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23일 목요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성령(聖靈)의 불 (루카12,49-53)
제1독서<여러분은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었습니다.>(로마6,19-23)
19 나는 여러분이 지닌 육의 나약성 때문에 사람들의 방식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이 전에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에 종으로 넘겨 불법에 빠져 있었듯이, 이제는 자기 지체를 의로움에 종으로 바쳐 성화에 이르십시오.
20 여러분이 죄의 종이었을 때에는 의로움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21 그때에 여러분이 지금은 부끄럽게 여기는 것들을 행하여 무슨 소득을 거두었습니까? 그러한 것들의 끝은 죽음입니다.
22 그런데 이제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또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23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화답송>시편1,1-2.3.4와 6(◎40,5ㄱㄴ) ◎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
○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
복음<나는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12,49-5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49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50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제1독서(로마6,19~23)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23)
로마서 6장 23절은 죄의 품삯은 죽음이요, 하느님의 은총의 본질과 최종 결과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임을 밝히는 매우 중요하고 유명한 구절이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6장 12절부터 계속되는 성도에게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성화(聖化)에 대한 권면을 마무리하면서 결론적으로 죄와 은총의 최종적 결과를 비교하며 선언한 것이다.
로마서 6장 23절은 상반절과 후반절의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첫째 '죄의 품삯'과 '하느님의 은사'의 대조이며, 둘째 '죽음'과 '영원한 생명'의 대조인데, 사도 바오로는 '품삯'과 '은사' 간의 대조를 강조하고 있다.
죽음은 죄를 지은 것에 대한 필연적이며 정당한 대가요 보수로 얻어지는 것인 반면에, 영원한 생명은 무상으로 얻어지는 선물임을 비교를 통해 부각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품삯'으로 번역된 '타~옵소니아'(ta~opsonia; the wages)는 복수형으로 '보수들', '봉급들'이란 뜻이다.
매일 혹은 매월 받을 권리가 있는 보수, 그래서 그 권리가 침해당한다면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는 급료를 언급할 때 사용되던 용어이다.
70 인역(LXX) 등의 후기 그리스 문헌들에서는 복수형으로 쓰여 군인들이 받던 곡식이나 기름과 같이 마땅히 대가로 지급되는 식량과 더불어 군인의 생계 수당이나 일반적인 급료 혹은 관료의 봉급을 의미했다.
이것은 자기 몸의 수고와 이마의 땀으로 번 것인데, 이처럼 죽음은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와 감정으로 죄를 지은 것에 대한 대가로 주어지는 보수(pay; wage)이다.
사도 바오로는 죽음의 본질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지불하는 품삯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죄를 위해 헌신하고 충성한 사람들이 얻게 되는 것은 죽음 뿐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한편, '은사'로 번역된 '토~카리스마'(to~charisma; the gift)는 '선물','부여된 은총', '특은'이라는 뜻이며, '품삯'이라는 말과 대조적으로 단수로 쓰였다.
라틴어 'donatium'(도나씨움)과 똑같은 의미를 나타내는 이 단어는 수고하지 않고 받은 선물이며, 황제의 생일이나 등극일 혹은 어떤 특별한 기념일에 가끔 군인들에게 주어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것은 노력의 대가가 아니고 거저 공짜로 주어지는 선물이었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주시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선물은 우리가 그것을 얻기 위해 일한 것이 아무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값없이 주시는 아주 특별한 은총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우리의 노력에 대한 보수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거저 무상으로 주시는 선물이다(에페2,8.9).
따라서 아무도 자만해서는 안된다. 우리에게는 자랑하거나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그것은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자력 구원에 이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로마 3,20).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님 우리 주님 안에서만 있는 것이어서 그분 밖에 있는 자는 그 누구도 이것을 얻지 못한다.
예수님 없이도 얼마든지 착하고 의롭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인간이 본래 죄에 예속된 '죄의 종'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 없이는 그들이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죄를 위한 것이고 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므로 그들에게 주어지는 보수는 바로 죽음이 전부인 것이다.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사제 정진만 안젤로)
오늘 복음은 앞서 24일과 25일의 복음에서(12,35-48 참조) 준비되었습니다.
주인, 사람의 아들, 도둑과 같은 설정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파견 목적을 설명하시는 바탕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파견되신 목적을 두 가지로 설명하십니다.
첫 번째,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습니다.
불은 구약 성경에서 정화(레위 13,52; 민수 31,23 참조), 구분이나 분별(예레 23,29; 이사 22,14 참조), 또는 심판의 수단을(창세 19,24; 탈출 9,24; 이사 43,2 참조) 가리키는 말로 쓰였습니다.
여기에서는 ‘심판’의 수단으로 쓰였는데, 예수님께서는 이를 통하여 심판자의 역할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십니다.
두 번째,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께 기대하였던 역할과 차이를 보입니다.
루카 복음의 탄생 이야기는 예수님을 이 세상에 태어나신 평화의 주님으로 묘사하고 있으며(1,79; 2,14 참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방문하는 집에 평화를 빌어 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10,5-6 참조).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아닌 분열을 일으키시는 분으로 당신을 소개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역할은 시메온 예언자의 예언으로 예고되었습니다(2,34-35 참조).
시메온의 예언에 따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이도 있지만 반대하는 자도 나오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그리고 이 세상에 왜 오셨는지 배웁니다.
예수님의 자기 소개는 우리를 향한 초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자세를 성찰하는 기회를 주기 때문입니다.
(정진만 안젤로 신부)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지금은 하늘의 의로움에 매어야 할 때.
독서(로마6,19-23)
19 나는 여러분이 지닌 육의 나약성 때문에 사람들의 *방식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이 *전에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에 종으로 넘겨 불법에 빠져 있었듯이, 이제는 자기 지체를 의로움에 종으로 바쳐 성화에 이르십시오.
= *사람의 방식으로 말한 불법은 무엇인가? - 사람들이 정한 규정, 법등을 어기고 또 자신의 일, 뜻만을 위해 사는 이기적 삶이 불법이다.
*주님의 방식, 영적으로 말하면? - 하느님의 규정과 법을 따르기로 약속한 그리스도인들이 그 하느님의 규정, 법인 하느님의 일, 뜻을 위한 삶을 살지 않는 불충실한 것, 곧 우리 죄인들의 속죄 제물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법, 진리로 믿지 않는 것,
그래서 당신 아드님을 우리의 속죄 제물로 내주신 그 하느님께 감사할 줄도, 사랑할 줄도 모르고, 구원자를 주는 이웃을 자신처럼 돌봐야 하는 그 이타의 삶을 살지 않는 것이 불법이다.
나와 너,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대속, 그 십자가의 피로만 의롭게, 거룩하게 될 수 있다. 그 십자가의 복음, 구원의 새 계약을 믿는 것이 성화다. 자신의 뜻, 이름(의, 명예)만을 추구하며 살아왔던 그 이기적 삶을 부인하는 버림으로 받는 의, 거룩이다. 곧 자기 부인, 버림이 그리스도인의 성화다.
자기 의로움으로 착하게 살았던 이들에게~
(마태23,27-28) 27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28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 구원의 진리, 곧 하느님의 새 계약인 그리스도의 대속, 그 의로움을 입지 않고(믿지 않고) 사람이 자신의 이름, 의로움을 진리로 믿고, 열심히 착하게 살았던 그들에게 위선자, 불법자라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이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한 죄인인 것이다. 모든 인간의 양심이 위선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피(血)로 더러운 양심이 씻겨 이미 거룩하다.(히브10,22) 그리스도의 피, 그 사랑의 힘, 전능함이다.
20 여러분이 죄의 종이었을 때에는 의로움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 영적으로 말하면 죄의 종, 곧 불법(세상 법, 율법)으로 살았을 때에는 하늘의 의로움에 매이지 않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 그 의로움을 입어야(매어야)한다는 것이다.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21 그때에 여러분이 *지금은 부끄럽게 여기는 것들을 행하여 무슨 소득을 거두었습니까? 그러한 것들의 끝은 죽음입니다.
= 세상의 법을 잘 지킨 그 의로움도 구원을 주지 못하는 부끄러움이며 율법(제사와 윤리)을 잘 지킨 종교행위의 의로움도 죄를 알게 할 뿐인 죽음으로 끝나는 부끄러움이라는 것이다.(이사64,5 로마3,20 10,1-4참조)
22ㄱ 그런데 *이제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모든 죄와 죄의 법, 모든 율법에서 해방되고~
22ㄴ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또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 내 뜻대로, 왕으로 살았던 내가 그리스도의 대속, 그 안에서 죽어 하느님의 종으로, 하느님의 뜻으로 사는 성화와 영원한 생명을 소득으로 얻게 된 것이다.
(갈라2,19-20) 19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살려고, 율법과 관련해서는 이미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20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 죽음은 생명을 입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의 죽음(死亡)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입는, 받는 것이다.
23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 세상의 법, 율법은 죽음을 주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이다.
(시편17,8) 주님,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
☨보호자 성령님!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복음(루카12,49~53)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49~50)
루카 복음 12장 49~53절은 복음이 확산될 때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되는 진리와 비진리의 처절한 투쟁과 충돌에 대해 다루고 있다.
특히 루카 복음 12장 49절과 50절은 예수님의 십자가상 구속사업을 통한 구원의 복음 전파에 수반되는 현상을 '불'과 '세례'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이미 타올랐으면'으로 번역된 '에이 에데 아넵테'(ei ede anepthe; (if) it were already blazing)에서 '아넵테'(anepthe)동사가 '불이 붙었다'는 의미를 지닌 부정(不定)과거형으로 완전히 불붙은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성서학계에서는 이미 불이 붙었으나 완전하게 붙어 더 잘 타오르게 되기를 바라는 의미로 본다.
여기서 '불'로 번역된 '퓌르'(pyr; fire)는 신앙인과 불신앙인간에 조성되는 적대감이나 박해로 인해 믿음의 자녀들이 겪게 되는 '고난'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제시하는 영생의 복음적 가치관과 세상의 가치관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불'과 같은 충돌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앙과 미움, 죄악과 불의 그리고 박해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지만, 바로 그 무죄하신 예수님의 고난의 '세례'가 믿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복락과 축복이 되고, 고난과 박해를 저지른 자들에게는 '심판'의 '불'이 됨을 선포하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천상과 영원을 바라보며, 하나 밖에 없는 '하느님의 말씀'이요,'진리'이신 예수님의 가르침 때문에 기쁘게 고난을 감수할 의지와 신앙이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
당장에는 그 진리 때문에 세속화(世俗化)되고 인본주의(人本主義)로 흐르는 교회 안에서조차 따돌림당하고 배척 받는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스테파노의 순교 형장을 천상에서 서서 바라보시고 동참하시는 것 (사도7,55~56)으로 위로를 삼고, 보이지 않는 주님께만 인정받는 자세로 꿋꿋이 살아갈 수 있는지 스스로 물어 보아야 한다.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50)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 세 번씩이나 기도하셨다. 그러나 당신이 이 길을 걸어가지 않으시면, 인류가 아버지 하느님 대전에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을 길이 없다.
당신의 천주성(神性)으로서 아담으로부터 인류 종말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과거에 지었고, 지금도 짓고 있으며, 앞으로 지을 모든 죄들이 당신의 전지(全知)하심으로 다 들어오며 다 보고계신다. 그 안에는 나의 죄도, 너의 죄도, 우리 모두의 죄도 다 들어있다.
그러기에 이 겟세마니의 밤은 참으로 괴롭고 가슴아픈 밤이다.
이제 이 인간들이 저지르는 모든 죄를 무죄(無罪)하신 당신의 인성(人性)으로 자발적으로 대속(代贖)해야만 아버지 하느님의 공의(公義)가 채워지고,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모독당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선성(善性)과 성성(聖性)이 회복되신다.
죄(罪)를 제외하고는 우리와 똑같은 나약한 인간성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참으로 견디기 힘들어 하시는 밤이다.
겟세마니의 밤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당신의 나약한 인성(人性) 사이의 전쟁터이다. 이 겟세마니의 밤은 예수님 당신의 천주성(天主性)과 인성(人性) 사이의 갈등과 충돌의 시간이다.
그러나 인류를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는 이 대속의 십자가의 길은 영원으로부터 하느님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일이요, 예수님 당신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요 사명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대속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당신 사명인 인류구속사업을 이루실 날을 답답한 심정으로 애타게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을 표현하고 계신다.
바로 그 말씀이 루카 복음 12장 49절의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how I wish it were already blazing!) 그리고 50절의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how great is my anguish until it is accomplished!)로 표현된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세례'는 일차적으로 인류의 죄로 인해 당해야 하시는 고난을 가리킨다. 궁극적으로는 고난의 절정인 십자가상 죽음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십자가의 죽음을 알고 계셨고, 이것을 이룰 날이 속히 오기를 답답한 심정으로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대속적 죽음을 당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세례(洗禮)란 용어로 표현한 또 다른 이유가 무엇일까? 세례가 갖는 씻음(정화)과 정화의 의미 가운데서 일치(一致)의 의미와 깊은 관련이 있다.
즉 세례는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구성원(지체)이 되는 심오한 의미가 있고, 그리스도의 체험이 우리의 체험이 된다는 영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 우리의 죽음이 될 수 있으며,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 삶을 얻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루카 복음 12장 49~53절에서 당신이 감당하실 고난을 보여주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그날까지 믿음의 자녀들은 그리스도께서 체험하신 것과 같은 고난을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제자가 스승보다 나을 수 없고, 종이 주인보다 나을 수 없듯이 우리 믿음의 자녀들은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고난을 통한 영광의 길,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파스카 신비를 걸어가야만 한다.
이 땅에서 고난, 고난, 고난 또 고난은 없다. 또한 이 땅에서 영광, 영광, 영광 또 영광도 없다. 고난 한번, 영광 한번, 영광 한번, 고난 한번이다. 그래야만 절망하지 않고, 그래야만 겸손하게 성소(聖召)와 소명(召命)의 삶을 잘 마칠 수 있다.
특별히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 사랑 때문에, 예수님께서 제시한 영생의 복음적 가치관 때문에 억울한 고통, 터무니 없는 사악한 고통을 겪고 있는 믿음의 자녀들은 예수님께서 간택하신 특별히 사랑받는 제자요, 특별 관리 대상자들이며, 성령과 말씀과 희생 제사의 도구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2025년 10월 23일 목요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이찬우 다두 신부)
저는 어릴 때 동생과 많이 다투었습니다. 동생이 마음에 안 들어서, 동생이 대들어서, 동생이 말을 안 들어서 다투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머니한테 걸리면 둘 다 무척 혼났습니다.
한번은 속옷 바람으로 둘 다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겨울이라 해는 져서 어둡고 추운데, 서럽기는 왜 그리 서러운지 동생과 저는 훌쩍이며 울다가 서로 화해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고 어머니한테 약속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습니다. 며칠이 지나면 다시 다투고, 또 화해하고, 그렇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서로 다투기는 하였어도 쉽게 화해하였던 그때가 그립습니다.
이제는 다투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이미 어른이 되어 버린 지금은 화해한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서는 쉽게 싸우지 않습니다. 그 대신 싸운 뒤에 쉽게 화해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가족과 갈라져 싸워야 한다면 예수님을 쉽게 따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믿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평화와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단조로운 하루하루의 삶에서 오는 편안함이 아닙니다.
분열과 어려움을 겪은 뒤에 오는 평화, 하느님과 일치하며 누릴 수 있는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치를 통한 평화를 주시고자 우리가 분열이라는 어려움을 겪기를 바라십니다.
분열을 두려워하기보다는 분열을 넘어, 예수님의 평화를 얻기를 기도합시다.
(이찬우 다두 신부)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구원의 표징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
우리의 죄로 죽으셨다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어 하느님의 오른(진리)쪽에 앉으셨다 다시, 구원의 진리로 오신 그리스도의 영, 성령을 믿는 것이다.
복음(루카12,49-53)
49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 세상적인 나, 그 옛 사람의 나를 태워 새롭게 하시는 불이다.
(히브12,29) 29 우리의 하느님은 다 태워 버리는 불이십니다.
50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 나를 새 것으로 하시기 위한 세례, 곧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피의 새 계약인 십자가의 대속이다.(요한19,30 2코린5,17 갈라6,15 히브10,9-22)
(로마6,4) 4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 영광(독사), 하느님의 신성과 본성이 드러나 나타나는 것, 곧 그리스도께서 대속으로 달리신 십자가가 하느님의 신성과 본성인 사랑이 드러나 나타난 ‘독사(δόξα)’, 영광이다.
(갈라3,27) 27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1코린12,13) 12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 그리스도는 영이시다. 이제 내 죄로 죽으신 예수님은 없다는 말이다. 지금은 계시지 않는, 살아 계셨던 예수님을 기억하며 섬길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의 모든 재산, 곧 하느님의 영원한 용서, 자유, 안식, 평화, 자비, 지혜, 사랑, 의, 생명의 말씀을 주신 그 하느님께 그리스도의 영, 성령을 통하여 감사와 찬미, 영광을 드리는 때라는 것이다.(요한4,24) 지나간 일, 사건, 시간은 없는 것, 죽은 것이다.
살아 계셨던 예수님을 기억하며 섬기는 것, 죽은 시신을 섬기는 없는, 거짓 신앙이 된다.(마태24,4-5 요한20,17) 많은 이들이 자신의 뜻, 소원을 위해 없는 예수를 섬기는데 열심을 부린다. 그것이 참 신앙인의 모습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덤에 계신 시신 예수님을 꺼내놓고 내 뜻, 소원을 들어 달라고 보채는 꼴이다. 곧 다른 신, 우상으로 섬기는 것이다.(탈출20,3 묵시13,3)
예수님의 대속, 그 하늘의 의(義)의 죽음과 부활을 헛되게, 거짓되게 하는 큰 죄악이다. 성가정이라는 이름으로 온 가족이 합심해서 열심히 죄를 짓는다. 그래서~
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 부서져야 산다. 죽어야 산다. 그래서 부수심, 분열을 시키실 수밖에 없으시다. 불로 태우실 수밖에 없으시다. (선택한 이들에게 성령의 불을 놓으신다.) 하늘의 참 생명, 참 평화를 주시기 위해(야고1,12).
그러므로 아프다. 너무 힘들다. 숨을 쉴 수 없듯이 괴롭고 고통스럽다. 그러나 잘 가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뜻, 생명의 길로 이끄심이다. (히브12,7)
☨ 하느님의 힘이신 천주의 성령님!
저희 모두 안에 충만하소서. 타 오르소서. 의탁합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