나라 잔치는 이제 울타리를 넘어 울타리 밖 큰 길의 사람들에게 까지 확대됩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울타리 안의 사람들인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울타리 밖의 사람인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살려주었습니다. 강도를 만난 그도, 재난을 당하기 전까지는 울타리의 안과 밖을 엄격하게 구분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도 사마리아 사람은 상종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강도를 만나 거리에 버려졌을 때 지금까지 그를 지켜 왔다고 믿었든 울타리는 그에게 아무런 힘도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는 사마리아 사람의 신분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그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데리고 가서 치료해 주고 보살펴 준 것은 바로 하느님 나라 잔치의 현실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자기가 뜻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가 재난을 당하고 거리에 버려졌을 때, 철저하게 낮아지고 위기에 처했을 때, 비로소 그는 울타리를 넘어 하느님 나라 잔치의 현실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어제와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하느님 나라의 현실입니다. 아멘..........◆
조동성 신부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복음 (루카14,15-24)
그때에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그분께,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15) 주인이 다시 종에게 일렀다. '큰 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차게 하여라.' (23)
루카 복음 14장 15-24절에는 하느님 나라의 초대를 받은 사람의 자격에 대한 교훈이 주어진다.
이러한 교훈이 주어지게 된 계기는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어떤 한 사람이 예수님의 교훈을 듣고 있다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된 사람은 행복합니다' 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지금 하느님의 나라에서 먹게 될 사람의 행복을 찬양한 이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당시의 유대주의적 관념을 자신의 말 속에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유대주의적 선민 의식 가운데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메시야가 출현하여 유대인 중심으로 건설된 왕국으로 이해하였고, 또한 하느님의 나라가 건설되면 죽었던 의인들이 부활하여 그 나라에서 영광과 축복을 누리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지금 이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싶은 희망에서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유대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 가서 그 영광을 누릴 것이라는 자신감 속에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에 대한 이 유대인의 왜곡된 가치관을 무너뜨리시며,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신다.
루카 복음 14장 15절 이후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님의 대답은 오히려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그릇된 확신과 교만한 마음을 가진 유대인은 하느님 나라의 그 영광에 참여하지 못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 의해 그 영광의 자리가 채워지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큰 길과 울타리 쪽으로'
여기서 '길'에 해당하는 '호두스'(hodus; highways; roads)는 성 안에 있는 골목이나 거리라기보다는 성밖에 멀리 뻗어 있는 도로를 가리키며, '울타리'에 해당하는 '프라그무스'(phragmus; hedges; country lanes)는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산줄기를 가리킨다.
따라서 루카 복음 14장 21절의 '고을의 한 길과 골목'에서 '성밖'으로 그 주인의 초청 범위가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것은 구원의 대상이 유대인들에게서 온 이방인에게로 확대될 것을 예고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21절의 '한길과 골목'이 유대 지역을 가리킨다면, 23절의 '큰 길과 울타리'는 온 이방인들의 땅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루카 복음 14장 21절과 마찬가지로 '나가'에 해당하는 '엑셀테'(ekselthe; go out)라는 명령이 주어지며, 이어서 '어떻게 해서라도 들어오게 하여'라는 명령이 주어진다.
이 중에 두번째 명령에서는 '강제하다'는 뜻의 '아낭카조'(anangkazo; compel them) 동사가 사용되었고, 여기에 '들어오다'는 뜻의 '에이세르코마이'(eiserchomai)의 부정사인 '에이셀테인'(eeiselthein; to come in)이 추가되었다.
둘다 '강제로 권하여 데려오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아낭카조'(anangkazo) 동사는 강제성의 정도가 더욱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하느님의 백성들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강조해 주는 표현이다.
여기서 쓰인 '아낭카조' 동사는 폭력을 동원한 강제가 아니라, 설득이나 간청을 통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필연성'의 의미를 내포한다.
2025년 11월 04일 화요일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김동희 모세 신부)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루카 14,15).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어떤 이가 한 말입니다.
믿는 이라면 당연히 그리 생각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시골에서 어르신 신자분들과 살 때였습니다. 어느 날 할머니 한 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신부님,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하잖아요.” 저는 그냥 미소를 지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비유를 통하여 세상에서 부요한 사람은 하느님의 초대를 거절함을, 세상이 주는 만족에 길들여진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함께 나누지 못함을 보여 주시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가난하고 부족한 사람이어야 우리 마음속 성령의 불이 꺼지지 않고, 열렬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악을 혐오하고 선을 사랑하여 그것을 꼭 붙듭니다.
그가 섬기는 주님께서 악을 싫어하시고 선을 사랑하시는 까닭입니다.
그러면서 주어진 자기의 몫에 따라 살아갑니다. 이웃을 시기하지 않고 이웃의 몫을 존중합니다.
독서에 나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따라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예언이면 믿음에 맞게 예언하고, 봉사면 봉사하는 데에 써야 합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사람이면 가르치는 일에, 권면하는 사람이면 권면하는 일에 힘쓰고, 나누어 주는 사람이면 순수한 마음으로, 지도하는 사람이면 열성으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면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로마 12,6-8).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가난합니까? 세상 것이 아닌 하느님 나라의 보화를 바라며 찾고 있습니까?
(김동희 모세 신부)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복음]
큰 잔치에 초대 받은 이들
(루카14,15-24)
15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그분께,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 이 다음, 하느님과 함께 먹고 자고 하는 그 모습을 그려본다. 실감은 나지 않지만 마음은 뿌듯해진다.
내 죄를 대속하신 그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미 골고타에서 세워져 완성되었기에, 그래서 나의 구원은 확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오늘 하늘의 양식 곧 하느님의 말씀(양식)을 먹고 있음을 알아야~ 그 것의 지속됨이 하느님 나라에서 그분과 함께 먹게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을 알아들으라고 하늘나라의 비유 말씀을 주시는 것이다.
16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다.
= 큰 잔치란 완전한, 완성된 잔치, 하늘의 혼인잔치를 뜻한다. 병행 복음(마태22장)에서는 '아들의 혼인잔치' 라 하셨다.
17 그리고 잔치 시간이 되자 종을 보내어 초대받은 이들에게,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오십시오.’ 하고 전하게 하였다.
= 하늘의 잔치, 곧 아들(예수)의 혼인 잔치는 아버지(하느님)께서 다 준비하신다. 다 준비된 그 하느님의 나라에 우리는 깨어있다.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18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양해를 구하기 시작하였다. 첫째 사람은 ‘내가 *밭을 샀는데 나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고 그에게 말하였다.
= 나의 열심인 돈으로 산 밭, 세상 것을 위해 짝하여 사는 모습이다. 문제는 그것이 신앙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하늘의 밭(나라)은 거저 은총으로 받는 것이다.
(이사55,1-2) 1 너희 목마른 자들아, 오너라. 여기에 물이 있다. 너희 먹을 것 없는 자들아, 오너라. 돈 없이 양식을 사서 먹어라. 값없이 술과 젖을 사서 마셔라. 2 그런데 어찌하여 돈을 써 가며 양식도 못되는 것을 얻으려 하느냐? 애써 번 돈을 배부르게도 못하는 데 써 버리느냐? 들어라, 나의 말을 들어 보아라. 맛좋은(하늘) 음식을 먹으며 기름진 것을 푸짐하게 먹으리라.
19 다른 사람은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려고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였다.
= 다섯, 구약의 모세오경, 그 하느님의 율법으로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는, 곧 자신의 뜻을 위해 열심을 부리는 헛된 신앙의 사람이다.
(요한5,46) 46 만일 너희가 모세를 믿는다면 나를 믿을 것이다. 모세가 기록한 것은 바로 나에게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20 또 다른 사람은 ‘나는 방금 *장가를 들었소. 그러니 갈 수가 없다오.’ 하였다.
= 장가(혼인)는 남자와 여자가 하듯, 하늘(남자)과 땅(여자)이 하는 하느님 나라의 혼인의 예표인 것이다. 곧 하늘 신랑이신 예수님(남자)과 피조물(여자)인 우리의 혼인인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병행복음(마태22,2) '하늘나라는 어느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것에 비길 수 있다.‘ 고 하셨다.
오늘 본문의 사람들은 세상과 장가든, 땅이 땅과 짝한 곧 피조물의 피조물과 짝한 동성애의 신앙인 것이다. 땅이 하늘을 담는 것, 곧 사람이 하늘과 짝하는 것이 구원이다. 오늘 세 사람 모두 하늘의 혼인 잔치가 자신의 혼인 잔치임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 하늘의 혼인 잔치가 나의 혼인 잔치임을 아는지~ 그래서 미사 드릴 때, 예수님의 살과 피, 곧 그분의 영을 먹고 마시며 그분과 하나 되는 나의 혼인 잔치라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내 뜻을 위해 예수님의 살과 피로 먹고 마시는지, 오늘 본문 사람의 모습을 보며 우리의 진짜 모습을 보라고 하신다.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알렸다. 그러자 집주인이 노하여 종에게 일렀다.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 자신이 부족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부르심에 응답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십자가의 대속, 그 예수님의 의로움이 구원의 진리라고, 그 진리를 믿어 받는 구원이라고, 사람의 자기 의로움으로는 구원 못 받는다고 하면 열심히 착한 일을 많이 한 이들은 거부한다.
22 얼마 뒤에 종이 ‘주인님, 분부하신 대로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하자, 23 주인이 다시 종에게 일렀다.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 큰길과 울타리는 포도밭, 성전 곧 교회의 경계선이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 처음, 곧 구약(율법)의 자기 의로움으로는 하느님 나라의 혼인 잔치에 못 들어간다. 곧 구원 받지 못한다는 말씀이신 것이다.
오늘 성경의 모든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대속을 통하여 주시는, 곧 그분의 십자가로 주시는 구원의 청혼의 말씀으로 받아먹고 마셔야(입어야)한다는 것이다.
(로마13,14) 14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 몸을 무장하십시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갈라3,26-27) 26 여러분은 모두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삶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27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
= 십자가의 의로움으로 입혀주신, 하느님의 자녀라는 옷, 그리스도인이라는 그 옷을 벗지 맙시다. 거짓과 헛된 유혹에 속아 빼앗기지 맙시다.
(갈라2,21 3,1-3) 21 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지는 않습니다. 만일 사람이 율법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헛일이 될 것입니다. 3,1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왜 그렇게 어리석습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여러분의 눈앞에 생생하게 나타나 있는데 누가 여러분을 미혹시켰단 말입니까? 2 한 가지만 물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을 지켜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3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은 사람들입니까? 성령의 힘으로 시작한 일을 지금 와서 인간의 힘으로 마치려 드는 것입니까?
= 성령은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주지만, 육은 영원한 죽음이다.
† 영원하신 아버지, 저희가 지은 죄와 온 세상의 죄를 보속하는 마음으로 지극히 사랑하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 영혼과 신성을 기억하며 의탁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